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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ULtc-3C7Ep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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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누가복음 14:1, 7~14 |
복된 삶의 역설
눅 14:1, 7~14, 성령강림 후 열둘째 주일, 2022년 8월28일
오늘 설교 본문(눅 14:1, 7~14)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가르침이 나옵니다. 이런 가르침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곤혹스럽습니다. 그 말씀을 외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따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개는 한쪽 귀로 듣고 흘려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죽은 문자로 떨어집니다. 저는 이 말씀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한 대로 여러분을 그 말씀의 깊이 안으로 안내해보겠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면서요.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
첫 번째 이야기는 눅 14:7~11절입니다.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열린 식사 자리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초대받았습니다. 주요 인사들은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당시 사회 지도층 인사들입니다. 그들 중의 일부가 상석에 앉았나 봅니다. 8절부터 예수께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상석에 앉지 말라. 그 자리에 앉았다가 지위가 더 높은 사람이 오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차라리 처음부터 ‘끝자리’에 앉는 게 좋다. 주인이 그를 상석으로 안내하면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11절에서 말씀의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예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경구에 속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2절에도 나오는 이 경구는 언뜻 너무 평범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와 비슷하게 말한 동서양 현인들은 많습니다. 생각이 있는 부모들은 자식들을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살기도 쉽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누구나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뜻대로 안 되면 자기 실력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속상해합니다. 가능한 한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자기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게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고, 세상이 작동하는 이치입니다. 자기를 높이지 말고 낮추라는 예수의 이 말씀은 그럴듯하긴 하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극단적인 이상주의자일까요? 그의 가르침은 소위 ‘공자 왈’에 불과한가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제가 보기에 예수께서는 가장 현실적인 분이십니다. 우리가 보는 허상을 깨트리고 실상을 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실상이 위 경구에 담겨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1) 높은 자리에는 가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아니, 하나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기껏해야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일만 있습니다. 그걸 사람들은 명예라고 말합니다. 명예는 우리 삶에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 자체가 새로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밥을 더 맛나게 먹는다거나 숨쉬기가 더 편해졌다거나 소소한 사물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의 영혼에 평화와 안식이 더 풍성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개 목사님은 존경할만해.’라는 말이 있어요. 존경받는 것으로 목사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 말을 유지하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바리새인이 될 가능성만 커집니다. 명예와 명분만 남고 생명은 유명무실해지는 겁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예수 말씀을 지금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다른 말을 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돈도 더 벌고,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돈과 인정받는 일은 삶의 현실(reality of life)이 아닙니다. 그건 형식입니다. 그 형식도 필요하기는 하나 형식에 매달리면 삶의 현실을 놓칩니다. 높은 자리도 얻고, 삶의 현실도 붙들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사람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께서 다른 자리에서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기지 못한다고(마 6:24) 말씀하셨겠습니까. 궁극적인 사건 앞에서는 ‘이것과 더불어 저것도 함께’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사건 앞에 서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2) 높은 자리를 피해야 할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에게 높은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본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를 감당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불행한 일입니다. 대통령직을 수행할만한 능력도 없고, 자세도 안 된 사람에게 대통령 자리는 자신도 불행하고 주변 사람도 불행하게 합니다. 사실 대통령직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본래 없긴 합니다. 다만 자기가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통령이 있고, 아예 인정하지 않는 대통령이 있을 뿐입니다. 대통령만이 아닙니다. 어떤 인간에게 판사와 검사의 능력이 있겠습니까.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칠만한 능력이 있는 교사는 본래 없습니다. 제한된 지식만을 가르치는 겁니다. 의사도 그렇습니다. 명의다 뭐다 하지만, 그가 병을 알아야 얼마나 알겠어요. 부분적으로 아는 겁니다. 자기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아는 의사가 있고, 자기가 대단하게 안다는 자세를 취하는 의사가 있습니다. 전문가를 존경하지 말라거나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전문가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든지 자기의 한계를 의식하면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런 사람은 굳이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이미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입니다. 마 23장에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신랄한 비판이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그런 자리에 오른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그런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뻔뻔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이 그렇습니다.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면 어딘가 서운해집니다. 인격적으로 준비된 이들은 그런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만,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노골적으로 표출합니다. 더 나아가서 화를 냅니다. 율법 교사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예수에게 종종 화를 냈습니다. 급기야 예수를 죽일 생각까지 합니다. 자기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그런 마음을 신학 용어로 ‘자기의(自己義)’라고 합니다. 자기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겁니다. 자기 생각이 늘 옳으니까 상대방을 재단합니다. 율법 전문가들인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의에 사로잡혔기에 예수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율법 기술자였습니다.
교회에서는 목사직이 높은 자리입니다. 특히 설교를 독점한다는 점에서 그 자리가 더 두드러집니다. 설교자의 자리가 목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목사에게는 설교할 능력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설교 행위는 마치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일부만 만져보고 코끼리를 설명하는 격입니다. 칼 바르트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을 인식할 수 없다(nicht können).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해야 한다.(sollen)’ 두 개의 조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인식의 불가능성과 선포의 당위성입니다. 목사가 하나님 말씀을 모른다는 말을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해도 목사 역시 일반 신자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고, 회중들의 영혼을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저도 늘 안개가 낀 숲속에 들어간 심정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여러분 앞에 섭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알고 경험한 성경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다는 기쁨이 있으나, 더 궁극적으로는 온전하게 알지 못한다는 불안이 가시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백척간두에 선 사람입니다.
