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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https://youtu.be/jh8cNggR80g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열왕기상 2:10-12, 3:3-14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성령강림 후 13, 2018819

 

2:10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11.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다스렸더라 12.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앉으니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3: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4.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11.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14.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허락해 달라.’고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에 연관된 유명한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왕상 3:16-28절에 나옵니다. 두 여자 사이에 송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여자들의 직업은 유곽에서 몸을 파는 일이었습니다. 며칠 간격을 두고 이 여자들은 각각 아들을 낳았습니다. 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느니 아니니 하는 논란이 벌어진 겁니다. 지금처럼 유전자 감식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재판장인 솔로몬은 살아있는 아이를 반으로 잘라서 각각 나눠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한 여자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다른 여자에게 주라고 했고, 다른 여자는 임금의 명령대로 반으로 잘라 누구의 것도 되지 않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의 판결이 내려집니다. 아이를 양보한 여자가 진짜 엄마입니다.

 

문제적 인간 솔로몬

솔로몬의 지혜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왕상 3:3-14절에 나옵니다. 당시는 솔로몬의 집권 초기라 솔로몬의 권력 기반이 약했습니다. 솔로몬의 나이가 어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집권 과정에도 하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다윗에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 압살롬은 오래 전에 반역을 일으켰다가 현장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왕위 계승의 다음 차례는 아도니야입니다. 아도니야에 대해서 왕상 1:6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도니야는 다윗이 늙자 왕위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여러 동생 왕자들과 장군들과 선지자와 제사장과 귀족 등, 여러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여기에 제외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나단과 동생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와 배다른 형제로서 마지막까지 다윗의 사랑을 잃지 않았던 밧세바라는 여자의 아들입니다. 나단은 밧세바를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대처방법을 알립니다. 일종의 궁중 권력 투쟁이 시작된 겁니다. 밧세바와 나단의 승리로 끝납니다.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서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는 어떤 사건을 꼬투리삼아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그 뒤로 차례대로 아도니아 쪽에 줄을 댔던 사람들을 처단합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기는 했으나 종교적 정치적 정당성은 허약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우선 신적인 권위가 담보되어야합니다. 솔로몬의 왕위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갔습니다. 기브온에는 큰 산당이 있었습니다. 산당은 원래 가나안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우상을 제사하던 곳입니다. 그런 산당이 가나안의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당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존의 산당을 이용했습니다. 솔로몬은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소나 양을 일천 마리 바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솔로몬의 마음이 지극 정성이었다는 것을 과장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솔로몬은 기브온에서 하룻밤 지내다가 꿈에 여호와를 만납니다. 꿈에서 신을 만난다는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나 다른 문명권의 왕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보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솔로몬은 재판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정확한 워딩은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길게 이어집니다.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장수나 부를 구하지 않고 백성들의 송사를 위한 지혜를 구했으니 지혜를 줄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왕 다윗처럼 믿음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지혜와 부귀와 영광과 장수를 허락하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은 솔로몬에게 실현되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은 바로 솔로몬 시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었고 궁궐도 건축되었습니다. 국력이 강할 때라서 이런 대형 토목건축 사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성전은 7년에 걸쳐서, 왕궁은 13년에 걸쳐서 완공했습니다. 그가 지혜롭다는 소문은 다른 나라에까지 파다했습니다. 왕상 10장에는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 한 수 배우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솔로몬의 인생은 그야말로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적이었습니다.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3)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의 인생에 그대로 실현된 것이니까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는 인생 전체를 놓고 내려져야합니다. 그 말은 인생의 마지막이 중요한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의 말년은 여러 가지 점에서 좋지 않았습니다. 겉으로야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중에서 핵심은 그가 여호와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왕상 11:4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 솔로몬이 우상숭배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성경기자들의 비판 중에서 이것보다 더 준엄한 것은 없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면 여호와를 더 성실하게 섬겨야 할 텐데, 솔로몬은 오히려 거꾸로 갔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외적인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다는 걸 솔로몬의 인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귀와 영화는 그게 없을 때나 소중하지 주어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화려하게 보이던 것들이 상투성으로 떨어집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도 그것만으로는 인생을 생명 충만하게 살 수 없습니다. 거기에 매달리면 늪에서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 듯이 상투성의 늪 안으로 더 깊이 빠져듭니다. 그 상투성이 곧 지옥의 특징입니다.

