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창조절 조회 수 8320 추천 수 1 2016.09.04 19:48:08
설교듣기 : https://youtu.be/eTs2V6E2MvM 
설교보기 : https://youtu.be/4r4skemb4ik 
성경본문 : 누가복음 14:25-33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14:25-33, 창조절 첫째 주일, 201694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천 년 전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과 맺은 관계는 각각 다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고, 소문을 듣다가 궁금증이 발동해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배척하고, 더 나가서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유대교 지도층 인사들이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를 맺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복음서에 많이 나옵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은 이들도 있었고, 그중에서도 예수님과 더 친근한 관계를 맺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서 서로의 입장이 다릅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모두 제자로 사는 건 아닙니다. 한발 물러선 방관자도 있고, 호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고, 제자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입장인가요?

 

현대 기독교인들이 제자로 산다는 것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상에 과도하게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눅 14:15-24절에는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초청받은 사람이 각각 핑계를 대고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한 사람은 얼마 전에 구입한 밭에 나가봐야 하니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고, 둘째 사람은 새로 산 소 열 마리를 길들이기 위해서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고, 셋째 사람은 결혼 건으로 시간을 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비인격적이거나 불성실한 사람들이 아니며, 일부러 잔치 초청을 거부한 것도 아닙니다. 일상에 매몰됨으로써 그것 너머의 잔치를 현실로 느끼지 못한 것뿐입니다. 오늘날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을 현실로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것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업 전도자, 즉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제자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역시 제자의 삶에서는 소외됩니다. 자신은 전업 전도자가 아니니 제자의 삶과는 관계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겁니다.

 

가족을 미워하라

예수님은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사람들에게 제자 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과격해서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정도입니다. 26절을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문장에 열거된 이들은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를 맺는 대상들입니다. 이런 관계는 본능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미워하라는 말은 천륜을 거부하라는 거나 똑같아서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원수 사랑까지 사랑하라 말씀하신 분의 말씀이라고 믿기 힘듭니다. 예수님은 고르반전통(1:2-3; 2:1; 3:1; 7:12-17)에 근거해서 부모 부양을 거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한 적도 있습니다(9:1-13).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가족과 직업을 포기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상식적으로는 물론이고, 또는 평소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해서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워하다.’는 뜻의 헬라어는 미세오’(μισέω)입니다. 이 단어가 셈어 계통에서는 덜 사랑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사네제쳐놓다. 버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의 미워하다.’는 말은 감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미워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단절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으로 가족을 미워하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만 의지적으로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건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관계라고 해서 늘 붙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떨어져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사람보다 동물들이 더 바르게 행동합니다. 동물들은 자식이 어느 정도 자라면 냉정할 정도로 그 관계를 단절합니다. 독립시키는 겁니다. 그게 각자가 다 사는 길입니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전체 메시지와 연결해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전체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창기부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일상에 대한 염려는 이방인들에게 속한 거라 규정하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고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에 대한 염려와 가족 관계에 대한 염려는 같은 차원에 속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삶에서 긴급하기도 하고 절대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삶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이런 것들이 상대적인 차원에 떨어집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면 삶이 파괴됩니다. 이런 정도는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나라를 절대적인 것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없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겉돕니다.

 

하나님 나라가 왜 절대적인 것인지를 제가 이 시간에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성경을 펼치면 이런 설명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지만, 그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실감이 가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창조를 빅뱅이라는 물리학 용어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138억 년 전에 일어났던 빅뱅을 일으킨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면, 그분을 절대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게 너무 먼 이야기라면 지금 우리 가까이 있는 모든 사물의 구조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물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나 나무의 몸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구성 요소는 똑같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정을 통해서 각종 생명체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의 경우만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어떤 이들은 시리아에서 태어났고, 또 어떤 이들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이 각자 그 나라를 선택한 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나서 각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비밀입니다. 그 비밀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비밀이 곧 하나님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 절대적인 비밀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는 것에 예속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결단을 강렬한 표현으로 바꾸면 가족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꿰뚫어볼 때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소유를 버리라

