1,051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기타 조회 수 9408 추천 수 41 2005.12.11 18:34:15
성경본문 : 이사야 61:1-10 
http://wms.kehc.org/d/dabia/12월11일.MP32005. 12.11.       사 61:1-10
역사의 영성을 향해!

예언자 전통
오늘 본문말씀에 어떤 설명을 보태는 것은 이미 완전하게 그려진 명화 위에 덧칠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설교한다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다른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은 의도적으로라도 저의 역할을 줄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61편에는 더 이상 넣거나 뺄 것도 없고, 무슨 보충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복잡한 말씀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오늘 본문이 어떤 상황에서 기록된 것인가에 대해서 안내만 할 생각입니다. 이는 흡사 미술관의 안내원 같은 역할과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이사야 예언자의 영적인 호흡을 생생하게 경험하셨을 겁니다. 소위 제3 이사야라는 사람이 쓴 오늘 말씀은 남유대의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난 시기인 기원전 5세기 초반에 기록된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일제식민 통치에서 신음하며 해방의 날을 학수고대하던 신학자가 해방을 맞았다고 말입니다. 또는 난치병으로 오랫동안 병원 생활하던 사람이 이제 병원 문을 나서게 된 순간을 상상해보십시오. 노래하고 춤추고 싶지 않겠습니까? 본문은 이런 상황에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해방, 자유, 희망이라는 단어가 이런 상황을 반영합니다.
이사야의 이런 예언은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5:8-12절에 보도되어 있는 희년(禧年) 전통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희년은 안식년 전통에 그 뿌리가 있고, 안식년은 또 안식일 전통으로 소급됩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엑서더스 정신의 결과입니다. 창조와 엑서더스 모두 생명, 해방, 자유, 희망을 의미합니다. 이런 전통 줄기의 끝에 희년이 놓여 있습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인 오십 번째의 해를 희년이라고 하는데, 이때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레 25:10).
이런 희년 전통에 근거해서 이사야는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b,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 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이 말씀의 내용은 희년에 일어나야 할 일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은 공교롭게도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장 처음으로 읽으신 말씀이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4장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갈릴리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읽으신 예언서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예언자의 전통은 어떤 한 두 사람의 기발한 발상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출애급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받은 율법으로부터 시작해서 포로 귀환 후의 이사야에게, 그리고 이제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의 활동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도대체 예언자 전통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끌어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에 묶이지 않고 인류 전체 역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복음서 기자들이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통을 예수님의 구원 행위와 하나로 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도대체 이 예언자들의 전통이 무엇이기에 신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단 말입니까?

영의 사람들
예언자 전통은 우선 ‘영’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 야훼의 영을 내려 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레위기서에 나오는 희년 전통 역시 야훼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회당에서 읽으신 예수님도 역시 세례 받을 때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령 안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이런 예언자 전통인 영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기독교 공동체는 곧 성령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신약성서는 모두 성령의 활동에 대한 보도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됩니다. 신자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나 이 영과 연결된다는 것은 곧 예언자적 전통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성령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오늘 본문 1절에 기록된 “주 야훼께서 영을 내려 주셨다.”는 말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한 가지는 영의 도구화입니다. 성령을 이용해서 자기의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행위들이 곧 그것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성령이 많다는 사람들이 점쟁이들처럼 어떤 신자들의 미래를 알아맞히는 일들을 합니다. 임신한 여교우들의 아들을 낳을 것인지, 딸을 낳을 것인지를 예언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방언과 일치하기도 합니다. 이런 건 매우 순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성령의 도구화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영을 오해하는 또 하나의 현상은 영의 극단적 관념화입니다. 물론 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관념적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긴 하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영의 왜곡입니다. 보통 우리가 영혼 구원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만약 이 말이 인간의 육체는 아무 상관없고 오직 영적인 부분만 구원받는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을 영육이원론의 구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순전히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 여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문제는 좀 복잡하기 때문에 설교시간에 길게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령을 물질적인 것이나 육체적인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순수 심령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실히 하면 충분합니다. 성령을 흡사 귀신처럼 생각하는 그런 태도는 결코 기독교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영에 대한 오해를 간단히 설명했는데, 이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서에도 영에 대한 진술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영을 어떤 한 가지로 끊어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예희는 세상에 태어난 지 네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희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한 힘은 무엇일까요? 예희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요. 물론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난자와 정자의 결합이지만 심층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난자와 정자가 결합해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도록 하는 훨씬 근원적인 힘이 작용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아마 인간으로 진화해온 지난 수백만 년의 역사가 작용했을 것이며, 현재 어떤 유전자 활동이 개입했겠지요. 이게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알고 있는 기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걸 연구하면 생명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서울대학교 황 아무개 박사의 배아줄기 연구문제로 인해서 나라 전체가 시끄러워졌는데, 이런 연구로 생명이 본질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분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세상이 왜 다른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인간은 흙일뿐만 아니라 영이고, 영일뿐만 아니라 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은 곧 이 영이 흙을 통해서만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몸이 없으면 영도 없습니다. 그게 참으로 신기한 거죠. 영과 육체가 서로 다른 현상이기는 하지만 서로 결합되어야만 생명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이걸 가능하게 하는 힘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이렇게 은밀한 방식으로, 은폐의 방식으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아주 비밀스럽게 이 세상에 생명을 가득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곧 세상의 신비입니다. 그런 신비한 생명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며, 예언자들입니다.  