성경기자는 솔로몬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왕상 11:3절에 따르면 솔로몬의 후궁이 칠백 명이고, 첩이 삼백 명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들이 왕의 마음을 여호와로부터 돌아서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외교 정책적으로 외국 공주들을 왕비나 후궁으로 맞아들이곤 했지만 솔로몬의 경우는 정책적인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맞은 겁니다. 이 여자들은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 등의 우상을 끌고 왔습니다. 솔로몬은 이런 신들을 위한 산당을 예루살렘 앞에 지었습니다. 우상을 향해 마음이 기울어진 솔로몬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로보암 장군이 모반하려는 낌새를 알아챈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고, 여로보암은 이집트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국내외 정세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솔로몬은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르호보암 시대에 나라는 남북으로 나뉩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솔로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기자들이 솔로몬에게 내린 평가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

저는 솔로몬을 생각할 때마다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성경기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집권 초기에 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다윗의 법도를 충실히 따랐습니다. 왕이 된 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일단 왕이 된 다음에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능력은 인정받아야 합니다. 더구나 아버지 다윗의 숙원사업이었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이방 여인들로 인해서 여호와를 멀리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솔로몬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그가 왜 딴 사람이 되었는지를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솔로몬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부분적으로 바뀔 수는 있으나 중심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애국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친일로 돌아선 이들이 있고, 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선 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상황에 따라서 변했다기보다는 원래의 모습이 숨어 있다가 나중에 나타난 것이라고 봅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이 꿈에 여호와를 만나서 요청한 것은 지혜였습니다. 그 대목을 정확하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그가 원한 것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걸 사람들은 보통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두 이걸 좋다고 여깁니다. 성경에는 이와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2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자라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멀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4,5). 소위 선악과 설화에서는 선과 악을 인식하는 것이 죄로 규정됩니다. 왜냐하면 선악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배타적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좋은 뜻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달라고 했겠지만 그 능력은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죄입니다.

선악의 분별 능력이 왜 죄일까요? 그냥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선한지 악한지를 실제로 알 수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교우들 관계도 그렇습니다. 김 집사가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거 같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차라리 모르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그걸 알면 굉장히 불편한 관계가 됩니다. 두 시간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미리 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큰 병에 걸린다는 것을 미리 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걸 알면 죽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만이 생명의 실체를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선악을 분별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재판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법정은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해서 논쟁을 벌이는 곳입니다. 어느 정도는 실체적 진실을 가릴 수 있을지 몰라도 완벽하게 가릴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의 법정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아기를 둘로 잘라서 각각 나눠주라는 방식은 오늘날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습니다. 검사나 변호사, 판사 모두 선악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법이 정해놓은 범주 안에서 그걸 찾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법의 문구가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집니다. 현실 세계에서 법과 재판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대한 실체적 진실을, 즉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법정과 강의실에서, 그리고 삶 한가운데서 논쟁해야 하고, 이에 따른 법체계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둘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실현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부귀와 백합화

저는 솔로몬을 평가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평가가 설교의 목표도 아닙니다. 성경기자들이 솔로몬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가 핵심입니다. 그는 당대의 역사에서 나름으로 할 만큼 했습니다. 다윗 왕의 마음을 얻은 밧세바를 어머니로 두었고, 권력 암투가 벌어지는 궁궐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린 나단 선지자 덕분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왕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크게 키운 건 잘한 일입니다. 왕상 4:20절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늘었고, 모두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주변 여러 나라들이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런 시절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솔로몬 시대가 유일무이했습니다. 태평성대를 솔로몬이 이룬 겁니다. 그러나 성경기자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솔로몬을 칭송만하지 않습니다. 앞의 모든 업적이 쓰레기처럼 보일 정도로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솔로몬은 말년에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결국은 믿음에서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좌절입니다. 그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인생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와 권력과 장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에 서는 것이 가장 복된 인생이라는 게 그 대답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는 답입니다. 알지만 우리의 마음은 습관적으로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로 돌아갑니다. 기도할 때는 솔로몬의 지혜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뒤로 따라오는 부귀와 영화를 갈망합니다. 만약 지혜를 선택할래, 부귀와 영화를 선택할래 하면 지혜는 쏙 들어가겠지요. 이런 선택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일단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이 없어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는 솔로몬처럼 화려하게 사는 게 낫겠지요. 현실 세상에서 그걸 부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가 바람이나 구름처럼 그냥 지나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저자가 솔로몬으로 알려진 전도서에는 자신을 이스라엘 왕이라고 표현한 사람의 말이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살펴보니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더라.’(1:14) 했습니다. 인생이 화려할수록 삶이 헛되다는 사실에 앞에서 더 심각하게 좌절합니다. 그래도 솔로몬처럼 부귀와 영광을 손에 넣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예수님은 구약 인물을 자주 거론하지 않으셨습니다. 솔로몬은 드문 경우에 속합니다. 6:28,29절에 솔로몬이 언급됩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의 부귀와 영광을 백합화에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백합화는 단돈 몇 푼으로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지만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삶을 정확하게 뚫어보는 사람은 푼돈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백합화가 백배 천배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여기 모인 분들 중에서 삶의 여유가 있는 분들도 있고 없는 분들도 있겠으나 그런 차이는 정말 미미합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 목사와 백 명이 채 안 되는 대구샘터교회의 담임 목사 사이에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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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Nomad

