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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행 3:12~19)

부활절 조회 수 5547 추천 수 0 2021.04.18 16:46:23
설교보기 : https://youtu.be/KnDC-aTdgLw 
성경본문 : 사도행전 3:12~19 

회개

3:12~19, 부활절 셋째 주일, 2021418

 

 

예루살렘의 베드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자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향했던 그들의 꿈이 박살 났으니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당시에 그들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예수님에게 속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이비 교주를 따라서 세상에서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 이들이 나중에 교주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 느꼈을 감정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운명에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두려워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 뒤로 그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회 초창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제자는 베드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설교의 성경 본문인 행 3:12~19절은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 근처인 솔로몬 행각에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선포한 설교 내용입니다. 설교하기 전에 먼저 어떤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베드로가 고친 사건입니다. 그가 장애인에게 한 말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부르는 어린이 찬송가에도 나올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장애인이 깨끗하게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당연히 놀라워했습니다. 베드로에게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럴 만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일들에 열광합니다. 모든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줄 정치인과 과학자와 사업가를 기대합니다. 본인이 그런 역할을 할 것처럼 나서기도 합니다. ‘대박이라는 신조어에 대중들의 이런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로 우쭐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고 묻습니다. 장애인이 나은 근거는 당신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배척당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9절이 베드로가 전하고 싶은 설교의 핵심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 교회의 중심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신앙은 오늘 우리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회개하라.”(μετανοήσατε)라는 단어는 교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나 찬송가에 종종 나옵니다. 기도를 드릴 때도 회개가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중에 드린 사죄기도도 회개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도 회개가 따라옵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길을 가다가 표지판을 보고 잘못된 방향을 바꾸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회개하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돌이키라고 말했습니다.

 

인식의 동굴

회개와 돌이키는 일은 어렵습니다. 이유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말이 현대인에게 꺼림칙하게 들린다면 삶의 뒤틀린 방향이라고 바꿔도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잘못이기는 하나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합니다. 물론 부도덕하거나 파렴치한 행동을 옳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대다수가 선택한 삶의 길이라면 그게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설교에서도 한 이야기지만 이 대목에 어울리는 이야기라서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플라톤은 국가론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와 현실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대대로 죄수들이 동굴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동굴의 현실이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리 중의 하나가 동굴 밖을 나가서 빛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와서 동료들에게 동굴 밖 빛의 세계를 말했으나 미치광이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플라톤 시대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나 인식의 동굴 안에서 갇히면 그게 왜 잘못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주민 역시 회개하라는 베드로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자신들은 크게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짚은 예루살렘 주민의 잘못이 무엇인지 먼저 들어보십시오. 오늘 설교 성경 본문 13b~15a절입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예수님이 유대 산헤드린에 의해서 고발당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때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고를 당한다고 생각하여 풀어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죄인을 사면해 줄 수 있는 유월절 풍습에 따라서 빌라도는 흉악한 죄수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선택하라고 제안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회유 받은 예루살렘 주민들은 빌라도의 예상과 달리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유대교 권력자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선택은 크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신성 모독자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안식일을 상대화했습니다. 당대의 신학자인 서기관과 유대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을 위선자라고 비판했습니다. 비슷한 메시지를 선포했던 세례 요한은 제사장 출신이니 인정해줄 만했으나 예수는 변방 나사렛 목수 가문에 속한 자라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같은 민족인 유대인 예수를 이방인인 로마 법정에 넘기면서도 그들은 떳떳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선고 사건에서 유대교 권력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복음서와 사도신경이 약간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복음서는 유대인들의 책임을, 사도신경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제 생각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서 어느 쪽의 책임이 더 크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은 바로 우리를 대표합니다. 우리 모두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살인자를 선택하는 죄와 결탁해 있다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에 마녀사냥처럼 억울한 죽음이 반복해서 일어났다는 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겼던 예루살렘 주민처럼 오늘 우리도 그것이 왜 잘못된 판단인지를 모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한민국 기독교인 중에서 상당히 많은 이들이, 주로 대형교회 지도자들에게 교육받은 이들인데, 차별 금지법을 대놓고 반대합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신념에 근거하여 동성애와 타종교와 좌파를 혐오합니다. 혐오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전후 사정을 알아서가 아니라 목사가 반대 청원서에 서명하라고 하니까 따라서 서명합니다.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해서 모두 옳은 건 아닙니다. 큰 방향이 잘못되면 작은 일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에게 세련되어 보이는 교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활 신앙

