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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https://youtu.be/XQw39OHTzZs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8-25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사순절 셋째 주일, 201538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때 그를 따르던 이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젊디젊은 삼십대 초반입니다. 불교 창시자인 부처나 유교 창시자인 공자 같은 이들은 천수를 살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당혹스러운 일은 십자가 처형 자체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유대교의 율법이 아니라 로마 실정법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정치범에게만 해당되는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차라리 돌에 맞아 죽었으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산헤드린 종교재판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 과정에서 제자들이 비겁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이런 충격의 결과입니다.

 

십자가의 스캔들

십자가 사건 앞에서 받은 제자들의 충격은 그 뒤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고전 1:23절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이 구절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하나는 우리라고 하는 기독교인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이고, 그 다음은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거리끼는 것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스칸달론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스캔들이라는 영어가 이 헬라어에서 온 겁니다. 스캔들은 남녀의 부적절한 관계를 가리킬 때 쓰입니다. 일종의 추문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헬라어로는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우리 말 성경이 거리끼는 것이라고 번역한 것은 옳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것이기 때문에 거리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갈 3:13절에서 이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그 구절을 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린 자는 모세오경인 신 21:23절의 인용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큰 죄를 짓고 사형당한 이의 시체를 일정 시간 동안 나무에 달아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부관참시와 비슷한데,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조치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그 시체를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놓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이의 시체로 인해서 땅이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의 십자가와 신명기가 말하는 나무는 둘 다 사람을 매단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만 그 잔인성이라는 점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신명기는 사형에 처해진 사람의 시체를 일시적으로 나무에 달아놓으라고 했지만, 로마법은 처음부터 사형수를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빨리 죽이지도 않습니다. 손에 못을 박아놓고 피가 흘러나와 죽을 때까지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놓습니다. 보통 건장한 남자는 보름 정도 거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죽어도 시체를 날짐승이나 들짐승들이 뜯어먹도록 내버려둡니다. 이런 사형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건지는 로마 정권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십자가 처형을 실행했습니다.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저항한 반국가 사범들 중에서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눈에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바보 같은 일이라는 겁니다. 당연합니다. 로마 제국에 저항한다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어리석습니다. 하나는 이 저항이 승산 없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입니다. 로마는 막강합니다. 특히 그들의 군사력은 주변의 여러 나라를 초토화시킬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로마를 대항해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무모하게 칼을 들고 나선다는 것은 만용이고, 미련한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제국이 당시에 정의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정치, , 군사, 의학, 예술, 철학, 그뿐만 아니라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로마 문명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습니다.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 21세기 까지 사회와 국가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정의를 확보하고 있는 로마 체제에 도전하다가 십자기에 달려 처형당하는 일은 미련한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의 생각과 전혀 달리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외칩니다. 그 사실을 24절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놀라운 발언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바울을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종교적 열정과 깊이에서 뛰어났던 유대인들의 생각을, 그리고 정치와 사상과 예술의 깊이가 탁월했던 로마 헬라사람의 생각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생 실패의 본보기인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라라고 외치는 바울을 지지할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을 겁니다. 바울의 발언은 무슨 근거가 있을까요? 아니면 종교 열광주의자의 독백에 불과한 것일까요?

 

지혜의 한계

바울은 세상이 말하는 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지혜는 헬라어 소피아입니다. 모든 민족은 다 이 소피아를 진리의 근거로 여깁니다. 유대인들도 지혜를 말하고, 헬라인들은 더더욱 지혜를 말합니다. 철학(philosophy)은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와 지혜를 가리키는 소피아의 합성어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의 근본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지혜롭게 살려고 최선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그리고 미련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지혜가 과연 옳으냐, 하고 따지고 듭니다. 본문 19절에서 사 29:14절을 인용해서 세상의 지혜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이어서 20절에서 그는 더 밀고 들어갑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으며, 선비가 어디 있으며,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가 열거한 사람들은 그 사회를 대표하는, 요즘 말로 오피니언 리더들입니다. 선생,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 목사, 휴머니스트, 변호사 등등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냉소주의자가 아닙니다. 자타가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실체를 뚫어본 것뿐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도 바울이 열거한 사람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넘쳐납니다. 그들이 개인과 사회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개인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나름으로 성실하게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가만히 있어주는 게 나을만한 사람도 제법 많습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봅시다. 모두 선한 의도를 갖고 성실하게 자기 일을 감당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무엇이 달라질까요? 겉모양은 약간의 변화가 있을지 몰라도 근본은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법만 해도 그렇습니다.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옛날에 비해서 지금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우리의 삶을 얼마나 새로워졌을까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할 부분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혜라고 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피조물인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입니다. 우리는 선의를 갖고 일을 해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맺을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전체에 대한 통찰 없이 부분에만 매몰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노벨이라는 사람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노벨상을 제정했습니다. 그런데 노벨 이후로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칼과 창으로만 쓰다가 이제 총과 폭탄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인해서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생명의 위험성이 높아집니다. 소유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인간성과 그 연대성은 취약해집니다. 스마트 폰이 이렇게 일반화되리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것으로 사람들이 더 친해지고 똑똑해지는 것처럼 느끼겠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갑니다. 이런 걸 예로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지혜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다는 바울의 진술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본문 22절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원의, 즉 생명 완성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헬라인들에게 해당되는 지혜가 유대인들에게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많은 표적을 보여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구약성서에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에 얽힌 일화들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으며, 여러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런 표적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것들입니다.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을 표적으로 삼을 것이며,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표적으로 삼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기적과 표적을 모두가 꿈꾸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스캔들이었으며,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아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근거가 무엇일까요?

