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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창조절 조회 수 23268 추천 수 0 2011.11.13 23: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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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25:31-46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태복음 25:31-46,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 2011년 11월13일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종말과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26-28장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진술입니다. 마태복음의 이 마지막 부분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세계를 심판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특히 25장에는 심판에 대한 세 비유가 나옵니다. 1-13절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 비유이고, 14-30절은 그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이며, 오늘 설교 본문인 31-46절은 앙과 염소에 대한 비유입니다. 각각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 결론이 나옵니다. 첫째 비유에서는 졸다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에게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는 말이 주어집니다.(25:13) 둘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온 종을 향해서 주인은 이렇게 책망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25:30) 셋째 비유에서의 마지막 진술은 영벌과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25:46) 악인은 영벌에 들어가고 의인은 영생에 들어갑니다. 이 세 비유 모두 심판을 주제로 합니다. 그냥 심판이 아니라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마지막 심판입니다. 각각의 비유가 나름으로 특징이 있지만 마지막 비유는 유별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본문은 31절에서 ‘인자’가 영광으로 천사와 함께 올 때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인자는 세상의 마지막 때 오실 심판자를 가리키는 유대 묵시적 용어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로 세상을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34절에서는 그 인자가 임금으로 묘사됩니다.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분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 부류로 심판을 받습니다. 오른 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영생을 얻게 될 의인들입니다. 그들이 의인으로 분류된 이유는 임금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 어려운 처지가 여섯 가지로 나옵니다. 주림, 목마름, 나그네, 헐벗음, 병듦, 옥에 갇힘이 그것입니다. 의인들은 자신들이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37-39절) 이때 임금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 뒤로 악인에 대한 심판도 이런 대화로 이어집니다. 45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작은 자를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문제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는 누구인가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가리킵니다. 작은 자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여섯 항목을 보십시오.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동일시했다고 암시하는 구절이 신약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마 10:42절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소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메시아 관에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에는 메시아가 ‘비천한 자를 높이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말합니다.(눅 1:52, 53) 좀더 구체적인 언급은 예수님이 처음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인용한 이사야입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사 61:1) 하는 일이 바로 메시아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 삶에서도 주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가리켜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자라고 했겠습니까?(눅 5:30)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을 잘 읽어보십시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이들을 형제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복음 전도자들이 되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을 그게 걸맞게 대우하는 이들은 의인이고, 박해하는 이들은 악인이라는 뜻입니다. 고통을 받던 초기 그리스도교 복음 전도자들에게 이런 말씀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옳은 말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구원에 대한 소식입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것을 도와주는 구제와 복지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일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막 3:29)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작은 자가 소외된 이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제자들을 가리키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양쪽 모두에 해당된다고 봐야겠지요. 본문에서 작은 자가 누구야 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을 서로 다르게 대한 이들에게 임한 심판이 중요합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서 우리도 불안합니다. 과연 영생의 심판을 받을 자들인지, 아니면 영벌의 심판을 받을 자들인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영생을 얻는다고 믿으면 속이 시원하지만 열광주의자들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늘 찾아가서 도와주면서 살지 못합니다. 그런 일을 간혹 했다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영벌의 심판을 받은 이들의 경우를 보면 더 불안합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악을 행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다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 한 것” 뿐입니다. 악을 행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 추궁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영벌을 피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칠 사람들이 있을까요?

     톨스토이의 동화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저는 자주 대합니다. 지하도나 육교를 지날 때 동냥바구니를 앞에 놓고 엎드려 있는 사람들 옆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바구니에 돈 몇 푼을 넣고 지나갈 수도 있고, 그냥 지나가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동냥 받는 바로 그 사람으로 그 자리에 나타나신 것이라면, 저는 주님을 못 본채 한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지난 11월 10일에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309일 동안의 크레인 농성을 끝내고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질질 끌던 한진중공업 노사협정이 타결된 결과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의 노동문제, 노사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김진숙 씨 행동은 불편합니다. 그렇게 까지 투쟁할 필요가 있는지, 투쟁하더라도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런 복잡한 노사문제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한 여성 노동운동가가 크레인 위에서 309일 동안 농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몇몇 그럴 듯한 자기합리화로 못 본채 했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파트 관리원들에 대한 문제도 비슷합니다. 나이가 든 그분들은 그 자리마저 잃을 게 염려되어서 내년부터 법이 정한 최저생계비를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기업체의 비정규 직원이나 대학교 시간강사들의 삶도, 교회 부교역자들의 삶도 위태롭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대개 못 본채 하고 지나칩니다.