베드로의 회개 설교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책임을 추궁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변호해줍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여서”(17) 예수를 거부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이런 일을 다시 행할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잘못을 뉘우쳐봐야 근본적인 해결은 못 됩니다. 예루살렘 주민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라 사람은 원래 십자가에 처형시킬 대상을 찾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아놓고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합니다. 언론도 여기에 부화뇌동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회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일하십니다.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십니다. 장애인의 책임이 누구냐를 따지지 않고 장애인을 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 구원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게 바로 회개입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인지 대답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일렀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11:5)

 

여기에 열거된 이들은 모두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모든 장애인과 환자를 고치지는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몇몇 사건들이 복음서에 보도되었을 뿐입니다. 이 보도에서 핵심은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침을 받은 장애인처럼 말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고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방향 전환입니다. 혐오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무시가 아니라 존경입니다. 그런 일이 바로 메시야, 즉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생명으로의 방향 전환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범주에서 몇 가지를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기후변화라는 위기 가운데서 지구 생태 환경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거나 옆에서 연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남북분단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분단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반생명적인 현상을 오늘날 우리가 몸으로 겪고 있지 않습니까. 남북 군사 대립에 쏟는 에너지를 청소년 교육으로 돌린다면 한반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십시오. 이런 일들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 중에는 개별적으로 이런 운동에 참여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에 머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휴머니즘에 속하는 그런 일들은 우리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하지만, 기독교인에게는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붙들어야 할 생명 지향성이 있습니다. 예수 부활이 그것입니다. 예수 부활에 대한 영적인 통찰과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리 성실하게 이웃을 위해서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선의를 가진 사회 운동가에 불과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공교육 살리기, 흥사단, 와이엠씨에이, 아프리카 기아 대책 본부 같은 시민단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착하게 살려고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 십자가 처형에 충격을 받아서 각자도생하듯이 갈릴리로 낙향했다가 이렇게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주민들을 향해 회개하고 돌이키라.”라고 설교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예수 부활 신앙이 자리합니다. 베드로는 15b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기독교 신앙에서 이 메시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무() 가운데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creatio ex nihilo! 창조나 부활은 세상을 조금 더 보기 좋게 만든다거나 실용적으로 바꾼다는 말이 아닙니다. 질적인 변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와 부활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한 오해가 벌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0:27절 이하에는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사두개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난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부활을 오해하는 데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25:5절에 거론된 형사취수혼제도를 근거로 해서 사두개인들은 칠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죽었다면 부활 때에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부활은 전혀 다른 생명입니다.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나님에게 모든 사람이 살았다는 말은 죽음도 하나님 안에서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에게 결속된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런 부활 생명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읽은 19절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라고 외쳤습니다. 부활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야말로 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죄는 자기 연민에 떨어져서 자기 소멸을 두려워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자기 성취에 목매게 하는 강요와 유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연히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자기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납니다. 제자들이 그런 신앙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안위에 대한 염려로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저주하면서 부정하고 고향으로 도망갔던 그들이 예루살렘 거리에 다시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세상살이의 현실과 거리가 너무 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라는 말이 너무 멀리 느껴지는 겁니다. 자신은 그냥 세상에서 재미있게 사는 것으로, 조금 더 나아가서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고 사는 것에 만족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그런 인생을 탓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실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실제로는 만족하지 못할 겁니다. 살아가는 형편이 좋든 나쁘든 자신의 삶이 어딘가 비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시시하게 보일 것입니다. 여기서 예외는 없습니다. 다른 삶이 보이지 않으니 세상이 말하는 모범답안을 따라갈 뿐입니다. 예루살렘 주민을 향한 베드로의 설교에 다시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 부활을 향해)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그렇게 하면 여러분에게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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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3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07
87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143
8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162
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243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7929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285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647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7996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561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153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715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874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7759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339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350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4932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13419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8361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5831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454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467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281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4519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273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5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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