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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 (계 1:4-8)

창조절 조회 수 9001 추천 수 0 2015.11.22 19:04:37
설교듣기 : https://youtu.be/CyLVc_FDMqs 
성경본문 : 요한계시록 1:4-8 

알파와 오메가

1:4-8, 창조절 열두번째 주일, 20151122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오늘 제3독서인 요한계시록 1:4-8절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와 문장이 많이 나옵니다. 평소 성경을 자주 대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런 본문은 거리가 멀게 느껴질 겁니다. 몇 개만 나열해보겠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보좌, 일곱 영, 땅의 임금들의 머리, 죄에서 해방, 나라와 제사장, 구름타고, 애곡, 알파와 오메가 ... 등등입니다. 성경 자체가 낯선 텍스트인데, 요한계시록은 유별날 정도로 그런 성격이 강합니다. 그 이유는 문학과 예술에 초현실주의 작품이 있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이 초현실적 방식의 글쓰기인 묵시문학에 근거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문학은 하나님이 비밀스럽게 자신의 뜻을 알린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인간의 운명과 우주의 미래를 해석하는 글쓰기입니다. 요한계시록 1: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을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천기누설쯤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그런 잘못이 이단들에게서 자주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계 7:4절에 인침을 받은 144,000’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이 숫자를 문자적으로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숫자가 채워지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집단들이 한국교회에 그동안 많았는데, 최근에는 신천지가 대표적입니다. 이 숫자는 상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12는 완전 숫자입니다. 열두 지파도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144,00012,000 곱하기 12입니다. 이 숫자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의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안전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13:18절에는 짐승을 추종하는 이들의 숫자인 666이 나옵니다. 666을 상품의 바코드와 비교하면서 종말이 가까이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666은 알파벳을 숫자로 계산한 것으로서 기독교를 가장 극력하게 박해했던 네로 황제를 암시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단어와 숫자를 통해서 당시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을 위로하고 싶어 했던 한 기독교 지도자의 글이라고 보면 됩니다. 묵시문학 장르의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시 로마 황제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알았다면 불로 태웠을 겁니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지난 한달 여 동안 대한민국이 몸살을 앓았습니다. 찬성과 반대가 충돌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정부 입장은 우리의 역사를, 특히 근현대사를 국가에서 발행하는 교과서 한 가지로 가르칠 테니 다른 주장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역사 교과서를 국가에서 발행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북한을 비롯해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소수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도 유엔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내년부터 검인정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검인정에서 자유발행으로 나가지는 못할지언정 국정으로 퇴행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말고 없을 겁니다.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 대부분의 역사교과서가 좌편향이라서 이를 배우는 학생들의 국가관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염려가 된다면 수정 명령을 내리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검인정을 내주지 않으면 됩니다. 더 좋은 방식으로는 현재의 교과서보다 질적으로 뛰어난 교과서를 만들어서 서로 경쟁하게하면 됩니다.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찬성하는 국민들의 숫자보다 반대하는 숫자가 훨씬 많을 뿐만 아니라, 역사 전공 교수들과 교사들 대부분이 반대하는 국정화를 밀어붙이기 식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21세기 문명국가에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서해석 문제가 이와 비슷합니다. 성서 문자주의에 떨어져 있는 분들은 대구샘터교회 정용섭 목사의 성서해석을 자유주의신학에 치우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성서라는 단어까지도 꼬투리를 잡습니다. 성경(聖經)이지 어떻게 성서(聖書)냐고 말입니다. 노아홍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신화에 근거한 것이라는 저의 글을 읽고 어느 신학대학 교수는 성경을 신화로 보는 정용섭 목사의 성경관은 자유주의적이어서 동의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성서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감습니다. 성서 해석이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엄중한 사실의 깊이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겁니다. 성서문자주의는 신자들의 생각을 통제하는 억압 장치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목사들은 설교의 권위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나 질문을 제기하면 안 된다는 식입니다. 제가 보기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성서문자주의와 다를 게 없습니다. 자기만의 해석을 절대화해서 권력으로 다른 해석을 발 못 붙이게 하면 역사는 결국 왜곡됩니다. 극단적인 상징을 통해서 당시의 역사를 비밀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요한계시록 기자의 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이 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와 문장들은 일단 겉으로 보면 순전히 종교적인 내용입니다. 로마 황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로마 황제에 대한 비판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위에서 666이라는 숫자가 바로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과 초기 기독교 문헌은 다 로마 제국을 역사적 배경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로마 형법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를 퀴리오스’()라 고백한 것은 당시 로마 황제를 퀴리오스라 주장한 로마의 정치이념을 거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사실이 분명하게 들어 있습니다. 아주 장엄한 필치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저는 가슴이 뜁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여기서 알파는 헬라어 알파벳 첫 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현재도 계시고, 과거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으로서 전능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런 존재를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에게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를 맡겼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페터 아이혀(P. Eicher)신학의 길잡이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신학의 주제를 완전히 잘못 다룬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초보자들이 신학연구에서 추구하는 내용을 내가 완전히 놓친 것이 아니라면 신학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물음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물음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지는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닙니다. 신자들이 모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해서 대화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평소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합니까? 부부와 가족이 밥상 앞에 앉아서, 또는 차 한 잔 앞에 놓고 하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화하는 기회가 있나요? 가정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런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한 채 산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상의 범람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들, 또는 손에 넣고 싶은 것들에게 마음을 다 쏟고 삽니다. 하이데거 표현을 빌리면 일상에로의 퇴락입니다. 어떤 개인 집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주인은 정신을 차리기 힘듭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나온다고 합니다. 통계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이와 비슷합니다. 모든 것이 필요해보입니다. 모든 것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뱀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보니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예쁘고 영양가도 있어 보였다는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백화점이나 대형매장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불 난 집의 주인과 같이 쫓기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게 허무하다는 것을 누구나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것에 마음을 더 쏟습니다. 거기서 진도가 더 나가면 그런 일상을 우상처럼 섬깁니다.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세상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듭니다. 스타들을 생산해냅니다. 그런 것들이 알파와 오메가의 자리에 올라섭니다. 대중들은 그들에게 대리만족을 경험하면서 삽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에게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로마 시대 사람들은 로마 황제가 알파와 오메가라고,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많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무소불위의 제국이었습니다. 로마의 군사와 정치와 경제와 예술과 철학이 절대적인 선이었습니다. 로마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전차 경주와 격투사들의 싸움은 오늘의 축구 월드컵 못지않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 제국에서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제는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시대정신을 거부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이며, 하나님만이 현재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이라고, 역사를 초월하여 권능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라는 황제숭배에 기초한 제국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집단인 기독교가 그들에게 눈엣가시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은 로마의 박해에 대항해서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로마 권력과 타협하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길입니다.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는 겁니다. 황제 숭배는 정치적인 거니까 대충 따라가고,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인 거니까 이것대로 최선을 다 하면 됩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타협과 절충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듯이 로마 황제를 섬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무력 투쟁을 벌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반로마 무력투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 이런 혁명가들이 많았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순교를 당할지언정 로마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고, 무력으로 맞서지도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방식으로 성장해서 결국 기원후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선포된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기독교의 실제 역사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초기 기독교가 알파와 오메가로 자처하던 로마 황제의 무소불위적인 존엄 앞에서 비굴해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데에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합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라고, 그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라고 믿었고, 그 믿음대로 살았고, 그 내용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후예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이 알파라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1:1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사도신경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세상의 창조주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가 볼 때 착한 사람에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우주 전체의 근원이십니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가리켜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로마 황제의 박해에 굴복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이 알파라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막연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태어나기 이전 시간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득한 과거의 그 빅뱅이 일어나던 순간에도 계셨고, 그 이전에도 계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근거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떤 존재가 여러분에게 필요합니까?

