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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성령강림절 조회 수 7076 추천 수 0 2016.07.31 20:14:35
설교듣기 : https://youtu.be/XUPs6zJj10Q 
설교보기 : https://youtu.be/8VpsFZ0dc_w 
성경본문 : 호세아 11:1-11 

나는 하나님이다.”

11:1-11, 성령강림후 열한번째 주일, 2016731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우리는 제1 독서로 호세아 11:1-11절을 읽었습니다. 이 본문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목도 있고, 또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본문이 한글로 된 문장인데도 마치 외국어로 된 문장을 읽는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본문은 지금부터 27백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배경으로 합니다. 까마득히 먼 시절의 이야기라서 낯설게 다가오는 건 당연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27백 년 전 호세아 선지자 시대로 안내하겠습니다.

 

바알숭배

호세아는 기원전 750년부터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한 기원전 722년 직전까지 대략 30년 동안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당시는 앗시리아 제국이 팽창 정책을 쓰고 있었기에 북이스라엘에게는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왕들은 주변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앗시리아 제국에 맞서보려고 했습니다. 그런 정치 군사적인 동맹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오히려 화를 자초하기도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나쁘게 작용했습니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절에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선포를 훗날 사람들이 문서로 만든 것이 구약 호세아입니다. 호세아는 국가의 위기를 단순히 정치 외교적인 차원으로만 보지 않고 더 근본적으로 북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호세아만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알숭배를 가장 큰 죄라 여기고, 바알숭배와 투쟁했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 시대에 활동한 엘리야가 대표적입니다. 선지자들은 왜 바알숭배를 배척했을까요?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서 배운 대로 바알숭배를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알은 생긴 것도 역겹고, 추종자들을 성적으로 문란하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그렇게만 보면 오해하는 겁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농경문화를 크게 꽃피운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을 바알이라고 보았습니다. 바알은 다산과 풍요의 원천이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아무리 말려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숭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이해됩니다. 그들의 뿌리는 광야입니다. 가나안에 정주하고 농사를 지으며 풍요로운 문명을 발전시킨 가나안 사람들과 달리 광야에서 정처 없이 떠돌면서 살았던 노마드(유목민)이었습니다. 이들이 40년 광야시절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 나오는 이야기만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드라마틱하게 애굽에서 빠져나와 의기양양하게 가나안을 정복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역사는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출애굽도 그렇고, 광야생활도 그렇고, 가나안 정복도 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늘 생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정복도 마음먹은 대로 진행된 게 아닙니다. 여리고와 아이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지역의 땅을 열두 지파에게 분배했다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이 멋져보였습니다. 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자신들과 비교해볼 때 월등하게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종교인 바알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마음과 그 열정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21세기 우리들도 27백 년 전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알숭배를 마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따르는 중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장은 다 번영과 풍요를 절대 이념으로 작동됩니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바알을 따를 거 같습니다. 오늘 제3 독서인 눅 12:13-21절에는 소위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산 문제로 다투는 사람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를 잘 지어서 소출이 크게 늘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곡식을 보관해둘 곳이 부족하니 창고를 넓혀서 거기에 쌓아놓고 평생 편안히 먹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12:20). 사람이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으면 만족한 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은 어느 정도 경제 수준에 오르면 그것으로 만족한 채 정의로운 사회를 세워나갈 마음을 먹을까요? 세계 5대 강국에 들어가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세상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는 어느 정도 성장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거의 끝이 없을 겁니다. 헬라 신화 이야기처럼 사람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허기에 시달리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알숭배를 멀리해야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을 당해야만 할까요? 북이스라엘은 다시 광야의 척박한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일까요? 삶을 즐기면 안 되는 것일까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연봉이 적당한 것일까요? 3천만 원이나 5천만 원까지는 되고, 1억이면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가난 자체를 신앙적으로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부 자체를 신앙적으로 찬양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선지자들은 자기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문화적으로도 품위 있게 사는 것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바알숭배가 결국 하나님 신앙을 멀리하게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 신앙 자체를 파멸시킨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산과 번영과 풍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참된 자유와 평화와 정의가 실종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선지자들의 이런 통찰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호세아는 우상숭배에 떨어진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3절 이하에서 일종의 우화 형식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1인칭으로 묘사된 3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여기 아기 키워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아기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기립 보행입니다. 