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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시 1:1~6)

부활절 조회 수 4755 추천 수 0 2021.05.16 19:19:42
설교보기 : https://youtu.be/2WzRyGS0Ezc 
성경본문 : 시편 1:1~6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1:1~6,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21516

 

 

전체가 150편으로 구성된 시편의 시작에 해당하는 1편은 그 길이가 6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1~3절은 복이 있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고, 4~5절은 악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6절은 결론인데, 시편 전체의 압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대칭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의인의 인생은 잘되고, 악인의 인생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겠으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히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적인 독단으로 들릴 겁니다. 시편 1편은 과연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의 왜곡된 독단일까요?

 

복이 임하기를

1:1절은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의 원어인 히브리어 아스레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복이 있기를 바란다.”라는 기원입니다. 5:3절의 헬라어 마카리오이와 똑같은 뜻의 단어입니다. KJV은 시 1:1절의 아스레와 마 5:3절의 마카리오이를 똑같이 blessed(are)로 번역했습니다. 복이 임하게 될 사람의 특징이 1절에는 부정문으로, 2절에는 긍정문으로 나옵니다. 부정문으로는 세 가지가 언급되었습니다. 1)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2)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 3)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여기서 악인들은(레사임-רְשָׁ֫עִ֥ים, ungodly)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며, 죄인들은(핫타임-חַ֭טָּאִים, sinful) 실제로 죄를 범한 이들이고, 오만한 자들은(레심-לֵ֝צִ֗ים, scornful) 다른 이들을 조롱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인생길을 함께 가지 않는 사람에게 복이 내리기를 바란다는 게 시편 기자의 생각입니다.

1절에 열거된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 중에서 가장 나쁜 이는 오만한 자입니다. 악인과 죄인의 잘못은 인간적인 실수라고 한다면, 오만한 자의 잘못은 자기를 심판자의 자리로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인과 죄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오만한 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서 그 위험성이 더 큽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도 죄의 본질을 교만(휘브리스)이라고 규정합니다. 교만은 자기 사랑이고, 자기 연민이자 자기 집중입니다. 교만은 살아가면서 행하는 단순한 시행착오가 아니라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삶의 태도이기에 다른 사람을 종종 조롱하고 무시하고 혐오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논쟁하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나 정치 영역에서도 비판할 대상이 있으면 비판해야겠지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비판과 조롱은 다릅니다. 대한민국 사회에는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조롱이 너무 많습니다. 이 문제는 진보냐, 보수냐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지금 전직 대통령 두 사람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업의 대표가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분들의 위법에 관해서는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분들을 비판할 수는 있으나 조롱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조롱하는 사람이 그분들보다 더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잘못을 종종 저질렀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기에 정당하고 필요한 비판인지, 아니면 조롱하면서 자기를 높이려는 것인지를 저 자신에게 계속해서 묻습니다.

남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교만한 삶의 태도가 가장 큰 잘못인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기독교인에게 일어나는 오류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세상 만물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내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우주론적 차원에서 유일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과 생명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범적인 사람만이 아니라 잘못이 많은 사람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둘도 없는 자녀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복이 내릴 사람의 특징을 본문 시편 기자는 1절에서 무엇무엇을 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2절에서 무엇무엇을 해야 하는지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1절의 부정문과 2절의 긍정문이 깊이 연관됩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면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 힘으로 충만해야만 합니다. 시편 기자에게 그 어떤 힘은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율법주의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면 율법주의자가 되지만, 율법의 근본을 구도 정진의 태도로 따르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 됩니다.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그의 삶을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