 

2) 하나님이 오메가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21:1절 이하에 따르면 그 완성된 세상을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눈물, 죽음, 애통, 통곡, 아픔이 없는 세상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상상이 잘 가지 않을 겁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웃음과 삶과 즐거움을 느끼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세상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마지막 때에 모든 세상과 삶이 완성된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이자 은유입니다. 로마 황제는 눈물과 죽음과 아픔을 씻어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게 가능합니다. 로마 황제의 존엄에 굴복하라고 강요받던 시대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라고 말입니다. 정말 혁명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가 22장에 이르는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신 분들이 계십니까? 황당한 이야기도 제법 나옵니다. 하늘이 종이두루마리처럼 말린다거나 바다에서 용이 나오는 광경도 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그 역동성에 감동을 받습니다. 전혀 새로운 언어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일이나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대통령이나 필부나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조 단위의 재산이 있는 사람이나 겨우 먹고 사는 정도의 사람이나 인간의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모두 이 세상에서 한 순간 살다가 떠나야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대상에 매달려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밥벌이를 포기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 해방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생살이의 처세술을 말씀드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삶의 근본만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하나님에게 눈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만물 속에) 계시고, 전에도 (우주와 인류 역사에) 계셨고, 장차 (세상 마지막 때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 오실 분입니다. 그는 바로 모든 것의 알파이며, 모든 것의 오메가이십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이 세상과 그 안에서의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미래라는 사실을 믿고, 안심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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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November 23, 2015
*.72.188.140

