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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성탄절 조회 수 13121 추천 수 0 2017.01.01 22:45:29
설교듣기 : https://youtu.be/cjmmuRgdvRQ 
성경본문 : 마태복음 2:13-23 

나사렛 사람 예수

2:13-23, 성탄후 첫째 주일, 201711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지금 제가 예수님에 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할 테니까 각자 속으로 답을 맞춰보십시오.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당시에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도 흔했습니다. 아버지 이름은? 요셉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이 자란 곳, 또는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출가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결혼했을까요? 아닙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나이는? 서른 세 살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유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복음서가 신약성경에 몇 권이나 될까요? 4권입니다. 4권의 특징이 각각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독자는 누구일까요?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의 율법이나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유대의 역사와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그 특징이 오늘 설교 본문으로 삼은 마 2장에서 두드러집니다.


2장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은 마태복음만의 전승입니다. 1-12절은 동방박사 이야기이고, 13-18절은 요셉이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한다는 이야기이고, 19-23절은 애굽에서 돌아와 나사렛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그 줄거리를 간단하게 살펴볼까요? 동방박사 이야기는 오늘 설교 본문에 속하지 않으니까 간략히 짚고 건너뛰겠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예수와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에게 동방박사들이 와서 경배를 드리면서 세 가지 예물,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고 떠난 뒤에 요셉은 천사가 나타나는 꿈을 꿉니다.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고 하니 가능한 빨리 이곳을 떠나서 애굽으로 피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만나기 전 도움을 받으려고 헤롯 왕을 찾아갔을 때 헤롯은 속으로 예수를 제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 소문을 요셉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런 꿈을 꾸는 거겠지요. 신생아 예수는 살해당하는 위기를 모면하지만 나중에 서른세 살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걸 보면 이미 이런 운명이 아기 예수에게 암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따르면 악몽을 꾸다 잠이 깬 요셉은 그 즉시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요셉 가족은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머물렀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런 일이 구약 호 11:1절에 의한 것이라는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예수의 운명이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이미 예언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헤롯은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예수가 태어난 날짜를 계산해서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헤롯은 원래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유대인 로마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헤롯은 자신의 세 아들을 반역으로 몰아 처형했고, 자신의 장례 때 사람이 슬퍼하도록 각 가정에서 한 사람씩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광적인 사람이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이런 일을 연산군(1476-1506)이나 히틀러(1889-1945)에게서도 볼 수 있고, 현대 세계 역사에서도 자주 목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평소에 겉으로 정상적인 것처럼 보여도 그 내면의 세계가 병들어 있어서 최소한의 상식에 어긋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요세푸스가 오늘 성경이 말하는 두 살 아래 아이를 죽이는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 걸 봐서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유대 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태어난 시절에 애굽의 바로는 산파들에게 명령하기를 유대 산모가 출산하는 아이들 중에서 남자 아이는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예수의 운명이 바로 유대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모세의 운명과 비슷하다는 의미입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연히 예수님과 모세를 연결해서 생각했을 겁니다.

  

세월이 흘러 헤롯이 죽자 요셉은 다시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2:20).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애굽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감히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같습니다. 성경은 간단하게 묘사했지만 그 안에서는 수많은 사연들이 숨어 있습니다. 요셉이 꿈에서 천사를 만나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애굽을 당장 떠날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활 근거지를 포기하기도 어렵고,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요셉은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내와 아들 예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유대 지역에서 왕위를 계승한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는 아버지 헤롯 못지않게 난폭했습니다. 유대 지역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의 북쪽 변방인 갈릴리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도 작은 마을인 나사렛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나사렛에 지인이 있었을까요? 친인척이 있었을까요? 요셉의 직업인 목수 일을 할 만한 조건이 들어맞은 걸까요? 그 숨은 사연을 우리는 아는 게 없습니다. 2:23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기자는 당시 예수님에게 붙어 다니던 호칭인 나사렛 사람이 구약 선지자의 말에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구약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 11:1절이 이에 해당된다는 각주가 달렸습니다. 11:1절은 이렇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한 가지가 나온다고 하는 표현에서 이 가지는 히브리어로 내체르라고 합니다. 그 발음은 구약이 말하는 나실인(13:5)과 비슷합니다. 나사렛도 이런 발음과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여기서도 다시 예수가 유대 민족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말해도 충분할 텐데, 왜 나사렛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일까요?