정의와 찬양
이스라엘에는 생명의 심층을 눈여겨보는 영적인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이사야는 역사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역사를 영적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예언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는 이사야가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책상머리에 앉아서 어떤 초월적인 신탁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아주 신비로운 그런 하나님의 통치를 포착하려고 했습니다.
이사야의 마음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야훼 하나님의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도 우리와 똑같은 역사 안에서 살았던 인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를 초월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그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사관이 물씬 풍기는 예언들이 모두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너희를 ‘야훼의 사제들’이라 부르고 ‘우리 하느님의 봉사자’라 불러 주리라. 너희는 다른 민족들의 재물을 먹고 그들의 보물로 단장하리라.” 이런 구절들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런 민족주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긴 했지만 무조건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정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면 언제든지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사야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보다도 야훼 하나님의 뜻에 훨씬 더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민족을 통한 야훼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그런 통치를 전하려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본 야훼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구원통치는 오늘 본문 끝구절인 14절에 정확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이 말씀을 꼼꼼하게 읽어보십시오. 예언자 전통이 분명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안에 세워진 것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편향적인 건 결코 없습니다. 예언자들의 관심은 정의로운 공동체였습니다. 이런 정의로운 공동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유효한 게 아니라 “만백성”에게 해당됩니다. 만백성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는 외치고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정의롭지 못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공동체는 곧 앞 단락에서 여러 방식으로 설명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억눌린 자들, 포로들, 슬퍼하는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기초는 곧 정의입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이 희년 전승과 연관된다는 말씀을 기억하시죠? 사회의 모든 불균형이 새롭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그 희년은 곧 정의로운 공동체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정의로운 공동체와 영성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야훼 하나님의 영을 받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사회가 되어야만 정의로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거꾸로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통치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오늘 말씀 끝부분에서 정의와 찬양을 한 묶음으로 제시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와 하나님 찬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정의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는 말도 됩니다. 정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이 역사의 영성이며, 그걸 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집니다.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아 우리가 함께 드리는 이 예배가 여러분의 삶에서 정의로운 공동체를 향한 희망과 기다림으로 승화하기를 바랍니다.
profil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666
451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859
450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58
449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56
448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847
447 성탄절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file [5] 2015-12-27 9837
446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28
445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750
444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8] 2014-06-15 9744
443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738
442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709
441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08
440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99
439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98
438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689
437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683
436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69
435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63
434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652
433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47
432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46
431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634
430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25
429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11
428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600
427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595
426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586
425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546
424 성탄절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6] 2014-01-05 9542
423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530
422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530
421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24
420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9523
419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12
418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492
417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480
416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47
415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435
»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408
413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07
412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01
411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71
410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370
409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9360
408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47
407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45
406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335
405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330
404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18
403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317
402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313
401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10
400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06
399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05
398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304
397 부활절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벧전 2:2-10) [2] 2014-05-18 9296
396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293
395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90
394 사순절 의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 (사 50:4-9a) [16] 2014-04-13 9288
393 성령강림절 선과 악 (롬 7:15-25a) [16] 2014-07-07 9279
392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266
391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64
390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53
389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51
388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208
387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196
386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151
385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137
384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28
383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080
382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9061
381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9052
380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9048
379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9046
378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35
377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9030
376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966
375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8940
374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20
373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915
372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8906
371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78
37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76
36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42
368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8831
367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8822
366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821
365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813
364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8799
36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85
362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784
361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782
360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60
359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8759
358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8755
357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8724
356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80
355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69
354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59
353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569
352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55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