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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고전 15:12-19)

주현절 조회 수 15964 추천 수 162 2007.02.11 15:20:03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5:12-19 
2007.02.11. 고전 15:12-19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성경은 여러 종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족장들 이야기나 모세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전쟁 이야기는 별 생각 없이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삼손이나 드보라 같은 사사들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벌어졌던 많은 이야기들도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이들의 예언이나 신약에서 바울 같은 이들의 편지들은 그런 재미가 덜합니다.
바울의 편지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은 아주 까다롭기 때문에 우리가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특히 12-19절 말씀은 부활 신앙에 대한 믿음을 단순하게 서술하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분석하기 때문에 조금 따분하기도 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만나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충 지나갑니다. 그러나 밥을 먹을 때도 편식하지 말고 모든 음식을 골고루 꼭꼭 씹어 먹어야 건강에 좋듯이 따분한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꼭꼭 씹어 먹어야 합니다. 부활문제와 연결해서 2천 년 전 고린도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고린도교회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스도파로 자처하는 이들로 인해서 분열이 심했고, 음식을 중심으로 한 우상의 문제, 도덕적인 타락, 지나친 은사주의 같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일들에 대해서 1-14장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한 다음에 이제 전혀 새로운 주제를 15장에서 언급합니다.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말은 곧 그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서 부활에 대한 신앙적 견해가 서로 달랐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시대에 이런 문제들이 벌어지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그런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진리는 그런 논쟁의 방식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종교회의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완벽한 신앙체계를 갖고 시작한 게 아니라 교회 현장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교리를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현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신앙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염려하는 겁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면 아예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겠지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는 말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말이 결국 똑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조금 깊이 생각하려면 그 당시 죽음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생각과 헬라인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참고해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개념이 별로 강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지하의 세계를 가리키는 게헨나, 혹은 스올에 갑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저주입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명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서 부활사상이 조금 엿보이기는 하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의 죽음은 영과 육이 완전히 구분되는 사건입니다. 죽음에 의해서 유한한 육은 사라지고 영원한 영은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들에게도 역시 죽은 자의 부활은 없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은 영과 육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부활할 수 없고, 예수님이 재림할 때 살아있는 사람은 그 상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오늘 너무 신학적으로 예민한 문제들을 말씀드리는 것 같군요. 고린도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설명하느라 그렇습니다. 한 말씀만 더 드려야겠군요.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었습니다. 다만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단정하지 마십시오. 그들도 나름으로 최선으로 바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했습니다. 다만 그들의 세계관이 헬라철학의 영육이원론과 영혼불멸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별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떤 면에서 매우 극단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예루살렘의 핵심 세력인 사도들이나 예수님의 동생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교의 율법을 그대로 안고도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모(母)교회와의 신학적인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 의해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구별되는 새로운 복음 공동체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극단성은 오늘 주제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보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들 중에서 상당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었지만 죽은 자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잘 보십시오. 13,14절 말씀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케뤼그마)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15-18절은 13,14절의 반복입니다. 바울답지 않게 글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걸 감안하면서도 이렇게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문제에까지 연결되고, 결국은 기독교의 선포인 케뤼그마 전체에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의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바울의 논리가 조금 과장된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도 지금 바울은 신학적으로 큰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물러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그는 배수진을 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실증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생물학이나 물리학이 그걸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바울 시대의 헬라 철학은 오히려 영혼불멸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교가 죽은 자의 부활 사상을 완벽하게 지지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접어두고 대충 그리스도의 부활만 믿는 것으로 정리하는 게 지혜로운 게 아닐까요? 그런데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 문제를 그리스도의 부활 문제로까지 확대시켰습니다. 죽은 자의 보편적인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이제 바울의 논리는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 주장했다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전 15:1-11절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부활의 주님이 사도들과 5백 명의 교우들과 야고보와 자신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제 아주 미묘한 문제인 죽은 자의 부활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켰으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이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그가 설명하는 기독교 신앙 전체가 허물어질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증명했나요?

몸의 부활
고전 15:35-58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부활을 변증합니다. 그중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42-44절 말씀만 읽겠습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그는 몸을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육체적인 몸과 영적인 몸말입니다. “소마 피지콘” 즉 육체적인 몸은 썩지만, “소마 프뉴마티콘” 즉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입니다.
바울이 소마(몸)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영지주의의 영육 이원론과 똑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지주의는 죽음을 통해 육체와 영혼이 갈라진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육체의 모습을 한 인간이 죽은 다음에 영의 모습을 한 몸으로 다시 산다는 주장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변형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몸으로 살다가 죽고, 그 다음에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걸 전제하고 51-5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씨앗이 땅속에서 썩어 잎과 꽃으로 변화하듯이, 그리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우리는 전혀 다른 몸으로 변화합니다. 이런 참된 생명으로 변화하는 부활의 첫 열매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변화된 몸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육체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한다는 그의 주장이 곧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에 대한 증명인가요?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증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증명을 구분해야 합니다. 신앙의 문제는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명제처럼 실증적인 증명의 차원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서를 물리학적인 차원에서도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성서를 귀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태도야 칭찬받을만하지만 그것이 곧 기독교의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생명, 부활, 종말, 죽음 같은 가장 궁극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우리의 잠정적인 논리로 완전하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루 이틀 안에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풀어야 할 종말론적 숙제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숙제를 푸는 중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성서의 답변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다만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알지 못할 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종말 때까지 그 숙제를 풀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왜 죽은 자의 부활 문제를 제기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영육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문제였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 오늘 인간의 몸은 무의미했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금욕이나 도덕적 방종에 떨어졌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몸을 함부로 굴렸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책망합니다. 이 몸은 육체와 영으로 분리되어 썩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다시 영적으로 변화된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곧 영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설명한다면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신랑을 맞게 될 신부와 같습니다. 신부는 ‘아직’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부활을 기다리는 오늘 우리의 마음은 신부처럼 새롭게 변화할 생명에 대한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이걸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기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눌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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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임승한

