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무엇을 기다리는가?

기타 조회 수 19795 추천 수 97 2004.06.14 21:43:04
성경본문 : 시편 70:1-5 
무엇을 기다리는가?      

시편70:1-5



     구약의 시편은 가장 엄선된 단어를 통해서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하나님에게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할 말씀입니다. 물론 다른 성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시편은 시(詩)라는 고유한 특색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도 소설보다는 시 읽기가 훨씬 어렵다는 사실과 비슷합니다. 물론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매우 모호한 표현이기는 합니다. 시 읽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그걸 읽어낼만한 삶의 깊이가 없다는 말이 맞겠지요. 어떤 점에서 시 읽기는 삶 읽기와 격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하이덱거가 훨더린의 시에 대해서 해설한 책을 읽어보십시오.). 그렇지만 좋은 시를 이해했을 때는 소설이나 수필에 비해서 훨씬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지 오늘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어느 시인이 쓴 시를 우리에게 열려지는 것만큼 들여다 볼 생각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는 말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시편에는 이런 형식의 기도와 호소가 흔합니다. 69편의 시도 역시 그렇게 호소하고 있으며, 약간 형식을 달리 하지만 여러 곳에 이런 도움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이 사람의 처지가 매우 어렵다는 말인데, 그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2절 말씀을 통해서 대충 그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1) 내 영혼을 찾는 자: 이 시인의 가장 진실하고 가장 깊은 정신적 세계를 위협하고 있던 사람이 주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물질적인 손해를 끼치거나 말다툼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궁극적 존재 근거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나 사상이 그를 둘러 싸고 있었습니다.
     2)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 자기가 파멸되는 것을 기뻐하는 자가 자기 주변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이런 게 바로 인간 세상이기도 합니다.  
     3) 아하, 아하, 하는 자: 약간 표현을 달리한 것입니다만 이 시인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사람들은 앞의 사람들과 같은 종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옆에서 남의 불행을 그럴듯한 말로 합리화 하고 단정해버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자기가 별 수 있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던 이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서 "나를 건지소서. 나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별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 에게는 이런 시편기자의 위기나 불안이 없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오히려 친구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즐거운 일이 넘쳐날 수도 있습니다. 온통 우리의 주변이 먹고 마시고 노는, 즐거운 일들이 깔려 있는 마당에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기껏해야 장사가 잘 안 된다거나 자식들이 말썽을 피운다거나, 사랑의 배신을 당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어떤 절대적인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흡사 왕의 초청을 받았지만 소를 사거나 밭을 사거나 결혼 문제 때문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처럼(눅14장)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그 어떤 구체적인 시련과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사해야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런 조건들의 이면에 놓여 있는 더 근본적인 궁핍과 불안과 무상성을, 그런 위기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냥 모르고 살 뿐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일 죽을지 모르니까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사도 바울도 그런 징후를 2천년 전에 보았습니다(고전15:32). 왜 그렇게 살까요?
     우리는 오늘의 이런 복지 사회, 그런 국가, 공부, 직장, 가정생활과 같은 일들이 잘되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들도 기껏해야 복지 향상이라는 눈높이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이런 요소들이 바로 우리의 원수가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찾는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고 단지 피조적인 것을 의지하게 만드는 세력이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살자는 환상이, "부자 되세요."라는 유혹이 우리로 하여금 "나를 건지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악한 힘이 아닐까요?
     정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나를 건지소서. 나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는 일이며, 그런 절박한 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게 그냥은 되지 않습니다. 절박한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에 숨어 들어온 무감각과 무의미를 눈여겨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게 자기의 영혼을 찾는 자가,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가, 아하, 하는 자가 무안을 당하며 물러가게 해 달라도 기도합니다(2후). 아마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악한 세력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겠지요. 이것은 당연한 기도입니다. 그 누가 자기의 시련을 달게 받으려고 할 것이며, 그것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누가, 또는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찾는 자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소꿉놀이를 하면서 정작 필요한 가족과의 대화나 독서를 게을리 하는 어린 아이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능한대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에 서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것 자체가 우리의 원수는 아닐까요? 사실 종교생활은 우리에게서 제거해야할 악한 세력이 무엇인지 아주 예민하게 통찰하고 구별할 수 있는 영적 혜안의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사는 것은 그 반대라는 게 비극입니다. 영적인 세계가 무뎌지고 일상성에만 매달려 사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세계를 무뎌지게 만드는 요소가 무언인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그렇게 견디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그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더 근본적으로 "주를 인하여 기뻐한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었습니다(4). 도대체가 지금 온갖 어려움과 원수들로 인해서 정신 차릴 수 없는 상태인데, 기뻐한다는 말이 타당한 합니까? 이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사람은 인생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의 핵심인지 정수를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 주변에 많은 문제들과 원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이런 현안에만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렸습니다. 기쁨의 근원을 찾았습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데에 인생의 해답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언제 어디서도 문제가 없을 수 없으며, 또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또 다시 힘든 문제들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의 뜻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만 있다면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신비입니다. 이런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시련을 진정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생명의 신비와 능력을 안다는 말인데, 우리는 지금 대개 그것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그냥 무언가를 무작정 할 뿐이지 무엇 때문에 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삶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 어떤 집을 살 것인가, 자식들 교육은 어떻게 시킬 것인가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늙고 죽겠지요. 예컨대 자녀교육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생동안 자식 교육에만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삶 자체를 생각하면서 살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 곁길로 나가는 말이지만, 독일의 경우에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교육문제는 국가에서 완전히 책임을 집니다. 제가 경험한바로는 자식 교육 때문에 고민하는 독일 부모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아이의 능력에 따라서 국가에서 모든 것을 떠맡습니다. 물론 부모들이 세금을 많이 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생사를 걸듯 자식 교육에 매달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사회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냥 사는 것과 삶 자체를 생각하며 사는 것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돈 벌고 학교 다니고 취미 생활하는 것은 삶의 수단이고 과정일 뿐이고 생명은 그런 과정 안에 깃들어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돈을 적게 벌어도 행복할 수 있고, 반대로 많이 벌어도 불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돈은 수단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심지어는 돈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육체도 역시 그렇습니다. 장애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그 형편을 받아들이고 삶 자체에 집중할 수 있으면 그는 얼마든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장자는 그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가난해도 좋고, 장애자가 되거나 중병에 걸려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것, 혹은 삶의 좋은 조건들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절대조건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 분 말고는 이 세상에 광대한 분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질 때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늘 우리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시련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의 기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5). 얼마나 간절한 기도인가요? 얼마나 신앙적인 기도인가요? 이 시편 기자는 그저 자기의 힘든 인생을 활짝 펼칠 날만 기다리는 마음으로 원수를 물리쳐 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는 그것보다 기쁨에 대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광대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지체치 말라고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기도는 구약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실상 신약의 기도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16:22). 그 날을 기다리는 신앙적인 기도입니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심정으로 구약을 읽습니다. 이 땅에서의 복지 국가를 최종 목표로 삼는 게 아니라 그것과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런 자세로 기도를 드리며, 성서를 읽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다림이 아니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참된 구원이 임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profile

