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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성령강림절 조회 수 11170 추천 수 0 2014.08.04 10:15:14
설교듣기 : https://youtu.be/GeaaqBbz1vE 
성경본문 : 창세기 32:22-31 

이스라엘과 브니엘

32:22-31, 성령강림후 제8, 201483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서안의 가자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이슬람주의 군사정치 조직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라서 사실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요즘 이스라엘이 전 세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이스라엘도 나름 할 말이 있을 겁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제거를 목표로 하는 집단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입니다. 유엔의 중재도 먹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민간인 사망자와 부상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희생도 큽니다. 벌써 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가자 지역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입니다. 수천 년 동안 박해를 받았던 이스라엘이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박해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군가요?  

 

오늘 설교 본문(32:22-31)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성경 각주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그것은 신성모독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나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신들 나라의 이름에 그런 뜻을 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는 씨족사회로 분류되는 족장들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세 명의 족장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세 번째 족장인 야곱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삶은 출생 때부터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붙들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장손의 지위를, 즉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된 자리를 얻습니다. 화가 난 에서는 동생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서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피신합니다. 거기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삼촌을 속이면서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일가를 이룬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습니다. 형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야곱은 형이 자신에게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사절단을 꾸려 에서에게 먼저 보냈습니다. 사절들을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다만 에서가 4백 명의 부하를 대동하고 야곱을 맞으러 온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 상황을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원래 에서는 체격이나 성격이 모두 우락부락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냥하러 다녔습니다. 야곱은 집에서 어머니를 도우면서 곱게 자랐습니다. 쌍둥이였지만 에서와 야곱은 정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긴 여행 끝에 야곱은 요단강 지류인 얍복 나루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만 건너면 고향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형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먼저 선물을 보냈습니다. 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 숫양 이십, 낙타 삼십과 그 새끼들, 암소 사십, 황소 열, 암나귀 이십과 그 새끼들입니다(32:13-15). 오늘로 따지면 수억 원 이상이 되겠지요. 종들과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도 다 얍복 시내를 건너게 한 후 야곱 혼자 남았습니다. 그 상황을 본문 22-24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하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시름하다가...

 

얍복 나루를 건너기 전에 촌극처럼 보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벌였다는 겁니다. 지금은 한가하게 씨름을 할 때가 아닙니다. 얍복 시내를 건너냐 마냐, 형을 만나서 목숨을 건질 것인지, 유사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순간에 낯선 사람과 씨름을 한다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게 단순한 놀이로서의 씨름이 아니라는 건 이야기의 진행을 조금만 더 따라가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야곱과 씨름하던 이 낯선 사람은 씨름이 불리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비상수단으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즉 고관절을 무언가로 내리쳤습니다. 반칙을 행한 겁니다. 그래도 야곱은 밤이 새도록 이 낯선 사람과의 씨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밤이 지났고, 급기야 날이 새려고 했습니다. 이 낯선 사람은 야곱에게 날이 새려고 하니 나를 가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야곱은 당신이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을 놓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장면은 주술적으로 보입니다. 동서양의 유령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유령들은 밤에 활개 치다가 날이 밝기 전에 도망칩니다. 이런 귀신, 유령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신앙과 어울리지 않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과감하게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익숙한 주술적인 이야기 방식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씨름하다가 날이 밝아오자 자리를 뜨고 싶어 했으나 야곱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던 이 낯선 사람은, 이제 독자들은 그가 하나님의 천사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을 텐데, 야곱에게 당신 이름이 뭐냐?’ 하고 묻습니다. 야곱이라는 대답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기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제 이스라엘로 변경되었습니다. 야곱이 낯선 사람과의 씨름 시합에서 기권승을 얻어냈다는 에피소드를 기초로 해서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신적인 능력을 갖고 있던 낯선 사람이 실제로 야곱과의 씨름에서 진 건 아닙니다. 다섯 살짜리 자식과 씨름하면서 아빠가 일부러 져주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고관절이 탈골된 상태에서도 축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끈질기게 천사를 붙들고 늘어진 데 있습니다. 결국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축복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사생결단으로 받아내려 한 축복은 대체 무엇일까요? 당시에 야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축복을 달라고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누리고 싶은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아내도 여럿이었고 자식들도 많았고, 목축을 통해서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형편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지금 얍복 시내를 건너기 직적입니다. 에서가 4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옵니다.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무런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런 위기는 야곱에게 처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가 갖고 있는 재산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가족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는 인간이 이룬 그 어떤 업적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축복을 요구했다는 말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미 여러분도 대답을 찾으셨을 겁니다. 축복은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체입니다. 즉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것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축복입니다. 그 이외의 것을 축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형편에 따라서 그 가치와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우리 삶의 근본은 점점 허약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많아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경제 수준이 어느 정도는 갖춰져야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건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한계를 넘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와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체 회장의 생활수준은 수십, 수백 배의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저보다 행복하다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겁니다. 티베트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비해서 대한민국의 생활수준은 아주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특히 지금 얍복 나루터의 야곱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재산과 건강 등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축복의 근원입니다. 야곱은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했습니다. 본문 30절이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함이더라.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새로운 이름인 이스라엘이나 지명인 브니엘이나 모두 하나님 경험이라는 점에서 서로 동일한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 경험이 야곱에게 최대의 축복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입니다

