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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주현절 조회 수 17011 추천 수 6 2013.02.03 23:08:01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0203.mp3 
성경본문 : 예레미야 1:4-10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예레미야 1:4-10, 주현절후 제4주, 2013년 2월3일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는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잘 알려진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에스겔과 더불어 소위 삼대 대선지자로 불립니다. 그가 선지자로 활동한 시대는 유대의 격변기였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기원전 609년과 587년이 중요합니다. 609년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나름으로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했던 요시야 왕이 죽은 해입니다. 요시야 왕은 외교적 판단을 잘못했습니다. 바벨론과 이집트의 싸움에서 바벨론 편에 서서 이집트 군대와 맞서다가 자신의 꿈을 피워보지 못한 채 전장에서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왕하 23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587년은 요시야의 뒤를 이어 이십여 년 동안 차례대로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가 모두 나라를 지키는데 실패하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유대가 멸망당한 해입니다.

 

유대의 이 시대는 1910년 한일합방이 이뤄지기 직전 조선 후기 시대와 비슷합니다. 우리도 당시에 러시아, 청, 일본, 미국 등의 열강들 사이에서 마치 고래 싸움터에 낀 새우와 같은 형국이었습니다. 국내외의 아주 복잡한 사건들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또는 세계역사의 큰 흐름에 휩쓸려 결국 519년 동안 이어지던 이씨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수많은 애국지사와 역사학자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한편으로는 절망감과 좌절감이,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겠지요.

 

예레미야가 처한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그는 자기 조국 유대가 서서히, 그러나 어떻게 손쓸 여지도 없이 멸망의 길로 빠져드는 상황 앞에서 좌절과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유대 왕과 왕족과 귀족, 그리고 민중들에게 호소하기도 하고, 위협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적대감만 팽배해졌습니다. 예레미야는 옥에 갇히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 위기도 여러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줄기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웬만하면 포기할 만도 한데, 그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초토화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렸습니다. 그런 영적인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말씀의 임재

 

예레미야의 성격이 원래 끈질겨서 그런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내심이 유독 강하다고 말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위에서 아무리 반대를 해도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무조건 자기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돌진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꾸준하게 성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예언이 잘못된 거 아닌가 하고 회의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고집불통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예민해서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그가 예언을 통해서 돈벌이를 한 것일까요? 고대 유대사회에서도 돈을 받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제사장들도 돈을 받고 제사를 드려주곤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부도덕한 일들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렘 5:1절은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한 비판입니다.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예레미야의 영혼을 붙든 힘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본문 4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2b도 그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예레미야가 온갖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소명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사명감을 느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이 어려우니까 자기가 나서서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자기 결단이 아닙니다. 사실 소명과 결단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게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걸 경험한 적이 있을지 모릅니다. 해외 선교를 위해서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지구촌 오지로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누가나 크게 감동을 받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희생적으로 살았던 슈바이처나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의 성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결단을 일종의 소명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이들의 결단과 성서의 소명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그 말씀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이 자기의 안일에 위태로운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 선포가 자기 민족을 살리는 길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아주 특별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들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명감 비슷한 거였다면 그들의 예언이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어떤 힘에 사로잡힌 겁니다. 그래서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고, 거의 모든 선지자들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그와 비슷한 현상을 시인들에게서 배웁니다. 사이비가 아닌 진짜 시인들은 자신이 시를 쓴다고 하지 않고 시가 자기에게 왔다고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배가 고파도 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거겠지요.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작곡은 기술이 아니라 소리의 존재론적 경험입니다. 자기가 억지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소리가 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걸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어떤 분들에게는 별로 실감 있게 전달되지 않을 겁니다. 또는 그들의 경험이 참되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두 예레미야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임재 하는 걸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예레미야처럼 똑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일어난 말씀의 임재가 무엇인지는 일단 알아야만 우리가 선지자들의 영성 안으로 좀더 깊이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다.

 

예레미야의 두려움

 

예레미야가 전해들은 여호와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여호와의 이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는 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반응을 보입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절) 여기서 말할 줄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입담이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즉 예언을 하기에 영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너무 어리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고백은 단순한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일단 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경험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까지 말하곤 합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다 그런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모세도 자기가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사도 바울도 자신이 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고후 11:6) 이사야는 자기가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사 6:5).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메시아적 징표를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보도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든지 아니면 예수를 부정해야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정하는 쪽을 택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님 경험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완전히 낯선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낯선 분입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전적 타자’(ganz Anderer)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그 어떤 존재 유비가 가능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나 어머니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부활을 보십시오. 부활은 이 세상의 생명과 전혀 다른 생명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대하는 모든 경험들을 뛰어넘는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부활을 환생이나 재생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겁니다. 부활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결혼하고 자식 낳고 배부르게 먹고 칭찬 듣는 식으로 삶이 유지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부활을 모르는 겁니다. 부활 경험은 전혀 낯선 겁니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걸 감당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어립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낯선 하나님을 당시 국내외 정치적 현안에서 경험했습니다. 그가 전해야 할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 듣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더 나가서 당시 근동 지방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이집트, 아시리아, 바벨론 제국이 듣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모든 나라는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역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갑니다. 예레미야는 그 역사의 그 신비한 차원을 들여다 본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선포하면 미쳤다는 말을 듣기 좋습니다. 당시 유대민족으로부터는 반역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예언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할 정도였습니다. 예레미야는 가능한 예언활동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피곤하기도 했겠지요. 자기는 할 만큼 했고, 모든 책임은 유대 민족이 져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처형이 임박할 때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두려워하지 말라

