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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주현절 조회 수 7433 추천 수 0 2017.01.29 20:19:12
설교듣기 : https://youtu.be/-2KdVQlpABk 
설교보기 : https://youtu.be/V36FQTDr7f4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8-31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주현 후 넷째 주일, 2017129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오늘 설교 제목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와 그리스도라는 낱말의 조합은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걸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말은 둥근 삼각형이라는 표현처럼 형용 모순입니다. 이런 곤혹스런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초기 기독교의 입장을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예수 그리스도는 삼십대 초반 나이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의 치안을 위태롭게 하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입니다. 대개는 반()로마 무력 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된 이들에게 일벌백계 차원에서 이런 형벌이 적용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쳤던 예수님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예수님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 로마 체제를 위태롭게 할 만한 요소들이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그의 메시지는 당시 절대 권력자들에게 불온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말이 되던 안 되든 어쨌든지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기독교인들은 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거리낌의 대상인 십자가

위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두 세력이 나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거리낌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똑같이 로마의 불의한 통제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대항하던 이들에게 십자가 처형이 내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비호할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정도 동정심을 느끼기는 했겠지만 속으로는 귀찮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으로 인해서 불편한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마을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이 나왔다고 합시다. 로마 제국은 그 마을에 대한 감시를 더 강화하고 뭔가 트집을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 증거를 기적적인 특별한 현상에서 찾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사건이 그것입니다. 애굽의 기마병들을 하나님이 홍해에 수장시켜서 그들은 무사히 광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고전 1:2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런 신앙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즉 기적을 구한다.’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기적 신앙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로마 군대를 박살내는 기적을 보였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신 자신을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27:40), 그리고 관리들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면 자신도 구원하라.’(23:35)고 빈정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 현대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기적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성공신화를 누구나 꿈꿉니다. 세상은 성공하는 길을 제시하고, 거기서 낙오가 되지 말라고 닦달합니다. 그게 매력적으로 들리는 건 당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런 꿈을 꿉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어느 누가 자신이나 자기 자식들이 삼십대 초반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따돌림 받는 운명을 용납하겠습니까. 기적적인 성공신화에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거리낌의 대상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부류는 이방인들, 즉 헬라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미련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 것은 헛소리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고전 1:22b절에 따르면 지혜가 그들의 최고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지혜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즉 신()에게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철학 전통을 이어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철학이라는 단어 philosophy는 사랑이라는 뜻의 필로스와 지혜라는 뜻의 소피아의 결합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의 죽음은 무가치한 겁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로마 형벌인 십자가에 처형되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현대인들도 헬라 사람들처럼 지혜를 삶의 최고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구원으로 여깁니다. 현대 물리학, 심리학, 경제학, 컴퓨터 공학을 포함하여 모두가 지혜를 추구하는 겁니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가 특히 강합니다.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교육열이 유달리 강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빠른 속도로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이 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의 태도입니다. 저는 이런 태도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무식하게 사는 것보다는 유식하게 사는 게 여러 가지로 바람직합니다. 시를 이해하고, 물리학도 좀 알고, 예술과 음악도 감상할 줄 알고, 철학을 아는 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분명히 됩니다. 신학도 그런 지혜를 얻는 한 방편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에만 절대적으로 묶여 있는 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미련한 사람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는 기적을 추구하던 유대인들과 지혜에 몰두하던 헬라 사람들이 대세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생각을 물리칩니다. 고전 1:24절에서 바울의 강력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유대인들이 구한 기적, 즉 하나님의 능력이고, 헬라인들이 추구하던 지혜라는 바울의 진술은 놀랍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진술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이게 말이 될까요?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말일까요? 단순한 종교적 덕담일까요? 심리적으로 황홀경에 빠진 한 광신자의 독백이나 넋두리에 불과할까요?


