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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삶, 하나님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072 추천 수 5 2010.11.07 23: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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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20:27-40 

죽음, 삶, 하나님

(눅 20:27-40), 11월7일, 성령강림절 후 24째 주일

 

     형사취수혼

     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는 겨우 2-3년 밖에 되지 않지만 그동안에 예수님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치병, 축귀, 선포, 가르침 등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진리 논쟁입니다. 바리새인들과의 율법 논쟁은 공생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마지막 순간에도 ‘진리가 무엇이냐?’하는 논쟁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논쟁에서 이기고 싶어선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진리가 훼손되는 경우에 시시비비를 따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두개인이 등장합니다. 사두개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과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예수님과의 충돌이 더 잦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사두개인은 예수님에게 부활에 관한 질문을 했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한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려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일단 신 25:5절에 있는 내용을 꺼내들었습니다. 소위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 Levirate)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독특한 제도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유대 사회에서 얼마나 분명하게 실행되었는지는 정확한 정보가 없습니다. 부분적으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한 여자가 결혼해서 살다가 아이를 낳지 않은 상태에서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 말고 남편의 형제들과 결혼하는 제도입니다. 사두개인은 모세의 법을 근거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일곱 형제가 모두 모두 한 여자와 부부로 살다가 죽었고, 여자도 죽었습니다. 부활 때에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짓궂은 질문을 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기준으로 끌어내려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차원의 질문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비슷하게 나옵니다. 여러분이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상급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면류관을 쓰고, 어떤 사람은 개털모자를 쓴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좋은 집에 거하게 되고, 인색했던 사람은 초라한 집에 거한다고 합니다. 이런 선정적인 주장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아마 있을 겁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믿어지지 않아도 믿고 싶을 겁니다. 죽어서 뭔가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살아 있을 때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우리에게서 신앙생활이 일종의 주식투자나 보험가입처럼 간주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곱 명의 남자와 살았던 여자가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사두개인의 질문과 하늘나라에서 보상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은 똑같이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를 세상의 삶이 단순히 연장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어리석은 질문이었지만 예수님은 사두개인에게 정확하게 대답하십니다. 부활의 세계, 즉 하늘나라에는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눅 20:36)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일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인간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들은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돈을 버는 목적도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낳은 자식을 잘 키우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경험하고 삽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그런 삶이 작동되지 않습니다. 남녀의 성 구별도 없어지겠지요. 이건 최소한의 논리로 생각해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부모의 관계가 연속된다면 곤란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나라는 절대적인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모두 천사와 동등하게 됩니다. 천사에게 형이 있고, 동생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목사가 있고, 평신도가 따로 나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따로 있고, 노숙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새로운 존재(new Being)로 변화됩니다. 그런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삶을 재미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난 것을, 또는 자식이 잘난 것을 자랑도 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맛도 봐야 살맛이 난다고 말입니다. 돈 버는 재미가 없이는 견뎌내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가족끼리만 통하는 진한 감정 없이 영원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겠지요. 학생들도 친구보다 시험점수도 높게 받고 친구보다 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기분을 포기하고 싶지 않겠지요. 그런 삶의 에너지가 문명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마르쿠제는 <문명과 에로스>에서 설파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작동되는 이치입니다.

