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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ciIM2cjQVW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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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립보서 1:3-11 |
충만한 ‘의로움의 열매’
빌 1:3-11, 주현절 후 2주, 2024년 12월 8일
바울은 예수님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신비에 속합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교회도 등장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과장은 아닙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10권 내외가 바울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들의 행적을 다루는 사도행전은 거의 바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유럽 지역에서 최초로 세운 교회가 빌립보교회입니다. 그 이야기가 행 16장에 나옵니다. 빌립보는 그리스 북쪽 지역 데살로니가에서 오른편으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습니다. 행 16:12절에 따르면 바울 일행이 지금의 튀르키예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빌립보로 갑니다. 거기서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고급 옷감 사업가인 루디아라는 여자입니다. 이후로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에 동반자가 됩니다. 빌 4:10절 이하에 따르면 바울이 펼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에 빌립보교회가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빌 4:15, 16) 아주 각별한 관계였다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의 설교 본문 빌 1:3-11절에도 ‘너희’라는 표현이 열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8절에서 그는 자기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마치 연인에게 보내는 연서처럼 들립니다.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빌 1:13) 빌립보 교인을 향한 그리움이 더 절실했었나 봅니다. 그들을 위한 기도 내용이 9-11절에 나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한 구절씩 주석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9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ἀγάπη)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우정을 가리키는 필로스나, 예술적 열망을 가리키는 에로스가 아니라 신적인 차원의 아가페를 언급했습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사랑이 그렇게 특별하다는 뜻이겠지요. 바울은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총명을 <새번역> 성경은 통찰력으로 번역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알아야 하고, 거기서 벌어지는 사태를 깊이 통찰할 줄 알아야만 사랑은 풍성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사랑할 수 있으며, 특히 더 풍성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식과 통찰력이 없으면 종교적인 열광주의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서는 흔하게 일어납니다. 신학 무용론이 교회를 지배합니다. 절대 믿음을 강조하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따릅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쉽게 타 종교를 배척하고 성 소수자를 조롱합니다. 어느 대형교회 담임 목사는 노골적으로 진보 좌파 빨갱이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에 매달려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없고 통찰력도 없어진 겁니다. 그들의 영혼에서는 오직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다는 자신의 종교적 열망만이 작동합니다. 이런 신앙은 사랑을 풍성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축시키고 왜곡시킵니다. 배척과 혐오가 일상화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치우치지 말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0절-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바울은 이어지는 10절에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새번역> 성경은 ‘가장 좋은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이 있으면 차선으로 좋은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밑으로 조금씩 덜 좋은 것이 있고, 더 내려가면 나쁜 것이 끝없이 등장하겠지요. 우리는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손에 넣고 안간힘을 쓰지만,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똑같이 하루 24시간과 일 년 열두 달을 삽니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사람이 있고, 허투루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을 가장 좋게 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무조건 바쁘게 살았다고 해서 알차게 보내는 건 아닙니다. 평생 돈벌이에 쫓기면서 살다가 고가의 아파트 한 채를 남겼다면 그게 그의 인생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제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각자 살아가는 형편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9절에서 언급된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질 때만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풍성해진다는 말은 곧 삶의 내공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책 읽기의 내공이 깊은 사람만 좋은 책과 시시한 책을 분별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아주 중요한 또 한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빌 1:6 참조) 이르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재림 공동체입니다. 그 재림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는 절기가 지금의 대림절입니다. 교회는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세상 마지막 때 다시 오셔서 세상을 완성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분이 다시 오실 재림의 때를 기다립니다. 이런 신앙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어처구니없어할지 모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재림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부록쯤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림 신앙이 확실하다면 허리가 휠 정도로 무리하게 큰 교회당을 건축하지 않겠지요. 비유적으로 내일 핵무기가 동원되는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게 분명하다면 누가 집을 사며, 누가 결혼하며, 누가 사업을 시작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런 결정적인 순간(kairos)을 영혼에 담아두고 살기에 매 순간을 절실하게, 생명 충만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종말론적이고 메시아론적 미래일 뿐이 아니라 이미 그 미래가 선취된 ‘지금’이기도 합니다. 2천 년 전에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과 행위와 그의 운명은 이미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날에 해당합니다. 그를 통해서 구원이 이미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날을 살아가기에 이 세상의 논리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실제로 느끼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주 철저하고 완벽하게 율법적으로 작동합니다. 율법적인 작동은 일상적인 용어로 성과주의입니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낙오되는 세상이라서 복음이 제시하는 자유로운 삶을 실감하기 어려운 겁니다. 오히려 성과를 내야만 자유로운 삶이 보장된다고 믿고 삽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삶과 똑같은 성과를 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이 가리키는 능력과 자유는 우리에게서 흐릿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날까지 진실하여 허물없이 우리 각자의 삶을 풍성하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도 저는 모두에게 딱 떨어지는 대답을 여러분에게 드릴 수는 없습니다. 11절에 대한 저의 설명을 들으면 어느 정도는 방향은 잡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1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11절은 두 문장의 결합입니다. 