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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주현절 조회 수 12913 추천 수 3 2013.02.10 17:18:01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0210.mp3 
성경본문 : 누가복음 9:37-43 

예수의 축귀 능력

누가복음 9:37-43, 주현절 마지막 주, 2013년 2월10일

 

37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38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39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42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간질병 아이


눅 9:37-43절에는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곤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대단히 신기해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워 보입니다. 축귀 능력이야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이건 초기 기독교인들이 뭔가를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일단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를 봅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셨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산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신 곳을 가리킵니다. 산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중에 난치병 걸린 외아들을 둔 어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을 보면 간질병처럼 보입니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눅 9:39) 이 사람이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용하다는 의사는 다 좇아 다녔을 겁니다. 무당을 불러다가 푸닥거리도 했겠지요. 좋다는 민간요법도 다 해봤을 겁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도 잡으려고 합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았겠지요. 이 사람은 혹시나 해서 예수님께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마침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부탁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눅 9:40)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눅 9:41a) 여기서 패역하다는 것은 썩었다는 뜻입니다. 다짜고짜로 믿음 없다고, 또 썩어빠졌다고 하셨으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걸 정확하게 해석할 수만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신학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이 책망은 누구를 향한 걸까요? 간질병 아이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라고 본다면 일단 아버지를 향한 책망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아들의 병을 고쳐야겠다는 아버지의 절박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처음 보는 입장에서 믿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제자들을 향한 것일까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구를 종합적으로 본다면 믿음이 없고 기도가 부족해서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책임을 물으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도 곤란합니다. 제자들에게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축귀는 예수님의 능력이지 제자들의 능력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요? 누구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차원의 말씀은 아닐까요? 신앙적인 선입견을 내려놓고 본문을 천천히 따라갑시다.


여러분은 혹시 간질병 발작을 본 적이 있습니까? 길을 가다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걸 모르고 결혼했다가 크게 놀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간질병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난치병, 불치병이 있습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병도 심각합니다. 평생 신경성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의학이 이렇게 놀랍게 발전했는데도 병은 여전합니다. 병과의 싸움에서 인간이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미생물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으로 내다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병은 대부분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등, 미생물의 부작용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부작용이지만 미생물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미생물과의 싸움이 어려운 이유는 어떤 미생물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어떤 것이 치명적으로 위험한지를 분간하기 어렵다는 사실과 미생물 스스로 변종의 길을 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병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한 아무도 이런 병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죄와 마찬가지로 죽어야 모든 병과의 싸움이 끝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무기력합니다. 그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하나님의 위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거 아니냐,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믿음으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승리주의 신앙이 한국교회에 팽배합니다. 빌 4:13절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라.” 이런 구절을 근거로 ‘아이 켄 두 잇.’ 신념을 기독교 신앙으로 치장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해병대 구호와 혼동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그런 의미로 쓴 게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선교헌금에 대한 감사의 인사입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솔직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간질병과 같은 난치병이 치료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사업도 잘 되고, 자식 농사도 잘 될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위에서 짚은 것처럼 믿음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극적으로 잘 전달하는 책을 쓰면 베스트셀러가 될 겁니다. 물론 믿음이 병 치료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는 분명히 있습니다. 믿음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편안한 마음은 치료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일어납니다. 아내나 남편의 끔찍한 사랑에 감동받은 사람의 병 치료가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경우보다 효과가 더 크다고 합니다. 이런 자연치유와 심리치유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수님 당시나 그 뒤의 지난 2천년 역사에서 다른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이런 축귀와 치병 사건은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간질병 치료를 기독교 신앙과 일치시킬 수 없습니다.


