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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성령강림절 조회 수 4716 추천 수 0 2020.08.23 20:37:28
설교보기 : https://youtu.be/4bdUwKpGQts 
성경본문 : 출애굽기 2:1-10 

모세의 출생 이야기

2:1-10, 성령강림 후 12, 2020823

 

 

신구약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이 나옵니다. 그 인물들의 활동이 주로 다뤄집니다. 출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출 2:1-10절에 모세의 출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선 이야기 구성의 외형적 특징을 하나 짚는다면,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자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를 낳은 어머니, 아기 모세가 들어있는 갈대 상자를 나일강에서 건져낸 파라오의 공주와 그 시녀들, 중간에 임무를 수행한 모세의 누이 미리암입니다. 남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습니다. 모세의 어머니와 결혼한 한 레위 남자가 거론되지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모세가 태어난 시대는 기원전 13세기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중해 인근에서 가장 잘 나가던 이집트 제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거대 토목공사와 피라미드 같은 초대형 건축물 공사가 많았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에 동원된 사람 중에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온 노예도 있었을 겁니다. 이집트에 여러 민족이 모여 살다 보니 사회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아기를 유달리 많이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유대인들이 이집트인들보다 더 많아질 수 있습니다. 이를 막아보려고 이집트 왕인 파라오는 유대인 산파에게 출산 시 남자 아기가 나오면 죽이고 여자 아기만 살게 하라고, 끔찍한 비밀 명령을 내렸습니다. 산파들은 유대 여자들이 건강해서 산파가 도착하기 전에 아기를 낳는다는 말로 그 명령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파라오는 전국에 공식적으로 명령을 다시 내렸습니다. 유대인 여자가 낳은 남자아이는 모두 나일강에 던지고, 딸아이면 살려두라고 말입니다. 말이 안 되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 알지 못하는 논리를 내세웠겠지요. 유대인들로서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떨어진 겁니다. 그 내용이 출 1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2장에서 모세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한 레위 여자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석 달간 아이를 숨겼습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커져서 더는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갈대로 엮은 상자를 구해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의 진을 칠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엄마는 아기를 갈대 상자에 넣고, 덮개로 덮었습니다. 그 갈대 상자를 강가에 자라는 갈대 늪지대에 놓아두었습니다. 아이가 다른 이집트 사람에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심정입니다. 운이 좋으면 그 사람이 아이를 데려다가 키울 겁니다. 아이의 누이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시녀들과 함께 강가로 내려왔다가 갈대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갈대 상자 뚜껑을 열자 놀랍게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내아이가 보였습니다. 아이가 크게 울자 공주는 아이를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불쌍하게 여겼다는 말은 아이를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공주는 이 아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살려주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연민과 유대인 남자아이는 나일강에 던져야 한다는 이집트 제국의 법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아이의 누이가 공주에게 와서 말합니다. “공주님을 위해서 유모를 소개해줄 수 있습니다.” 공주는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녀는 아기의 친모를, 자기 어머니를 데리고 왔습니다. 엄마와 딸이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공주는 이 유모에게 말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시오. 양육비는 내가 주겠소.” 유모는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였습니다. 아이가 젖을 뗄 때가 되었습니다. 두세 살이 되었을지, 서너 살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유모는 아이를 공주에게 데려다주었고, 공주는 이 아이를 자기 양아들로 삼아 이름을 모세로 지었습니다. 그 이름은 건져냄이라는 뜻입니다. 나일강에서 건져냈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아이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인물인 모세입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40,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데릴사위로 40, 그리고 자기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민족 지도자로 살았던 40년입니다. 그의 죽음 이야기도 출생 이야기 못지않게 극적입니다. 출생과 죽음이 함께 거론된 인물이 성경에는 드뭅니다. 모세의 죽음 이야기는 모세 오경이 끝나는 신 34장에 나옵니다. 광야 생활이 끝나갈 즈음에 모세는 모압 땅의 느보산에 올라가 길르앗과 단 지역을 바라봅니다.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감개무량했겠지요. 이제 사해 동편에서 사해를 향해 가로지르는 아르논 강만 건너면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습니다. 성경은 그가 어느 골짜기에 묻혔다고만 할 뿐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모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신 34:10-12절에 나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유대인들이 모세를 얼마나 위대한 인물로 여기는지는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 권인 모세 오경에서 네 권이, 즉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모두 모세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인물이 구약에는 없습니다. 신약에도 없습니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복음서도 그 분량으로만 본다면 모세 이야기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모세 이야기는 240쪽에 가깝고, 복음서는 네 권을 다 합해도 185쪽에 불과합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에게도 모세는 예수의 예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따르면 예수가 새로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 왕은 남자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모세 출생 시대에 유대인 남자아이는 모두 나일강에 던지라는 파라오의 명령을 연상시킵니다. 예수의 변화산 전승에 모세가 등장합니다(9:4).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이듯이, 바울은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고후 4:6). 한마디로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인물입니다.