August 20, 2018
*.229.77.52

솔로몬이라는 등장인물의 숨은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삶의 원칙을 다시한번 다짐하며 제가 늘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을 상기시켜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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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0, 2018
*.182.156.177

사실 솔로몬만이 아니라 다윗도 그렇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도 그렇고

왕 노릇을 하긴 했지만 모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와 판단력에서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류 역사 발전에서 어쩔 수 없이 왕이 되었기에

왕으로 살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기에 불행한 거지요.

행복하게 살려면 왕으로 선택되는 걸 거부하는 게 좋습니다.

사사기 어딘가에는 어릿광대 같은 이만 왕이 되려고 한다는

비유가 나오는데, 구절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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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August 21, 2018
*.106.98.51

1. 문제적 인간 솔로몬 편,  4번째 문단 5번째 행의 " 다윗이 우상숭배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에서 다윗이 아니라 '솔로몬'이라고 해야 맞겠지요.^^;;


2. 선악을 분별하는지혜 편, 두 번째 문단  2번째 행의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있사오리이까" '수' 자가 탈락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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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1, 2018
*.182.156.177

ㅎㅎ 다윗과 솔로몬을 반복해서 말하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큰 실수를 했군요.

고맙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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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mist

August 21, 2018
*.112.108.222

'솔로몬왕'하면 일천번제를 드려 지혜를 구했고 그 결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린 부러운 대왕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아마도 지금껏 학습된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인간의 대한 평가가 인생전체 , 특히 말년의 평가가 중요하다면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났으며 아니, 그 이전부터 애초에 그 중심에 하나님이 부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되네요.

목사님 설교 내용중에 '사람의 중심은 바뀌지 않는다.'는 문구에 오래도록 마음이 머무르게 되네요.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정말 내속에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있는지 누구보다 내자신이 잘 알고 속일 수 없음을....
말씀 읽어면서 솔로몬의 삶을 통해 타산지석의 교훈을 한번더 되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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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2, 2018
*.182.156.93

초등학교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보더라도

세계를 바라보는 그 중심은 달라지지 않은 게 확실합니다.

단지 달라졌다면 세계관이 조금 깊어졌다는 것이겠지요.

교육학자들은 어릴 때의 교육을 이런 점에서 강조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치원 시절에 다 배웠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 교육학적 관점이 옳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볼 때는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예정이나 섭리, 또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영혼이 심층적이라는 뜻이지요.

영혼이 바로 쉽게 변하지 않은 '중심'입니다.

내일 태풍이 한반도를 관통한다는데, 

그쪽 농장에 어려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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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인자무적

August 22, 2018
*.166.163.5

우리가 인식하는 선과악은 개인의 직, 간접적인 경험에서 투영된 판단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의 배타적인 능력의 현실을 선과 악으로 진단해 버리는 인간의 오만한 지적 언어가 아닐까요? 지혜 또한 상황의 주관적인 적절한 판단이지 절대적인 지혜는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은 인간공동체 안에서 약속의 판단이지만 선과악은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안다는 것은 가히 바벨탑 사건에 견줄 수 있는 오만 방자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감히 생각하건데 선과 악이라는 단어를 인간의 인식속에서 잊고 사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논하는 자체가 불경스러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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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2, 2018
*.182.156.177

선악에 대한 인식마저 잊는 게 좋다는 인자 님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최소한 생명을 파괴하는 것과 세우는 것을 구별할 필요는 있겠지요.

하여튼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을 절대화하는 오류에는 빠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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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August 22, 2018
*.118.117.106

목사님

'어릿광대 같은 사람만 왕이 되려고 한다.'는 구절이 사사기에 있습니까?

혹시 다른 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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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2, 2018
*.182.156.177

삿 9:7절 이하에 비유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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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August 22, 2018
*.151.83.22

사람들이 열망하는 부귀영화와 태평성대를 누린 솔로몬이

말년에 우상숭배에 떨어지자
그 화려함과 권력까지도 상투성으로 인해
모든것들이 헛되다고 고백할수 밖에 없을정도로 좌절하게 되었군요.
이것은 부와 지위가 그 존재를 변화시킬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진정한 부와 영광임을 말씀해 주시는것 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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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2, 2018
*.182.156.177

성서기자들의 통찰력과 판단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웬만하면 솔로몬의 잘못을 가려줄만도 한데

여지 없이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다윗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의 인간적인 실수와 한계가 많이 지적됩니다.

