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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불 세례 (눅 3:7-18)

대림절 조회 수 3414 추천 수 0 2024.12.15 22:11:42
설교보기 : https://youtu.be/vueFgHJF2JI 
성경본문 : 누가복음 3:7-18 

성령과 불 세례

3:7-18, 대림절 3, 20241215

 

 

세례 요한은 예수님 운명에서 가장 독특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직계제자가 아닌데도 네 복음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복음서가 일관되게 말하는 핵심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자세하게 보도하는 신약성경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출생을 세례 요한의 출생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각각의 출생 전승에서 천사가 등장해서 새로 태어날 아들에 관한 소식을 알립니다. 훗날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직전 이야기인 오늘 설교 본문에는 세례 요한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는 단호하면서도 충격적인 어조로 설교했습니다. 세례받으러 온 이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일갈했습니다. 3:8절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신앙의 원조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이 유대의 역사를 통해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도 예수님의 족보를 거론하는 대목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10)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이슬람교에서도 똑같이 중요한 인물로 받아들여집니다. 말하자면 유일신 종교의 문을 연 인물이 아브라함인 셈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아브라함이라는 혈통이 중요하지 않다고 외친 겁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는 대중들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을 겁니다.

 

요한의 설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대중의 질문에 세례 요한은 11-14절에서 구체적으로 세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는 여벌의 옷이 있는 사람은 옷이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먹을 게 넉넉한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요한이 말하지 않아도 베풀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자기 살기가 바빠서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으며, 세금을 내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좋은 정치인은 사람이 최소한 사람답게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꿈과 실천력이 있어야겠지요. 둘째는 세금 징수의 권한이 있는 사람은 법으로 정해진 것만 받아야 합니다. 뇌물을 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에 세금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는 뇌물을 받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로마 제국과 맺은 계약에 따라서 일정한 액수를 전달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착복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세금 징수에 관한 온갖 편법 기술을 알고 있었기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 방식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매국노라 여겼습니다. 셋째는 군인을 향한 대답입니다. 군인은 합법적인 무장이 가능한 사람들이기에 대중에게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권력으로 대중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강탈하지 말고 무고하지 말며 자기 연봉에 만족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하려는 핵심은 양심과 법에 충실한 삶입니다.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설교에 영향을 받았겠지요. 마태복음에 따르면 요한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2)이고, 예수님의 첫 메시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입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당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이신가?’(11:3) 하고 묻게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11:11, 7: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인정할 정도로 세례 요한은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따르면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그리스도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훗날 사람들은 예수를 헤롯 왕에 의해서 참수당한 세례 요한의 환생인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요한은 광야에서 극도로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에는 그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가 차고 넘쳤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내다보는 거룩한 상상력으로 충만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새로운 세상을 향한 거룩한 상상력이라는 전통은 바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오늘의 첫째 말씀인 습 3:14-20절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하라 예루살렘 딸아 진심으로 기뻐하라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부분적으로 발췌)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메시지도 선포했습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은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1:6-9) 이런 선지자 전통을 아는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선지자들이 꿈꿨던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세울 메시아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능력 많으신 이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려주는 역할만 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16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이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라고 표현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입니다. 물세례는 요한의 역할을, 성령과 불 세례는 예수의 역할을 가리킵니다. 물세례가 무엇인지는 쉽게 손에 잡힙니다. 실제 삶의 변화입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옷과 먹을거리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세리들은 뇌물을 받지 않으며, 군인은 자기 권력을 폭력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와 휴머니즘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일종의 유토피아라 할 이런 세상에서는 살맛이 날 겁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토피아(없는 세상)라는 어원에서 보듯이 그런 세상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하는 그런 나라에도 다 불평등이 있고, 비인간적인 폭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잘 사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유대주의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지금 가지 지구에서 자행하는 폭력적인 행태를 보십시오. 미국은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번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서 보듯이 국가주의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된 세상에서도 사람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물세례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요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줄 뿐이고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성령 세례와 불 세례는 같은 뜻입니다. 요한의 세례인 물세례는 행동거지가 새로워지는 것이라면 성령 세례, 즉 불 세례는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물리적 변화라고 한다면 불 세례는 화학적 변화입니다. 물은 아무리 강력해도 겉모양만 바꿀 뿐이지만 불은 형질 자체를 바꿉니다. 이를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쓴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령과 불 세례를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2장에는 최초 교회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에게서 일어난 처음 사건은 성령 충만입니다. 마가 요한의 집으로 추정되는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모임을 꾸렸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있었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2:4절이 이렇게 보도합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진 그들은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서 과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의 제자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숨어지내던 그들의 생각과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겁니다. 그들은 세상 끝까지 가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비유적으로 노숙자들이 길거리에서 노숙자의 삶이 가장 행복하다고 외치는 형국과 비슷합니다. 이들의 외침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예수의 성령 세례, 즉 불 세례는 바울의 표현처럼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그러니까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그런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과 딸이라고, 예수 안에서 삶은 무거운 멍에가 아니라 가볍다고,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라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걱정에서 벗어나라고, 하늘나라에 온전히 집중하라고, 솔로몬의 영광이 들의 백합화의 영광보다 못하다고, 삶을 축제로 여기라고, 온갖 병과 장애에서 벗어나라고, 늦게 된 자가 앞서게 될 것이라고(꼴찌도 박수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율법에 충실했던 큰아들만이 아니라 실망스럽게 살았던 둘째 아들도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하나님은 한 마리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 나서는 목자와 같다고 예수께서는 누누이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자기의 삶으로 살아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말씀하신 겁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삶의 지혜를 가르친 스승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놀라운 깨달음을 주는 스승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도 배울 점은 많습니다. 세례 요한에게서도 배울 점이 많듯이 말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이어진 그리스도교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교부와 신학자의 글을 읽으면 우리 영혼이 맑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런 여러 스승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지도자 중에 누구도 자기가 예수와 동급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이비 이단 교주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운명은 다른 스승이나 영적 지도자들의 그것과 실제로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요한은 무엇을 근거로 자기 뒤에 오실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고, 자기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걸까요?