모세 오경을 기록한 사람은 왜 모세의 대서사를 출생 이야기부터 시작했을까요? 스펙터클이라 할 수 있는 모세의 다른 이야기에 견줘보면 출생 이야기는 지나칠 정도로 소박한데 말입니다. 역사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출생 이야기는 다른 고대 문헌에도 나옵니다. 기원전 3천 년 후반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스리던 사르곤왕의 출생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거의 똑같은 줄거리로 나옵니다. 비슷한 전설이 다른 문헌에도 몇 군데 더 나옵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비슷하지만,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고대의 다른 문헌에 나오는 전설은 신적인 개입을 통해서 그 사람을 영웅시합니다. 모세의 출생 이야기에는 그런 관점이 없습니다. 매우 소박하게 사실만 전합니다. 당시 이집트에 살던 유대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만한 일이었습니다. 출생 이야기를 빼도 모세의 위대성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언급한 것일까요?

성경 기자의 관심은 모세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하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목표였다면 그의 출생 이야기를 더 신비롭고 색다르며 드라마틱하게 묘사했을 겁니다. 아기 모세가 들어있는 갈대 상자를 나일강 악어가 집어삼키려는 순간에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쳐서 악어를 박살 냈다거나 무지개가 갈대 상자를 안전하게 지켰다고 하면 훨씬 더 감동적으로 들렸을 겁니다. 평범하게 그려진 그의 출생에 그의 위대한 미래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은 고대 유대인들은 그렇게 위대한 모세도 출생 장면만 보면 우리가 크게 다르지 않군.”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아이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게 인간의 출생과 인생 여정의 신비입니다. 모세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출생에는 모세의 미래가 숨어 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출생 자체가 위대한 사건입니다.

모세의 출생 이야기를 좀더 보실까요?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장가들었습니다. 중간에 중매한 사람이 있었는지, 아니면 어떤 축제에서 두 사람이 만났는지 모르겠으나 남녀가 만나서 아기를 낳는다는 사실 자체는 대단히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공주가 때맞춰 나일강에 목욕하러 나오지 않았다면, 그녀가 다른 일에 한눈을 파느라 갈대 상자를 보지 못했다면, 공주에게 연민의 정이 없었거나 아버지 왕의 명령을 절대복종하는 사람이었다면 모세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평범하게 태어난 듯이 보이지만 거기에 연루된 상황을 살피면 아주 특별하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것입니다. 여러분의 출생에는 이미 모세의 위대한 미래가 들어있습니다.

한 인간의 출생을 생리적으로 보면 더 오묘합니다. 임신 확률은 생각보다는 높지 않습니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면 아주 특별한 현상이 거기서 벌어집니다. 아주 빠르게 열 개 정도의 만능 줄기세포가 생깁니다. 그 줄기세포가 우리 신체의 각 부위와 오장육부로 변화됩니다. 임신 280일이 되면 출산하는데, 그 시간 메커니즘이 엄마 몸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여전히 비밀입니다. 출산 과정에는 아기 머리와 산모 골반의 불균형이라는 문제가 불거집니다. 인간의 직립 보행에 맞도록 골반구조가 변화하면서 여성들은 다른 동물에 비해서 출산 과정에서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영장류 중에서 2분 만에 출산하는 종도 있습니다. 아기가 엄마의 산도를 빠져나오면서 엄마 몸의 미생물을 온몸에 묻힙니다. 이런 미생물의 세례가 아기 건강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연 분만이 제왕절개보다 아이의 건강에 훨씬 좋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모세의 출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모든 아이를 미래의 모세라는 마음으로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단순히 신앙적인 감동이 아니라 세상을 객관적인 실체로 인식하는 데서 오는 마땅한 결론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분 중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눈에 아이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연봉을 벌어들이는 수단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험해볼 대상인가요?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대상인가요? 대다수 기독교인 교사들은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나 학문을 깨우치게 할 계몽의 대상으로 여길 겁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교육 방법론을 연구합니다. 다 좋습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정말 중요한 태도는 그들에게서 생명과 인생의 신비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들의 미래가 바로 모세라고 말입니다. 오늘 모세 출생 이야기에서 보듯이 여러분은 어머니 역할을 할 수도 있고, 공주나 아이의 누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역할을 하든지 아이들에게 숨어 있는 그 미래를 엿볼 수 있다면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거룩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지금 갈대 상자에 들어가 있는, 겨우 석 달 된 모세입니다. 지금 갈대 상자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갈대 상자에 들어간 이유도 모릅니다.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빠른 물살에 빨려가 나일강 하류로 떠내려가서 망망 지중해에서 떠돌지, 중간에 바람에 뒤집혀서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 악어의 먹이가 될지 모릅니다. 공주의 자비로움으로 건짐을 받을 것이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겠습니까. 절체절명의 위기에 떨어진 갈대 상자 속의 아이가 훗날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칠 영웅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모세니까 그런 일이 가능했지,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의 운명은 우리의 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의 출생과 우리의 출생은 똑같습니다. 갈대 상자 안의 아기 모세에게 위대한 미래가 숨어 있다면, 우리에게도 역시 위대한 미래가 숨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미모세의 위대한 미래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운명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엄청난 사건들은 너무나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네 권의 책으로도 다 담지 못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 경험입니다. 모세 이야기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하셨다는 사실이,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과 그 얼굴을 간절하게 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 모세의 서사를 관통하는 중심축입니다. 흥미진진한 홍해사건과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제 오늘의 설교가 정작 무엇을 말하는지를 아는 분들은 다 알게 되었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모세와 똑같이 이미 위대한 영웅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세나 촌부나 똑같이 여자의 몸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태어난 어린아이입니다. 기회가 되어서 나라와 세상을 위해서 큰일을 할 수 있으면 하십시오. 학문적으로 뛰어난 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을 정직하게 많이 벌어서 선하게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모세의 업적이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게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모세 못지않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 사변적이라고 느껴지십니까? 저는 언젠가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모세를 만난다면 친구처럼 지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모세나 저나 똑같이 하나님을 찾았으며,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인식과 믿음과 경험이 없는 분들이 여기 계신가요? 수학에서 더하기와 빼기를 할 줄 모르면 미분과 적분 개념에 들어갈 수 없듯이 그런 분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아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으며, 늘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은 자신의 실존을 두 가지 관점에서 새롭게 규정하고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관점입니다. 갈대 상자에 들어있는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기력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직하게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겁니다.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미래가 생명 세계로 열려 있다는 관점입니다. 사람들은 이전의 자신에게 갇힙니다. 자의에 의해도 그렇고 타의에 의해서도 그렇습니다. 갈대 상자 안에 들어있다는 고정관념으로만 자신과 세상을 봅니다. 연봉 5천만 원을 받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으로만 인생을 바라봅니다. 예쁘다, 건강하다, 행복하다, 아니다 하는 것도 고정관념입니다. 갈대 상자 안의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위대한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에게 미래는 열려 있습니다. 그 미래로 용감하게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이전 것에 묶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건져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자궁의 양수에서 건짐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와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건짐을 받은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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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August 24, 2020
*.139.82.200

