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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기타 조회 수 15800 추천 수 36 2006.03.19 14:20:57
성경본문 : 요한복음 2:13-22 
http://wms.kehc.org/d/dabia/06.03.19.MP32006. 3.19.        요 2:13-22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성전정화사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금 우리의 교회당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당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 한 군데만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당과 같은 건물과 조직은 이스라엘의 회당입니다. 그 회당은 이스라엘 땅에도 여러 곳에 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는 곳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회당이 유대인들의 종교 행위 장소이긴 하지만 종교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예루살렘 성전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특히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일 년에 서너 차례 씩 예루살렘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가장 중요한 절기가 곧 유월절입니다. 우리가 읽은 공동번역에는 과월절로 번역된 절기입니다. 과월이나 유월 모두 지나갔다(pass over)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출애굽 당시에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를 칠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만 그 죽음의 재앙이 지나갔다는 전승에 따른 절기입니다.
예수님도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유월절 예루살렘 방문을 공생애 마지막 시기로 잡고 있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은 초기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건, 특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소동을 일으킨 사건을 네 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는 건 이 사건이 매우 확실할 뿐만 아니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신 걸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쫓아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성전에 왜 장사꾼들이 버젓이 장사를 하고 있었는지 여러분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예루살렘 순례객들이 제사를 드릴 때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소와 양과 비둘기 중의 하나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먼 곳에서 그런 동물을 끌고 올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야훼 하나님께 바치는 동물은 흠이 없어야만 합니다. 지금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순례객들을 위해서 제사 드리기에 알맞은 동물을 준비했습니다. 환전상들의 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성전세를 내려면 환전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여행하려면 외환은행에서 우리의 원을 일본의 엔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물로 바칠 동물을 파는 것이나 성전세를 내기 위해 환전해 주는 것은 성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것도 말로만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폭력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16절). 마가복음은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절을 인용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달합니다.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막 11:17).

성전정화 이유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성전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키셨을까요? 강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예수님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더구나 이 사건을 공생애 후기로 잡고 있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의 보도에 따르면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유대교 고위층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만큼 이 성전정화 문제가 심각했을까요? 위에서 설명한 대로 동물 판매와 환전은 따지고 보면 순례객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온몸을 던질만한 사안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신 이유를 두 가지로 일단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순례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제사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해야 할 종교의 본질을 훼손시킬 염려가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예수님의 꾸짖음에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역시 이런 점에서 신앙의 본질에 얼마나 투철한지 늘 반성해야 합니다. 아무리 동기가 순수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머리는 늘 ‘장사하는’ 쪽으로 회전되기 때문에 기도가 망각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이런 성전정화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권력구조를 비판한 것인지 모릅니다. 동물을 팔고 돈을 바꿔줄 때 반드시 이윤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 이윤의 상당 부분은 결국 제사장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밑에서 실제로 장사하는, 소위 민중들에게 분노하는 게 아니라 교묘하게 선으로 위장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구조화하고 일상화하려는 제사장 계급에게 분노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이 사건 뒤에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리고 다짐했다는 공관복음서의 기록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런 생각을 꿰뚫어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제시된 두 가지 이유는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해석에 근거해서 많은 설교자들이 오늘의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교회가 인간들의 이윤추구, 친목도모, 자기만족 등에 떨어지지 말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제사장처럼 교권을 이용하는 교회 권력구조가 더 이상 재생산될 수 없도록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옳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 그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본문이 이런 정도의 문제에 한정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성전정화 사건 자체만 본다면 이것은 예수님보다는 세례요한에게 어울립니다. 양심을 회복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며, 성전을 정화하는 일은 광야에서 불을 토하듯 설교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 요한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2의 요한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위한 선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교회개혁, 사회개혁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은 성전의 구조개혁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혹은 그것이 부단히 돌아가야 할 영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얼까요?

