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부활절 조회 수 9843 추천 수 0 2015.04.12 19:39:07
설교듣기 : https://youtu.be/pWrUNLb5n2A 
성경본문 : 요한복음 20:19-31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20:19-31, 부활절 둘째 주일, 2015412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가끔 그런 이야기를 간증 식으로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천국에 다녀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도 합니다. 단테의 <신곡>처럼 문학적인 상징으로 말하면 가능하지만 실질적인 것으로 말하면 잘못입니다. 그런 이들은 뭔가 다른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든지, 또는 심리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기는 합니다. 구약은 접어두고 신약만 해도 다섯 군데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관계 된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회당장 야이로의 딸(5), 2) 나인성 과부의 아들(7), 3)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11). 고대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사 상태에 빠졌던 이들을 모두 죽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착오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 아이가 병들거나 다른 이유로 숨도 쉬지 않고 심장이 멈춰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포대에 말아 윗목에 놓아두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흔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런 사건 중의 하나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사로도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날 정도였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까, 비슷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 사건은 기자들의 취재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제자들도 미처 그 실체를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운 생명 경험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사건에 연루되는지도 종잡기 힘들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꾸미지 않고, 거칠지만 있는 그대로 증언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들의 증언 중에서 한 대목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전해드릴까 합니다.

 

도마 이야기

요한복음 20:19절에 따르면 안식 후 첫날, 요즘의 요일 계산으로 일요일 저녁 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고 꽁꽁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는 모든 이들이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까지 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처형당할 때 생긴 상처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나타난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전해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딱 끊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 도마의 이런 발언은 초기 기독교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대표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한다고 도마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고 근거로 없이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좋은 신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자칫 광신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 26절부터 도마에게 반전이 일어납니다.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던 그 자리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도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첫 번째와 똑같은 축복의 말씀을 주신 다음에 도마에게 당신의 손을 보고 옆구리에 손을 대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 난 몸에 손을 댔을까요? 본문은 그것을 확인해주지 않습니다.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추정한다면, 도마는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겁니다. 바로 앞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할 때 예수님은 당신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목격한 도마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의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본질입니다. 요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복음서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반석이라는 뜻의 이름을 주시면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고백으로 큰 명예를 얻은 겁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 즉 초대 교황으로 내세웁니다. 이에 반해 도마에게는 의심 많은 제자라는 별명 아닌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런 평가는 정확한 게 아닙니다. 도마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수준이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외경으로 도마복음서가 있을 정도로 도마는 초기 기독교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원래 로마 황제에게 따라다녔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퀴리오스, 즉 주님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당대의 최고 권력을 손에 쥐고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퀴리오스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성 있는 이야기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퀴리오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대기업의 총수가 오늘의 퀴리오스는 아닐까요? 실제로 이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굴러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생각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보면 대답은 간단히 주어집니다. 현대인들은 세속적인 힘, 즉 경제만능주의, 승리주의, 제국주의, 황제숭배, 권력숭배라는 세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도 실제로는 그랬습니다.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의 질서가 사람들과 세상을 구원하는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퀴리오스로 고백했습니다. 이게 옳은 주장일까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뭔가 비현실적인 몽상에 빠져 있는 건 아니었을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근거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리고 이런 경험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무의미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인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대한 제국을 이끌고 있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의 무게를 감당하는 이야기가 되려면 예수님의 부활이 왜 생명의 근원인지를, 왜 부활의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대답을 대다수 교인들은 압니다. 최근 설교에서 제가 몇 번 짚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한 죄와 죽음의 극복이 그 대답입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완성시켜보려는 욕망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전승도 아담과 이브가 눈이 밝아진다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밝아지면 지식이 늘고, 그러면 사회 리더가 되고 선생이 될 수 있고, 존경받고, 돈도 많아집니다. 이런 걸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성취해보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것을 통해서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헛수고일 뿐입니다. 이런 욕망들이 충돌하는 와중에서 삶을 파괴하는 악순환이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오는 목요일인 416일은 세월호 침몰 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 250명과 일반인 54명을 포함해서 304명이 목숨을 잃은 대재난이었습니다. 이런 대재난이야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참사를 통해서 많은 걸 배우면서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마음만 분열되고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느 쪽일까요? 저는 사고 당시만이 아니라 지난 일 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처럼 무기력하고 몰염치할 수 있는지, 화가 치밀고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또는 교묘하고 세련된 편법을 통해서 자기 성취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하는 시대정신에 우리가 굴복당한 겁니다. 그것을 기독교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당신이 설명하는 복잡한 교리는 손에 잘 잡히지 않으니까 모르겠고, 그냥 세상에서 남에게 욕먹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노력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충분한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그런 생각이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아니며, 더 나가서 그런 게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상대적인 만족감에 불과합니다. 참된 행복과 참된 만족을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상대적인 것에 매달립니다. 바둑을 비유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바둑 동호회가 두 군데 있다고 합시다. 한쪽은 모일 때마다 점심 내기나 돈내기 바둑을 둡니다.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다가 서로 싸우고, 실망하거나, 잘난 척 거들먹거립니다. 바둑 실력은 매일 그 자리고, 꼼수만 늡니다. 다른 동호회는 바둑 전문 기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석을 되풀이 배우면서 바둑의 세계 깊이로 들어갑니다. 바둑이 개인과 공동체를 기쁨으로 채웁니다. 어느 쪽이 바둑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요? 앞의 동호회에 속한 사람들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다투는 것을 바둑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질서와 권위가 제공하는 삶의 안전한 토대가 허상이며, 그것의 절대화가 죄라는 사실을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그 질서와 권위를 온 영혼으로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온 길입니다 