자기를 높이면 낮아진다는 말씀은 알아듣겠으나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는 말씀은 여전히 모호하게 들릴 겁니다. 높아진다는 말은 원래 높은 자리로 올라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낮은 자리에서만 삶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삶의 실체를 만나는 게 높아지는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낮은 자리에서만(오늘 주보 표지에 나오는 ‘맹인 거지’라는 제목의 사진에서 보듯이) 안식과 평화와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사람들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게 중요합니까?
마카리오스
둘째 이야기는 12~14절입니다. 자기를 식사 자리에 초대한 주인인 바리새인에게 예수께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가까운 이웃을 초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답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친한 사람들 ‘끼리’ 어울려서 살아가는 우리의 행태와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갚을 게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게 맞는 말인가요? 너무 이상적인 말씀은 아닌가요? 14절 말씀에 대답이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헬라어 성경으로 이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καὶ μακάριος ἔσῃ … ”(and you will be blessed) 마카리오스는 blessed, happy라는 뜻입니다. 초대한 사람들이 갚을 것이 없을 때 복이 있다는, 즉 ‘해피’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브앤테이크’(주고받기) 방식으로 삽니다. 그게 세상 이치입니다. 받았는데 갚지 않는 건 결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오히려 받으려고 하지 않는 행위에서 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지 못합니다. 이렇게 살려면 극기에 가까울 정도로 훈련해야 합니다. 아주 소수 그렇게 산 사람들을 우리가 흉내 낼 수는 있으나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불가능합니다. 노숙자가 여러분 집에 와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부랑자들을 원천 차단해주는 고급 아파트에 살면 이런 곤란한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요.
구제와 휴머니즘 활동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계없이 세상에서 상식적으로 사는 사람으로서, 또는 교양인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런 활동을 하는 단체가 세상에는 많습니다. 거기에 직간접으로 동참하는 교우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발에 비싼 향유를 쏟은 여자를 나무라면서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왔어야 한다고 어떤 제자가 말했을 때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떠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도 기억되어야 한다.’(막 14:3~9)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본문 14절에서 정작 중요한 말씀은 “의인들의 부활”에 있습니다. 의인의 부활에서 우리가 갚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보답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는다는 뜻입니다. 섭섭하신가요? 하나님에게서 받는다는 게 분명하다면 우리는 사람에게서 기대하지 않습니다. 비유적으로, 손자 손녀를 키우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손자와 손녀에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베풉니다. 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의 부활시’라는 말은 세상 종말을 가리킬까요? 개체로서 우리가 죽을 때 일어날까요? 지구가 끝나는 45억 년 후일까요? 저는 ‘의인들의 부활시’가 시간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사건 자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의인들의 부활이 바로 하나님의 갚음이라고 말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가장 높은 삶의 경지인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경험한 사람은 사람에게서 무언가 대가를 받는다는 게 얼마나 작은 일인지 깨닫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셨습니까?
의로운 사람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의로운 자가 되느냐에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 문제에 아주 민감한 민족이었습니다. 의로운 자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어도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시 1:6절은 이렇습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그들은 율법을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지혜롭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의로워졌을까요? 불행하게도 두 가지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로 바리새인처럼 실제로는 의롭지 않은데 의로운 척하니까 위선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둘째로 세리와 죄인처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책감도 심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런 데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습니까?
유대교 전통 안에서 살던 이들 중에서 일부가 전혀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위에서 설명했듯이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뚫어보았습니다. 노력할수록 삶이 무거운 짐으로 경험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게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시각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자기를 향한 시각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각으로 말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시각에서는 당시 율법 교사와 바리새인들이나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나 낮은 자리에 머문 사람이나 똑같았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율법 교사와 바리새인들보다는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까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귀를 기울이고 가까이 가는 사람이야말로 의인입니다. 그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선포하기 시작한 이가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로 인해서 당시 유대교 당국의 위선과 한계가 노출되었습니다. 그들과 투쟁하다가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예수를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로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게 부활 경험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에 갇히지 않고 살아있는 자로 나타났으니 제자들에게는 예수가 곧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로 인정하신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출발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믿음의 전통에서 살아갑니다.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삶이 복된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인정받는 삶이 복되다는 ‘삶의 역설’에 여러분은 동의가 됩니까? 거기서 주어지는 삶의 기쁨이 나이를 먹으면서 더 늘어나는 중입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까? 예수와의 관계가 더 깊어짐으로써 복된 사람들로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목사님~ 낮음과 높음을 또 이렇게 풀어주시네요. 매주 꼼꼼히 설교문을 읽고, 설교복기까지 듣고 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오늘 드디어 칼 바르트 '교의학 개요' 강독을 다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강독을 따라 저도 두 달에 걸쳐서 다 읽었네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어렵긴 했지만.... 신학적 사고와 영성의 근육을 조금은 키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명의 완성, 선취, 씨앗, 은폐성.... 바르트가 가르친 이런 용어들이 가리키는 리얼리티가, 이전보단 확실히 조금은 가깝게 다가오는 듯 합니다. 갈 길이 참 멉니다. ㅎㅎ 조금 쉬었다가, 개신교 신학 입문 강독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주 말씀 정말 은혜가 많이 되었습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