성전정화의 권한
공관복음서는 별로 말이 없지만 요한복음서는 성전청결 이후에 전개된 사연을 부연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 주겠소?”(18절).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기적이 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인식했던 것이지요. 홍해가 갈라진다거나 해와 달이 멈춘다거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기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예수님의 행위가 바로 하나님에게서 뿌리를 둔 것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라는 주장입니다. 이 질문은 곧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당면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지,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유대인들에게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당면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이며 종말의 심판자인지 그 증거를 대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건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대답하겠지만 이 세상은 그런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교회를 향한 이런 도전은 매우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왜 이 세상에 평화를 실현해야 하는지, 왜 소외된 사람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개혁해나가야 하는지, 왜 청소년들이 입시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교육 제도를 바꿔나가야 하는지, 왜 빈익빈부익부 경제구조를 평등의 구조로 개혁해야하는지,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증명해보라는 요구를 우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전을 개혁할 권한이 무엇인지 증명해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핀 대로 유대인들의 요구는 기적을 보여 달라는 거였습니다. 오늘도 역시 이 사회를 그걸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적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구약시대의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처럼,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쏟아진 것처럼 그런 능력을 보이라고 다그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증거라고 그들은 외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그러자 유대인들이 다시 반문했습니다.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20절). 이 대화는 옆에서 듣기에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원래의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로 몇 번의 재건축이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역시 46년 동안 재건축 중이었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건축물이라 할 예루살렘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듣더라도 말이 안 되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도 고지식하게 보입니다. 이 대화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기적이냐 부활이냐?
이 대화에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건물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몸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더라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그 부활 사건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미처 생각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인간이 죽으면 스올, 혹은 게헨나에 갈 뿐이지 부활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신학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본다면 이런 진술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해석이며 신앙고백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부활할 것을 확신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근본주의자들처럼 복음서에 진술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직접 하신 것으로 믿는다면 근본적인 문제가 불거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부활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완치될 게 분명한 큰 수술을 받는 것과 별 차이가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에게 전혀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곧 생명의 완성인 부활입니다. 그 부활의 빛에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새롭게 이해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 절대적으로 의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연법칙이 깨지는 기적을 요구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연법칙의 완성이라 할 부활에 집중했습니다. 부활이 자연법칙의 완성이라는 말은 곧 자연은 궁극적인 생명을 향해서 나가는 질서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성전정화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일입니다.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한 열정적인 투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그런 근원이 없으면 모든 인간의 행위는 허무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궁극적인 생명 사건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인간 기술과 영감의 집대성이라 할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행위인 예수님의 부활이 그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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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인범

March 20, 2006
*.72.252.251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보았는지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이 본문을 근거로 당시 제게는 너무나 엄청난 해석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제 신앙의 주요 내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하여간 제목이 '성전 무효화 사건' 이었던 것 같고
내용은, 이 사건은 주님의 성전 청결 또는 척결이라기 보다는
'무효화 선언'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이제 더 이상 성전 신앙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신앙형태가 생기는데
그것은 성전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완성되어
율법을 넘어 복음으로 왔듯이
그것은 건물로부터 성도(사람)들로
제사나 종교적 행위들로부터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이 결국 삶과 생활로 가는
진정한 삶의 신앙으로
그것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며
그리고 그 증거는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만 가능한 것이라는 거죠.
'나를 헐라.'시는 그 말씀이
오늘 동일한 증거를 요구하는 세상 앞에
동일하게 요구되는 거죠.
그러기에 주님은 "너희가 나를 좇아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 시는" 거구요.
그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무엇인가가
결국은 이 성전 신앙, 곧 주님과 함께 허물어진
율법과 건물 그리고 종교적 신앙 극복의 관건인거겠죠.

제 생각에 문제는 오늘 우리 대부분의 신앙형태들이
이 극복되어야 할 신앙에서 넘어서지를 못하고
그저 성전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우리들의 신앙이 구약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기도 하답니다.
하긴 그래서 오늘도 역시 교회가 건물을 짓기에 바쁘고
모든 신앙 목표를 더 크고 웅장하고 성전스럽게에 두고
역시 다 짓고는 의심 없이 '성전 봉헌 예배'를 드리잖습니까!
그 때의 분위기도 역시 아마 모르긴해도 구약 당시나
아니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을 것 같구요.

그런 면에서 실은 성전 신앙 극복의 문제는
주님께만 국한 된, 즉 주님이 유일하게 외친 것은 아니었다죠.
그것은 이미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외쳐진 메시지 였죠.
이미 위의 설교 속에 인용된 성구 중에도 나오지만
에레미야 7장에서도 1-11에서 강조되듯
특히 1-4절에서의 심각한 경고성 말씀은
분명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삶이어야 한다는 것과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가 보여준는 분위기와
특히 1장 10절의 말씀은 의미가 심장하다 할 것입니다.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즉 주님이 성전 무효화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이 말씀의 성취로 보는거죠.

이제 성전은 건물로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하시는 우리가 되었고
그러기에 우리가 과연 주님과 함께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닮는
거룩한 존재가 되는 과정으로 신앙생활을 보는거죠.
그것은 역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그 주님과의 동행으로 가능해지는 거겠죠.
그래서 요한복음 17장 21-23에 주님의 기도에서 말씀하시듯이
삼위 하나님이 하나이시듯 우리도 하나되고
결국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그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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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2, 2006
*.249.178.22

김인범 목사님,
제 설교를 보충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성전무효화 사건이라!
대단히 선정적인 표현이긴 한데,
정확한 진술 같습니다.
정확한 진술이긴 하지만
그게 바로 이 본문의 실제인가 하는 점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군요.
성전의 절대화는 문제가 되지만
그것이 필요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지요.
바로 이 긴장을 우리가 버텨내기가 어렵습니다.
성전의 절대화에 빠지거나
그것의 해체화에 빠지고 말지요.
좋은 코멘트, 다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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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권요안