February 11, 2007
*.141.35.208

바울이 극단적(?)이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 만큼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겠죠? 저는 종종 확신(?)이 없는 저를 보며 비탄해할 때가 있는데, 오히려 그런 마음을 포함해서 저를 비울 때 하나님께서 제가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해주시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보여주셨을 때 저 또한 바울처럼 강건하게 나갈 수 있을 것이고요. 그게 바로 고집과 진리를 향한 순종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말씀의 핵심은 이게 아니었을 테지만 제게는 이런 부분이 더욱 확실히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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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February 11, 2007
*.186.168.85

목사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바울이 깨닫고 체험한 궁극적인 진리가 그 당시의 한계성 있는 문화와 사상의 틀 안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는 안타까운(?) 느낌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표현할 수 없는 진리가 어떻게든 표현되어야만 하는 그런 절박한 바울의 마음이었다고 할까요?

동물은 목숨만을 가졌지만, 인간은 목숨을 넘어서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 느낍니다. 물론 동물과 똑같이 목숨만 부지하는 인간들도 많겠지만요... 목숨과 생명은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 생명이 "근본적이고 우주적인 생명의 충만한 원천"인 그리스도에 잇대어 끝없이 磁化되고, 자화되면서 목사님의 말씀처럼 "생명의 궁극"에 도달하여 만개함이 부활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면에서 "부활"은 끝내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인 것도 같습니다만... 포기할 수 없는 꿈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이루심을 겸허히 기다리며 그 분의 뜻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임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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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2, 2007
*.236.169.24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변화된다는 말씀의 변화(transform)은 변형(transfiguration)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뒤의 모든 변화란 단어도 변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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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권현주

February 12, 2007
*.244.165.224

심오한 내용을 이해하기쉽게 설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소마 프뉴마티콘, 소마는 soamtics 처럼 사용이 되어지니 이해가 쉬운데
프뉴마티콘, 우리말, 숨(프뉴마)과 같은 어원인 것입니까?
'영적인 몸', 좀더 생각해보아야할 주제인듯 합니다.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는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하시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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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3, 2007
*.150.14.187

브니엘남 님,
정확한 용어를 제시해주셨군요.
변화보다 변형이, 또는 변태가 훨씬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다만 변화의 사건만을 말했기 때문에 변화라는 단어를 썼을 뿐입니다.
고전 15:51,52절에는 '변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순간에 그 헬라어를 확인보지 않아서 정확한 의미를 말씀드리기는 힘들군요.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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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3, 2007
*.150.14.187

권현주 선생이 말한대로
퓨트마티콘의 어원은 푸뉴마 맞소.
영적인 몸이라.
신앙적 화두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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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임마누엘

February 13, 2007
*.67.140.208

정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계속 묵상해보다가 문득 요한복음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 6:33)
신학에 대해서 거의 잘 모르고
지식도 부족하여서 그런것이겠지만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부활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활은 같은 것인가요?
이 말씀만 놓고 보면 마치 육체의 부활은 무의미한 것 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요..

물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연인 상태의 육신적 원리가 무익하고
하나님을 아는 영적원리가 생명이라는 것이라는 의미이겠지만....

그냥 묵상하다가 의문이 생겨서 적어봤습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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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3, 2007
*.236.169.24

변화란 단어는 변태와 같은 단어이고 변형은 다른 단어입니다.
변화(transform)는 헬라어로 metamorpheo인데 이 단어에서 변태란 영어 metamorphosis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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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February 13, 2007
*.104.197.143

"메타"는 변화란 뜻이고, "몰포" 는 형태라는 뜻이라면, "형태의 변화" 즉 "변형"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변태"(transform) 와 "변형"(transfiguration)의 차이점이 무엇일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변태"는 질료의 변화가 없이 모양만 변한다는 것이고 "변형"은 질료 자체가 변한다는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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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구름

February 13, 2007
*.166.184.105

임마누엘님,요한복음6:3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는 구절은 번역상 매끄럽지 못함으로 인해서 잘 못 해석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물론 뒤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서 올바르게 알 수있지만, 정확한 번역은 '영이 생명을 주니 육은 그럴 수 없느니라"로 해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로 쉽게 읽어내려가면, 살리는 것이 주어가 되어, 영은 살리고 육은 살리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이해 할 수도 있습니다.
"영이 생명을 주니 육은 그러 수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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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3, 2007
*.236.169.24