 

     배타적 심판 행위

     오해는 마십시오. 오늘 설교 본문은 우리를 도덕적인 불안감에 빠지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오른편으로 분류된 사람들과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은 그런 결과를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님께서 주린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한 적이 없다고 말했고, 영벌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작은 자에 대한 태도가 바로 주님을 향한 태도였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인자이며 임금이신 주님은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준으로 이들을 판단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마지막 심판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심판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고, 심판을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창조행위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배타적인 행위입니다.

     이런 문제를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마지막 심판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마지막 심판을 선정적으로 대합니다. 영원한 형벌, 유황불, 구더기를 연상시킵니다. 그런 영벌 앞에서 신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오해입니다. 심판은 생명완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심판은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첫 비유에서 천국을 혼인잔치라고 한 것도 심판이 생명완성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생명을 파괴하는 힘들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영벌에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생명을 파괴하는 요소가 남아있다면 그것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최종적으로 제거하는 사건이 바로 마지막 심판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때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십니다. 그 악한 세력이 거해야 할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때 지금 허약하기 짝이 없는, 늘 죽음에 노출된 생명을 완전한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그분의 고유한 능력으로, 그분의 배타적 능력으로 그것을 행하십니다. 아무도 거기에 간섭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25장의 첫 비유에서 잔치 주인은 뒤늦게 온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셨고, 둘째 비유에서 무책임한 한 달란트의 사람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완성인 마지막 심판이 하나님의 배타적 능력만으로 이뤄진다면 사람이 할 일은 정말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자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일반 법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검사와 변호가 많은 말을 하지만 결국 판결은 법관이 내립니다.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법원의 법관과 같습니다. 그와의 관계가 생명을 얻는데 절대적인, 궁극적인 기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 완성의 근원입니다.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25장에 함께 나오는 두 비유를 보십시오. 잔치에 참여한 지혜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위임받은 종들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겨서 자신들의 책임을 다 감당했습니다. 처녀들은 기름을 통해서 잔치 주인과 참된 관계를 맺었고, 종들은 달란트를 통해서 주인과 참된 관계를 맺었습니다. 오늘 설교본문에서는 작은 자를 돌보는 일을 통해서 주님과의 참된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이 완성될 그 순간을 기다리시나요?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시나요? 지금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아는 사람에게만 그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방식으로 이루실 생명 완성의 순간을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기다리십시오. 마지막 심판으로 이뤄질 그 순간은 잔치와 같습니다. 그 순간은 두 배로 받은 달란트와 같습니다. 그 순간은 새로운 생명인 영생의 카이로스이며 파루시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오마 약속하신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를 안다면 오늘의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일에 최선을 다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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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November 14, 2011
*.115.229.187

목사님, 예전에 이곳 사랑채에서 어느 회원의 글로

댓글 논쟁이 붙었을때 "천국,영생,심판" 이런것이 성경이 가르키고자 하는

핵심적 요소가 아닌 것인데 댓글 논쟁 한다고 한마디 하신

목사님께 따지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제가 정말 기독교를 보수 근본주의 교회에서 가르키는대로 너무 순진하게 믿었었고

다른 말로 바꾸면 기독교의 핵심적 메시지를  잘모르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당시에 목사님은 얼마나 답답하셨는지 그 심정 이해가 되더군요..

송구 스럽기도 하구요^^

어제 "예수 안믿는 사람은 천국 못가고

세상 사람들은 결국 지옥밖에 못간다는 어느 목사님의 말도 안되는 말을 듣고는  너무 답답하였습니다.

식사 시간에 같이 있었는데 제가 그분께 성경이 가르키는 메시지가 꼭 그런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했더니 

그런 기독교가 바로 이단이다" 라며 화를 내더군요..

주위에 믿지않는 분이 그만 언쟁 하라기에 이야기는 거기서 막을 내렸지만은

그 목사님은 정말 대화가 안되더군요...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배운것이 진리인줄만 단정짓는 어리석은 사람들과의 대화 정말 피곤하고 답답하더군요..

 

목사님, 오늘 설교 말씀 "작은자"의 메시지를 핵심으로 받아 들고 갈까 합니다.

목사님, 평안한 밤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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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6, 2011
*.185.31.7

별달 님,

답글이 늦었지요?

이틀 동안 우리집 인터넷이 먹통이 되었답니다.

이제 막 뚫렸어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ㅎㅎ

저 설교의 핵심은 '작은 자'가 아니랍니다.