첫 문장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충만한 ‘의로움의 열매’라는 오늘 설교 제목이 이 문장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의’라는 단어보다 더 중요한 단어도 없습니다.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의 번역입니다. 영어 righteousness에 해당합니다. 의, 정의, 의로움은 인류 역사에서도 아주 오래된 가치입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라는 책은 우리나라에서 밀리언셀러였습니다. 미국 본토보다 우리나라에서 열 배 이상 팔렸습니다.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한국 사회에 정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중요한 이유일지 모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죽했으면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무엇이 정의이고 의로움이고 공정함인지를 규정하기가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자기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따라서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유세만 해도 그렇습니다. 부자들에게 고율의 세금을 매기는 정책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정의이지만 부자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게 받아들여질 겁니다. 가난한 노인들에게 최소한 먹고살 정도로 노인 연금을 제공하자는 정책이 정의로운지 아닌지를 서로 다르게 생각합니다. 자동차 운전 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끼어들기에서 가끔 접촉 사고가 납니다. 끼어들기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옆 차가 양보해주는 게 정의이나, 끼어들기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정반대입니다. 이런 일들이 국가 차원에서 벌어지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보듯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시시비비 논란이 많은 정의와 정의로운 삶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가 보는 디카이오쉬네, 즉 정의로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그 문제를 바울은 롬 3-5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롬 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여기서 언급된 율법의 행위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의로운 행동입니다. 개인의 차이는 있으나 아무도 완전히 정의롭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저도 교통법규를 잘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지 완전하게 지키지 못합니다. 그 외의 모든 윤리 행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움(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차별 없이 미칩니다. 사람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말입니다. 롬 3:24절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구절이 칭의론의 근거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가 모두 인상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 하나님의 은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 그것입니다. 각각의 단어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무게를 오롯이 담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교리를 외면할 겁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그것이 실제로 우리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오해합니다. 그래서 아주 쉽게 ‘값싼 은혜’에 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하시니까 아무 걱정하지 않고 교회만 잘 다니면 된다고 말입니다. ‘값싼 은혜’라는 말은 히틀러의 나치즘에 저항하지 못한 당시 독일의 루터교회 신자들을 본회퍼가 비판할 때 쓴 단어입니다. 그런 특징이 한국교회에도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을 모르거나 왜곡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기대서 우리가 의로워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값싼 게 아니라 가장 값비싼 은혜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이 말하는 디카이오스쉬네는 로마 제국의 위대한 스승들도 말했던 윤리적인 차원에서 선하다, 착하다, 정의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비슷한 표현이 성경에 나오기는 하나 그것 자체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디카이오쉬네의 실질적인 의미는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는 무엇인가요? 자기에 대한 걱정과 염려입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입니다.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사람은 삶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이런 현상이 소시민들에게도 나타나고 정치 지도자에게도 나타납니다. 지난 주간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습니다. 대통령이 뜬금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서너 시간 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민에게서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으로 그분의 정상적인 인지 활동이 무너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본인 개인도 그렇고 특히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을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면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세상의 기준에 들지 못해도 풍성한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용서이고 해방입니다.
문제는 인정받는 방식에 길들어서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혁명적인 변화가 없으면, 즉 삶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없으면 죽었다 깨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난은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늘 예쁘다, 착하다, 멋지다, 최고야 하는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어떻게 삶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어떤 종교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제 우리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을 한 겁니다.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자기연민에서 벗어났다고, 의로워졌다고, 그러니 의로움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라고 말입니다. 더 자유롭고, 더 평화롭고, 더 기쁨 충만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삶이 곧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는 11절의 표현을 기억해두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상한 인격자가 되는 걸 삶의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심리치료에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 의사에게 도움을 받고, 가능한 한 좋은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아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상당한 정도로 풍요로워지는 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그런 치료와 교양을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필요 충분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인정할 수 없으면 비그리스도인으로 살거나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겠지요. 각자 자기가 선택한 인생을 사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역사적 예수를 기억하고, 생명 완성자로 다시 오실 미래의 예수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여러분과 저의 삶에는 의로움의 열매가, 즉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