     지난 10월7일 스웨덴 한림원은 페루 출신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74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해서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은 시인도 지난 수년 동안 강력한 후보로 알려졌었는데, 이번에도 고배를 마셨습니다. 아마 번역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일본은 이번에도 두 명이 화학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노벨상 시즌이 올 때마다 후보에 올라간 이들만이 아니라 그들 나라의 국민들이 모두 큰 기대를 품고 발표 순간을 기다립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문명을 끌어가는 에너지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선의의 경쟁마저 없는, 천사들이 모인 것과 같은 세상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영화 한편을 소개해도 되겠지요? 1998년도에 집사람과 함께 <시티 오브 엔젤스>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원래는 <베를린의 천사들>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리매이크 한 영화라고 합니다. 천사 남자와 여의사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자천사인 세스 역할을 한 배우는 니콜라스 케이지이고, 여의사 메기 역할을 한 배우는 맥 라이언입니다. 세스는 천사의 능력을 포기하고 보통 사람이 되어 메기와 여행을 떠납니다. 메기가 사고로 죽습니다. 세스는 비록 사랑하는 여자가 죽어서 혼자 남게 되었지만 사람으로 살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든 삶이 천사의 능력보다 더 좋다는 말을 합니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겠지요. 기쁨과 슬픔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애절하고 달콤한 삶이 다 귀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장가와 시집이 없고 모두 천사와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구체적인 삶을 평가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과 저 세상의 삶을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철이 들기 전의 어린아이의 삶과 어른의 삶을 단순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삶이 있고 어른은 어른의 삶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면 소꿉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고 군것질을 즐기지도 않습니다. 어른과 아이는 서로 다르게 삶을 경험합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삶을 보고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른들의 삶도 따지고 보면 가지각색입니다. 형태만 달랐지 기본적으로는 아이들의 소꿉놀이에 매여 있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수도원 생활은 재미가 없을 겁니다. 노력한 것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원리가 아니라 순전히 기도와 노동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맹탕처럼 보일 겁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속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고 마치 천사와 같다는 말은 그곳에서의 삶이 지금 여기서의 삶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형사취수혼을 근거로 일곱 명의 남자와 결혼한 여자의 운명에 대한 사두개인의 질문이 왜 잘못인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생명 형식으로 저 세상의 생명까지 재단한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왜 어른들은 소꿉놀이를 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도 삶이다

     사두개인의 질문은 형사취수혼 자체가 아니라 부활이 없다는 사실을 내세우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의도를 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사두개인들과 마찬가지로 모세의 권위로 대답하셨습니다. 가시나무 떨기 전승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출 3: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말이 안 돼 보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인데, 살아 있다니요. 도대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이고, 살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눅 20:38절이 이런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여기에 두 문장이 나옵니다. 똑같은 뜻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문장입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세상에서 죽었는데 여전히 살아있다면 그가 부활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관건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죽더라도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독특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생명의 출처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그가 어떤 실존에 처하든지 살아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생명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상투적인 것으로 듣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생명을 얻는다는 가르침이라고 말입니다.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별 다른 감동으로 와 닿지도 않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그렇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시 그 말씀에 마음을 열어보십시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요? 이 말씀이 놀랍게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사두개인들의 생각에 머물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두개인들에게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삶의 내용이 없으면 죽은 것이었습니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은 모든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우리의 실존입니다. 아무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에게 모든 사람이 살았다는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에게는 죽음도 삶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생명입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 사실이 여전히 놀랍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사실에 영혼이 공명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부활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기존의 틀에 묶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좀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자연을 무리하게 파손하지 않습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별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가난한 나라를 우습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시각으로 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제가 지금 말로는 이렇게 설교하지만 이런 영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이 세상이 말하는 죽음과 삶의 틀에 길들여집니다. 신앙의 길에서 시행착오가 반복됩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죽음도 역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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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November 09, 2010
*.99.193.27

놀라운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말씀을 접할때마다 무언가 강화하는 방식(새마을 운동 같은...)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열리는 것 같아 자꾸 빠져듭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지식으로 머물러 있지 않기를 기도 드립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유의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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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9, 2010
*.120.170.243

상수리 님,

내 설교를 통해서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는 건

이미 상수리 님의 영성이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기계적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에요.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되거나

짧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니에요.

이런 점에서 말씀을 받는 것도 은총이라는 말이 옳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의 경험과 세계 인식의 틀을 벗어나는 거에요.

벗어난다기보다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게 좋겠군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형식에 길들여지지 않는 거지요.

이런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허황되게 들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빛으로 소리로 들리기도 합니다.

허황되게 들리는 이유는

익숙한 것들에 완전히 길들여졌기 때문이에요.

세계, 생명, 시간을 평면적으로만 본다는 겁니다.

새로운 인식이 상수리 님이 말하듯이 지식, 정보로 머물지 않고

깨우침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춥지만 햇빛은 찬란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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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떨기나무

November 11, 2010
*.238.16.158

하나님 안에서는 죽음도 생명이다.

좋은 말씀으로 영혼을 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엉뚱하기는 하지만, 삶과 죽음의 공간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 천국이 화성, 목성 같은 공간적인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으면 공간적인 어떤 세상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여기신 바로 이 세상, 지구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국이 아닐까요.

종말에 완성될 새하늘과 새땅은 화성, 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닐까요?

죽으면 이 지구를 떠나 어떤 공간적 세상으로 간다는 이원론적 죽음 이해가 과연 성서적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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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1, 2010
*.120.170.250

떨기나무 님,

어려운 질문을 하셨군요.