작은 자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우리의 삶에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구요.

설교를 좀더 꼼꼼이 읽어보시면

그 이유를 아실 겁니다.

날씨가 정말 환상적으로 좋은 하룹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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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17, 2011
*.220.104.49

게으르고 악한 종, 기름 없는 등불 드는 종이 나의 모습인데 바꾸지 않고 고치려는 노력을 더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고치려 들고 나의 의지에 하나님의 능력을 기도로 끌어들이려는 모습을 매일 봅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려 기도합니다. 결국 내 맘대로 나를 키운다는 것은 남의 것을 뺏는 모습으로 거의 닮아 가는 것 같습니다.

남보다 나아야 해, 싫은 소리 듣지 않으려면 노력해야 해... 삶의 치열한 모습입니다. 이런 광폭한 STYLE의 인생 곁에 어린 순처럼 연약하고 작은 자들은 오지도 않을 뿐더러 어쩌다 오더라도 시퍼런 서슬에 쓰러져 나가기 일쑤입니다.

연약하고 작은 자들을 돌봄이 이제는 완고한 마음으로 변해버린 나에게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돌봄이 뭔가 목적이 있어서 저러는구나 하는 외부의 눈길이 먼저 의식이 되어서 손길도 내밀다가 거두어 드립니다.

주님, 굳어지고 마른 나의 마음에 말씀의 비를 더 내려지도록 도와 주소서.

그리고 작은 자들을 돌보는 일이 나의 일이요, 주님께 나를 이어주는 태()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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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8, 2011
*.185.31.7

진인택 님,

내일은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하네요.

늦은 가을에 겨울을 재촉하는 비는 정말 낭만적이겠지요?

내일이 기대가 됩니다.

우리는 작위적인 게 참으로 많지요?

이런 건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맺는다고 해서

결국 자기義랍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이기도 해요.

자기의로 인정받는 세상에서

그걸 뛰어넘는 칭의에 이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추구해야하니까요.

작은 자에 대한 관심이 자기의도 아니고,

부담도 아니고 신앙적 실적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설교의 중심 주제가 작은자에게 대한 관심이 아니라는 거는 아시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휴머니즘을 친구로 생각하지만

신랑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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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샘터

November 18, 2011
*.49.248.148

동영상 실행이 안되는데 제 컴만 그런지 모르겠네요?  mp3 음성만은 들을수 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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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8, 2011
*.185.31.7

동영상 파일을 올리는 분이 잠간 착각을 했든지

바쁜 일이 있어서 아직 처리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는 동영상 파일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카메라가 시원치 않아서 얼마전에 수리를 받았는데,

또 잘못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제가 문자로 전했는데,

좀 기다려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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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November 18, 2011
*.179.178.110

핵심이 아닌 <작은 자>에 대해서...

목사님,

사람이 누군가를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자기 몸처럼은 차지하더라도 자기가족만큼도 사랑할 수 없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작은 자를 만날 때,

인간은 진정으로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대어

위선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일부러 외면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것이 비록 자기양심의 가책을 피하려는 동기든,

불쌍한 마음이 들든 간에, 무조건 작은 자들을 도와야 하는지...

그래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낫지 않을까요?

현실적으로 작은 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둘 중에 어느 쪽이 옳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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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8, 2011
*.185.31.7

오메가 님,

재미있게 글을 쓰시네요.

그 마음이 잘 전달됩니다.

답을 원하는 건 아니겠지요.

답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실 거구요.

우리는 가까이 갈 뿐이지

답을 꼭 짚어낼 수가 없어요.

그게 답답한 노릇입니다.

질문의 핵심은 작은자들이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억지로라도 작은자를 돕는 게 더 나은 거 아니냐, 하는 거지요?

이것은 굳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론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측은지심이라는 말도 있어요.

그게 발동하면 우리는 작은자를 보살피지 않을 수 없지요.

어떻게 측은지심이 발동할 수 있을까요?

그게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천사적인 기질과 악마적인 기질이 뒤섞여 있는 셈이지요.

말을 하다보니 점점 길어질 것 같네요.

줄여야겠습니다.

작은자에게 대한 냉소는 상식적으로나 그리스도교 영성으로나 잘못이에요.

그렇다고 의무적인 구제와 봉사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절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 옥합을 깨어 바치는 여자를 향해서

가룟 유다로 추정되는 제자가 불평을 했어요.

저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게 더 좋은 것이었다고 말이지요.