 

우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능력은 헬라어 뒤나미스입니다. 본문인 고전 1:1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번역은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뒤나미스 데우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보통 다이내믹하다.’고 할 때의 그 다이내믹입니다.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다이너마이트도 이 단어에 온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폭발적인 생명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능력은 사람이 재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표적과 지혜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본문 고전 1:21절에서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표적과 지혜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의 눈에 그것은 거리낌의 대상이고 어리석은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인지, 즉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다는 말이 옳다고 해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면, 사이비 이단 교주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바울의 주장을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 믿고 죄 용서 받아 구원에 이른다는 기독교의 초보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는 죄의 용서를 가리킵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도둑질, 살인, 폭력, 분노, 전쟁 등을 생각해보십시오. 인류는 늘 이런 것들에 시달려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해보려고 많은 일을 시도했습니다. 윤리와 도덕 명제들이 생겼습니다. 거기에 철학도 포함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죄를 무지라고 보았습니다. 사람이 뭔가를 깨우치면 죄를 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앞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의 표적과 헬라인들의 지혜가 다 이런 시도들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간의 죄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인류의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 용서의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십자가는 인간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믿음만을 요구합니다. 사람은 착하게 살고 인격적으로 산다고 해서,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계속해서 강조된 것인데, 죄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용서받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간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워졌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이 일어났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일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말할 때 전제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이것은 표적과 지혜로 우리가 생산해낼 수 없습니다. 무에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생명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서 죄의 결과인 죽음은 극복되었습니다. 부활의 승리 앞에서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의 죽음은 더 이상 거리낌의 대상이 아니고 미련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보다 더 소중하거나, 더 결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 기독교인의 인생 전체는 사순절입니다. 마지막 때 완성될 부활 생명을 앞두고 있으나, 그 이전의 시간을 살아내야 할 이 현실은 고난과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예수의 십자가에 이미 부활의 빛이 은폐의 방식으로 비추고 있는 것처럼 이 사순절과 같은 우리의 인생에도 부활 생명의 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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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석진혁

March 09, 2015
*.35.171.143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늘 건강조심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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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9, 2015
*.94.91.64

ㅎㅎ 삼송 님이 살아있었군요.

다비아로 인해 받은 고난을

제가 어떻게 복구해드려야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대글로나마 만나게 되어서

반갑고, 또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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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March 10, 2015
*.105.196.66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어리석고 미련하게만 보였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는데...

어느날, 내게 있어 구원의 근거가 되고,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으로 믿어졌고, 말씀을 대할때마다, 마음이 설레이는 은혜가 제게 있어서는 큰 기적입니다..

또한 말씀하신대로 부활의 사건이 십자가의 구원사건을 완성시켜줌으로..현재는 삶자체가 고난이지만,

마지막때 완성될 생명의 부활사건을 소망할수 있음에 감사가 됩니다..