축귀, 치유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실용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교양을 쌓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생활입니다. 종교생활을 세련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기도생활, 예배생활, 봉사생활 등등입니다. 이런 종교생활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기독교를 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마음 수련에 좋은 불교를 택하는 게 훨씬 실용적입니다. 힐링이다, 멘토다 해서 이름을 날리는 분들이 대개 불교의 승려들이라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기복을 목적으로 하는 무당을 찾아가도 부분적으로 위로를 받을 겁니다. 단전호흡이나 뇌 훈련원에 가도 됩니다. 흥사단이나 경실련 등 사회단체 활동을 해도 좋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치료하고 도와주는 단체나 기관은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착하게 살거나, 또는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구원 사건과의 일치를 목표로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독교 신앙은 마치 슈퍼마켓에 가서 카트에 상품을 담듯이 내 삶에 종교적으로 필요한 것을 취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에 자신의 운명을 던지는 것입니다. 간질병 치유나 축귀 현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일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을 때 축귀 현상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해야 합니다. 두 가지가 똑같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게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본문은 예수님을 통해서 간질병 아이가 치료된 사실이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게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 앞에서도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아!’ 하고 꾸짖었고, 아이가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고대 사람들은 모든 병을 귀신의 작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주술이 세계를 읽는 코드였습니다. 성경기자들도 그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어리석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기자들이 당시의 주술적인 언어를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근본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현대의 세계관에서 살면서 주술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나이가 들었는데도 어머니 젖가슴에서 안겨 젖을 빨려고 하는 사람과 비슷한 겁니다. 그것을 오히려 극복해야 합니다. 주술이나 신화라는 언어형식 너머의 영적 현실(spiritual reality)을 봐야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누가복음 기자는 이 사건의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성서기자는 예수님의 축귀 능력에서 경험했습니다. 간질병 치료는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것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지 간질병 치료 자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간질병 치료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질병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그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세상에서 또 다른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더 큰 문제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간질병 치료는 보물을 싼 포장지에 불과합니다. 보물을 옆에 두고 포장지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위엄입니다. 그 위험을 아는 사람은 다시 축귀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귀신


이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 축귀 사건이 오늘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오늘의 귀신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귀신은 간질병 아이를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거품을 흘리게 하고, 자기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악한 영인 귀신의 작용입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경련을 일으키거나 거품을 무는 식으로 공격적이거나 자학적인 적은 없습니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그렇게 대한 적은 없을까요?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폭력성에 사로잡히는 경험이 개인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자주 있을 겁니다. 사회적으로 지금 대한민국은 간질병 환자와 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의자놀이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놀이를 할 때마다 반복해서 한 사람은 앉을자리가 없어서 사회에서 밀려나야 합니다. 그걸 가학적으로, 자학적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간질병이자, 귀신들림 현상입니다.


이런 간질병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먼저 개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내면에서 솟아나는 이런 폭력성을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원인을 상대편의 탓으로 돌리는데 우리가 익숙합니다. 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나도 이렇게 폭발하지는 않지, 합니다.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은 상황을 조금 좋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사회적인 문제 쪽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책임자들과 관료들과 야당과 사회단체와 교육 책임자들이 애를 씁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한 문제를 해결하면 다음 문제가 또 불거집니다. 바닷가에서 맞는 파도와 같습니다. 한 파도를 넘으면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옵니다.


여러분은 이미 제가 오늘 설교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 예상하실 겁니다. 간질병과 같은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간질병 아이를 분명히 고치셨습니다. 오늘의 개인과 사회 문제도 결국 하나님의 위엄인 예수님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 결론이 옳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숙제로 남겨드리고 싶지만, 숙제를 싫어하는 분들을 위해서 제가 직접 설명하겠습니다.


예수의 축귀능력을 믿는다는 것은 개인과 세상에 나타나는 간질병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간질병의 주체인 귀신을 제어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요? 여전히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 세상만 크게 보이지요? 그래서 두렵지요?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십시오. 귀신의 힘은 제한적입니다. 예봉은 이미 꺾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간질병과 같은 세상 안에서 살지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 용감하게 투쟁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가 있지만 다시 일어섭니다. 일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엄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가장 궁극적인 생명의 현실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귀신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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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February 11, 2013
*.41.205.235

지금 우리는 의자놀이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놀이를 할 때마다 반복해서 한 사람은 앉을자리가 없어서 사회에서 밀려나야 합니다

---> 자본주의 특히 신자본주의의 속성을 정확히 말씀하시네요..

