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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 (창 1:1-5)

주현절 조회 수 8786 추천 수 0 2015.01.11 23:11:38
설교듣기 : https://youtu.be/l3CwDhHjFZM 
성경본문 : 창세기 1:1-5 

태초에 ...

1:1-5, 주현절 후 첫째 주일, 20151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는 태초에라는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우주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현대물리학은 우주의 시작을 138억년 이전으로 봅니다. 태양은 50억년 정도 되었고, 태양의 행성인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입니다. 구약성서 시대 사람들은 이런 물리적 사실을 몰랐습니다. 다만 그들은 모든 것들의 시작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인식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보면 그걸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옵니다. 나무, , 사람, 그리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과거의 시간은 어디까지 이를까요? 실존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다 어디서 왔을까요?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결합해서 배아가 되고, 자라서 태아가 되고, 때가 되어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 이전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인원을 거쳐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까마득합니다. 아득합니다. 그 까마득하고 아득한 시간이 바로 창세기 기자가 말하고 있는 태초입니다.

 

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일어난 일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사건입니다. 천지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하늘과 땅을 현대물리학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고대인의 눈으로 일단 보십시오. 세상을 직관하는 겁니다. 제가 살고 있는 원당은 2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동북서 쪽으로는 야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남쪽으로만 터져 있습니다. 우리 집은 서쪽 야산 아래쪽에서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른 집들에 비해 약간 높은 곳에 있어서 전경이 좋습니다. 특히 달이 없는 날의 야경을 저는 좋아합니다. 쏟아질 듯한 별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눈에 보이는 별들은 우주의 모든 게 아니라 일부입니다. 우리 눈이 받아들이기에는 우주가 너무 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엄격하게 말하면 별이 아닙니다. 태양이라는 별에 딸려 있는 행성입니다. 우주에는 수많은 성운 집단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태양이 속해 있는 은하계입니다. 우리가 보통 은하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태양은 은하계의 변방에 자리한 평범한 별입니다. 우주 물리학자들은 생태환경이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찾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80% 정도 비슷한 행성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곳이 너무 멀어서 현재 과학으로는 사람이 그곳으로 가기가 불가능합니다. 어쨌든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말한 창세기 기자들이나 어느 정도 우주물리학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현대인이나 똑같이 하늘의 무한한 크기 앞에서 영혼의 어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학 용어로 그것을 누미노제,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큰 긍정

여기까지는 자연주의자, 예술가, 시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며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한발 더 나갑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창조했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에 큰 긍정입니다. 하늘과 땅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적인 차원에 속하는 겁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기자는 하늘과 땅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가리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4)고 묘사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창 1:10, 12, 18, 19절 등등, 여러 구절에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늘과 땅을 비롯한 세상과 우주 전체를 긍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산과 들에 나가서 참 아름다워라.’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감상에 젖는 것도 아닙니다. 창세기 기자는 당연히 자연의 무자비한 폭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이 일어나면 무수한 사람들이 죽습니다. 당시에 비해서 오늘의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했지만 자연재해만은 어떻게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쓰나미와 화산폭발을 예측하기 어렵고 예측해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전염병도 일종의 자연재해와 같습니다. 이런 것들을 돌아보면 하늘과 땅을 선하다고, 좋다고 긍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노자의 말이 옳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긍정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긍정은 하늘과 땅이라는 자연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과 그 인간의 삶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사람의 삶이 늘 평탄한 것은 아닙니다. 사고도 많고, 사연도 많습니다. 인류 역사와 일상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대단히 폭력적입니다. 오죽했으면 불교는 삶을 고해라고 했겠습니까. 기독교의 지옥도 역시 그런 세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기심, 탐욕, 배신감, 잔악성 등등은 사람을 믿을 수 없게 합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존재론적인 긍정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각 사람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백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었을 때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한 마리를 끝까지 찾아 나선다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말은 그야말로 공자 왈()이야,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럴 듯하지만 현실에서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거나, 그건 배부른 사람들에게나 해당된다거나, 또는 세상의 삶이 얼마나 살벌한지를 알면 사람에 대한 큰 긍정 같은 말은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설파하는 게 아닙니다. 입담 좋은 교양강좌 강사들이 웃기면서 설파하는 자존감 회복 같은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벌어져도 그걸 다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라는 아전인수적인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주장과 가르침들은 우리 삶에 약간의 도움이 될 겁니다. 심리 치료와 처세술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 도움을 통해서 나름 건전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일상에서는 그런 게 훨씬 더 현실적인 가르침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도 신앙을 이런 차원에서 받아들입니다. 일종의 교양으로서의 신앙입니다. 그런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실용적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그런 데 머물러 있으면 신앙의 성숙과 심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의 세계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소유지향적인 사람이 존재지향적인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창조 이야기가 세상과 삶에 대한 큰 긍정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좀더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창조는 시원(始原)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하늘과 땅이 보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쉽게 예를 들어, 여러분은 분명히 태아였을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탯줄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으며 살았습니다.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존재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주어졌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긍정이 어디 있을까요? 이 놀라운 사실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세상과 삶을 긍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현재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혐오스럽고 절망스럽다고 하더라도 태초의 일을 알고 있어서 그런 혐오와 절망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에 완전히 묶여서 태초와 하나님과 천지와 창조를 먼 나라 이야기로 여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일상의 과잉으로 인해 벌어지는 영성의 훼손입니다. 이게 일반적인 인생살이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안식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람은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는 모든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서 태초와 창조를 기억하라고 말입니다. 이런 전통은 신약에도 이어집니다. 태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기억할 때 우리는 세상과 자기의 인생이 얼마나 귀하고 거룩한지를 전혀 새롭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절대화 거부

