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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주현절 조회 수 4633 추천 수 0 2021.01.24 23:31:21
설교보기 : https://youtu.be/VnoD8MCIWS4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7:29-31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주현절 후 셋째 주일, 2021124

 

 

결혼과 성 윤리

고린도전서 7장에는 성경에 기록되기에 걸맞지 않아 보이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 7:1, 2)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바울에게 경건하게 살려면 부부 사이의 성관계를 피하는 게 좋은지, 하고 질문했고, 바울은 금욕생활이 옳은 게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뒤로 결혼과 이혼과 성 등등에 관련된 대답이 길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이어집니다.

고전 7장을 전체적으로 볼 때 바울의 성 윤리와 결혼관은 기본적으로 현실주의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을 두 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성 현실주의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성 욕망을 부정하면 위선에 떨어지거나 힘든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결혼 현실주의입니다. 결혼을 이상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33절에서 바울은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다가 주의 일을 못 한다고 짚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의 수도원을 가다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유튜브로 본 적이 있습니다. 수도사의 길은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인생의 즐거움이 차단되기에 엄두 내기가 힘듭니다. 그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수도사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자기가 좋아하던 모든 일과 가족 관계를 끊고 은둔해서 고립된 채 살아가니까 한편으로 인간적인 외로움이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에서 더 큰 삶의 기쁨을 누린다고 말입니다. 겉으로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수도사들의 삶이 힘들 거 같지만 실제로는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더 무겁습니다. 가톨릭 신부보다 개신교회 목사에게 어려움이 더 큰 것처럼 말입니다. 부부와 가족이 서로 사랑하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지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긴 합니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야지요.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삶의 힘을 가정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랑하고 인격적인 관계라고 하더라도 사람 사이에는 신경 써야 할 일이 늘 많기 마련입니다. 바울이 부부와 가족의 사랑을 몰라서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고전 7:2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매우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이런 구절을 보면 바울은 결혼을 부정적으로 보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이 결혼과 성 윤리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인 고전 7:29~31절에서 매우 특이한 문장으로 대답합니다. 결혼과 성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 전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지금 놓인 삶의 조건에 일정한 거리를 두라는 겁니다. 아내 있는 자들은 아내가 없는 자처럼 살고, 울고 싶을 정도로 큰 슬픔에 떨어진 사람은 울지 않는 자처럼 살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처럼 살고, 재산이 많은 사람은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 자처럼 살라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포함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바울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삽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행운을 만나면 하늘을 날아갈 듯이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개인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개는 일상에 집착하듯이 살아갑니다.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거리를 두라고 말합니다. 집이 있는 사람은 집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집이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처럼 살라고 말합니다. 연봉이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처럼 살고, 연봉이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처럼 살라는 겁니다. 잘난 사람은 잘나지 않은 것처럼, 못난 사람은 못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도대체 바울은 제정신으로 말하는 걸까요?

 

생명의 실체를 향하여

바울이 말하는 이런 삶은 우리가 아는 이 현실에서는 두 집단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완전한 공산주의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출가 수도사들이 사는 수도원입니다. 세상이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면 좋겠지요.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게 되니까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이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이미 20세기 후반에 실패한 이데올로기로 판명이 났고, 수도원 공동체는 세속 사회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체제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방향성마저 우리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속적인 세상에서 이런 방향성을 구현하려면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사회적인 관점으로 복지 제도의 확장입니다.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사람이라면, 물론 가능한 대로 외국인 노동자들도 포함되어야 하지만, 최소한 의식주 문제에서 어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약간 넓은 집에 살거나 좁은 집에 살 수는 있으나 주거문제로 고통받는 사람은 없어야겠지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완전한 복지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복지 제도의 확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더 중요한 두 번째 관점은 개인이 삶의 중심이나 본질에 천착할 수 있는 내공을 키우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이것이 앞의 관점보다 더 중요합니다. 삶의 중심이라는 표현은 삶의 껍질이라는 표현과 대비됩니다. 우리가 어디서 진짜 살아있다는 경험을 하는가, 하는 질문이 이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모두 이런 생명 충만한 인생을 목표로 합니다. 이를 위해서 돈도 벌고 집도 장만하고 자녀 교육에도 힘을 쏟습니다. 수도원 공동체에 들어간 사람들은 바로 그 생명 충만 경험을 목표로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는 수행의 길을 갑니다. 그들의 일상은 기도와 노동으로 압축됩니다. 돈과 명예와 가족은 포기합니다. 작은 것은 잃고 대신 큰 것을 얻으려는 노력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어떻게 생명 충만을 경험합니까? 생명 충만감이라는 게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걱정과 근심에 찌들게 되면 인생은 늘 그러려니 합니다. 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으나 소리의 세계를 모르는 청각 장애인처럼 말입니다. 생명 충만감은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주어집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가장 일상적인 예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택배 기사가 있다고 합시다. 몸이 망가져도 수입을 늘려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일한다면 요즘 우리가 아는 모든 사회적인 문제를 당하게 될 겁니다. 생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택배 작업 자체가 생명 충만에 들어가는 기도이자 노동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물품을 분류하고, 들어서 나르고, 주인에게 배달합니다. 속으로 주인에게 많은 이들의 땀이 배어 있는 소중한 물품이니 잘 사용하세요.”라고 인사할 수 있습니다. 그 물품을 만든 사람과 받을 사람을 연결해주는 택배 기사의 역할이 고귀해지는 순간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지 않고 물품을 나를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는 사실은 복된 일입니다. 철저하게 돈으로 인간이 평가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연 그런 태도로 일하는 택배 기사가 몇 명이나 되느냐, 당신 주장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신앙보다 더 비현실적인 게 어디 있습니까. 뭐하러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예배드리고, 땀 흘려 번 돈을 헌금으로 드립니까?