 

나사렛 동네

1:43절 이하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은 별로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마을입니다. 거기서 위대한 인물이 나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태복음을 비롯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 자체를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마을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각자 대구에서, 영천에서, 경주와 포항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를 따라서 나사렛에 간 예수님은 그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았을까요? 소년이 되면서 산과 들을 돌아다니고, 계절에 따라서 친구들과 여러 가지 놀이를 했겠지요. 다른 이의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서 포도나 무화과를 따먹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춘기가 되면서 같은 또래의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뛰었겠지요.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는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던 몇 시간 동안 의식이 혼미해질 때 그런 유혹이 찾아온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예수가 받은 최후의 유혹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가정을 꾸리고 사는 거였습니다. 그 소설에는 마리아와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사는 거로 나옵니다. 목수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예수에게 제자들이 몰려들어서 따지고 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전하던 우리가 실패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쓰러뜨리고 머리를 발로 밝습니다. 예수는 고통을 느끼면서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다시 정신을 차립니다. 그는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을 나사렛이라는 지명과 일치해서 부르는 이유는 그가 우리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살았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삽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배설합니다. 모든 게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만 지금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있다는 사실이 소중합니다. 소중할 뿐만 아니라 거룩합니다. 간혹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라는 복음 찬송을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헛되고 악하니까 포기하고 십자가만 바라보자는 찬송입니다. 일리가 없지 않으나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삶을 부정하거나 훼손하는 것으로는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나가서 교회는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해야 한다는 주장도 간혹 듣습니다. 정치도 구체적인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정치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른 정치를 위해서 투쟁할 때는 투쟁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건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과 같은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기승을 부리면 생존 자체가 불안해져서 성경공부와 신학공부는 둘째 치고,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예배도 진정성 있게 드릴 수 없습니다. 이런 생존 보장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문제입니다. 최저임금을 한 시간 당 1만원으로 올리는 건 정치적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일어나는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은 중앙 정부나 지방 정부의 차원에서 지원해야지요. 이게 다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정이 넘치는 대형교회와 최소한의 생존도 담보되지 못하는 소형교회가 경제 민주화 차원에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교회 정치가 필요합니다. 가톨릭교회가 각자도생에 떨어진 개신교회와 다른 점은 교회 정치가 건강하게 작동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간의 삶이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하는데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그 안의 역사와 인간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마저 나사렛 동네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삶을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심

이 대목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서 세상에서 살았다면 그를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지, 즉 그를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대답하기가 곤란할 겁니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거나, 성경을 더 많이 읽거나 기도하면 답을 얻는다는 말로 이런 곤란한 상황을 헤쳐 나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취미생활로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면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스스로 답을 얻기 힘들면 전문가에게 물어보거나 전문 서적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후 첫 주일이자 2017년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부딪쳤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살았던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인 근거가 무엇인가요?