여기까지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3절입니다. 복이 내릴 의인의 인생살이가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실제로는 받아들이기는 힘듭니다. 일단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이 문장은 한 마디로 만사형통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서로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첫째, 어떤 사람은 이 말씀 그대로 자기 인생이 잘 풀렸다고 여기면서 흡족합니다. 둘째, 인생이 잘 안 풀린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합니다. 셋째,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인생살이는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삶이 다르기에 어느 쪽의 생각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시편 기자가 말하는 만사형통이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준과 다르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 다른 기준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여기서 핵심입니다. 그 다른 기준을 오늘 본문 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시편 1편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매우 과격하게 들리거나 상투적으로 들리는 문장입니다. ‘인정한다.’라는 우리말은 히브리어 요우데아’(יוֹדֵ֣עַ)의 번역입니다. KJV 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know’로 영역했고, 루터 성경도 ‘kennen’으로 번역했습니다. 둘 다 안다.’라는 뜻입니다. 만사형통은 모든 인생살이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잘 풀린다는 통속적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사람의 인생살이를 깊이 안다는 의미입니다. 안다는 말에는 책임진다는, 또는 인정한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인정한다거나 인정받는다는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인생살이는 인정 투쟁의 과정일지 모릅니다. 인정 투쟁 개념은 철학과 교육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슈입니다. 상대방에게 주체적인 인간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발달과정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인정받는다거나 학생이 교사에게 인정받아야만 자기에 대한 주체의식이 확실해집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인정 욕구가 트집 잡기로 떨어집니다. 어릴 때는 종종 부모나 교사에게 인정받으려고 말썽을 피우듯이 말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방식으로 인정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본문은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말합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거나 존경받는 일은 손에 잡히지만, 하나님에게서 인정받는다는 말은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날 주일(59)의 설교(예수 사랑 안에!)에서 탕자의 비유를 예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환대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받는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창조 능력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받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려고 몇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거기서 두 가지만 오늘 조금 더 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창조주이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신다는 말씀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걷기입니다. 인간만이 두 발로 걷을 수 있습니다. 손이 자유로워졌고, 뇌 용량이 늘어났고, 성대가 발달하여 언어가 생겼습니다. 걸으면서 우리는 지구의 중력을 적당하게 느끼고, 머리를 들고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2019년도에 저는 여러 번에 걸친 통풍 발작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때 절실하게 깨달은 교훈은 두 발로 걷는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다 느끼면서 살고 계실 겁니다. 저는 요즘 마당에서 일하거나 테니스장에서 뛰면서 걷는 행위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동물들도 걷거나 뛰지만 걷는 행위의 존재론적 깊이를 느끼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자연의 본성에만 충실한 동물과 달리 스포츠나 춤이나 패션쇼에서 보듯이 걷는 행위를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됩니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인식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죽음 인식도 인간에게만 허락된 일입니다.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자유로워집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지고, 다른 사람에게서도 자유로워집니다. 우리의 일상을 훼손하는 이유의 하나는 남의 인생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부러워하고 불만스러워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모두가 거의 동시적으로 죽는 마당에 부러워한다는 게 무슨 타당성과 의미가 있겠습니까. 너무 극단적인 말씀으로 들리시나요?

 

악인들의 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과 달리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라고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너무 노골적인 표현이라서 찜찜할 정도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악인이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떵떵거리면서 살기도 합니다. 악인들의 길이 망한다는 말은 그들의 인생이 망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지 못하는 게 바로 본문이 말하는 망함의 본질입니다.

설교자도 망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설교자가 망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침묵입니다. 세련된 종교 언어를 쏟아내도 그 안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청중들은 눈치채지 못해도 설교자 자신은 압니다. 자신이 말씀에서 소외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청중들에게 잘 보이는 일에만 점점 더 많은 신경을 씁니다. 악순환입니다. 사람들만 쳐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멀어지니 당연히 사람의 인기에 목을 매게 됩니다. 이게 바로 망하는 겁니다. 악한 설교자의 운명입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은 악인의 삶을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들은 삶의 중심이 잡히지 않아서 좌고우면하고 일희일비하면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죽음의 심판 앞에서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아서 율법을 즐거워하는 의인들의 모임에 가고 싶은 생각이 아예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인정하는 의인의 길을 가라고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그게 바로 생명을 얻는 길, 즉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칭의 문제

시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의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바울은 롬 5: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시편 1편이 말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잃게 만드는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것입니다. 의롭다고 인정받았으니 그 사람은 이제 하나님과의 평화를, 즉 생명과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자유롭습니다. 안식을 누립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실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단도직입으로 말해서,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지 실제로는 믿지 않고, 믿지 못합니다. 믿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는 의로워졌다는 느낌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하거나, 영적으로 게으른 겁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오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가장 큰 관심은 부동산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돈입니다.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다는 소문이 많아서 마음이 뒤숭숭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이제 부동산 문제나 돈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지거나 거꾸로 실연을 당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도 역시 부동산과 돈벌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시인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부동산과 돈벌이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어떤 의사가 환자들을 고치는 일에만 열정을 보이게 되었다거나, 어떤 교사가 가르치는 일에서만 자신의 존재의미를 느끼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에게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영혼을 갉아먹는 부동산과 돈은 결정적인 관심 사항이 아닙니다. 세상일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면 여기서 무슨 말을 보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는 지금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겁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실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다 알듯이 우리 인생은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닙니다. 많은 일에 신경을 쓸 만큼 우리 인생이 길지도 않습니다. 남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행복한 조건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게 복이 있는 인생이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행복해도 한순간이고, 불행해도 한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입니다. 바로 그 의인의 길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의 길을 우리 모두 함께 꿋꿋하게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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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May 17, 2021
*.229.148.165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창조능력으로의 초대가 하나님의 사랑이요 구원이다'
금주에는 '걷는것의 존재론적인 깊이에 눈 뜨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능력 경험이요 구원경험이다' 하셨군요