지구가 새로운 세상으로 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아니냐는 질문이지요?

그것은 우주의 어느 공간을 생각하는 이들에 반론이기도 하구요.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여지는군요.

일단 지상낙원을 말하는 이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인 생각을 일단 내려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구라는 공간도 앞으로 45억년 후에는 태양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런 공간이 아닌 세상을 우리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런 생각 자체를 일단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해체된다면 공간 개념도 완전히 달라질 거에요.

도대체 그런 세상이 어디 있나, 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굳이 한 마디 한다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차원이 좀더 정확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통치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나라말입니다.

그런 나라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부활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연결됩니다.

천천히 더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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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노큐

November 11, 2010
*.120.219.26

오늘 오랜만에 목사님의 설교를 읽었읍니다. 그동안 좀 타성에 젖어 있었고 혼자만의 고민

(새로운 영적시각으로 이 땅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는것.)

이 더 이상 싫기도 해서...

목사님 다시 한번 몸부림 쳐 볼렵니다.. 오프라인에서 목사님이 이야기 하신 방향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이

신앙세계에서 왕따를 경험하는거지만(제 주위에서는 그렇네요) . 다시 한번 힘을 내보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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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2, 2010
*.120.170.250

노큐 님,

오랜 만에 이 설교방에 들어오셨다군요.

섭섭합니다. ㅎㅎ

비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을 아시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아시죠?

바리새인들에게 왕따 당한 예수님을 아시죠?

기존의 원리에 길들여져서 적당하게 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여서 자유롭게 살 것인지를

우리 각자가 선택해야 한답니다.

저는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이래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합니다.

지난 기독교 2천년  역사에 어른들이 많답니다.

타성이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가장 나쁜 바이러스라는 걸 아시죠? ㅎㅎ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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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November 11, 2010
*.9.80.149

존경하는 스승이  있다는 것은   스승을 만나지 않아도 그 어르신이  

자기방에 불을 밝히고 연구하고 계시리라  생각하는 그것만으로도 내게 힘이 됩니다.

죽음도 생명이기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죽음도 삶이라는 깨달음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 갑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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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2, 2010
*.120.170.250

수우 님,

이건 웬일이세요?

왕년의 용사를 만난 기분이네요.

초창기 서울오프 친구들이 눈에 다 자취를 감추었는데,

수우 님이 이렇게 짠 하고 나타나셨군요.

요즘도 시 쓰세요?

아니 수필이지요?

예수를 죽은지 삼일만에 일으키신 하나님 안에서

죽음도 삶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서로 깨달을 수 있다니,

이것도 하나님의 은총이군요.

예, 하나님의 품에 깊이 안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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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November 12, 2010
*.109.153.13

말씀을 들으며 특히나 후반부에 뭔가 호소하시는 듯 평소보다 강하게

말씀하시는 인상을 받으며 조금 착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죽음과 삶이 하나라는 사실이 그렇게 놀라움으로까진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그건 당연한거 아닌가 근데 그 사실에서 뭐를

깨달아야만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에도 죽음에 대해 또 그 생각을 하다 보면 당연히 부활에 대해

적지 않게 생각을 합니다

과연 부활의 실체라는게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야 알수 있고

그 전까진 어떤 상상도 할수없는 부활의 실체, 그냥 무의식으로 들어가는건 아닐까

자꾸 생각하다 보면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가 문득, 지금도 살아계시고 바로 이순간

죽는다면 대면하게될 절대자 그렇다면 그 절대자는 차안과 피안의 구별이 없는거구나

그런 생각에 이르렀지만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저의 영성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전 한번도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를 하늘나라의 시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해본적은 없거든요

물론 그 연결고리가 완벽히 이해된건 아니지만 그건 제 영성의 수련을 통해

해결해야할 문제고 새롭게 깨달음을 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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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2, 2010
*.120.170.250

방랑자 님,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군요.

우리가 가야할 길이 멉니다.

그렇지요?

영성이 깊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다를지도 우리는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의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근본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지금 우리를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거지요.

그건 그렇고,

하나님 안에서 죽음도 삶이라는 말이 별로 놀랍지 않다는 거지요? ㅎㅎ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삶의 새로운 차원이 아직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일까요.

천천히 하나님 나라의 길을 가 봅시다.

다행스럽게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라는 시각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네요.