하나님의 창조가 가리키는 두 번째 의미는 세상의 절대화에 대한 거부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지만, 세상은 그것 자체로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창조라는 단어는 어떤 질료를 써서 무엇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신학용어로 creatio ex nihilo, 즉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이 어마어마한 모든 세상은 원래 없었습니다. 현대물리학은 우주가 원래 하나의 점이 폭발해서 커진 거라는 빅뱅 이론을 말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우주가 다시 하나의 점으로 축소될지도 모릅니다. 이게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론이 아닙니다. 블랙홀을 예로 들면 이해가 가능합니다. 블랙홀은 무한의 중력이 작용하는 구멍을 가리킵니다. 지구가 블랙홀에 빠지면 사과 한 개 정도로 축소됩니다. 지구가 빈 공간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히브리서 1장을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1:10-12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시편 102:25절 이하를 인용한 구절입니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문학적으로도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하늘과 땅이 옷과 같이 낡아진다고 말했습니다.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다가 산이 되기도 하고, 산이 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우주의 별들도 탄생했다가 다시 사라지고 맙니다. 모든 세상은 옷을 갈아입듯이 변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원하며, 그 연대가 끝이 없습니다. 거꾸로 영원하고 연대가 끝없는 그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 표현은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도 정확한 진술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우주물리학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대 유대인의 역사와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그들이 처한 역사와 삶의 자리는 바벨론 제국입니다. 바벨론 제국은 당시 근동의 패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입니다. 바벨론 제국 앞에서 고대 유대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력이 창조의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의 권력자들, 지식인들, 기업가들은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의 이런 외침을 가소롭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대다수는 바벨론 제국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소수의 유대인들만, 신학적으로 P(제사장 계급)문서를 생산한 유대인들만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을 창조한 분이라는 사실을 줄기차게 외쳤습니다. 그런 외침이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외침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당대를 호령하던 바벨론 제국은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절대적인 권력이 무너지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으며, 고유한 방식으로 완성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초기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모든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사도신경의 첫 항목이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 권력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단입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의 절대 권력은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렇게 무식한 권력이 아닙니다. 로마정치와 로마법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음악과 시와 예술도 수준이 높았습니다. 제국은 채찍만으로 지배하지 않습니다. 늘 당근을 줍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신을 절대화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로마 제국과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전능한 존재이시며 그가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아주 특별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로마제국이 제공하지 못하는 어떤 세계를, 로마제국의 채찍과 당근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어떤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그들은 유대교 안에 머물거나 로마제국의 보호 아래 머물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절대 생명이라는 사실을 신약성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두 군데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1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했고,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모든 생명의 시원이라 할 태초에 이미 존재했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2 독서인 막 1:4-11절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건에 대한 보도입니다. 세례 받는 순간에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1).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무()로부터 창조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창조주와 동일한 권위를 지닌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로마의 절대 권력에 굴복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성이 깊고, 삶에서 진실하고 용감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편으로 자랑스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커다란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현절 후 첫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실체로 드러난 것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의 시원이라는 고백입니다. 태초의 창조가 예수님에게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그리고 그에게 일어난 구원 통치를 믿고,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전권으로서만 가능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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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January 16, 2015
*.194.68.54

하나님의 행위를 기억하는 것, 모든 사물을 상대화 하는 것이

머리로 의식해서가 아니라 저의 삶과 일치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올 한 해도 아득한 진리의 세계로 서서히 들어가는 기대와 떨림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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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7, 2015
*.94.91.64

신앙과 삶의 일치가 어려운 이유는, 음

여러가지이지만 극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이 되는 게

빠른 길일지 모릅니다.

뭔가 세상에서 붙들 만한 게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는 거지요.

여기서 벗어나기를 불가능한 겁니다.