대개 돌 언저리에서 기립 보행이 가능합니다. 그 것이 유인원 호모 에렉투스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에브라임에게 걸음걸이를 하나님이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입니다. 열두 지파를 따질 때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어갑니다. 둘째 아들이지만 에브라임은 할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오히려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가 됩니다. 호세아는 요셉의 둘째 아들을 거론하면서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각별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기를 돌보듯이 걸음걸이를 가르쳤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호세아는 7절에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런 것만 본다면 이스라엘은 싹수가 노란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선포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8)고 했습니다. 호세아의 마음이 여기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바알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호세아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에게 붙들어 두고 싶어 합니다. 그의 소명 이야기에 그런 마음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1:2 이하에 호세아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여호와로부터 듣고 순종합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람함이니라.’ 여기서 음란한 여자는 성전 창기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상징적인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호세아가 이런 극단적인 퍼포먼스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려 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호세아는 지금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매달리는 중인지 모릅니다. 9절에서 호세아의 이런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는다는 호세아의 예언은 성취되었을까요? 여러분이 다 아는 것처럼 그의 예언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졌습니다. 왕족은 다 참수 당했고, 귀족들과 가족들은 유배를 당하거나 종의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북이스라엘 지역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호세아가 순진해서 이렇게 전개될 국제 정세를 전혀 모르고 낭만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선포한 게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서기를 간절하게 원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위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백척간두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호세아의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떨어졌습니다. 나라가 끝장났습니다.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되지 못했다면 호세아는 실패한 선지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언은 성취 여부가 아니라 그 예언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선지자들도 사람이기에 역사를 잘못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예언으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호세아의 경우에 그것은 나는 하나님이다.’는 문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사람과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호세아는 이 사실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으라는 명령에도 순종했습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신학 명제의 하나가 이와 비슷합니다. Gott ist Gott.(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는 명제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또는 자연과학을 통해서 세상을 완성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이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강한 톤으로 바알숭배를 비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알숭배와 하나님 신앙은 병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 데까지 몰고 갔습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 전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변형된 바알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율법전통 안에 가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우리는 복음서에서 많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친 사건을 보고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릴 생각을 했습니다(12:14). 그들은 율법주의 안에 갇혀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호세아 시대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지 못한 거와 같습니다.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나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나 모두 종교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이었고, 나름으로 삶의 진정성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세상 경험과 삶의 기준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단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인류를 대표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들 살해에 똑같은 책임이 있습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을, 즉 하나님을 살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노아홍수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심판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신성모독 판결을 내린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이나 실제로 십자가 선고를 내린 빌라도 총독이 이 일로 인해서 심판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하늘의 날벼락을 내려서 십자가 사건의 장본인들을 직접 처분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습니다. 호세아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사람과 달라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긍휼과 사랑을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바알숭배에 기울어지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호세아가 절규하듯 외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분의 긍휼과 사랑은 무한합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단순히 교리로만 알고 있으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는 진리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비록 순간적으로 바알숭배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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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31, 2016
*.164.153.48