이런 설명을 듣고 예수의 제자로 사는 게 너무 어렵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냥 교회생활에 충실하고 세상에서 착실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사는 정도로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칭찬받을 수는 있지만 예수의 제자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여러 가지 점에서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었던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27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두 가지 예를 듭니다. 하나는 망대 건축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에 대한 것입니다. 망대를 건축할 사람은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을 미리 계산해야 합니다. 그런 준비가 없을 때 망대 건축은 실패할 것이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상대의 군사력과 자신의 군사력을 비교해보고 승산이 없다면 미리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합니다. 이런 예를 든 다음에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33절에서 다시 한 번 더 짚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은 복음서에서 우리가 종종 들은 겁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하고 질문한 한 부자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18:22).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은 일상의 작동원리에서 벗어난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 중에서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출가 수도승 말고는 하나도 없을 겁니다. 실제로 기독교인의 삶을 철저한 무소유와 철저한 금욕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소유가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도 앞에서 가족에 대해서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가족을 실제로 미워하라는 게 아니듯이 소유 자체를 부정하라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세계 앞에서 소유를 상대적인 차원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걸 강조하는 뜻으로 소유를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좀더 솔직하게 생각해봅시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소유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겠지만, 소유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 겁니다. 각자 차이가 많습니다. 이건 억지로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충 양다리를 걸쳐놓고 살아가라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16:13) 보듯이 대충 엉거주춤한 상태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어느 한쪽으로 쏠려 있을 겁니다.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강요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소유 문제에서 그냥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으로 넘어가든지 소유에 집착하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쉼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지 닦달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해될 수 있는 말씀을 본문에서 하신 걸까요?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며칠 전 저의 둘째 딸을 테니스장에서 만났습니다. 보통은 딸이 저보다 30분 일찍 와서 코치에게 레슨을 받고 돌아가면, 저는 그 다음 시간에 와서 동호회원들과 게임을 합니다. 지난 1년 동안 딸은 테니스 레슨을 받았는데, 제가 보기에 실력이 별로 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작심하고 레슨 시작하기 전 30분 동안 제가 개인적으로 넬리 연습을 시켜주려고 한 겁니다. 테니스는 다른 운동에 비해서 배우는 게 힘듭니다. 꾸준하게 레슨을 받고, 개인 연습도 해야 합니다. 꾸준하게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게임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레슨과 연습의 어려움을 감수하는 이유는 테니스가 주는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쁨이 없다면 돈을 준다고 해도 레슨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관계를 단절하는 것과 소유를 포기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로 사는 기쁨에 이르는 거룩한 레슨입니다. 이 두 사실은 상호적인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사는 기쁨을 알아야만 가족과 소유라는 일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일상의 과잉으로부터 벗어나야 제자로서의 기쁨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우선권은 당연히 전자, 즉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입니다.

 

제자로서의 기쁨

그 기쁨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세상의 절대적 비밀인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기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이 생명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돈과 인간관계와 건강으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2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 생명입니다. 만약 이런 말씀을 확실하게 알고 믿을 수만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것입니다.

 

오래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했다는 것을 절감할 수 없으며, 주변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말을 공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제가 짧은 설교를 통해서 이해시키거나 설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신앙 경험은 사도 바울이 예수 추종자들을 박해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회심한 것처럼 특별한 계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회심의 계기는 갑작스럽게 올 수도 있고, 시나브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계기를 전제하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해방 경험입니다.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이런 해방을 삶의 현실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런 해방의 능력으로 살아가시는지요. 영혼의 해방을 매 순간 누리고 있으신지요?

 

해방의 반대는 억압입니다. 절망일 수도 있고, 허무일 수도 있고, 그것의 다른 한 면인 과도한 열망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은 집착과 불안과 허무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주 작은 일로도 성질이 나고,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인격이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많을 겁니다. 우리가 숨이 붙어 있는 한 그런 걸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의 운명에 가까이 가면 그런 일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내공이 실제로 깊어진다면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 소꿉놀이 때의 유치한 생각과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거와 같으며, 테니스 실력이 늘면 힘 들이지 않고도 공을 잘 다룰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이런 신앙의 경지를 원하시지요? 문제는 원하기만 하지 노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도자처럼 예수의 운명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걸 느낄 겁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진 것입니다. 지금 여기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 예수보다 더 참혹한 운명으로 떨어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실질적으로 알고 믿는다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해방의 능력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초월을 가리킵니다. 이로 인해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와 소유에 대한 생각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능력입니다.


profile

[레벨:17]홍새로

September 04, 2016
*.224.15.62

가족을 미워하라, 소유를 버려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

전에는 예수님이 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지 정말 답답했었지요.

