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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창조절 조회 수 4070 추천 수 0 2022.10.17 07:33:33
설교보기 : https://youtu.be/jmGsnIqTaos 
성경본문 : 누가복음 18:1~8 

기도의 신비와 능력

18:1~8, 창조절 일곱째 주일, 20221016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

18:1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에는 대표적으로 두 유형의 인간이 등장합니다. 한 인간형은 재판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진정성도 없고 인격적이지도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다른 이들보다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 머리가 좋았는지, 삶의 요령이 뛰어났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법을 관리하는 지위에 올랐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했으니까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을 존중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안하무인의 인간형입니다.

다른 한 인간형은 과부입니다. 고대사회에서 과부는 가장 힘이 없는 사람에 속합니다. 그 과부의 형편이 어떤지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으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는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먹고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여자는 원한이 맺혔다고 합니다. 원수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더 나아가서 탈취해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녀사냥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실제로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상당 기간에 걸쳐 반복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주로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미망인들이 그 대상입니다. 그녀의 작은 실수를 꼬투리 삼아서 마녀로 몹니다. 몇몇 사람이 그녀가 마귀와 접촉하는 걸 봤다고 증언하면 그녀는 마녀 선고를 받습니다. 화형이 집행된 뒤에 그녀의 재산은 주로 교회나 지역 관리자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본문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이 과부는 재판장을 찾아갔습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자주 찾아갔습니다. 재판장은 그녀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보통은 자존심을 상해하거나 귀찮아서라도 포기합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재판장은 과부의 원한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에 대한 연민도 없는 재판장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번거로운 일은 참지 못하는가 봅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평소에는 정의롭지 못해도 선거철이 되면 표를 의식해서 주민들의 숙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6절부터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 나옵니다. 불의한 재판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면서 그 핵심을 7절에서 이렇게 짚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우리는 이런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 매달리듯이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하게 구하는 기도라는 뜻의 강청기도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한 가지 예를 들면 눅 11:5~8절입니다. 밤중에 손님을 맞은 사람이 이웃 친구에게 가서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문이 닫혔고 아이를 포함한 가족이 모두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그 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 관계만으로는 떡을 줄 수 없으나 그 간청함으로는 그 어려운 요구를 들어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뜻이겠지요. 오늘 본문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원한 맺힌 사람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는 기도가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겠으나 시편에는 자주 나옵니다. 137:8절입니다. “멸망당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은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79:12절입니다.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6:10절입니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라.” 시편이 이렇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의에 대한 갈망입니다. 정의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지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직접 원수를 갚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관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가 원수이고, 악인지를 완벽하게 구별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하나님께 호소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그 판단을 맡기는 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바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원한을 풀어달라는 이 과부의 요청은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의 가장 치열한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감히 따라가기 힘든 거룩한 분노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해서 분노하신 적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23:15)

여러분에게는 인생살이에서 원한이 맺혔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소소한 문제는 있으나 그렇게 절박한 어려움은 없어서 아주 평안하신가요? 여러분이 다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만, 그런 삶이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닙니다. 삶이 무료해질지 모릅니다. 무료하더라도 본인이나 가족이 크게 아프거나 반지하에서 살 정도로 가난한 인생보다는 훨씬 낫지 않느냐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절대 빈곤이나 재난은 여기서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그런 불행한 운명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시라고 말씀드리기에는 저 스스로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칙에서만 말하면 무료하게 살기보다는, 또는 그걸 벗어나려고 작은 재미에 매몰되기보다는 원한이 맺혔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떨어지는 삶이 더 낫습니다. 배고픔을 경험해야만 배부름의 만족을 느끼고, 죽음 직전에 간 경험이 있어야 살아있는 것의 환희를 느끼듯이 무료한 삶에서는 원한이 풀리는 경험이 없으나 원한 맺힌 삶에서는 그런 경험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원한이 풀리는 경험은 곧 하나님 경험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꼭 풀어야 할 원한이 있나요? 없나요?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외친 바울처럼 저에게는 있습니다.

 

원한 해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우리가 원한이라고 여기는 사건들의 본질, 또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짚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억울한 일이나 속상한 일들로 인해서 벌어지는 어려움은 그런 일 자체라기보다는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합시다. 재산이 반쪽으로 줄었습니다. 작은 집으로 옮겨야 합니다. 돈의 씀씀이도 대폭 줄여야 합니다. 그런 어려움보다는 사기를 친 사람을 향한 분노가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그게 심해지면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만약 사기 친 사람을 향한 분노가 해결된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가해자가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최선이겠으나 그가 여전히 뻔뻔스럽게 행동한다고 해도 피해자의 분노가 해결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경험이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의 영혼은 생명의 빛으로 채워지기에 원수를 향한 분노가 아침 햇살 아래의 이슬처럼 사라집니다. 시간은 많이 필요하겠지요.