 

믿는 자의 복

나의 주님이라는 도마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본문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런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도마에 대한 책망처럼 들립니다. 도마의 신앙은 결국 눈과 손이라는 감각적인 수준에 떨어진 것이니, 그걸 초월하는 믿음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도마에 대한 책망이 아닙니다. 도마의 믿음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베드로의 믿음과 동일한 차원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해야합니다. 요한복음은 기원후 90-100년 어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과 여러 증인들이 모두 세상을 뜨고 없을 때였습니다. 믿음이 흔들릴만한 상황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신앙에 비해서 자신들이 뭔가 1%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지 않다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처럼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도 보고 믿은 사도들과 똑같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부활을 직접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 하는 게 핵심이 아니라 믿는 자가 되는 핵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에는 사도들처럼 부활의 주님을 보고 믿는 자도 있고,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처럼 보지 못했지만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으로 산 이들과 지금 우리들도 모두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믿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영적인 권위를 우리가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앞에서 주눅들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도 없고, 더 이하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에 이미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과 확신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마를 비롯한 사도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런 경험과 확신으로부터 나의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부활을 직접 목격한 이들의 신앙고백과 보지 못한 이들의 신앙고백이 다른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찬송과 기도와 성찬식과 세례와 예배 등을 통한 모든 신앙의 표현에는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이 녹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의 친교도 부활 신앙을 뿌리로 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님의 부활생명에 참여한다는 희망이 없다면 교회는 세상의 친목 단체 수준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부활공동체입니다. 그걸 정체성으로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신앙고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사도들처럼 보고 믿는 자는 아니지만, 사도들의 전통에 근거해서 보지 못하고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퀴리오스라는 사실을 믿는 저와 여러분 모두 사도들과 똑같이 믿는 자로서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profile

[레벨:21]주안

April 15, 2015
*.69.199.48

나의 주님!
다비아를 통하여 빛, 진리, 생명이신 주님을
점점 더 밝히 깨닫고 알아, 보지 못하고도

확실히 믿게하여 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는 모든 이들이
주님만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주님안에서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진실과 정의, 평화를 이루는 도구로 살아가게
하옵소서~아멘~!!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15, 2015
*.94.91.64

저희 다비아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멘!

profile

[레벨:43]웃겨

April 18, 2015
*.252.49.18

깊은 밤에 목사님 설교를 들었어요.( 목소리는 그리 미성이 아니신 건 확실한듯..ㅎ)

빵집 알바를 끝내고 들어온 늦은 시간에.. 혼자 조용히 듣다보면

홀로 앉아 음미하며 마시는 차 처럼

영혼의 골수 깊숙이 파고 듭니다.

