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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https://youtu.be/NccGPOsBPzI 
성경본문 : 이사야 55:10-13 

산과 언덕이 노래하리라.

55:10-13, 성령강림후 제 5, 2014713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저는 <신학공부> 특강을 위해서 매달 한 번씩 서울에 올라갑니다. 지난 76일 저녁에 있었던 특강의 제목은 구원에 관해서였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르거나 또는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몰라도 세상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고, 오히려 세상살이가 더 편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문제는 우리의 삶을 실제로 끌어가는 근본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돈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돈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겁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사 55:10-13절도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쓴 사람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된 기원전 587년과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서 패망한 기원전 539년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기원전 7세기에 활동한 이사야, 그리고 포로귀환 이후에 활동한 제3 이사야와 다른 인물로서 학자들은 이 사람을 제2 이사야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를 그냥 이사야로 부르겠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려는 게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 그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다윗 왕조를 패망시킨 바벨론은 거슬러 올라가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탄생시킨 고대제국입니다. 하무라미 법전으로 유명한 그 나라입니다. 그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치다가 기원전 6세기에 마지막으로 반짝 하고 번성했는데, 그 시기가 바로 오늘 설교 본문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바벨론은 기원전 6세기 말에 예루살렘을 몇 번 무력으로 침공했고, 유대는 이러저런 방식으로 맞서다가 결국은 기원전 587년에 패망합니다. 고대사회에서 패전국은 모든 걸 잃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궁은 불타고 모든 값진 집기는 약탈당했고, 상당한 숫자의 유대 지도자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으며, 유대 지역은 바벨론에서 파견된 총독들에 의해서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제국이 작은 나라를 자기 나라에 동화시키는 정책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당하는 고난도 고난이지만 영적인 실망과 혼란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이 휩싸였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전능한 존재가 아니든지, 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런 절망의 세월이 수십 년 계속되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게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에 이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사야는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탁을 선포했기에, 그리고 그의 선포가 신앙의 본질을 담고 있기에 역사에 살아남아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이런 신앙이 가능하려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첫째, 구원에 대한 열망입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세상을 보고, 그렇게 삽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현실이 그대로 유지되는 걸 선호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보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상황에 살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곳에 잘 적응해서 사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소수민족으로 산다는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삶의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출세한 사람도 있었고,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런대로 지낼 만했습니다. 그리고 이 포로 상황이라는 게 하루 이틀 된 게 아니라 수십 년 계속된 것이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기에 길들여졌습니다. 오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 말은 하고, 그렇게 살려고 나름으로 노력하고,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이 철저하게 지배하는 이런 세상에 자의반타의반으로 적응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구원에 대한 열망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의 영혼이 뜨거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구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말도 상투적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자기가 구원을 이룬다고 생각하면서 뭔가를 야심차게 계획하고 실천합니다. 그렇게 평생 수고하다가 안 되는구나.’ 하고 죽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다는 말은 개인의 운명과 국가, 또는 세계 전체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앞 절인 사 55:8, 9절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와 생각이 다른 하나님을 대한다는 건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수고가 헛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으로 숨거나 하나님에게 자기가 원하는 생각을 투사시킵니다. 이런 생각에 갇혀 있는 한 바벨론 포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한 이사야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일종의 현실안주나 타협, 또는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향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당신이 아무리 떠들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아, 바벨론 이데올로기는 공고한 거야, 그러니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게 좋아.’ 우리도 늘 이렇게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 되돌아오지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취된다고 믿었습니다. 55:1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사야는 이런 확신 가운데서 바벨론 포로라는 현실에 갇혀있는 동족을 향해서 새로운 영적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평안하게 인도해서 조국으로 돌아가게 해준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체제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열어주신다는 뜻입니다. 1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13절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고 소귀나무는 찔레를 대신해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표징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산들과 언덕들이 노래하고 나무들이 손뼉을 친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노래와 손뼉은 즐거움과 행복의 표현입니다. 사람도 즐거우면 노래하고 손뼉을 칩니다. 그런 경험이 깊어지면 노래와 악기 연주와 춤 같은 예술로 승화됩니다. 천국에는 아마 설교는 없고 노래와 손뼉과 춤만 있을 겁니다. 그런 희망을 안고 우리는 삽니다. 그것은 단순히 미래의 희망으로만 남는 게 아니라 오늘의 현실이 되고, 되어야만 합니다. 노래하고 손뼉 치는 이런 삶을 현실로 살아내는 것이 기독교인의 영성이기입니다.