작은자의 문제는 어렵습니다.

개인의 동정심과 휴머니즘은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고,

이 문제에 접근하는 최선은 공적인 정의를 세우는 것이 아닐는지요.

복지의 강화입니다.

교회는 국가로 하여금 그 일에 매진하도록 예언자적 임무를 감당해야겠지요.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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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19, 2011
*.220.104.49

목사님, 매일 묵상집 다비안 통권 96호 이전것 구할수 있는지요.

현재 제가 96, 97, 98호를 읽고 있습니다.

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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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9, 2011
*.185.31.7

지난 거는 없습니다.

그래도 찾아보고 혹시 나오면

보내드릴게요.

기도하면서 기다려보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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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moheeni

November 21, 2011
*.207.204.113

목사님

안녕하세요..

신앙생활 하면서 풀리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목사님 책을 사서 읽다가 이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여쭈어 볼 것이 많이 있었는데, 올라와 있는 글들 살짝 살펴보면서 조금 속이 시원해 졌어요.

그렇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고민은 여전하네요..

 

저는 민속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제주도를 중심으로)

기독교와 우리 문화와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부족하지만

논문도 제사와 기독교의 갈등, 조정에 맞추어서 썼습니다.

물론 민속학 논문이기에 목회자 분들과 성도 분들 일일이 찾아뵌 현장자료를 활용했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신앙에 대한 참 많은 것들에 눈을 떴답니다.

그리고 많은 문제가 거기서 시작된 것이지요(^^;)  

 

목사님..

주일예배에 참석 하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저는 시골의 아주 작은 마을교회에 출석합니다. 주일에 스무 명이 채 출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재정적으로도 투명하고, 제법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인 것 같습니다.

제가 시골생활과 작은 교회를 좋아하기에 제주도 정착해서 줄곧(7년 정도) 같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는 큰 교회와는 또다른 고민이 있는 것 같아요.

목사님이 한 분이시기에 모든 설교를 홀로 하신다는 건데요,

매일 드리는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 구역예배, 주일의 오전과 오후예배...

사실 같은 교회에 오래 다니다보니 예배에 참석하고 싶어도 설교 듣기 싫증날 때가 있어요.

지금은 주일예배만 드리고 있는데, 그분의 세계관을 접한 것이 이미 포화상태라서 이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예배 참석하라고 권면하시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요.

설교 마음에 안든다고, 혹은 맘 상했다고 교회 전전하는 거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었기에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이 되네요.

 

그런데 좀 더 근본적 문제는 이것 같습니다.

저희 목사님은 보수신학을 고수하시는 분입니다.

문자주의, 성속이원론, 기복주의... 대충 다 해당되시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는 새소식반(어린이 전도교실) 때 예배 안들어오려 했던 말썽쟁이 아이에 대해서 -실명을 거론하며-

"'아무개 보니 어차피 지옥갈 아이인데 불쌍하게 여겨야지...' 생각 했어요. 이런 '선한 마음'을 제 스스로 가졌겠어요? 하나님이 주셨어요" 하시는데 예배실 뛰쳐 나올 뻔 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지목된 아이의 또래들도 있었는데

저는 심장이 벌렁거려서 혼났습니다. 지옥 갈 아이라니요!

설교 때 드러나는 몰역사적인 말씀에도 '아멘'하기 참 힘듭니다.

예를 들어, '6.25 때 미군이 들어와서 수준높은 기술을 전해줘서 우리에게 참 도움이 되었다.' 대충 이런 말씀들.

(도대체 육이오가 왜 났냐는 말이죠!)

그리고 조선일보를 그대로 전달하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

 

 헌데, 이런 상황들은 인근의 다른 교회를 간다고 해서 나아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지역의 교회 연합집회 같은 데 가서 설교 듣고 해봐도 더 이상하면 이상하지 낫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입니다. 

 

목사님

예배, 이래도 꼭 드려야 하는 걸까요?

다시 여쭙자면...교회 꼭 다녀야 할까요?

 

 

그런데 또 한가지, 교회출석은 십일조와 '세트' 인 것도 제게는 고민입니다. 

십일조에 관해서는 상처도 사실 있어요.

제가 얼마 전 여러 문제로 십일조를 좀 쉬 때였어요.

 어느날 목사님이 교회 새 프로젝터 구입비용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시더군요,

그때 제게 부모님이 어렵게 마련해주신 목돈이 있어서 이걸로 십일조를 대신 해야겠다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프로젝터 구입을 위해서 써달라고 헌금했더니

밤에 목사님 사모님 찾아오셨더군요.