이제서야 목사님이 그 오랜 시간을 힘주어

말씀해 오신 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듯합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무게를,

세상과 다른 패러다임으로 사는, 차원이 다른 의식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감을 다시 한 번 되새김니다.

별로 눈에 확 띄는 반찬이 없는 평범한 식탁같이 보이면서도

 영양가 있는 오가닉 유기농 음식을 먹는 듯한

 목사님의 설교에 조금씩 저도 입맛이 길들여지나 봅니다.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18, 2015
*.94.91.64

그동안 저의 설교에 입맛을 느낄 수 있도록

인내하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ㅎㅎ

제가 나름으로 전해보려고 했던 '그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리고 오늘 확연하게 경험되는 것 같다가

내일이면 다시 묘연해져버리는 것이라서 

우리가 집중하면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 우리가 부르는 그분이 그런 분이니까요.

거기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더 정확하게 말해

그 세계가 가까이 왔을 때 알아먹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앞서 그 길을 갔던 신앙 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들은 성서기자들과 신학자들인데, 

우리의 영적인 촉수가 예민해지는 것이겠지요.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9]송정공

April 19, 2015
*.112.106.152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너무나 감사하신 말씀

도마 같은 의심(?) 많고

가룟 유다 같은 저 같은 것을

내치지 않으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중략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주님은 손도 옆구리도 상하셨고

목소리도 쉬셨고... ㅠㅠ

목자되신 나의 주님!!

제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주님을 버리고

또 버리고, 또 버리고 했던 나를

내치지 않으시다니...ㅠㅠ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19, 2015
*.94.91.64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주님의 제자일 뿐입니다.

profile

[레벨:13]진인택

June 25, 2015
*.176.175.19

어렵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주시고 생명으로 인한 기쁨, 고통을 경험하면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알게 됩니다.

내가 살아있음에 주님이 살아 게심을 믿습니다.

증거와 근거를 눈으로 보고 믿는 게 피곤한 인생이 란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날들은 주님께서 생명을 주신 날들이라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25, 2015
*.94.91.64

생명은 종말까지 이어질 영적인 화두라서

우리에게 사유의 인내심을 요구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방식으로 생명을 은총으로 받았고,

죽음 이후에는 잠 자는 방식으로 생명에 참여할 것이며,

마지막 심판 후에는 완전히 변화된,

그래서 지금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겠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45
448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03
447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783
446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748
445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742
444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9718
443 성탄절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file [5] 2015-12-27 9715
442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8] 2014-06-15 9703
441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688
440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54
439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53
438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647
437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642
436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30
435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626
434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12
433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02
432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602
431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569
430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543
429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541
428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521
427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519
426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516
425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515
424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497
423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466
422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9451
421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449
420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440
419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438
418 성탄절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6] 2014-01-05 9438
417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437
416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415
415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393
414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357
413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355
412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355
41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332
410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327
409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307
408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06
40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299
406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286
405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284
404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284
403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268
402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265
401 부활절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벧전 2:2-10) [2] 2014-05-18 9260
400 사순절 의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 (사 50:4-9a) [16] 2014-04-13 9259
399 성령강림절 선과 악 (롬 7:15-25a) [16] 2014-07-07 9253
398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40
397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215
396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195
395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190
394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185
393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183
392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183
391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176
390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175
389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171
388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147
387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124
386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121
385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120
384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034
383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031
382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017
381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8997
380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8997
379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8987
378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8983
377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8944
376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8926
375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8918
374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8916
373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880
372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48
371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833
370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8830
369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19
368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04
367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798
366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783
365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775
364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8757
363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742
362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35
361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03
360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8663
359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651
358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44
357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29
356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26
355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8592
354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8590
353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514
352 주현절 변모의 예수, 하나님의 아들 (눅 9:28-36) [3] 2016-02-07 8490
351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8480
350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8478
349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478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