 

예레미야는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듣습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8절)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이 그에게는 사실 족쇄였습니다. 그는 그 말씀으로 인해서 선지자 활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본문은 더 실감 있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시고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술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바로 여호와의 말씀 자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아주 구체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예레미야를 세워서 여러 나라와 왕국을 세우기도 하고 넘어뜨리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멋지게 들리지만 예레미야가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백척간두에 올라선 것과 비슷합니다.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앞으로 나가기도 겁이 납니다.

 

이런 상황이 어떤지 실감하실 수 있나요? 살인 사건이 다루어지고 있는 법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검사는 피의자를 실제 살인범이라고 논고를 폅니다. 피의자는 억울하다고 호소합니다. 양쪽 주장이 엇비슷하게 일리가 있습니다. 양심적인 판사라고 한다면 이런 상황이 두려울 겁니다. 자신의 선고에 따라서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자신의 판단에 실수가 없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까요.

 

예레미야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를 비판하는 소리가 주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왕과 관료들도 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냐 선지자는 자기와 완전히 다른 예언을 합니다.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치시고 유대 민족을 곧 해방시킬 것이라고 유대민족을 위로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민족이 완전히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이 누구의 말에 더 솔깃해했을지 분명합니다. 자기 민족들이 듣기 싫어하는 내용을 예언해야 할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땠을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의 생각을 꾸준히 밀고 나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입에 붙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여호와의 말씀이 곧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거기에만 영혼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오늘 정작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의 사실입니다. 예레미야의 영혼을 사로잡은 여호와의 말씀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헛된 소문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영혼을 담대하게 할 것입니다. 죽음까지도 극복하게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희망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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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February 04, 2013
*.18.118.229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선지자다.

 

선지자를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을 경험했는가?' 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감당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해야겠다는 결심이나 결단을 할 용기도 없습니다.

 

어린 시절 참 많이 오해했던 것이 '감당할 일'이라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그저 싫은 일이나 힘든 일을 일상이나 직장에서 혹은 교회에서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결국 자기만 피곤하고 빨리 지칠 뿐이었습니다.

 

30대가 되어서야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지원보다 권력의 질투를 받으며 싸운 이순신, 윤관 등의 무관.

일제강탈기 현실성 없음에도 포기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시대의 한계와 투쟁했던 민주운동가들과 정치인들.

 

거대한 권력의 비리에 맞서는 언론인.

국가의 정책에 반론하는 학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면 익명의 크리스챤들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때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짐에도 용기를 내기 힘이 듭니다.

그들도 평범한 시민의 한사람 한사람인데 ...

 

근본주의 신앙에 가까웠던 어린 시절에는 그냥 선교가서 죽기만하면 순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마치 전쟁 시기 힘이 없어 죽은 사람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군인을 같다고 생각해버린 것이죠!

 

죽음을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죽음 앞에

아니 죽음에 이르는 고난과 고통 앞에 조금 더 담대하게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평범한 일상조차도 버거운게 지금의 수준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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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4, 2013
*.149.31.175

포크 님,

이 '평범한 일상'이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네요.

그걸 치열하게 살아내면 살리는 거고,

거기에 길들여지면 죽이는 거겠지요.

치열한 삶이 그냥은 안 되지요.

말씀의 임재, 영의 임재, 하나님 경험이

일상에서 현실되는 그런 단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생각이나 말처럼 되지 않는 게 문제에요.

선지자들을 통해서 배우 수밖에 없어요.

그 배움이 우리를 구원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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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天命

February 04, 2013
*.62.2.5

 

하나님께서는 왜 성육신을 하셔야만 했는가, 지난 주간의 의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이 그의 하나님 경험이라는 설교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름에 우리에게 하나님 경험을 하게 하시려고

초월적인 존재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시공간에 나타나게 하셨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저희에게 예레미야 보다 더 구체적인 하나님 임재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답이었습니다.

 

예배 후 진행된 사도신경 공부에서, 세례와 성만찬, 말씀 선포를 통해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교제,

나아가 하나님과의 일치까지 이루어지는 놀라운 신학적 영성은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가 단순히 성도들 간의 교통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으로까지 연장된다는 사실을....

지난 한 주간의 의문의 해결과 더불어 새로운 깨달음이 덤으로 얻어진 하루였습니다.

 

설교가 공감이 안 간다는 젊은이들의 고백은

실상 오늘의 젊은이들이 평소 하나님 경험을 사모하고 사유할 만한

그런 여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지 못하다는 고백일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 보다 더욱 긴박하게 돌아가는 처절한 상황이었음에도

예레미아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 경험을 사모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하나님 경험은 우리가 처한 상황의 문제가 아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애 가운데,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 경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놓지지 않고 늘 사모하는 그런 경지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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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4, 2013
*.149.31.175

천명 님,

그렇습니다.