위대한 구원, 위대한 위로, 위대한 하나님입니다.

역시나 우리들이 머물러야 할 자리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근에, 스피노자 관련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 속에서 '위대한 긍정' 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비교가 안된다는 생각 뿐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거기서 거기' 일 뿐 입니다. 

오늘 아침도 지겨운 밥벌이라며 한숨쉬며 나왔는데,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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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3, 2015
*.94.91.64

스테이트루 님에게는

기독교 변증가의 소양이 엿보입니다.

잘해보세요. ㅎㅎ

스피노자 책을 나도 한번 읽고 싶긴 한데,

좀체 기회가 없네요.

그분의 이야기를 틈틈히 해주세요.

주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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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November 23, 2015
*.237.104.169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심을 믿기에,

육체적 죽음이 두려움이 아니라

삶에서의 해방이 될수 있음을 믿게되고,

이세상 사는동안은

불난집의 집주인같은 일상에로의 퇴락에 

떨어지지않을 힘이 함께하실것을

믿습니다. 우주와 인류역사에 계셨던 하나님이 

만물속에 계셔서 이제 저에게도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목사님, 이게 존재론적 행복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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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3, 2015
*.94.91.64

에스더 님의 대글만 읽으면

설교의 핵심을 그대로 알 수 있겠네요.

세상 삶의 조건에 지배당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맡김으로써

선물로 주어지는 행복이 존재론적인 거 맞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그분,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분에게

우리의 영적인 주파수를 맞추고

투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이 현실을 뚫고 나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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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3, 2015
*.94.91.64

설교 중간 쯤에 밀라노 칙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착각해서 323년이라고 했는데,

아무개 다비안이 313년이라고 짚어줘서 고쳐 놓았습니다.

참고로 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밀라노 칙령은 물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것이고,

놀랍게도 니케아 종교회의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소집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고맙기는 한데,

그때부터 기독교가 조금씩 어용종교 맛을 보여서

기분이 영 개운치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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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November 24, 2015
*.254.87.93

지난주 설교에서
존재론적인 자유와 존재론적인 기쁨이란 표현을,
이번 설교에서는 일상사에 함몰되어 사는 삶으로부터의 해방.... 이란 표현을 하셨군요

내가 진정한 구원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하는 기준이

어쩌면  "지금 내가 존재론적인 자유,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일상사에 함몰되어 살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자유한 자로 살고 있는가?" 가 아닐런지요

구원받은 백성임을 자처하며,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내었던 유대인들이
장작 예수님 눈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로 비춰졌듯이,
우리네 삶 또한 그들이 종교생활로 지고 살았던  그 짐에다

한술더떠 이 시대 불신자들이 떠안고 사는 세상사의 짐(근심, 염려, 두려움)까지 겸하여 떠안고 사느라,
존재론적인 자유와 기쁨은 그저 성경속에서나 접하고 마는, 아니면 설교시간에 스쳐지나가듯 듣고 마는 ....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유대인들보다 심히 더 불쌍한 존재로 여김을 받고 사는건 아닐런지요.

그러면서 나는 구원의 삶을 살고 있노라..   치명적인 자기기만에 빠진채

또 자기가 그런 착각속에 사는지도 모른채

저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철저한 자기의의 철옹성에 갇힌채 열심을 내고 있는건 아닌지요.

혹시 내가 저 유대인들과 다를바 없는 건 아닐까...  평생 의심이나 한번 해볼까요?

 

일상사에의 함몰로부터 자유,
존재론적인 기쁨과 자유...
이는 결국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그 분이 이루신 경륜이 무엇인지를 아는 고만~~큼 인식하고 누리며 살수 있겠죠?

