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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a7D9LIGwjP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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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한복음 18:33-38 |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8:33-38, 창조절 13주(왕국 주일), 2024년 11월 24일
예수께서는 생애 마지막에 두 번의 재판을 연달아 받으셨습니다. 먼저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받은 종교재판이고, 다음은 빌라도 법정에서 받은 사법재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대법원이라 할 산헤드린은 이 문제를 자신들이 처리하기 힘들다고 보고 빌라도 총독부에 넘깁니다. 빌라도 총독은 고발인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산헤드린 대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무슨 죄명으로 나사렛 출신 예수를 우리 로마 제국법에 고발하시는가?’ 그들은 ‘이 사람은 악을 행한 사람이라서 끌고 온 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빌라도는 다시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법으로 처리하시라.’ 이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에게는 사형을 시킬 권한이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는 사형당해야 할 중범죄자라는 뜻입니다.
빌라도의 심문
그들의 생각을 확인한 빌라도는 33절이하에서 예수를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바로 그 대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바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람이오?”라는 빌라도의 첫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판단한다는 뜻이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말을 하는 것이오.” 이어지는 빌라도의 진술을 맥락에 맞게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동족인 유대인이 아니라서 당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오. 당신들의 최고 종교 법정인 산헤드린 대표자들이 당신을 중범죄에 해당하는 피고인으로 나에게 넘겼기에 도대체 당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거요. 당신은 그들의 주장처럼 유대의 왕이 되고 싶소?’ 36절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내 나라(βασιλεία)는 이 세상(κόσμος)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두 번 반복됩니다. ‘내 나라’라고 할 때의 나라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메시지에도 나옵니다. 헬라어 ‘바실레이아’(kingdom)의 번역입니다. 보통은 나라를 공간으로 여깁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한반도에 있고, 미국과 캐나다라는 나라는 북미에 있습니다. 바실레이아는 그런 공간적인 의미라기보다는 통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다스림이 예수께서 33절에서 말씀하신 ‘내 나라’이자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예수를 통해서 현실이 된 그리스도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작동원리에 제한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남한과 북한은 적대적인 나라이기에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왕래하지 못하지만 바람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국경에 제한받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철새도 국경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바람과 철새가 한반도와 아무 상관이 없지는 않습니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그 너머를 오가면서 한반도를 풍요롭게 만듭니다. 예수의 나라는 이 세상, 그러니까 빌라도가 속한 로마 제국에 속하지는 않으나 로마 제국과 아무 상관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험적으로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으나 예수의 나라는 궁극적인 생명의 나라이기에 실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간접적으로라도 이해하려면 먼저 총독 빌라도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의 실체를 살피는 게 좋습니다.
최근에 로마의 검투사를 주제로 한 영화 <글래디에이터 2>가 개봉되었습니다. 이전에 나온 <글래디에이터>에 이어진 후속편입니다. 1편이 크게 인기를 끌어서 후속편까지 만들어진 거겠지요. 이 두 영화는 2세기 후반의 로마 제국을 역사적 배경으로 합니다. 전편과 후편 모두 주제는 비슷합니다. 로마의 오현제(五賢帝)로 불리는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을 원로원에서 왕을 선출하는 공화제로 다시 돌려놓고 싶었습니다. 그의 오른팔과 같았던 전쟁 영웅 막시무스 장군에게 그 임무를 맡깁니다. 그의 꿈은 실패했습니다. 그의 아들 콤모두스 왕자가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이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농사짓고 가정을 이루면서 소박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로마의 참된 정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전편 영화의 주인공이나 후편 영화의 주인공 모두 밀밭이 펼쳐진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로마 역사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이들에 의해서 로마 정신은 무너집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비슷하게 굴러가는 게 아닐까요?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이 되었든지 실제로는 자기의 정치, 경제적 욕망과 명예욕에 충실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있고,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애쓰다가 시련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았소.’라는 예수의 말을 들은 빌라도는 다시 예수께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 아니라는 말이오? 왕이 될 생각이 없소?’ 빌라도는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에 대한 고발장에 따르면 예수는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혁명가로 보였습니다. 당시에 세상을 바꿔보려고 세력을 규합하던 이들이 실제로 많았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순수한 열정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또는 자기의 사적인 야망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이들 혁명가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이 세상을 자기 생각대로 바꿔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게 아니라고 하니까, 즉 자기는 세상 권력에 관심이 없다고 하니까 빌라도가 뜨악했겠지요. 저 친구는 종교적 몽상가니까 그냥 내버려 둬도 로마 질서 유지에는 큰 문제가 없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왕이시다
예수께서는 ‘당신은 왕이 아니라는 말이오?’라는 빌라도의 말을 이렇게 받아치십니다. 37절입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과 ‘내가 왕이다.’라는 말씀을 종합하면 예수께서는 빌라도로 대표되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저는 예수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면 로마 제국을 짚어야 한다는 뜻으로 로마 제국의 검투사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검투사 이야기가 바로 로마 제국의 작동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검투사는 대개 전쟁 포로에서 차출됩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포로들도 자기 나라에서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동네의 평범한 이웃이었습니다. 이제 포로가 되자 매일 생존을 걱정해야 할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검투사들의 생사를 건 싸움에서 가학적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황제는 로마 시민들의 정치적인 불만을 콜로세움에서 개최한 격투사 싸움으로 무마했습니다. 로마의 지식인들과 철학자들과 장군 중에서도 로마가 이런 식으로 가면 안 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세상은 그런 사람보다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들에 의해서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 로마 제국은 나사렛 출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로마 제국을 위태롭게 할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를 처형함으로써 유대인들의 협력을 끌어낼 생각이었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로마 제국에서는 한 사람만 왕이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한 사람의 몫인 왕위를 강탈하려고 온갖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만이 왕이시기에 보이는 그 누구도 왕이 될 수 없으면서 역설적으로 모두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라면 모두 왕이 되는 겁니다. 지금 현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 자리보다도 각각 모든 사람의 삶을 중심에 놓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대통령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대통령은 그야말로 귀찮은 일을 심부름하는 사람이니까요. 가장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높은 자리를 권력과 명예로 여기니까 모든 문제가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왕이니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려고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도 생명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니까 생명을 바치는 나라에서는 예수가 바로 왕이십니다. 우리도 그런 하나님 나라를 느끼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모두 왕으로 사는 겁니다.