그게 결론입니다.

그걸 구체적인 삶에서 적용하려고 할 때

또 문제가 많이 생길 거에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진도를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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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November 12, 2010
*.255.183.87

목사님, 저는 "죽음과 삶이 다르지 않다, 죽음은 문지방 하나 건너는 것과 같고 단지 옷을 바꿔 입을 뿐이다...등등..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재작년엔 고 노무현 대통령 유서에서도 읽었고요.

그러나, 이 의미를 성서적 관점에서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던 거 같습니다.   

 

이 말씀 몇 번째 듣고 있었지만, 오늘은 많이 놀랐습니다.

그동안  '죽음, 삶, 생명, 부활.. 그리고 삶과 죽음은 같다."는 단지 정보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거 분명하군요.

- 이런 점에서는 '경험'도 사실 믿을 만 한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한계가 분명히 있으니까요.- 

삶과 죽음의 문제,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문제가 제 삶을 온통 휘저어 놓는 것 같네요.

대체, "삶과 죽음이 같다"는 이 엄정한 명제 속으로 어떻게 하면 제 실존 전체를 집어 던질 수 있을까요?

그래야만, 삶과 죽음이 하나다...라고 감히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목사님, 이번 말씀을 읽으면서,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 드리자면,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것도 내려갈 것도 없는 극대치를 열어 보여주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 우리가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이외에 더 이상 무엇일까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삶과, 죽음, 생명, 부활의 경험으로 이 범주 "안'을 채우는 것만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이 "안"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였군요.

우리는 예수 생명안에서 사는 것이었어요. 그러기에, 우리가 감히 "죽음과 삶은 같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거지요?

목사님,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시고.."라는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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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3, 2010
*.120.170.250

라라 님,

삶과 영성에 대해서 늘 깊이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글에 나타나 있네요.

한 가지만 다시 정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위 내 설교가 그것을 정확하게 짚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지만요.

하나님 안에서 "죽음도 삶이다."는 말과

"삶과 죽음이 같다."는 말은 뉘앙스가 다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성서가 죽음을 예찬하는 경우는 없어요.

기독교 신앙이 죽음을 낭만적으로 초월하는 건 아닙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세계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같다는 명제로 간단히 해결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 안에서 '죽음도 삶'이라는 말은

우리의 삶이 질적으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죽음이나 삶이나 다 여일하니

죽음을 초월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에요.

오히려 죽음의 문화와 투쟁해야 해야겠지요.

라라 님의 말은 이런 걸 다 전제하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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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November 13, 2010
*.255.183.87

예, 목사님, 저도 "죽음과 삶이 하나다, 혹은 같다."라는 말과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죽음도 삶이다, 생명이다."라는 말과는

엄연히 다른 뜻임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확실히 성서적인 이해였는지 아니면 종교적(타종교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는 우리보다 더 초연한 것 같습니다.)

혹은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 한 건지, 저도 헷갈리는 문제였어요.

그래서 말씀을 몇 번이나 들으면서 꼼꼼히 점검해 봤어요.  그러다가... (말씀 드린 것처럼) 너무 놀랐습니다.

성서적 관점에서의 삶, 죽음은 예수님과 불가분리의 상태에서만이 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이었어요.

그러다가 "죽은자들로부터의 일어나심(부활)"까지 생각이 이르렀구요.  

그러니까, 제 인식에 머물고 있던 '지식'은 그저 '정보'였다는 것이 깨달아 졌어요.

앎과 정보가 이렇게 다르다니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그래서 죽음과 삶이 하나이기에, 이생이나 저생이나 다를 게 뭐냐식의 허무주의가

아니라, 이건 오히려 이 '생명'에 대한 끈질긴 목마름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요. 그런 생각이 어제 밤에,

반짝반짝 제 영혼을 비춰줘서 열심히 댓글을 썼는데, 다시 읽어 보니,

저조차도 대체 뭔 말인지.. 헤헤 (그래도 저게 5번 더 고친 거예요.^^)

 

목사님, 이제 쬐끔, 아주 쬐끔, 삶,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는 부활이 엄연히 자리잡고 있었음을, 감지하게 되어요.

그래서 감히 말씀 드리지만, 이 세상 그 누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쉽게 말 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과 죽음은 오로지 그 분의 영역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요.

어제밤, 그게 제 영혼을 얼마나 기쁘게 하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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