오늘도 그 길로 부지런히 가야겠구나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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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4, 2015
*.94.91.64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나는 평생 교회 밥 먹는 목사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이 세속의 삶에서 얼마나 치이는지는

생각으로만 알지 실제로는 잘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마다

내가 뜬 구름 잡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합니다.

밥벌이의 살벌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 통치라는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어요.

그래도 성서가 말하는 세계를

내가 알고 있는 정도만큼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 삶의 조건에서 좌지우지 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존재론적 기쁨과 자유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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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November 24, 2015
*.220.31.66

매주 월요일에 목사님 설교말씀을 보다가 오늘 좀 늦었습니다.

저 또한 일상이 늘 눅눅치 않고, 그렇다고 교회생활도 열심인 사람이 아니어서, 늘 말씀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마치 비밀이라도 간직한 양 기독교에 대해 나름 쫒아가고 있긴한데, 오늘도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 존재론적인 자유을 진정으로 모르니 - 자꾸 현실이 힘들때 드는 하나님 생각이, 도구화되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 또한, 내가 나 되게 하심은, 그리하여 종국에 생명의 완성에 참여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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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4, 2015
*.94.91.64

상수리 님이 저의 설교를 매주 애독(?)하신다니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수영이 정말 힘든 건데,

할줄 아는 사람은 쉬운 것처럼

상수리 님이 말한 '존재론적인 자유'도 역시

그 안으로 들어오면 쉬워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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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4, 2015
*.94.91.64

144,000에 대한 짧은 코멘트에 오류가 있었네요.

1,200 곱하기 12라고 말했는데,

그게 아니라 12,000 곱하기 12입니다.

이것도 아무개 다비안 님이 알려주어서

본문을 고쳐 놓았습니다.

제가 요즘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일에 정신을 판 탓인지

이런 실수를 자주 저지르네요.

내일은 하루 종일 늦가을 비가 온다고 합니다.

충만하게 누려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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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February 01, 2017
*.222.51.58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면서 보다 많은 하나님에 대해서 대화하는 시간이 부족하였습니다.

부족했던 이유가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을 생각했다가 돌아서면 나의 믿음이 생활에 매몰되어 식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알고 있는 것을 용기있게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식들에게 자연스럽게 재미있게 더 잘 전달하고 질문을 받을 수 있게 공부하겠습니다.

목사님의 훌륭한 해석들을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데 

게으르다는 사실에 부끄럽습니다. 

깨끗한 물 한잔과 같은 말씀들을 애들에게 잘 먹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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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2, 2017
*.164.153.48

자녀들에게 다비아 글들을 전하기는 간단하지 않으니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다비아 글을 직접 전하기보다는

진인택 님이 이해한 걸 바탕에 놓고

서로 대화하는 건 좋아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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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79
748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막 4:26-34) [5] 2018-06-17 6666
747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5483
74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10611
745 성령강림절 거듭남과 성령 (요 3:1-13) [2] 2018-05-27 8083
744 성령강림절 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4] 2018-05-20 5826
743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6979
742 부활절 성령 임재의 증거 (행 10:44-48) 2018-05-06 7669
741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7250
740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5570
739 부활절 예수의 살과 뼈 (눅 24:36-48) [4] 2018-04-15 7829
738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024
737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554
736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4] 2018-03-25 7375
735 사순절 예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요 12:20-33) [4] 2018-03-18 6629
734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1822
733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21
732 사순절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7] 2018-02-25 8347
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5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310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18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844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487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7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07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657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7414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7742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15696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0821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764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23
717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583
71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628
71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09
714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569
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34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8196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08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24
709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780
708 창조절 죽음 넘어! (출 12:1-14) 2017-09-11 8186
707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06
706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473
705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887
704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90
703 성령강림절 빈 들에서 배불리 먹다 (마 14:13-21) [8] 2017-08-06 8053
702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4993
701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50
700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881
699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42
698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12
69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1
696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374
695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12
694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275
693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43
692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477
691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29
690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21
689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753
688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400
687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54
686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894
68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5983
684 사순절 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2] 2017-03-26 8184
683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56
682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359
681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32
68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67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06
678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7
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771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06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403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34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39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2985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09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8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26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60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091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7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31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4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710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36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588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466
659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271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70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51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50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7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080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11
65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086
65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골 1:1-14 [9] 2016-07-11 7998
6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08
649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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