먼저 유대인들의 기적 신앙과 헬라인들의 지혜 신앙이 과연 우리를 구원하는지, 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미 그걸 뚫어보았기 때문에 과감한 발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적 신앙은 오늘날 성공신화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붙들고 있어야 할 진리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상대적으로 편해질 뿐이지만 그것이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목회에서도 성공과 실패를 말합니다. 수천, 수만 명 신자가 모이는 교회의 신자들과 담임 목사가 행복할까요, 아니면 백 명도 모이지 않는 대구샘터교회의 신자들과 정용섭 목사가 행복할까요? 물론 교회의 크기로 목사의 행복을 단순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눈에 기적처럼 보이는 목회 성공이 반드시 그 교회 신자들과 목사의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혜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지식인이나 교양인이 되는 수단입니다. 교양인과 지식인이 반드시 세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행복한 게 절대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 오늘날 스펙이 높고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출과 일몰의 장엄한 순간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도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세상에서 실패하고 무식해야만 행복하거나 구원받았다는 게 아닙니다. 구원과 행복은 그런 것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 전혀 다른 차원을 아는 데에는 성공신화나 지식이나 스펙이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26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당시 초기 교회에는 사회적으로 이름 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중산층 이하, 오히려 하층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노예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공동번역으로 26-28절을 읽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과감하다 못해 무모하다 느껴질 정도의 발언입니다. 이걸 상투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값싼 말로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다는 말은 신앙과 삶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지혜와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묶이기 쉽습니다. 그걸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데에 길들여집니다. 대학교 교수들은 자기가 배운 지식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법조인들도 자기가 아는 법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국정농단 중심에 선 최순실 씨의 딸 정 아무개 씨가 sns에 올렸던 돈도 실력이야 너희 부모를 탓해.’라는 문자가 이화여대 부정 입학과 연관해서 문제가 불거졌을 때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재미있으라고 날린 문자였겠지만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본다는 게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어느 고위 관료는 민중들을 개나 돼지처럼 먹을 거만 주면 된다는 식으로 폄하했습니다. 인간과 삶에 대한 왜곡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부단히 성찰하지 않으면 자기 주관에 떨어져서 편견을 갖고 세상을 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뚫어 보고,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하나님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복음의 세계로 부르셨다고 말했습니다.

 

해방의 능력인 십자가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의 지혜로 무장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대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늘 잘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의 부끄러움 운운은 사람들이 거리끼게 생각하고 미련한 것으로 치부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로 인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한쪽이 절대 생명을 얻으면 다른 쪽은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30절에서 이렇게 풀어서 설명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 구절에 핵심 단어는 지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해방입니다. 이런 성서 언어를 실감 있게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며칠 전 아침 식탁에서 제가 둘째 딸과 나눈 대화입니다. ‘창문 밖을 봐라. 응달에 아직 눈이 남아 있다. 대나무, 아침햇살, 그리고 딸과 대화하는 이 순간이 꿈결처럼 아름답지 않니?’라고 내가 말하자 딸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그래요? 그런 게 정말 느껴져요? 나는 그런 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저걸 보면 그냥 춥다는 느낌만 듭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고, 해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게 실제로 어떤 건지 이해가 되고 느껴지고, 그래서 거기서 어떤 삶의 능력을 경험하는지요? 아니면 전혀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지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덕택으로 우리가 해방을 받았다는 말을 봅시다. 나머지 세 가지 항목도 해방과 다 연결됩니다. 해방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이고, 그것이야말로 헬라인들이 추구하던 지혜이고, 유대인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근거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처형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당신 스스로도 십자가의 죽음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타협적으로 대처했다면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진해서 십자가에 달려죽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위기나 위협이 닥친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사실에 전적으로 부합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결국 그는 체포당하여 재판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한 결과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전혀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무기력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떨어지는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의 후예들입니다. 이제 세상의 여러 가지 주장에 솔깃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가 잘 났냐, 하는 것으로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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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7826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7027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5865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5989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5811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6237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422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768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6932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716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328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748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8503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6685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711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6425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486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326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6807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6731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8724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8804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8410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231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50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16444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7562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13196
76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6290
765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4] 2018-10-15 6266
764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101
763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738
762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5825
761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453
760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6286
759 창조절 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4] 2018-09-02 8155
758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565
75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093
756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6415
755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6225
754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6185
753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384
752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6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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