주일을 잘 지내셨는지요.

앞으로 설교 메뉴에 동영상은 올리지 않고

오디오 파일만 올리겠습니다.

동영상은 아프리카 티브이를 참조하세요.

아프리카 티브이 사이트로 들어가서

'대구샘터교회'를 입력하면 해당 계정이 나옵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아이디로 업로드 하고 있어서

이전 주소로는 안 됩니다.

http://live.afreecatv.com:8079/app/index.cgi?szType=read_ucc_bbs&szBjId=nfermata&nBbsNo=19105453&nTitleNo=39051002&act=web_search&act=web_search&szKeyword=%EB%8C%80%EA%B5%AC%EC%83%98%ED%84%B0%EA%B5%90%ED%9A%8C


설교문을 읽으시다가 질문이나 반론 등도 좋고,

혹시 오자가 나오면 알려주세요.

이제 7월도 블랙홀과 같은 어떤 곳으로 가버렸네요.

그걸 아쉬워하지 말고,

새로운 시간이 온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고

이 거칠고 야만스런 세월을 견뎌봅시다.

아프리카 티브이 실황 방송은

매주일 11시입니다.

그 뒤로 3일동안 아프리카 서버에 저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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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August 01, 2016
*.69.199.48

아멘!

구원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와 자유가 있음을 믿습니다.

바알의 달콤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하옵소서.

찬송이 절로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 ~! 오 크신 사랑!

하늘 그 보다 높고, 바다 그 보다 깊고,

우주 그 보다 넓은 오 크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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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1, 2016
*.164.153.48

주안 님은 찬송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좀 잘 못부르는 거지만

찬송에 마음도 두고 실제로 자주 불러야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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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August 01, 2016
*.105.196.251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이룰수 있는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말은 사람이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행위를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할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

 오늘은 이 말씀이 위로로 와닿습니다.

항상 하시는 중심 메세지인데..
오늘은 또 다르게 도전과 새로움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어떤분과 오랫동안 통화를 했는데..휴거, 세상의 종말,베리칲.. 미국의 움직임등을 말하며..
재림준비에 대한 분주하고 다급한 모습을 보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내가 알고 있는것을 설명해야할지? 참 난감하고 고민되었습니다..

내가 할수있는일은 기도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를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해 주어야겠어요.
말씀 덕분에 평안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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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1, 2016
*.164.153.48

ㅎㅎ 휴거론자와 대화하셨군요.

휴거가 뭔지를 알고 재림 준비를 하자고 해야 하는데,

오래전 '다미선교회'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신화적인 휴거 상에 머물러 있어요.

그런 분들을 설득시킬 수는 없으니

가능한 짧게 대화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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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August 05, 2016
*.41.205.218

 기독교는 오리엔테이션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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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알아야

August 02, 2016
*.187.14.236

맨 아래부터 4번째 paragraph 에 오타가 있어요. 목사님~ 다른 분이 발견하신지 모르겠지맘~


->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되지 못했다면 호세아 실패한 선지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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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2, 2016
*.164.153.48

알아야 님, 오차를 수정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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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맑은그늘

September 01, 2016
*.212.139.114

설교링크입니다.

https://youtu.be/8VpsFZ0dc_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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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27, 2018
*.36.133.167

목사님. 제가 목사님의 글을 읽고

저의 죄를 알게되고 그와중에서도 용기와 기쁨을 얻었다면

그것도 일종의 주님의 은총을 제가 받은 것이겠지요.

매주 말씀들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감동주시고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바알숭배, 변형된 바알숭배와 예수님의 구원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씩 늘어가니 머리도 맑아 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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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7, 2018
*.182.156.135

'머리도 맑아' 지신다니,

설교자로서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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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6920
83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6383
829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5467
828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9518
827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9004
826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6140
82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1561
824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6423
823 창조절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골 1:1-20) [6] 2019-11-24 7747
822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6856
821 창조절 두려워 말라! (학 1:15-2:9) 2019-11-10 5510
820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0738
819 창조절 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욜 2:23-32) 2019-10-27 7611
818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00
817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 2019-10-14 5773
816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7048
815 창조절 투쟁적인 믿음 (딤전 6:6-16) [4] 2019-09-29 8059
814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262
813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7218
812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6840
811 창조절 복 있는 삶 (눅 14:7-14) [2] 2019-09-01 7702
810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4891
809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084
808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7012
807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693
806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4851
805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7106
80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644
803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6488
80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046
801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0730
800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6542
7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7325
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15828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8482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7222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4469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7707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6997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5800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5954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5779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6202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370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711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6895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676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276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695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8381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6635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669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6388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443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302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6702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6440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8434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8595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8088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183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06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16335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7529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13082
76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6260
765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4] 2018-10-15 6211
764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048
763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645
762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5778
761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416
760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6259
759 창조절 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4] 2018-09-02 8111
758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520
75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037
756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6364
755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6198
754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6147
753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346
752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6864
751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6904
750 성령강림절 연보도 은혜다! (고후 8:7-15) [6] 2018-07-01 6425
749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1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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