 

이사야의 이런 예언을 오늘 우리가 공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좋은 말이라는 것을 알긴 하지만, 오늘의 현실이 너무 척박해서 노래하거나 손뼉 칠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416일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직접 겪은 이들이나 그것을 자기의 일처럼 느끼는 이들은 노래와 손뼉이 너무 먼 이야기로 들릴 겁니다. 아이들의 죽어가는 그 장면이,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제 머리에 자주 떠오릅니다. 그런 끔찍한 일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고난도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세상이 너무 악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불행을 손에 꼽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거꾸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이사야의 예언에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더 이상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령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도 그게 별로 절실하지 않습니다.

 

저는 앞에서 바벨론 포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현상을 좀더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냥 현실에서 좀 편안하게 사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거기서 출세하고, 취미생활 하고, 여행 다니고, 맛있는 거 찾아먹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조금 불편한 거는 인생이 다 그러려니, 하고 참으면 됩니다. 그게 인지상정입니다. 크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자꾸 귀찮게 말을 하는 겁니다.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우리와 생각이 다르신 하나님이 고유한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에 관심을 두라고 말입니다. 삶에 대한 시각을 하나님께로 완전히 바꾸라는 충고입니다.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들에 말씀을 선포한 겁니다.

 

산과 언덕이 노래한다는 이사야의 말을 다시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것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언제인가요? 우리가 즐거움의 절정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을 기억할 겁니다. 좋은 대학 합격, 대기업체 취업, 결혼, 출산, 각종 취미활동이나 예술 경험 등이 그런 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가능한대로 즐겁게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일들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게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걸 성취했다고 해서 절정의 즐거움을 맛보는 건 아닙니다. 절정으로 느낄 수 있긴 하지만 그게 너무 짧아서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아무 맛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군것질을 하면서 마냥 즐거워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삶은 그냥 재미있다고만 말할 수 있지, 산과 언덕이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그 사건만이 산과 언덕으로 하여금 노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제시한 영적 비전은 구체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산과 언덕이 노래한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그의 예언대로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와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서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 문헌을 다시 수집하면서 나라의 틀을 세워나갔습니다. 그런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결국 예루살렘과 유대는 점점 힘을 잃으면서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원후 70년에는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로 2천년 가까이 유대민족은 나라 없이 유럽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산과 언덕이 노래할 때가 올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현실에서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예언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들도 사람이기에 미래를 족집게로 잡아내듯이 맞출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바벨론 포로라는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이 올 것이라고 선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아니 여기까지가 바로 인간의 한계를 지녔으나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이사야 예언의 전통을 이어받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사야의 영적 비전을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인 구원을 주셨다는 겁니다. 오늘 제2 독서인 롬 8:11절은 그 놀라운 사실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바울의 이 진술을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부활의 능력이신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을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을 생명으로 바꾸신다는 뜻입니다. 바벨론에서 벗어난 유대인들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노력도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 못합니다. 명예를 얻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예가 높을수록 죽음으로부터 받는 충격은 높은 데서 떨어지면 더 큰 충격을 받듯이 더 큽니다. 창조의 하나님만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의 토대는 예수의 부활입니다.

 

앞에서 절정의 즐거움이 무언지 짚어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선하든지 악하든지 불문하고 다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을 몸을 살리신다는 것이야말로 참된 즐거움의 절정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신 분이시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에 의해서 구원자로 증언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종말에 세상을 그분의 고유한 능력으로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죽을 우리 몸을 살리십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겁니다. 이게 우리 기독교인들의 구원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산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모든 어려움을 새처럼 사뿐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상태와 비슷한 이 현실 앞에서 짜증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런 문제들은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아무도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마십시오. 산과 언덕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구원이, 그 생명의 환희가, 그 생명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바로 우리 눈앞에 와 있습니다. 그게 보이시나요?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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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July 14, 2014
*.192.29.120

바벨론 포로 시대에
구원에 대한 갈망을 절감치 못하며 체제에 순응해 살단 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작금의 거대한 세상의 교훈과 풍조에 휩쓸려, 그분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의 갈급한 심령없이 사는 우리 또한 저들의 종국의 모습과 동일한 결과에 직면하는게 아닌가...  은근 겁이 납니다


이사야처럼 바벨론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고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갈급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이가 들수록 세상것에 대한 감각적인 재미의 덧없음을 실감하면서도
산과 들이 노래하는 기쁨의 차원이 어떠할지가 어렴풋이라도 손에 잡히지가 않아

이를 누리고자 하는 갈급함이 상대적으로 커가지 않는것 같군요.


일상에 안주하지말라!
삶의 시각을 그분께 맞춰라...!
목사님의 지적에
"당연히 그래야지"
심리적인 공감만 가질뿐, 거기서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결단으로 나가지 못함은

그 공감과 도전을 삶의 혁명적인 전환점으로 만들지 못함은
이사야 영성을 그림자라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탓인가요?