갈대상자 안의 고정관념을 벗어나면

우리 모두가 무한한 가능성의 생명의 세계로 열려있는 존재라는 말씀에

가슴이 뜁니다. 

위대한 영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모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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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4, 2020
*.182.156.135

웃겨 님이 제 설교의 키워드를 다시 호출하셨군요. 

"갈대상자"

갈대숲에 숨어있던 갈대상자를 공주가 발견했듯이

성경 본문 안에 숨어있던 저 갈대상자가 저의 눈에

빛처럼 다가왔다는 게 놀랍지요.

깜깜한 현실이지만 그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영광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붙들고 오늘의 삶을 노래하면서 버텨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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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August 25, 2020
*.86.237.246

성경을 대하는 또 들여다보는 정 목사님의 혜안이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그 말씀의 깊이와 폭과 높이를 통해 인간의 영혼과 삶의 좌표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주신 목사님을 알고, 만나게 되어 행복합니다.  


대한민국 기독교계의 타락과, 천박한 목사들의 탐욕으로 인해 교회가 정 떨어져버린 시대에 살면서 

정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믿음에 관한 한 패배자가 되었을 겁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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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캔디

August 25, 2020
*.72.247.97

하늘연어님 글에 왕공감하며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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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5, 2020
*.182.156.135

아킬레스 건의 파열로 깁스 했다 하셨는데, 

좀 괜찮아졌는지 궁금하군요. 

제 설교가 허공을 향해서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니라는 걸

하늘연어 님 같은 분들의 피드백을 통해서 느끼니까 

저도 다시 힘을 얻어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성경이라는 한 권의 책만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는데,

저도 나이가 먹을수록 성경에만 집중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렬해집니다.

오늘이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칠석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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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5798
200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5775
199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5775
198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 2019-10-14 5773
19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709
196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5685
19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674
194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48
193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647
192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38
191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5565
190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563
189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550
188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5548
187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5523
186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520
185 창조절 두려워 말라! (학 1:15-2:9) 2019-11-10 5508
184 대림절 빈 들에서 (눅 3:1~6) [2] 2021-12-05 5490
183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5480
182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5465
18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455
180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443
179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415
17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370
177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351
176 성령강림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2] 2021-05-23 5349
175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345
174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340
173 창조절 생명과 지옥 (막 9:42~50) [4] 2021-09-26 5323
172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21
171 창조절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막 10:17~22) [5] 2021-10-10 5304
170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282
169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5280
168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275
167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273
166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262
165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5250
164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178
163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154
162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5138
161 창조절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 12:28~34) [4] 2021-10-31 5089
160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083
159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045
158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5010
157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4989
156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4986
155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4977
154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4954
153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4934
152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4889
151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4888
150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874
149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8) 2022-01-02 4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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