유대인에게 십자가 사건이 거리낌이 된다는것을 "십자가의 스캔들"이라는 헬라어단어<걸려 넘어지게 한다>로 자세하게 설명해주셔서.. 그때 당시에 메시야라고 하는자의 십자가 사건을 목도해야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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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0, 2015
*.94.91.64

은나라 님이 기독교 신앙이 중심으로 들어가 있으시네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구원의 길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우리의 기쁨과 평화가 훼손되지 않을 겁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분인데도

신앙 안에서 생각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게 신비롭군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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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신마적

March 10, 2015
*.26.142.192

정용섭 교수님.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건강하게 잘 계시죠? 다른게 아니라 문득 기독교 교리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예수의 유일회성과 그 유일회성을 바탕으로 한 삼위일체론이 아닌가 생각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다름 아닌 소위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 예수의 유일회성을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고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상당수의 기독교인들로 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키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종교다원주의라는 게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고 괜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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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0, 2015
*.94.91.64

신마적 님, 반갑습니다.

설교와 상관없이 질문한 거지요?

예수의 유일회성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이라고 해야지요.

물론 그게 그것이지만요.

예수는 당연히 자연인이기에 유일하지요.

다만 그가 그리스도인가 하는 점에서 여러 이야기가 가능한 거에요.

질문의 핵심은 종교다원주의인가요?

그게 하나의 '주의'로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종교, 또는 종교경험이라는 건 절대적인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지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을 쏟아놓으면

이미 그건 종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하나의 종교 철학 쯤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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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10, 2015
*.176.175.230

하늘이 열린다는 글귀가 그동안 햇빛과 비둘기에 가려져서

중요한 사실을 몰랐었습니다.

누군가가 제대로만 알려 주었다면.

아니, 제가 더 똑바로 알려고 노력을 했었다면

이 중요한 사실을 진작에 알았을 텐데.

하지만 오늘 또 새롭게 알고 또 알아가는 삶이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좋습니다

야곱의 사다리란 영화가 있습니다.

팀 로빈스가 나오는데 제목이 야곱의 사다리 ?

매치가 늘 되는건지 안되는 건지 몰랐었습니다.

아마 한 10년 정도는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그 영화를 본 당시엔 제가 신앙을 가지질 않았었지만

제목의 의미를 알려고 했었는데 몰랐었습니다.

그  뒤로도 막상 성경책을 보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몰랐었습니다.

이제 목사님 말씀으로 이해를 하고나니 그 영화의 감독의

의도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목사님의 말씀설명으로 그 동안 몰랐던 사실들이

구멍난 모자이크가 채워 지듯이 채워지면서

완성된 그림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란 말이 새생명이 주어진다란 말과

생각해보니 참으로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조금전 까지만해도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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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0, 2015
*.94.91.64

<야곱의 사다리>라는 영화가 있군요.

제 설교에서 그 영화가 연상된다니,

나도 한번 보고 싶네요.

구멍난 모자이크 채우기라...

멋진 표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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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March 14, 2015
*.156.251.135

목사님, 설교말씀 잘 먹고 갑니다.

위의 설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한 가지 질문드리겠습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한라산신제를 제관직 수행을 거부했다고 뉴스에 나왔더군요.

공인으로서 크리스찬과

사인으로서 크리스찬 사이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다는 건

욕먹을 각오없이는 불가능했을텐데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와, 대단하다, 믿음 좋네 하겠지만

비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틀림없이 개독 운운하며 욕할텐데 

정목사님의 입장에서는 이런 신앙적인 행동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만일 비기독교인들이 원희룡지사에게 개독운운하며 비판한다면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까요? 정목사님의 생각이 어떤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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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5, 2015
*.94.91.64

예, 그 상황을 제가 잘 몰라서 뭐라 끊어서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그분의 신앙을 제가 판단하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니에요.

다만 제가 그 경우라면,

제관직을 수행했을 겁니다.

불신자 가정에 시집간 기독교인이

집안 분위기를 흐트리면서까지

제사를 거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비슷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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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1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303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11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838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487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2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01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649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7406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7731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15683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0812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760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16
717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578
71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620
71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08
714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566
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30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8191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05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19
709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774
708 창조절 죽음 넘어! (출 12:1-14) 2017-09-11 8184
707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02
706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468
705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882
704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83
703 성령강림절 빈 들에서 배불리 먹다 (마 14:13-21) [8] 2017-08-06 8049
702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4987
701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47
700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881
699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40
698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09
69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59
696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368
695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07
694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266
693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41
692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475
691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26
690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19
689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742
688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394
687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50
686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889
68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5978
684 사순절 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2] 2017-03-26 8181
683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53
682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357
681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29
68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7
67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03
678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6
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770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03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399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31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35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2979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02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0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19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54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078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1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27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39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696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32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586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465
659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269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67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48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47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5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072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07
65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084
65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골 1:1-14 [9] 2016-07-11 7994
6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06
649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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