누구는 세상살이의 수고와 짐이 너무 버거워,

또 누구는 그런대로 아쉬움 없이 먹고 사는 재미에 빠져,

구원에 대한 절실성을 갖지 못하는 것인가요?

이사야의 영성, 구원에의 절실성, 그분을 향한 타는 목마름은 어떻게 해야 깊어지고
갈급해지나요?

내게 왜 구원이 필요한지..
죄 아래 팔려 사는 인생의 종국이 어떠한지...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는것과
내 손에 쥔 모든 것이 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는 순간이 창졸간에 닥칠

그 "죽음"이라는 숙명적 운명에 내 영혼을 더 깊이 직면하도록

자기를 그리로 몰아가는 것이 방법일까요?

 

목사님의 설교가 그 의문에 대한 갈증만 더 키워줍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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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4, 2014
*.94.91.64

'의문에 대한 갈증만 더 키워' 준다는 말을 들으니

제 설교가 나름으로 공명을 일으켰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설교관은 회중들을 질문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에 있거든요.

답은 어쩌냐구요?

답은 내가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성령이 줄 수 있어요.

(저 성령이 또 손에 잡히지 않지요? ㅎㅎ)

성령은 질문한 사람에게만

질문의 깊이에 맞도록 대답하십니다.

부수러기 님의 질문이 점점 진지해지는 걸 보니

성령과의 관계도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니 위 대글이 이미

한편의 설교네요.

거기에 질문도 있고 답도 있군요.

한 가지만 도움을 드린다면,

너무 명백한 대답을 기대하지 마세요.

그걸 알면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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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Himalaya

July 15, 2014
*.148.51.9

When human does not ask question,
the Holy Spirit does not give answer.

Hildegard of Bingen (12th century)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15, 2014
*.94.91.64

ㅎㅎ 내가 했거나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앞선 세대 사람들이 다 한 거네요.

<질문하지 않으면 성령도 대답하지 않는다.>

-빙엔의 힐데가드(12세기)-

저분 이름은 한 두번 들은 거 같은데

확실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좋은 경구를 인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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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anuary 12, 2015
*.206.242.56

우리가 우리를 기쁘게 한 일들이 얼마나 오래갈까.

내가 나를 기쁘게 한일들이 또한 얼마나 오래갈까. 

얼마전 목사님 말씀에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적이다란 말씀을 보았습니다.

중요한 인간의 특징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특징이 하나 보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언제까지나 춤추게 할 것인가.

기쁨의 끝을 또 다른 기쁨으로 가릴 뿐입니다.

영원한 기쁨, 산과 언덕을 노래하게하는 하나님의 기쁨

인간의 생명을 부활시키는 극치의 기쁨만이

꺼지지않는 기쁨입니다.

주 예수님을 구주로 받는 기쁨이 모든 기쁨을 눌러버리는 밤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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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2, 2015
*.94.91.64

주님을 통한 기쁨이 더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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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부활절 예수의 살과 뼈 (눅 24:36-48) [4] 2018-04-15 7831
312 성령강림절 하늘의 양식 (요 6:35, 41-51) [8] 2015-08-10 7831
311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06
310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7773
309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771
308 창조절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골 1:1-20) [6] 2019-11-24 7756
307 부활절 죽임 당한 어린 양 (계 5:11-14) [9] 2016-04-10 7748
306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7743
305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43
304 사순절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 (신 26:1-11) [6] 2016-02-14 7739
303 창조절 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4] 2015-09-06 7721
302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7718
301 부활절 부활의 증인이란? (행 5:27-32) [9] 2016-04-03 7711
300 창조절 복 있는 삶 (눅 14:7-14) [2] 2019-09-01 7706
299 부활절 성령 임재의 증거 (행 10:44-48) 2018-05-06 7670
298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648
297 창조절 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욜 2:23-32) 2019-10-27 7616
296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569
295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7537
294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473
293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462
292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7415
291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08
290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4] 2018-03-25 7380
289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375
» 성령강림절 산과 언덕이 노래하리라. (사 55:10-13) [6] 2014-07-13 7343
287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337
28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7330
285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310
284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3] 2016-02-21 7305
283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264
282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7250
281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249
280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7233
279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7220
278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211
277 성령강림절 집행 유예의 삶 (마 1324-30, 36-43) [14] 2014-07-20 7155
276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147
275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15
274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7112
273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081
272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081
271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7064
270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7053
269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051
268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042
267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7018
266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7000
265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6980
264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6929
263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6918
262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6910
261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6900
260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894
259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882
258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6866
257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6864
256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6846
255 대림절 늘 깨어 기도하라! (눅 21:25~36) [1] 2021-11-28 6843
254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13
253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784
252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764
251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6705
250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6703
249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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