profile

[레벨:13]토토

April 25, 2007
*.158.127.102

오늘 집으로 걸어오는데 길가에 핀 민들레들이 절 위해 피어준것 같아서 어찌나 고맙던지요
profile

[레벨:1]niger

October 09, 2010
*.128.56.33

할렐루야! 오늘 처음으로 이 싸이트에 와서 시편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현재 시편 연속 설교를 하고 있는데 너무 편협하게 설교를 하는 것 같아 고심을 했었습니다.



profile

[레벨:13]진인택

October 01, 2011
*.220.104.49

고난을 벗어나면서 안락을 찾을 때 하나님을 경시합니다.

안락을 잃고나서 고난의 한가운데 서면 하나님을 중시합니다.

늘 이런 나를 가꾸려는 시도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런 나의 모든 행동에 일침을 놓는 말씀들을 읽고 있노라면 아, 지금 시대에도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 살아계셔서

주님의 말씀을 잊을 만하면 주시는구나.

오늘 말씀들이 그냥 인터넷의 html문구가 아니라 길이요, 깨우침의 일설임이 깊게 느껴집니다.

내가 가끔씩 생각합니다. 사무실 책상에서 만약에 가장 중요한것은?

집에서, 나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것은 ?

하나님을 알기전엔 가장 중요한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압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창조주의 귀한 생명들중의 하나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것이 가장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61
148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748
147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11342
146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11356
145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310
144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441
143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689
142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478
141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546
140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14012
139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600
138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1788
137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6886
136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11442
135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11247
134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556
133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4783
132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787
13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251
130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10953
129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166
128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434
12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418
126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8946
125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11455
124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362
123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296
122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634
121 기타 평화의 은총, 6월26일 [1] 2005-06-26 11050
120 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2] 2005-06-20 11177
119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1924
118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678
117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602
116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068
115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637
114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166
113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290
112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430
111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70
110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640
109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9925
108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8761
107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8834
106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053
105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184
104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8921
103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8921
102 기타 자유의 길, 분열의 길, 2월13일 2005-02-13 8387
101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032
100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0969
99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499
98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2921
9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357
96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549
95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520
94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2
93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800
92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047
9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332
90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8928
89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268
88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127
87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188
8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545
85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1
84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125
83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185
82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125
8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4
80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8989
79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328
78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323
77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10
76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630
75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758
74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420
73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177
72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544
71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455
70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172
69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329
68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286
67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572
66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432
65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648
64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837
63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268
62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3
61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394
6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7
59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1978
58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9
5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3
56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291
55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059
54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676
53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183
52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784
51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468
50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25
49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214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