그냥 가는 거리만큼 가다가 주님이 부르실 때 가면 됩니다.

조금이라도 근본에 가까이 가는 최선은 공부입니다.

여러가지 종류의 공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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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갈매나무

January 20, 2015
*.230.136.69

창조 이야기에서 '큰 긍정'과 '절대화 거부'를 읽어내는 것은 탁월한 통찰입니다.

크게 공감하면서도 뒤따르는 의문이 있습니다.

'큰 긍정', '절대화 거부'는,

창조 이야기의 내용이 담고 있는 신의 존재와 신적 행위를 일단 미루어두고,

그 이야기를 공유했던 바벨론 포로기 유대인의 실존을 전면에 내세워 해석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용 자체가 담고 있는 신적 행위와

그 이야기의 바탕에 놓여있는 인간의 실존이

하나의 해석틀 위에 공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들은 말씀을 생각하다보니 '창조'라는 신적 행위와 신의 존재가 멀게 느껴져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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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0, 2015
*.94.91.64

좋은 질문을 하셨네요.

위 설교를 아주 진지하게 대했다는 증거겠지요.

어떻게 설명해야할지요.

일단 인식론과 존재론의 관계를 염두에 두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또는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의 모든 것을 초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으면 무의미합니다.

무의미하다기보다는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해야겠군요.

우리의 인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어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을 세상에 선포한 거지요.

그 유대인들의 역사가 유대인들에게는 실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계시의 통로인 거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역사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역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지요.

하나님이 따로 있고, 창조 사건이 따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이요.

창조행위, 그 사건 자체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다만 성서기자들은 그것을 문학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표현한 거지요.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갈매나무님이 멀게 느껴진다고 하는 그 신적 행위와 신의 존재는

창조 행위 자체에 가깝게, 아니 바로 거기에 일치하는 겁니다.

큰 긍정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통치인 거지요.

그 통치가 바로 하나님이구요.

이런 문제들은 신학 전반에 다 걸쳐 있는 것이라서

한 두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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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갈매나무

January 22, 2015
*.230.136.69

그렇군요..

역사와 계시가 하나라는 사실을 잘 붙들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3]진인택

March 09, 2015
*.176.175.230



지금의 절대권력은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결과물들입니다.


그 자본의 파워에 복지가 행해지는 것으로 보이고


우리의 삶의 기어가 맞물려 돌아 가는 것으로 착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본의 파워 제공자를 생각해야만 하는 구조로 살아갑니다.


그 자본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참뜻을 생각할 시간을 뺏겨 버립니다.


 내가 시간을 바치기 때문에 누구 탓도 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내가 소액의 세금이라도 추징된 것이 밝혀지면


고발이니 ....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일에 중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영성을 갈고 딱 고하는 시간을 자본주의가 눈에 보이게


세금 떼가듯이 떼어가도 인식을 못합니다. 마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벗어난다는 게 여간 쉽지가 않았습니다.


자본집착의 종착역은 죽음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뭔가 빗나갔습니다.


자본이 중요한 게 아니고 새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가 예수님이란


사실에서 벗어나서 뭔가를 찾으려 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많은 인생들을 변화 시키는데 크게 기여함에 감사 드립니다.


제가 어머니의 胎에서 처음 태어났지만


목사님 말씀의 胎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9, 2015
*.94.91.64

예, 제 말씀이 구도의 길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된다니, 좋습니다.

근본적으로 주님의 말씀이 성령의 도움으로 공명되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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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8
619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8452
618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9720
617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9000
616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145
615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067
614 창조절 쉐마 이스라엘! (신 6:1-9) [4] 2015-11-01 15512
613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175
612 창조절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히 5:1-10) [8] 2015-10-18 8227
611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4
610 창조절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4] 2015-10-04 10856
609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441
608 창조절 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11:18-20) [12] 2015-09-20 8197
607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8
606 창조절 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4] 2015-09-06 7720
605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40
604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50
603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4
602 성령강림절 하늘의 양식 (요 6:35, 41-51) [8] 2015-08-10 7829
601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양식 (요 6:24:35) file [15] 2015-08-02 8049
600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569
599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26
598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461
597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743
596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9
595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370
594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699
593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211
592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079
591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900
590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782
589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4
588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25
587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197
586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2974
58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51
58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6908
583 사순절 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8] 2015-03-29 8293
582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461
581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56
580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517
579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337
57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32
577 주현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막 9:2-9) [4] 2015-02-15 8334
576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761
575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46
574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8991
573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31
»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786
57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216
57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544
569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730
568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9
567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23
566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4694
565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6793
564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4
563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7
56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875
561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206
560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260
559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6
55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6
557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014
556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57
55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5
55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7] 2014-08-31 13301
553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882
552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647
551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747
5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175
549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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