 

지나가는 세상

저의 설교에 공감하지 못하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바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일 수 있겠지요. 그는 오늘 본문 마지막 31절에서 정말 놀라운 발언을 합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세상의 외형은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토 스케마 투 코스무의 번역입니다. 스케마는 헬-영 사전에 outward form, present form, nature로 나옵니다. 루터는 “das Wesen dieser Welt”로 번역했습니다. KJV 성경은 the fashion of this world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 스케마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외형을 가리킵니다. 그 외형이 지나간다는 바울의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눈앞에서 실증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포함한 우주 전체는 늘 그렇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우주는 천문학적인 속도로 팽창하는 중입니다. 무한하게 팽창할지 일정한 시점에 다시 빅뱅의 한 점으로 축소될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포함하여 지금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도 지나갑니다. 우리 개인도 지나갑니다. 여러분도 지나가고 저도 지나갑니다. 아내도 지나가고 남편도 지나갑니다. 우리가 소유하거나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물과 사람은 지나갑니다. 이렇게 지나간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현상입니다.

며칠 전에 낯선 전화번호로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분과 통화까지 했습니다. 그분은 유튜브를 통해서 저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옛날 장교로 근무하던 부대의 군목이 바로 저라는 사실을 알고 전화번호를 수소문해서 연락을 취했다고 합니다. 1980년 제가 처음으로 군목으로 입대하여 배치된 부대는 8사단 포병연대였습니다. 철원입니다. 당시가 그림처럼 떠올랐습니다. 오토바이 한 대를 끌고 여러 곳에 흩어진 대대 병사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특강도 했습니다. 그분 하는 말이 당시에 제가 부대 교회에 나오라고 말했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의정부 어느 교회 장로라고 합니다. 유튜브로 저를 보니 머리 색깔만 달라졌지 옛날 그대로라고 합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외형은 다 지나갑니다. 지난 40년 동안 저의 인생살이에서 많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마저 다 지나갔고, 이 순간도 지나갑니다. 가끔 아내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많이 늙었다고 말입니다. 100세 넘은 어느 철학자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서로 나누면서 위로받았습니다. 오래 살고 보니 인생은 65세부터 80세까지가 절정이라고 말입니다. 절정이라 하더라도 다 지나갑니다.

문제는 바울의 가르침처럼 거리를 두고 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젊었을 때만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힘을 주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자기를 성취해보려는 열정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이런 문제는 크게 욕심내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지, 다짐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책 읽기와 명상을 통한 마음공부가 도움이 될 겁니다. 어느 정도 삶의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부로 바울이 말하는 수준의 삶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생명 완성의 때

바울의 말에 귀를 더 기울여보십시오. 그는 오늘 본문을 언급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 사실이 고전 7장 전체의 토대가 되는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29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바울이 말하는 그때는 세상 종말이 오기 전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 기간이 단축되었다는 말은 세상이 완성될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완성될 그때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세상일에 몰입해서 정신없이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 생명 완성을 가리켜서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활의 절대적인 생명에 대해서 예수님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이라서 공관복음이 각각 다 전합니다. 12:25절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2:30, 20:35 참조)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사건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런 절대 생명이 발현될 때에는 우리의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결혼과 자녀 낳기도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체제와 이념과 문명도 개입될 수 없는 절대적인 생명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우리의 현실과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일까요?

그렇다면 죽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사람에게는 결혼이 무의미합니다. 그 죽음의 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옵니다. 시간이 단축되고 있습니다. 결혼과 출산 문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바울은 결혼한 남자들에게 금욕생활이 좋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스토아 철학의 주장처럼 일상에 대한 무관심(apathy)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막의 교부들이나 수도승들처럼 특별히 종교 훈련에 나선 이들 외에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세상의 일상적인 삶을 등한히 여겨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유유자적 고고하게 살지 않고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저잣거리에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다만 일상의 삶을 걱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고 더 절대적인 생명인 부활의 때가, 즉 죽음의 순간이 온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외형 문제는 앞에서 짚었듯이 쉽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우리 기독교인들만 아는 하나님의 감춰진 비밀입니다. 바울은 그 비밀을 알았기에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우는 자들은 있는 울지 않는 자 같이 살라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저의 인생도 짧아지고 있습니다. 제 삶이 완성될 순간이 가까이 온다는 뜻이니, 이제부터라도 더욱더 정신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생명에 더 가까이 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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