March 24, 2006
*.209.255.176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와 김인범 목사님께서 보충하신 말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당시 예수께서 행하신 활동의 전체적인 맥락에서나, 그리고 초기 기독교 형성 과정의 역사적 맥락에서도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이신 이 사건을 성전 무효화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비교해 본다면 성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무효화라는 표현 보다는, 왜곡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에서 정화라는 표현이 그 본래 뜻에 더 부합하는 보다 적확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 부활승천 이후 사도들의 활동이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졌다는 점에서도 예수께서 성전을 무효화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성전 무효화를 선언하고 성령의 내주하심만을 강조하게 되면 개인주의적 신앙으로 빠져들고 말 위험이 너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전 절대화 못지않게 기독교 신앙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치우치고 있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보면 각자 나름대로 큐티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면서 늘 성령이 내주하시는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께서도 이미 다른 글에서 지적하셨지만, 경건생활에 열심인 이들이 정작 교회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모여서 하는 일을 들여다 보면 단순한 친목모임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저와 같은 평신도로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성전에 대한 맹목적인 절대화도, 내면에만 치우친 개인적 경건주의도 아닌 온전히 한 몸을 이룬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아,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주제넘게 불쑥 끼어들어 실없는 넋두리만 늘어놓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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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인범

March 28, 2006
*.72.252.251

위의 글은 순수한 제 견해 만은 아닙니다.
나름으로 은혜 받았던 말씀에 좀 더 보탰다고 할 수 있는거죠.
하여간 문제는
그 본문을 그렇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 해석을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실은 좀 더 비약적으로 해석한다면
성전 신앙에서 교회 신앙으로 넘어 온거죠.
문제는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의 개념과 성전 개념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데 있는거죠
그래서 오늘의 입장에서 볼 때 성전 무효화란 개념을 도입한 겁니다.
교회 신앙과 성전 신앙은 같은 원리와 다른 내용이 있는데 말입니다.
즉, 성전 신앙이 예수님의 삶으로 완성되어
이제 비로서 교회 신앙으로 넘어 온 것이라고 할까요
예를 들어 이런 개념과 같은 의미가
곧 율법이 예수로 완성되어 복음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율법 없이는 복음이 없죠.
둘 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섭리요 간섭인 거죠.
성전과 교회도 마찬가지리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문제는
이 의미가 간과되어서
율법과 복음이 헷갈리듯
성전신앙과 교회가 서로 뒤섞여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제 생각으로는 오늘의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 보다 중요한 신앙 내용 중 하나가 교회론의 정립이라고 봅니다.
교회가 너무 선교 일변도로 나가거나
또는 진정한 부흥과 몸체 부풀리기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그리고 그것이 성공이라고 믿는,
아니 정말 그런 분들을 성공한 분으로 인정하고
그런 것을 이루기 위해 그런 분들을 불러 세미나를 개최하는
일부 대교회주의의 폐해와 심각성을 알아야 되는데...
주님 당시의 성전 지도자들의 의식과 맥이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런 교회들이 그 목표를 보통 선교로 택하는 경향이 많죠.

다시 비약해서 저 나름으로는
교회는,
요안님이 결론에 언급하신 말씀에
"온전히 한 몸을 이룬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아,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하셨는데
바로,
그것을 밝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아득한 것을 현실화 시키는 것이
곧 오늘의 교회가 존재하며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표라고 봅니다.
물론 우리만으로는 않되겠죠.
그래서 님이 말씀하신대로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주님께서 계속 우리의 머리가 되어 오늘도 쉬지 않으시는거죠.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건져 이 교회로 불러 주신 주님께서 말이죠.
부흥은 이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온전히 한 몸을 이룬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확인하는 것'
더 나아가 우리가 결국 하나님과도 하나가 될 존재라는 것에 대한 확인이죠.
그리고 역시 교회생활을 통해서 그런 존재로 성장하는 거겠죠.

역시 글쓰기에 한계를 절실하게 느낍니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군요.
그래서 두서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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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구원 섭리 [33] 2009-06-22 16188
332 성령강림절 생명의 날 [17] 2009-06-15 13555
331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7] 2009-06-08 16732
330 성령강림절 성령의 중보기도 [21] 2009-06-01 15358
329 부활절 그리스도인의 이중 실존 [8] 2009-05-25 15314
328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857
327 부활절 ‘여호와 이레’의 믿음 [23] [39] 2009-05-11 25331
326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418
325 부활절 죽임, 살림, 증인 [25] 2009-04-27 16275
324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957
323 부활절 죽음을 무너뜨리리라! [7] 2009-04-13 13328
322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448
321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867
320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65
319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907
31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430
317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6871
316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920
315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99
314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72
313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2001
312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41
311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77
310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942
309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537
308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891
307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429
306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992
305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2072
304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539
303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454
302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3085
301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92
300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91
29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633
298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517
297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50
296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628
295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37
294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58
293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72
292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17
291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112
290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76
289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85
288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99
28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84
286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54
285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60
28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55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97
282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92
281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961
280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56
279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343
278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86
27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909
276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68
275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88
274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847
273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99
272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624
271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811
270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421
269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66
268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90
267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719
266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35
265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206
264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553
263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408
262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94
261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61
260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88
259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807
258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50
257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712
256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64
255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67
254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327
253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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