도식적인 기존의 구원론과는 완연히 결이 다른 목사님의 구원론 앞에서, 평소에도 중력이나 걷는것, 계단 오르내리기의 신비등에 대해 자주 언급하신 터이기에 자연스레 다가왔습니다

살아있음, 존재의 신비!
그중에서도 걷는다는 것의 존재론적인 깊이에 더 주목해야겠구나...하는 도전을 받습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청춘을 젊은이들에게 맡기는 것은 낭비다!'
청춘의 가치를 모르고 사니까요
그처럼 '칭의를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는 것은 낭비다'
하는 주장이 나올법도 합니다

오늘 나의 전 존재가 그 분께 받아들여졌다는 이 존재론적인 깊이에 도무지 무지한채, 오늘도 여전히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심지어 믿음까지 동원하는 우리에게, 그 분의 창조능력 경험이나 구원경험, 존재론적인 깊이에의 영적 각성이 가능하기나 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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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8, 2021
*.182.156.93

와, '칭의를 ... 낭비다.'라는 문장이

종교 마켓처럼 돌아가는 한국교회의 속살을,

또는 치부를 여지없이 드러내는군요.

오늘만이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이 복음답게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는 일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서 

그 복음의 역사를 이어가는 게 아닐는지요.

부스러기 님은 이제 복음 설교자로 살아도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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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May 18, 2021
*.118.117.182

설교자가 망하(지 않)는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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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8, 2021
*.182.156.93

짚어주신 그 문장이 좀 애매하군요. 정리해놓겠습니다.

profile

[레벨:11]갈매나무

May 21, 2021
*.250.255.108

안녕하세요? 밴쿠버에 온 지 석달이 지났습니다. 이 곳에서 하는 일 없이 지내면서 틈틈이 시편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정을 받는 이와 인정투쟁에 매달려 살아가는 이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것 같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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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1, 2021
*.182.156.93

와, 류 집사님, 반갑습니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지요?

세달쯤 되면 그곳에 적응이 되면서 불편한 일도 눈에 들어올 겁니다. ㅎㅎ

국문학을 가르치는 분이 시편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군요.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궁극의 세계로 구도정진 들어가봅시다.

모든 가족 다 건강하고 재미있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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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May 21, 2021
*.118.117.182

시편 1편을 시편 73편과 연관하여 묵상해 보았습니다. 항상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기도이다. 거기서 아삽은 악인들이 잘 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시편 작가의 고난과 당혹감을 기록하고 있다. 시편 1편 3, 4절은 율법 준수자들이 잘 되고 악인들이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시편 73편에서 시편 작가는 자신은 고난받는데(시 73:13-14) 악인들은 잘되고 편안하며 재물이 쌓여만 가는 것(시 73:12)에 당황하여(시 73:16) 자칫 실족할 뻔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라고 말한다. 시편 작가는 악인들이 잘 되는 것에 관해서 느꼈던 당혹감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의 성소 안에서 얻었다. 구약의 하나님의 성소를 지금 우리의 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악인들의 상황에 대한 또 다른 관점 곧 특별한 인식을 우리의 영 안에서 신성한 계시를 받아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다.

시편 73편의 작가는 하나님의 성소, 즉 영 안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떠나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그의 몫으로 삼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하나님을 관심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을 얻고 모든 일에서 잘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관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제한하시며 심지어 많은 것들을 벗겨 내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욥에게 일어났던 일이고(욥 1:6-2:10) 사도 바울에게 일어났던 일이다(빌 3:7-8).

추구하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고 그분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누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시려는 데 있다. 이것은 시편 1편에서 말하는 율법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고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며 하나님을 얻고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삼아 의인의 길을 가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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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1, 2021
*.182.156.93

늘 공부, 공부에 매진하는 브니엘남 님의 그 거룩한 열정을 

누가 흉내내며 누가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시 1편과 73편을 연결한 묵상이 창조적인 사유의 무게로 다가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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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582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699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256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42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19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29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370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20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464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380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697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07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55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282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59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1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48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47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5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9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07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5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48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39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7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7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0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2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29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25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4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4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1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5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7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4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4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7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9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6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0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3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4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4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2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59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9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4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0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3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4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6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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