모두가 왕이 되는 그런 나라가 실제로 가능할까요? 혹시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모두가 왕으로 사는 나라와 그런 삶이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놀이를 합니다. 술래잡기도 좋고, 땅따먹기도 좋고, 줄넘기도 좋고, 말타기도 좋습니다. 소꿉놀이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는 모두가 왕이 되는 세상입니다. 여기서는 누가 더 높고 낮은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아이가 놀이 자체에 빠져듭니다. 술래는 술래 노릇을 하면서 놀이를 즐깁니다. 공주와 시녀 역할을 하는 소꿉놀이도 그렇습니다. 공주라고 해서 더 으스댈 거도 없고 시녀라고 해서 주눅을 들 일도 없습니다. 각자 역할만 잘하면 그 놀이는 생명 충만합니다. 우리는 왜 아이들의 놀이처럼 세상을 살지 못할까요? 왜 죽기살기식으로 싸울까요? 그래서 이겨봤자 거기서 얻는 짜릿한 승리감은 순식간에 흐지부지되고, 조금 후에 똑같이 죽고 말 텐데 말입니다.
생명의 나라
문제는 우리가 빌라도의 로마 제국 원리에만 길들어서 하나님 나라를 실감하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원리는 아주 강력하고 매력적이어서 저절로 우리를 그 세력에 지배당하게 합니다. 그런 로마 제국의 원리로 자기 삶이 완성된다고 여기면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로마 제국이 얼마나 많은 나라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는지 아실 겁니다. 적자생존과 지배 논리에 충실했던 로마 제국은 인류 역사에 많은 상처를 남기고 망했습니다. 콜로세움은 관광지는 될지 몰라도 인류 역사에서 전혀 자랑할 게 못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로마 제국과 달리 강력하거나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기에 그 나라를 실감하려면 배우고 깨닫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무릇 진리에 속한 사람은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언어의 깊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 시인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전망이 깊고 넓어지면 여러분의 인생은 왕의 삶으로 변할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βασιλεία)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눈에 들어오는 분이 있고 들어오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삶은 이상한 겁니다. 똑같은 조건인데도 어떤 사람은 삶의 기쁨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비슷한 연봉을 받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충분하다고 느끼는데 어떤 사람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최근에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휠체어 생활을 하는 어떤 유명 유튜버와 아이돌 출신 여자가 얼마 전에 결혼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여자는 앞으로 평생에 걸쳐서 남편을 돌보게 될 겁니다. 이 여자는 요즘 젊은 여자들이라면 손사래를 칠 불편한 일까지도 기쁘게 감당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돌보심을 실감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이렇게 살아있는 게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뚫어볼 수 있다면 무엇이 못마땅한 게 있으며, 감사하게 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소유는 없다는 사실을 뚫어볼 수 있다면 다른 사람처럼 부자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아쉬울 일이 있으며,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무슨 자랑할 일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생명조차도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자기를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압니다. 알아도 해결이 안 됩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삶이 비루해지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고상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로마 제국의 원리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고,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음의 사실을 붙들고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나사렛 예수를 허락하셔서 그럴듯하나 실제로는 거칠고 야만적인 세상의 원리에 종속당하지 않고, 선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 길은 예수가 왕으로 통치하시는 생명의 나라로 통합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 앞에서 크게 놀라워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도 왕처럼 대접받는다는 사실 앞에서 더 크게 놀라워할 겁니다. 믿어지시나요? 정 목사가 자기도 모르는 말을 떠드는 것처럼 들리나요? 그럴듯하기는 하나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인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분명히 당신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왕이 되고, CEO가 되고, 연봉 킹이 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인기 있는 검투사(글래디에이터)가 되는 건 세상에 속한 겁니다. 그런 일이 재미있으면 한번 시도해보십시오.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바꿀 수 있다면 박수받을 일이니까요. 그러나 그런 방식만으로 우리의 삶이 실제로 풍성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잊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그래서 그를 믿는 모두가 왕처럼 살아가는 ‘나의 나라’에서만 우리의 삶은 실제로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