하나님 경험, 말씀의 임재는 상황을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초월하는 영적 힘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걸 포착해서 더 밀고 나가느냐

아니면 머물러 앉아버리느냐 하는 것은

개인에게 주어진 영적인 과제이겠지요.

대한민국의 목회가 대개 비슷해도

어떤 목사는 구도정진의 태도를 취하고

어떤 목사는 사업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과 비슷할까요?

저도 남은 세월을 계수하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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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February 05, 2013
*.104.193.116

저는 설교의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눈이 튀어나오는 것같았습니다.

다시 설교를 읽으려고 들어왔더니 말씀이 축약이 되었어서

설교듣기를 다시 들었네요.

직접 예배에 참석하시지 않으신 분들은  '설교듣기'를 꼭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디오 12:00 부분 이후...

 

먼저 안다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관점으로 선망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앞날을 미리 알려고하고

위로부터 무엇인가를 구하고..

그런 입장에서 선지자를 오해하며, 더 이해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그 상황조차도

우리의 욕망이 투영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는데

목사님의 예레미아의 경험에 대하여 설교하심을 듣고

여러 면으로 제가 놀랐습니다.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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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5, 2013
*.149.31.175

눈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니, 음

하필이면 왜 눈이에요?

금년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선가 보군요.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에 대한 저의 설명이

유니스 님의 영혼에 공명됐으니

성령의 도움심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선지자들의 영적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연결되는지

앞으로 좀더 공부해봅시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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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라크리매

February 06, 2013
*.213.63.99

안녕하세요 목사님
설교 말씀을 읽으면서 나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는지 돌아보게 되네요
하나님을 경험한 자가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것이 더 힘든걸까요? 아니면 진리를 대면한 적이 없는 걸까요? 
목사의 대필,표절 사건을 대처하는 성도들,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요즘 교회안에서의 양육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이 듭니다
가끔 동네 교회를 가곤 했는데.. 그 발걸음도 요즘 무거워만 집니다
하나님 경험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묵상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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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6, 2013
*.149.3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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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 라크리매 님 잘 지내시지요?
요즘도 실내악 활동을 하시겠지요.
표절, 대필 이야기는 사랑의 교회 사태를 가리키는 거지요?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닙니다.
문제는 제자훈련으로
기독교인이 양심적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겠지요.
그건 좀 나이브한 생각이거든요.
교회가 '정감' 운동을 벌인다는 건
신앙의 중심이 뭔지를 잘 모른다는 증거이기도 하구요.
하나님 경험은 전혀 다른 차원이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집중하면서 살아봅시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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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February 07, 2013
*.34.116.82

라크리매님,
참 오랜만에 뵈어요.
비올라 연주 들을때마다
라크리매님 생각 종종 했어요.
이렇게 뵈니 얼마나 반가운지요.
자주 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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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라크리매

February 08, 2013
*.70.45.151

잘지내시죠? 라라님
다비안 자주와요 댓글 남기기 힘들었는데
모바일로도 글쓰기가 되서 흔적을 남길수 있게 됫네요
발걸음 닿을때 대림에도 한번 들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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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une 19, 2013
*.176.175.67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술에 말씀을 붙이셨고,
더 크신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인가요.
이 순서 또한 생각해보니 두렵습니다.
순서의 예측은 가능하나 어떤 모습으로 올지 얼마나 나의 생각을 뛰어넘는 낯선 모습으로 올지 긴장이 됩니다.
목사님, 전 신약성경을 읽는 이유가 하나님이 자꾸 춥다고 외롭다고 징수, 징집하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자기들의 교회에 모셔 놓고 있습니다.
천국을 청약하려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낯선모습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나도 인자하신 하나님에 기대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인자하기만 한지.
설명할 수 없는 잔인한 역사의 흐름이 왜 있어야 했는지를 기도 할 때 과연 하나님은 언제나 인자하신가...
물로 모든걸 쓸어 버릴 수 있다고 경고하셨던 하나님께서
물대신에 예수님을 미리 보내 주셨습니다.
낯선 두려움이 하나님의 실체인가 깊게 생각할 때 
구원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내안의 가장 큰 두려움을 가져 가셨습니다.
그때가 진리를 약간 알던 바로 그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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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9, 2013
*.94.91.80

'하나님의 낯선 모습'이라는 표현이 인상 깊군요.
사람들은 그걸 감당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도 황금 십자가로 치장하고 싶어하는 거지요.
십자가가 일종의 장식품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액숙하게 알고 있는 삶을 확장하기 위해서
성서와 기독교 신앙을 이용하려는 신앙태도가
그 밑에 토대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늘 새롭게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래서 늘 낯선 분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거룩하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그분에게
우리의 영혼을 맡긴다는 게 무슨 뜻인지
꾸준하게 성찰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지 않겠습니까.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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