다윗은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신앙을 꾸준히 유지했고,

솔로몬은 똑똑한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신앙을 훼손했으니

성서기자들이 왜 다윗을 인정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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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August 23, 2018
*.118.112.104

요담이 말한 나무의 비유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맞군요

감사합니다.

언제나 은혜로운 글로 일깨워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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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6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3043
945 사순절 목마름의 실체 (사 55:1~9) [4] 2022-03-20 3182
944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2] 2022-03-13 3302
943 사순절 시험받는 예수 (눅 4:1~13) 2022-03-06 3196
942 주현절 예수 변모 순간 (눅 9:28~36) 2022-02-27 3024
941 주현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창 45:3~11, 15) [2] 2022-02-20 3347
940 주현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6] 2022-02-13 3178
939 주현절 첫 제자들의 출가 이야기 (눅 5:1~11) [7] 2022-02-06 3049
938 주현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1~6) 2022-01-30 3046
937 주현절 하나님 말씀의 성취 (눅 4:14~21) [3] 2022-01-23 3614
936 주현절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1~5) [7] 2022-01-16 3511
935 주현절 성령 받음이란? (행 8:14~17) [2] 2022-01-09 4654
934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8) 2022-01-02 4868
933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 그리스도의 말씀 (골 3:12~17) [3] 2021-12-26 4595
932 대림절 평화의 왕이 오신다! (미 5:2~5a) [1] 2021-12-19 6082
931 대림절 성령과 불 (눅 3:7~18) 2021-12-12 4505
930 대림절 빈 들에서 (눅 3:1~6) [2] 2021-12-05 5477
929 대림절 늘 깨어 기도하라! (눅 21:25~36) [1] 2021-11-28 6833
928 창조절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욜 2:2~27) [1] 2021-11-21 4178
927 창조절 하나님께 가까이! (히 10:19~25) [2] 2021-11-14 6501
926 창조절 불행한 서기관 (막 12:38~44) 2021-11-07 3519
925 창조절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 12:28~34) [4] 2021-10-31 5087
924 창조절 욥의 회개 (욥 42:1~6) [4] 2021-10-24 5993
923 창조절 속죄와 구원 (히 5:1~10) [2] 2021-10-17 3617
922 창조절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막 10:17~22) [5] 2021-10-10 5298
921 창조절 욥의 재난 & 욥의 믿음 (욥 1:1, 2:1~10) [1] 2021-10-03 3967
920 창조절 생명과 지옥 (막 9:42~50) [4] 2021-09-26 5320
919 창조절 지혜 그 '너머' (약 3:13~4:3) 2021-09-19 3784
918 창조절 지혜 & 그 너머 (잠 1:20~33) [3] 2021-09-12 4361
917 창조절 놀람의 근거 (막 7:24~37) 2021-09-05 4238
916 성령강림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아 2:8~13) [1] 2021-08-29 4082
915 성령강림절 전투하는 교회 (엡 6:10~20) [2] 2021-08-22 4640
914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5002
913 성령강림절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6:35, 41~51) [3] 2021-08-08 4690
912 성령강림절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 4:1~16) [3] 2021-08-01 3550
911 성령강림절 가난한 자의 피난처 (시 14:1~7) [2] 2021-07-25 4025
910 성령강림절 예수 십자가와 세계 평화 (엡 2:11~22) [2] 2021-07-18 3786
909 성령강림절 왕-선지자-그리스도 (막 6:14~29) [1] 2021-07-11 3798
908 성령강림절 열두 제자 파송 이야기 (막 6:1~13) [2] 2021-07-04 4478
907 성령강림절 "딸아!" (막 5:25~34) [4] 2021-06-27 4533
906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4981
905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막 4:26~34) [4] 2021-06-13 4157
904 성령강림절 왕의 출현 (삼상 8:4~11, 16~20) [1] 2021-06-07 3799
903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4949
902 성령강림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2] 2021-05-23 5346
901 부활절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시 1:1~6) [8] 2021-05-16 4754
900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368
899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518
898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4882
89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542
896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5909
895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131
894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5818
893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393
89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290
891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338
890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5836
889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379
888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283
88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707
886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319
885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629
884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7846
883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437
88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5823
881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347
880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52
879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0750
878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0789
8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8473
876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8006
875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476
874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8028
873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06
87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143
8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161
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240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7923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282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642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7991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558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149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714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869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7754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333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346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4928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13411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8355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5826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452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462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278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4518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270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5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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