오늘 목사님 해석을 통하여

이 세상의 절대적 비밀인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삶의 절대적 조건들 이라고 여겼던 것조차도 

상대적인 차원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사는 기쁨을 알게 된다면

예수님이 닦달하시는 분이 아니라 

참된 쉼과 자유를 주시는 분임을 알수 있다고 하시니,

일상의 과잉으로 부터 벗어나는 거룩한 레슨을 해야겠습니다.

예수보다 더 참혹한 운명으로 떨어진 사람은 없을것이며,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되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5, 2016
*.164.153.48

기독교 기초를 성실하게 공부하고 있네요.

소걸음처럼 느리겠지만 가다보면

어느 사이에 깊은 영적 숲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걸 느낄 겁니다.

중요한 건 꾸준히 가는 거지요.

예수의 부활 사건만 해도

그것 자체가 거대한 숲과 같아서

겉에서만 잠시 바라보는 것으로 다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걸 구호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현실(spiritual reality)을 경험할 수 없어요.

에스더 님은 숲속으로 한발 들여놓았나요? ㅎㅎ

profile

[레벨:16]맑은그늘

September 04, 2016
*.212.139.114

설교영상링크입니다.

편집(설교) : https://youtu.be/4r4skemb4ik

무편집(전체) : https://youtu.be/-MWG_AJY-HQ  대구샘터교회 주일공동예배 전체영상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5, 2016
*.164.153.48

와, 판타스틱!

기독교 티브이 방송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드셨네요.

이번 주일 설교는 아프리카 티브이에 저장된 예배실황 파일에서

설교 부분만 재녹화해서 올리셨네요.

수고가 너무 많습니다.

화질과 싱크로는 만족스럽게 해결되었는데,

소리가 탁하지요?

엠프와 카메라 연결 선에 문제가 있어서

스마트폰에 부착된 마이크로 소리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간에 적합한 선을 구입한다고 했으니

다음 주일부터는 맑은 소리가 나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작업하는 맑은그늘 님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라도

제가 설교를 좀더 편안하고 깊이 있게 잘해보겠습니다. ㅎㅎ

profile

[레벨:38]클라라

September 05, 2016
*.187.1.199

맑은그늘님, 수고 많으셨어요.

영상이 있었으면 아쉬어하시는 분들에게 굳뉴스겠어요.

저야.. 뭐 음성을 더 선호합니다만..^^

저는 유툽음성을 다운받아 듣고 있는데요,

산책길에 듣기는 최적입니다.

그나저나, 맑은그늘님의 기타연주, 사진이 기다려지는걸요?^^

profile

[레벨:21]주안

September 05, 2016
*.69.199.48

주님 안에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요.

상대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영생의 도상에 있으니

언제나 하늘을 날으는 기분으로 찬양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주님 없으면 난 아니에요(Lord in my heart) 찬양입니다.

https://youtu.be/c6qe0d5Igfw


맑은그늘님!

귀한 재능 기부로 많은 이들이

설교영상 보게되어 참 고맙습니다.

기타리스트라니 님의 연주도 듣고 싶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6, 2016
*.164.153.48

'영생의 도상'이라는 표현이 매력적이군요.

과연 그게 무엇일까요?

단순히 기쁘다는 감정이나 심리만은 아닐 텐데,

어렴풋하게 머리에 그려지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을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걸 끌어안고 앞으로 가는 게 최선입니다.

눈보라 너머에 주막집이 있겠지요.

profile

[레벨:21]주안

September 09, 2016
*.69.199.48

구원 받은 이들이 살아가는 여정이라고 봅니다.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생의 reality가 이미 여기에 이루어졌으니

기쁨과 감사와 기도의 삶이겠지요.

profile

[레벨:16]맑은그늘

September 06, 2016
*.223.19.101

주안님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5월 29일 설교부터 듣기/보기가 되지 않는데요.