 

28:10-22절에 따르면 야곱은 훨씬 젊었을 때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탓에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신할 때입니다. 가는 도중 광야에서 노숙하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축복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음성까지 들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야곱은 돌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은 다음에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로 지었습니다. 이제 상당한 세월이 흘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야곱은 다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브니엘, 벧엘에는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될 만합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첫째, 하나님 경험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둘째, 그 하나님 경험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셋째, 나는 하나님을 경험했을까요? 이런 질문은 신앙의 본질에 속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려면 이런 질문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대답도 얻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 그 대답을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대답은 설교자인 목사가 아니라 성령이 주십니다. 성령만이 우리의 생각과 영혼을 살아 숨 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딱 떨어지는 대답은 주지 못한다하더라도 거기에 이르는 길은 어느 정도 가이드 할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다음입니다. 야곱 이야기를 다시 잘 보십시오. 야곱이 하나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세미한 음성으로, 때로는 번갯불로, 때로는 바람소리로, 때로는 큰 깨우침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점진적으로, 때로는 한 찰나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 순간에 그를 맞이하면 됩니다. 얍복 나루터에서 어떤 낯선 사람과 씨름했던 야곱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순간을 놓칩니다.

 

이런 설명이 멀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에게는 왜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는 거야, 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거꾸로 자신은 매일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 <카핑 베토벤>을 보신 분이 계신지요. 베토벤은 자기 악보를 대필해주는 비엔나 음악대학 수석 졸업 여학생이 선생님, 지금 청각 장애를 겪고 있으면서 어떻게 심포니 9번 일명 <합창 교향곡>을 작곡했나요?’ 하고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오해다. 내 귀에는 음악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나는 그걸 악보에 옮겨 적을 뿐이야.’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소리가 그를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궁극적인 것은 사람이 발견하거나 창조해내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가 사람을 찾아옵니다. 하나님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모두 베토벤이 될 수 없듯이 모두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없겠지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밝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영적인 눈이 유달리 밝지 않다하더라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습니다. 야곱의 얍복 나루터 경험이 단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의 경험으로 확대된 사건이 2천 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 안에 실제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여러분도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1장에 따르면 천사가 마리아의 남편 될 요셉을 찾아가 아내인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니 이름을 예수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사 7:14절을 인용해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다시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인 이스라엘과 연계됩니다.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야곱 이야기에 나오는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14:9절에 따르면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을 향해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처럼 신약성서 전체는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즉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그 주장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야곱은 얍복 나루터에서 나름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야곱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경험의 흔적을 부분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분이시며, 온전한 의미에서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 은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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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햇빛처럼

August 04, 2014
*.37.133.135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사는 신비한 삶, 

그 예수님의 운명에 집중하며 살도록 하신 은혜,

이  놀라운 신비의 세계로 한발자국씩 걸어들어가도록 안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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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4, 2014
*.94.91.64

제가 엉터리 가이드는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ㅎㅎ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해서

저도 마음이 좀 쫓길 때가 있습니다.

죽기 전에 한 걸음이라도 더 깊이 들어가보고 싶어서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봤자 큰 차이도 없으니

그냥 편안하게 천천히 가는데까지만 가보자 싶기도합니다.

제가 굳이 다른 분들을 가이드 한다기보다는

가던 길을 그냥 가기만 하면

그게 어떤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거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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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여름비

August 04, 2014
*.171.31.207

어제는 예배 중에 자꾸 잡념이 끼어들어

집중해서 듣질 못하였습니다.