"사모 말로는 요즘 십일조 안했다는데, 왜 목적헌금했습니까. 성경에 하나님꺼 도둑질 하지 말라고 나와있습니다.. 십일조로 다시 내십시오." 이러시더군요. (저는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사람한테 체크 당한다는 것도 맘상했지만, 목적헌금이라는 말도 모르고 십일조와 차이도 몰랐는데 말이죠)

어쨌든 십일조로 다시 냈는데... 그 뒤부터 이상하게도 이것이 생각할수록 분한 생각이 올라오더군요. 

교회에 헌금한 것 뿐인데 도둑질 한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어디다 쓸지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거니까(사실 목사님이 정하시죠) 너는 입다물로 돈만 갖다 바쳐라 이런 건가.

하나님께 드리는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은 사람을 무척 뻔뻔하게 만드는 구나... 등등

 

그 뒤부터 다시 십일조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신앙 초기에도 십일조에 대해 반감이 있었는데 생각을 대충 얼버무렸기에 다시 올라온 것이지요.

 결론은, 십일조 안하겠다! 교회 헌금은 무명으로 하겠다!

수입의 '십분의 일'은 기도를 통해서 필요한 곳에 직접 하겠다!

 

그런데, 십일조 안하면 얼굴들고 교회 못다닙니다.

특히 목사님, 사모님, 재정집사님...

십일조 생명같이 아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까요?  

 

 

 

두서없이 말씀드렸네요.... 하지만 저한테는 너무 절실한 문제이기에 글을 남깁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21, 2011
*.185.31.7

moheeni 님,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적나라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에 대해서

제삼자가 대답을 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모두 형편과 생각이 다르니까요.

이렇게 바꿔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

교회에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교회를 떠날 겁니다.

정 안 되면 이사를 가는 거지요.

'지옥에 갈....' 운운은 정말 한심한 발언입니다.

신성모독적인 발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하나님의 전권을 자신이 대신하고 있으니까요. 

최소한의 상식에도 들지 않는 교회 현상을

믿음, 또는 순종이라는 말로 용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1]moheeni

November 22, 2011
*.207.204.113

목사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이사를 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리고 이 교회에서 맺어 온 인연들 때문에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만 정리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는 '교회가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지조사 하면서 목사님, 전도사님들 여러분 인터뷰 했는데....음...제가 뵌 분들 대체로

'어둠의 영이 가득한 제주' '귀신의 땅' '어둠의 문화'...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백여년 전 미국인 선교사들처럼요...)

목회자가 따로 없는 퀘이커 쪽이나,  아니면 가톨릭, 성공회 쪽에 관심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아예 혼자 예배를 드려나 하나.... 싶은 생각까지요.

인도자의 필요성도, 공동체의 이점도 알지만 다시 억지춘향 식으로 고통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혹시... 제주도에 추천해 주실만한 곳이 있으신지요.

(좀 난감한 질문이기는 한 것 같네요...^^)

 

아무튼,

참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4]선비다움

November 22, 2011
*.220.220.7

목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변의 여러 가지 일들에 마음을 빼앗겼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용기가 나고 힘이 솟습니다.

「마지막 심판과 생명완성」의 말씀을 들으면서

역시 주일 공동예배에는 구원론적인 설교가 선포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항상 예수가 왜 그리스도이며, 예수에게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바랄 수 있는지

초지일관 역설하시는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불을 토하듯 살았던 세례요한이 스칩니다.(마태3:1-12)

세상은 사회개혁을 바라고 요구하지만 또한 일정부분 성취되어 가는 듯 보이지만

거기에서도 궁극적인 구원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마태11:6)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가옵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마지막 심판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전복된 위치(자리)를 바로잡는 것’이라는

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려 봅니다.

생명의 자리매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완전한 삶이지만 시간 속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최소한의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를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영역에서의 삶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일에 진력해야겠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22, 2011
*.185.31.7

선비다움 님,

반갑습니다.

저의 설교가 전달이 잘 되었군요.

똑같은 설교라도 듣는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여지나 봅니다.

당연한 거겠지요.

마지막 심판이나 생명 완성은 모두 관념적인 주제인데요.

저런 주제를 현실적으로 풀어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저도 설교 때마다 끙끙대고 있는데,

사유의 한계, 언어의 한계를 매번 느낍니다.

설교행위도 결국은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거 같습니다.

생명이 완성될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일상에 전력투구해봅시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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