정목사님으로부터 1월에서 5월까지 mp3파일을 받았습니다.

차근차근 유튜브에 올리면 해당설교에 댓글로 영상주소 링크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기타리스트 아니에요. 취미로 심심할 때 만지작거리는 수준이에요.

기회가 되면 한번 올려볼게요. 크게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profile

[레벨:21]주안

September 09, 2016
*.69.199.48

맑은 그늘님!

덕분에 오늘은 산책하며

유튜브의 정목사님 '속히 오리라'를 들었습니다.

너무 잘 들리니 은혜가 절로 되더라고요.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18]은나라

September 06, 2016
*.105.196.251

죄에 대한 죽음, 자기부인..이라는 말이나, 죄에서의 해방이라는 말은..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과도 연관이 되고, 일상을 살되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절대적으로 붙들라는 말씀인거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절대적으로 붙들면.. 죄에 대해서도 죽고, 자기부인도 되고, 죄에서 해방도 되고, 가족도 미워하게 되는 그런거 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6, 2016
*.164.153.48

기독교인이 죽을 때까지 이 땅에서 붙들어야 할 화두가

바로 이것, '하나님 나라'입니다.

나그네의 실존을 벗어버릴 수는 없으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기에 가까이 왔으니,

태양이 1억5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니 그 빛이 여기에 있듯이,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걸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profile

[레벨:7]소명

September 07, 2016
*.143.125.39

말씀 하나하나 다 아멘입니다ㅎㅎ 

상대적인 가치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절대적인 하나님께만

있으며, 지금 이시간 하나님나라에 산다는것이

고백되어지는 은총

그 은총의 길로 더욱 가까이 가길

소망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7, 2016
*.164.153.48

소명 님이 소망하는 은총의 길이

매 순간 가깝고 또렷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등등이 경험한 하나님의 절대성은

오늘 일상의 과잉에 놓여 있는 현대인들에게 '멀고 먼 당신' 쯤으로 느껴진답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profile

[레벨:13]진인택

December 07, 2018
*.36.133.138

목사님. 전에 문자적인 해석만을 강조, 강요하던 설교때문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껍데기를 겉어내고 깊은 메세지의 의미를 알게되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안개속에서 헤메이던 실체를 제대로 보니 제 맘속에 기쁨이 생겨납니다.
영혼의 해방감이란 말이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643
751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6966
750 성령강림절 연보도 은혜다! (고후 8:7-15) [6] 2018-07-01 6482
749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11694
748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막 4:26-34) [5] 2018-06-17 6708
747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5527
74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10677
745 성령강림절 거듭남과 성령 (요 3:1-13) [2] 2018-05-27 8149
744 성령강림절 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4] 2018-05-20 5872
743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7021
742 부활절 성령 임재의 증거 (행 10:44-48) 2018-05-06 7714
741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7315
740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5646
739 부활절 예수의 살과 뼈 (눅 24:36-48) [4] 2018-04-15 8020
738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135
737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707
736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4] 2018-03-25 7445
735 사순절 예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요 12:20-33) [4] 2018-03-18 6670
734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1875
733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72
732 사순절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7] 2018-02-25 8394
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230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341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61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884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522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64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58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780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7740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8057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16038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1042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789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76
717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623
71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663
71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47
714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622
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80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8248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74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75
709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812
708 창조절 죽음 넘어! (출 12:1-14) 2017-09-11 8215
707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54
706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504
705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932
704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139
703 성령강림절 빈 들에서 배불리 먹다 (마 14:13-21) [8] 2017-08-06 8074
702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5018
701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75
700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911
699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88
698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68
69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10001
696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432
695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33
694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302
693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68
692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512
691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60
690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60
689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846
688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493
687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85
686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938
68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6055
684 사순절 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2] 2017-03-26 8217
683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98
682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434
681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68
68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926
67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41
678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99
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800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35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445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71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82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3092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117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972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848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583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440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412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57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96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853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75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620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527
»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320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301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93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84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29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125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51
65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156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