말씀을 읽어내려오니

좀 더 세밀하게 전달되네요.

감사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심정이

너무 복잡합니다. 지난 시절

아우슈비츠에 대해 읽은 것들이

허사가 된 듯하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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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4, 2014
*.94.91.64

웬일로 여름비 님이 예배 중에 잡생각을 하시다니요.

무슨 걱정거리가 있나 봅니다.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서도.

오늘의 이스라엘, 뜨거운 감자네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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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August 06, 2014
*.36.146.130

얍복나루터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기술된 야곱의 인생행로속에서 그의 영적 정체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타는 목마름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요
즉 오늘 말씀속에서 언급하신 '하나님 경험'에 대한 그의 갈급함이 그닥 없어 보인 가운데 얍복 나루터까지 도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제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나요? ㅎㅎ)

그런데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정작 문제 해결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자체 (이전에 만나보지 못했던 그분을 인격적으로 오늘 새로 만나고 싶다- 제 해석이 맞나요?)를 경험하고 싶다는 염원은 앞뒤 연결이 매끄러워 보이지 않아서요

그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 차리는 순간
내 문제는 온데간데 없고 그분만 보이더라...
하는 갑작스런 득도의 경험이라도 했던걸까요?

이 부분에 대한 목사님의 부연설명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우리가 오매불망 소원하는 하나님 경험은
야곱처럼 오히려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맞닥뜨릴 확률이 높을수 밖에 없겠구나
..
하는 확신(?)이 들면서 은근 겁이 나는것은 아직도
"주여 !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변화산의 베드로 수준밖에 안된 탓이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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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6, 2014
*.94.91.64

생각할 거리가 많은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깔끔한 대답을 드리기는 힘들 것 같군요.

성서기자는 모든 걸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비약이 많다는 거지요.

야곱 전승에서 그가 평소에 늘 하나님을 갈망했는지가

핵심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보면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기는 했으나 빈둥댄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전승에서 하나님이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나

그들을 찾아가셨으며,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게 핵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갈망하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그걸 우리가 다는 모르는 거지요.

그런 갈망들이 간접적으로, 부분적으로

성경본문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구요.

당시는 하나님 경험이 초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명시적인 설명은 할 수 없었겠지요.

위 성경 본문에서 축복을 원한 야곱의 행동이

과연 하나님 경험에 대한 갈망이겠느냐, 하는 건

상황과 결과에 근거한 추론입니다.

얍복 나루터의 상황,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브니엘이라는 지명을 지었다는 결과가 그것입니다.

한 가지 더 부연한다면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갈망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어떤 하나님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지만

자기가 얻은 재산과 행복 조건만으로 삶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더 근원적인 힘을 갈망하지 않았을까요?

 

속된 표현으로 '위기가 기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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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August 07, 2014
*.192.29.120

오늘 야곱의 처지와 너무나 방불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 꿇은 주님을 떠올려봅니


내게 복 주겠다고 하시기 전까진 보내지 않겠다던 야곱과, 이 잔을 비켜가게 해달라고 하신 주님과 너무도 흡사하구나 싶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의 야곱과 하나님의응답(?)을 듣고 나서의 주님의 모습도 마찬가지고요

야곱의 자리에, 주님의 자리에 나를 대입시켜 봅니다

오늘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죽을것 같은 바로 그 정황이, 오히려 하나님을 새롭게 깊이 만날수 있는 전화위복의 복된 자리임을 도전받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모순과 역설이듯이
부름받은 우리의 매일 되풀이 되는 하루 하루의 실존이 모순과 역설의 모습으로 올수밖에 없음을 생각케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진솔한 답변과
빠른 피드백에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건강한 가이드(외람된 표현 용서하십시요)
를 만나게 해주신 분께도 또한 감사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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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7, 2014
*.94.91.64

예, 절체절명, 죽을 것 같은 자리,

그걸 일상에서 경험하는 태도가 영성인데,

그게 잘 안 됩니다.

결국 죽음이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인이 영원하고 참된 안식에 들어가셨다.'는

장례식 때의 멘트가 궁극적인 진리를 가리키고 있는 거지요.

그래도 살아 있을 때는 열심히 살아야 하고,

그래서 우리 삶이 모순이자 역설입니다.