이 시대의 귀신에 쫄지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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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1, 2013
*.149.31.175

여기서도 '쫄지 마~!!!' 하니까
그럴듯 하군요.
그 모자라는 의자를 공동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어려운 가운데서도 함께 풀어갈 수 있을 텐데요.
이를 위한 첫 걸음은 두려움의 극복이겠지요.
어쨌든지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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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February 11, 2013
*.18.118.229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폭력성...

실증법 상 인정받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정당방위인 것 같습니다.
외부의 억압에 대항하다보면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꼭 몸싸움 뿐 아니라 사회생활이나 역사전반에서
약자의 저항은 더 큰 억압을 부르고
그로인한 약자의 폭주는 대부분 처절한 응징으로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

수많은 혁명이 실패한 원인 중에도
지나친 폭력성 혹은 잔인함이 공감을 받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고 ...

무술가나 격투가들의 말에 따르면
상대가 두려울수록 잔인한 기술을 사용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양 무술들이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싸구려 정신론에 빠진 무술이 더 많지만 ...)

자기 내면의 두려움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잔인함과 지나친 폭력성이라고 한다면,
실제적인 위험성보다 상상력이 만든 두려움이 더 클 것입니다.
이런 막연한 두려음은 정말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소방관들이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도 두려움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때 두려워하신 것처럼
선지자들이 자신의 소명에 떨었던 것처럼 ...


이렇게 쓰고나니 ...

하나님을 경험할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인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경험하는 것인지 좀 혼란스럽습니다.
별개의 두려움 같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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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1, 2013
*.149.31.175

혼란스럽게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거에요.
그게 명쾌하게 풀리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걸 풀어보려고 지난 역사에서
수많은 심리학자, 종교학자, 사회학자들이 애를 썼지만
여전히 미궁이지요.
일단 열매가 중요한 겁니다.
깊은 평화와 안식이라는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의 위엄을 경험하는 거겠지요.
그런 경험이 영적 시각에 잘 잡히는 경지가 되면
악마와 귀신의 정체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요?
기독교인은 성서를 통해서
그런 경험을 미리 연습하는 사람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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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cubaren

February 20, 2013
*.247.90.27

 목사님!
Nothing is impossible! 안되면 되게하라는 구호는 해병대가 아니라 특전사(공수부대)의 구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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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0, 2013
*.149.31.175

혹시 cubaren 님이 특전사 출신이신가요?
특전사 구호를 작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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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29, 2013
*.220.104.49

목사님, 반갑습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하나님의 위엄에 늘 놀라고 감사하고 기대하는 시간을 경험합니다. 세상의 간질병에 위엄을 나타내심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세상으로부터 내게로 들어온 간질병도 역시 하나님의 위엄으로 사멸됨을 감사 드립니다. 업무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 속에서 자신이 예수님의 부활에 모든걸 걸고 살아가는 삶을 이어나가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목사님의 귀중한 말씀들이 가슴속에  새로운 기운의 바람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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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9, 2013
*.94.91.64

진인택 님,
오랜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 앞에서 경험하는 '놀람'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경험을 못하게 하거나
하더라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제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거짓된 열광이 아니라 참된 기다림의 영성이
우리 영혼 가득히 채웠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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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2
610 창조절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4] 2015-10-04 10854
609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439
608 창조절 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11:18-20) [12] 2015-09-20 8196
607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6
606 창조절 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4] 2015-09-06 7718
605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38
604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50
603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3
602 성령강림절 하늘의 양식 (요 6:35, 41-51) [8] 2015-08-10 7829
601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양식 (요 6:24:35) file [15] 2015-08-02 8048
600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568
599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26
598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459
597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742
596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8
595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370
594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697
593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211
592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078
591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900
590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781
589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1
588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24
587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196
586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2970
58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4
58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6902
583 사순절 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8] 2015-03-29 8291
582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460
581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55
580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514
579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333
57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30
577 주현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막 9:2-9) [4] 2015-02-15 8333
576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759
575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45
574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8989
573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31
572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784
57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216
57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544
569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726
568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7
567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22
566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4694
565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6791
564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3
563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2
56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874
561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205
560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260
559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5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6
557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014
556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56
55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55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7] 2014-08-31 13300
553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881
552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646
551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745
5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172
549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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