1:18절 이하에 따르면 동거하기 전의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파혼할 생각을 하는 요셉에게 천사가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는 부정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임신한 것이며,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 사건을 사 7:14절을 인용해서 해명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은 28:20절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계 전도의 사명을 내리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출생 순간과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장면에서 똑같이 하나님이, 또는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을 공간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건 아닙니다. 성찬예식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실체로 거기에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영적으로 거기에 임재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절대 생명으로의 변화인 부활이 성찬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경험되는 겁니다. 그런 경험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생명을 얻는 경험입니다. 기쁨과 자유와 평화의 영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좀 시시하다고 실망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혹시 이런 것보다 더 강렬하고 매력적인 어떤 것을 기대하셨는지요. 천국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거나 방언을 유창하게 한다거나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니까 병이 깨끗하게 치료되는 능력을 얻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그걸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로 알겠다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마치 티브이 연예 프로그램을 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거기서는 단순히 재미를 느끼면 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영적인 증거인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생명 경험은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생명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까지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의 자유를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신출귀몰하는 마술사나 인류 역사를 쥐락펴락하는 전쟁 영웅, 또는 노벨상을 받는 위대한 학자가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촌 동네에서 우리와 비슷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그 나사렛 예수가 이제 우리와 항상 함께 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과 그 일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체노동자, 전업주부, 학교 교사로서의 인생에 비밀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 통치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여러분은 실제 삶에서 어느 정도나 분명하게 누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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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January 02, 2017
*.224.15.62

이제까지 저희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안에 던져진 존재로서 이게 뭐지? 하고 있을때,
예수님이 인간과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셨다는 말씀이네요.
하나님은 생명이시고요.
생명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게 된다면, 슬픔과 탄식대신 일상에서 평화속에 살수 있을것 같습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살수 있네요,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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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2, 2017
*.164.153.48

에스더 님이 요즘 신학과 친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군요.

그런 생각과 느낌들이 축적되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폭발하는 것을 경험할 겁니다.

'돈오'의 경험이지요.

그렇게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맛만 느껴도 삶이 새로워질 겁니다.

2017년에도 이 길을 계속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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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January 02, 2017
*.69.199.48

임마누엘의 경험을 실증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예수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느끼며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순간 순간이라고 봅니다.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라는 것처럼

살아가는 일상에서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인식하며

늘 깨어 쉬지않고 기도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라고 봅니다.

닭 울음소리에 베드로가 깨달은 것 처럼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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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3, 2017
*.164.153.48

요즘처럼 어수선한 시국에,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무상한 인생살이에

임마누엘 신앙이 없다면 마음의 중심을 잡기 힘들겠지요.

하나님이, 즉 궁극적인 생명이

우리의 일상에 늘 함께 한다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더 깊이 느끼면서 2017년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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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bboyswj

January 05, 2017
*.216.32.110

목사님 안녕하세요^^ 가입한 지 5년이 넘었지만 글은 처음 쓰네요.

가끔 홈페이지 들를 때마다 목사님의 잠잠한 언어에 마음이 따뜻해져서 돌아갑니다. 제 설교에 모올래 적용하기도 하고요.

오늘도 목사님 설교로 마음 따뜻해져서 돌아갑니다. 혼란스럽고 분노도 치밀고 때론 따분한 제 일상에 임마누엘 예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 그걸로 족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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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5, 2017
*.164.153.48

bboyswj  님, 안녕하세요?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위로가 되는 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기기 쉽지 않다는 거지요.

사랑을 절실하게 느끼기 어려운 거와 같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그 길을 가다보면

임마누엘 영성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아직 깊이로는 들어가지 못했고,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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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0816
819 창조절 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욜 2:23-32) 2019-10-27 7648
818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71
817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 2019-10-14 5844
816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7100
815 창조절 투쟁적인 믿음 (딤전 6:6-16) [4] 2019-09-29 8131
814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323
813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7261
812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6903
811 창조절 복 있는 삶 (눅 14:7-14) [2] 2019-09-01 7796
810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4936
809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156
808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7103
807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781
806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4913
805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7180
80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705
803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6536
80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117
801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0794
800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6622
7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7390
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15926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8540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7294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4541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7849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7045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5895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6002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5837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6255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434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797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6951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752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352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776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8527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6716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731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6444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513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344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6858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6834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8828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8875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8509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258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69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16481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7585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13246
76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6316
765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4] 2018-10-15 6285
764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130
763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777
762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5844
761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477
760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6303
759 창조절 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4] 2018-09-02 8176
758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592
75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112
756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6439
755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6244
754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6199
753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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