갈데까지 한번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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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August 08, 2014
*.72.188.140

개인적으로,

축복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그 순간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씨름의 결과가 축복이 아니라, 씨름 자체가 축복인 ....


언뜻 묵상해보면, 밤새 씨름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치열했을까? 


어떤 기술을 걸까, 어떻게 기술을 피할 것인가, 

야곱의 온몸의 신경과 정신은 매순간 변칙적으로 들어오는,

하나님의 공격을 일분 일초도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싸웠을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대면하며 씨름하는 그 순간 ..... 이 혹 '생명' 은 아닐까요?


예수님이 부활하고 길가에서 만났서 이야기 나누던 그 순간에 두 사람의 마음이 뜨거웠던 것처럼,

일하느라 바뻣던 마르다보다 발밑에서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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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8, 2014
*.94.91.64

두루두루 내용이 다 공감이 갑니다.

씨름 자체가 축복이군요.

아멘입니다.

profile

[레벨:13]진인택

January 16, 2015
*.206.242.56

성령이 저와 함께하심을 느낍니다.

목사님의 말씀으로 십자가 부활사건으로 다가 갑니다.

한때는 교회를 그만 다니고자 했던 마음을

다시 돌아오게 하신것도 성령이 함께 하신것 아닌가요?

주관적이고 우스운 믿음이지만

전 하나님께서 절 버리지 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쉬운 설명과 자연스런 부활로의 결론과정이

저의 내공을 더 키워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17, 2015
*.94.91.64

ㅎㅎ 저의 설명이 쉽다는 말을 처음 듣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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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04
648 성령강림절 귀신 이야기 (눅 8:26-39) [43] 2016-06-19 11923
647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37] 2016-06-13 8218
646 성령강림절 울지 말고, 일어나라! (눅 7:11-17) [16] 2016-06-05 14457
645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2
644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524
643 성령강림절 교회는 성령공동체다 (행 2:1-21) [10] 2016-05-15 12144
642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05
641 부활절 바울과 루디아 (행 16:9-15) [9] 2016-05-01 13915
640 부활절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15] 2016-04-24 15130
639 부활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 (요 10:22-30) [13] 2016-04-17 6630
638 부활절 죽임 당한 어린 양 (계 5:11-14) [9] 2016-04-10 7740
637 부활절 부활의 증인이란? (행 5:27-32) [9] 2016-04-03 7708
636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238
635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028
634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840
633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147
632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515
631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3] 2016-02-21 7298
630 사순절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 (신 26:1-11) [6] 2016-02-14 7735
629 주현절 변모의 예수, 하나님의 아들 (눅 9:28-36) [3] 2016-02-07 8490
628 주현절 사랑, 하나님의 존재 방식 [9] 2016-01-31 7904
627 주현절 종말의 능력과 현실 (눅 4:14-21) [5] 2016-01-24 5923
626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466
625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눅 3:15-17, 21-22) [4] 2016-01-10 8255
624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414
623 성탄절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file [5] 2015-12-27 9715
622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0
621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348
620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76
619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8448
618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9714
617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8997
616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141
615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060
614 창조절 쉐마 이스라엘! (신 6:1-9) [4] 2015-11-01 15505
613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175
612 창조절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히 5:1-10) [8] 2015-10-18 8223
611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0
610 창조절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4] 2015-10-04 10853
609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434
608 창조절 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11:18-20) [12] 2015-09-20 8195
607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3
606 창조절 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4] 2015-09-06 7717
605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36
604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46
603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3
602 성령강림절 하늘의 양식 (요 6:35, 41-51) [8] 2015-08-10 7828
601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양식 (요 6:24:35) file [15] 2015-08-02 8048
600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568
599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24
598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454
597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741
596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7
595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368
594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695
593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209
592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075
591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898
590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780
589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0
588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23
587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194
586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2969
58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37
58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6900
583 사순절 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8] 2015-03-29 8290
582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459
581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48
580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512
579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331
57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28
577 주현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막 9:2-9) [4] 2015-02-15 8331
576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757
575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43
574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8987
573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30
572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783
57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213
57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541
569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720
568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88
567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15
566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4690
565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6790
564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2
563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2
56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874
561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204
560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258
559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5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5
557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012
556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52
55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55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7] 2014-08-31 13299
553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879
552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645
551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744
»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170
549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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