일상에서 가해자를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벌을 받을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은 용서를 구하도록 압박해야 합니다. 사람 관계에서도 그렇고 국가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보이는 행태는 정상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지적하고 저항할 때는 저항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분노로는 개인이나 국가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런 게 잘못 분출되면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은 문제의 근본 해결이 아닙니다. 원한이 풀어지는 게 아닙니다. 저는 상담 심리의 차원에서 처리할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고, 정치의 차원에서 처리할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되, 신앙적인 자세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극한의 상황에서도 우리의 원한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에서 실제로 가능한지는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기 중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일진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얻어맞기도 하고 용돈도 많이 뜯겼습니다.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사는 이 학생은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이제 자퇴하냐 마냐 하는 순간에 친부모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변호사이고, 어머니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였습니다. 이들 부모는 철이 없던 스무 살 무렵 아이를 낳았는데, 양육할 형편이 아니라서 입양 기관에 보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아이를 찾으려고 했으나 찾지 못하다가 이제 15년이 지나서 겨우 찾은 겁니다. 이 남학생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학교에서의 일이 너무 사소한 일이 되었습니다. 제가 꾸민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의미인지는 전달되었을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세상에서 당한 억울한 일이 사소한 일로 바뀐다고 말입니다.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하나님이 풀어주신다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를 가리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럴 정도로 깊어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원한을 단순히 풀어주는 게 아니라 속히풀어준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은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그런 시간과 다릅니다. 우리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실제로는 속히이기도 합니다. 이게 말장난이 아닙니다. 물리학은 이미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실감하기 어렵겠으나 시간은 우리가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서 다르게 흘러갑니다. 그래서 고도가 높은 곳에 사는 사람과 낮은 곳에 사는 사람 사이에 시간의 속도가 다르다는 겁니다. 그 차이가 아주 작지만요. 예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아 불안해하는 교인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라고 권면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은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우리 일상에서 비슷한 느낌은 있습니다. 우리 교우 중에서 나이가 오십 전후인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 나이에 대구 성서아카데미 운동을 시작했고 조금 지나서 대구 샘터교회를 시작했습니다. 20년을 지나놓고 보니 긴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한평생 전체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거나 실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만을 절대적인 시간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시간과 역사를 말할 때 그리스도교 교리의 한 대목인 종말론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말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순간으로 수렴된다고 믿습니다. 그 종말은 끝나는 때가 아니라 완성의 때이고 새로운 시작의 때입니다. 그런 종말론적 시각으로 우리는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로 삽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자기 인생이 풀리지 않으나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원한이 속히 풀릴 것이며, 이미 풀렸다는 사실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인생살이를 완전히 새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계산기로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신비이고, 원한이 풀림으로써 다른 모든 문제가 근본에서 해결되기에 능력입니다.

 

기도의 신비와 능력

오늘 본문은 눅 11:5~8절에 나오는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 이야기와 함께 기도를 주제로 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뭔가 억지스럽게 들릴 겁니다. 기도의 절실함을 강조하려는 문학적 수사입니다. 인생살이가 잘 풀리면 기도하고, 안 풀리면 그만두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거꾸로 인생살이가 안 풀리면 매달리듯이 기도하고, 잘 풀리면 기도와 담을 쌓는 게 아닙니다. 기도를 일종의 수행으로 받아들이는 걸 가리킵니다.

여기서 기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도 형식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찬양도 기도이고, 신학 공부도 기도하고, 예배도 기도이며, 교우들 사이의 신앙적 대화도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구도적 노력이 모두 기도입니다. 어떤 이는 풀 한 포기를 보면서도 기도 영성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내려온 기도문을 읽어도 되고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과 갈망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한평생에 걸쳐서 유지해야 할 삶의 실질적인 내용입니다. 죽음을 앞둔 존재인 인간에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마지막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기도의 삶을 살아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는데, 갑자기 그 의지를 무너뜨리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의 인자(the Son of man,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는 종말에 오실 심판자를 가리키는 묵시적 용어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에게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밤낮 부르짖듯이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재림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정해주신다고 해야 전체 맥락이 자연스럽습니다. 갑자기 그런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런 표현은 역설적인 의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누가복음이 기록되던 기원후 70년 어간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로마 제국은 여전히 승승장구합니다. 유대교와의 관계도 좋지 않게 흘러갔습니다. 예수의 재림은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과부의 심정이었습니다. 당시에 그런 불안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소위 가나안교인들이 늘어나듯이 말입니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일은 참된 믿음의 회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운명과 약속을 흔들림 없이 붙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세상일로 낙심하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도 믿음을 보기 힘든 게 아닐는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아닐는지요. 세상일로 자주 낙심하는 게 아닐는지요. 신앙생활이 인생살이의 구색 맞추기로 떨어진 건 아닌지요. 본문의 과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건 아닌지요. 기도의 신비와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또는 세련되게 그리스도인 흉내를 내다가 한평생을 끝내는 건 아닌지요. 본문 마지막 문장을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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