 

부활 생명

그리스도교 신앙의 압축이라 할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말합니다. 부활 사건만이 예수께서 다른 선지자와 세례 요한과 그 외의 여러 정신적 스승들과 완전히 다른 점입니다. 아무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가끔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나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질적으로 다른 사건입니다. 그런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시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다시 죽습니다. 다시 죽을 몸으로 살아나는 걸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된 사건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11:26-27) 그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증언했습니다. 여기까지의 설명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 생명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실감하려면 생명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건강하고 화려하게 멋진 인생을 사는 것만이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부활이 뜬구름처럼 들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명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하나님과 결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결속되려면 하나님이 누군지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깊이 아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만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알고 믿어서 하나님과 결속될 때 우리는 생명을 생명답게, 즉 삶을 삶답게, 인생을 인생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의 절정이 바로 부활 생명입니다. 미래에 완성될 그 종말론적 생명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사람은 씨앗 안에 은폐된 꽃을 누리듯이 씨앗처럼 단조롭게 보이는 이 세상에서조차도 종말론적 생명을 누리는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생명을 예수 안에서 현실(reality)로 인식하고 경험했기에 순교라는 상황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이나 순교 같은 이야기는 높은 수준의 신앙 안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만 가능하지 우리처럼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 인생살이에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고 정신 차리기 힘듭니다. 잠을 이루지 못할 일도 많습니다. 적개심과 미움과 분노와 번민으로 삶의 중심을 잃을 때도 없지 않을 겁니다. 그런 문제는 제가 도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과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만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이런 방향을 잡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여러분도 잘 아는 삶의 팁을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삶에서 힘을 빼 보십시오.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야만 행복한 인생이 펼쳐진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연봉이 낮으면 낮은 대로 살고, 건강이 약하면 약한 대로 살면 됩니다. 올 한해도 멋지게 살았든지 힘들게 살았든지 순식간에 이렇게 다 갔습니다. 50억 가격이 나가는 전망 좋은 아파트에서 살았든지 1억 가격이 나가는 촌집에서 살았든지 크게 차이도 없었습니다. 5천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설교한 목사나 50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설교한 목사나 근본에서는 큰 차이가 없듯이 말입니다. 삶에서 힘을 빼면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가 눈에 들어올 겁니다. 세례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힘을 완전히 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부러워하지도 않고 자기 인생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각자의 삶에서 드러나게 하려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억지로는 되지 않습니다. 성령과 불 세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가 질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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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소유와존재

December 17, 2024
*.126.156.157

눈을 떠서 글을 읽을때는 그 글속의 하나님경험이 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세상속의 나의경험이 보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떠올랐으면 좋겠는데... 잘 안됩니다.


어제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교회를 떠난 친구와의 대화에서 이런말을 하더군요

"철학은 남을 속이지만 신학은 자기 자신을 속인다."

뼛속깊이 부활생명 세계의 깊이로 들어가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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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7, 2024
*.137.91.200

친구의 말이 재미있군요.

남을 속이는 철학과 자기를 속이는 신학은 사이비이겠고요.

남을 속이지 않으려는 지적 노력이 철학이고

자기가 속지 않으려는 영적 노력이 신학이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그 친구는 철학과 신학 경험이 별로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변죽만 울리다가 말았겠지요.

profile

[레벨:25]브니엘남

December 18, 2024
*.118.113.111

철학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니 열려 있다.

신학은

질문할 수 없는 대답이니 닫혀 있는 입틀막이다.

그러니

철학과 신학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철학이 질문하면 신학은 답을 하고

신학이 질문을 하면 철학이 답을 한다.

어디

철학과 신학만 그러할까?

모든

학문이 다 그렇다.

심지어

과학과 신학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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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18132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17896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18213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18263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19359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22006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22629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22602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2953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7990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4] 2023-11-19 18616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9121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 2023-11-07 18462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8431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8532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8605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8078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8221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8363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8544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7957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8429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7980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8324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9193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8707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9063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8319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8259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7833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6] 2023-06-25 18238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7923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8174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8182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4] 2023-05-28 18366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8880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8429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703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8110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8499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18545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19180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680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664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761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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