첫날처럼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변화란 단어는 롬 12;2, 고후 3;18절에 있고요, 변형이란 단어는 빌 3:21에 있습니다. 변화는 바로 우리의 성화(santification)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영광의 한 단계에서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변형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는 것 즉 영화(glorification)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화 즉 변화는 우리의 혼에서, 영화 즉 변형은 우리의 몸에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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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3, 2007
*.236.169.24

요한복음 6장 63절: It is the Spirit who give life; the flesh profits nothing 정확한 번역은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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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임마누엘

February 13, 2007
*.67.140.208

구름님과 브니엘남 님의 답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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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3, 2007
*.236.169.24

고전 15:51-52절의 변화는 당연히 우리가 부활할 때의 변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한 몸=변형된 몸=영적인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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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3, 2007
*.150.14.42

브니엘남 님,
재미있으신 분이시군요.
일단 제 설교를 여러 편이나 읽어주신 거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여러 군데에 콤멘트를 주셨네요.
콤멘트라기보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네요.
변화와 변형이라는 단어는 전체 설교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엘남 님은 그게 아주 중요한 것처럼 말씀하셨군요.
엘람 님은 언어 능력이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분명히 변화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위에서 제가 한번 지적한대로
51절과 52절에서 바울은 ‘알라게소메타’라고 했습니다.
그 단어는 아마 ‘알라소’(변화하다)의 미래수동형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엘남 님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매타모르포마이’(형태로 변화되다.)를
줄창 주장하시네요.
엘남 님은 저의 설교에 나온 변화라는 단어를 모두 변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확신하시는군요.
물론 매타모르포마이가 더 정확한 뜻을 가질 수는 있지만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그냥 알라게소메타를 사용했습니다.
어떤 단어를 쓰는가 하는 문제는 문맥에 따라서 달라지는 건데
사실 위의 설교에서 제가 처음 사용한 단어는 ‘변형’이었습니다.
읽어보시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사건에서 중요한 게 바로 몸의 변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분명히 한 다음에 편의상 변화라는 단어를 썼지요.그런데 엘남 님은 그걸 트집잡으시는군요.
이미 설교의 흐름에서 변형이라는 의미가 전달되었다면
그 뒤로는 일상적인 용어인 변화를 쓴다고 해서 큰 문제는 아니지요?
특히 성서와 설교의 문맥에서 핵심은 육체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변한다는 것이니까,
그것만 명백하다면 ‘변화’를 쓰든지 ‘변형’을 쓰든지
그게 문제가 될까요?
반복해서 미안하지만,
‘알라게소메타’(변화)와 ‘매타모르포마이’(변형)를 골라 쓰는 게
저의 설교에서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하세요?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한국교회 신자들 중에서 확신범이 많기는 합니다.
특히 성서텍스트의 분석과 주석에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 많지요.
제가 알기로는 CCC나 UBF(정확한 이니셜인지 모르겠으나) 등등,
여러 유형의 대학생 성경공부 모임에서 간사나 스태프를 한 분들 중에서는
성서해석의 도사들이 많습니다.
평신도이지만 성서에 대한 공부가 많은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성서텍스트에 관한 문제만 나왔다 하면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사실 여기 다비아에 들어오는 분들 중에서 그런 분들이 꽤 된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작은 성서지식을 침소봉대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구절을 나열하거나
문자적인 해석을 들이밀고,
심지어 알레고리 해석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열정이야 백번 이해되지요.
그러나 왜 그래야만 할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기야 ‘여호와의 증인’에 속하는 분들도
그런 확신범들이지요.
제가 귀찮아서 자리를 피하는데도
그런 분들은 굳이 가르치려 하고 설득하려고 애를 씁니다.
성경 구절을 손가락으로 들이대면서 말이지요.

저는 요 며칠 동안 올라오는 엘남 님의 글을 읽으면서
내용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어떤 정형화한 성경공부 방식에 상당히 치우쳐 있는 분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잘못 보았을지도 모르지만요.)
일단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변화와 변형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구요,
다른 대글에서도 그걸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군데만 예를 더 든다면
12월3일 설교 “사람의 아들이 온다”에 대한 문제제기도
똑같은 방식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목사님은 이 구절의 "세대"란 단어의 의미를 확실히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의 정확한 해석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든 일이 이루기까지 이 세대가 지나가지 아니하리라"입니다. 모든 일은 21장의 예언 입니다. 이 구절의 해석은 "세대"가 그 핵심 단어입니다. 세대란 마 24:34절과 1:17절에 나와 있습니다.
1. 마1:17 시대나 사람들에 따른 세대
2. 마24:34, 11:16, 12:39, 41, 42, 45, 잠 30:11, 눅11:29-32 사람들의 도덕적인 상태에 따른 세대
이 구절은 2번입니다. 그래야 문맥이 정확하게 해석이 됩니다.>

나는 엘람 님이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군요.
그 구절은 소위 묵시문학에 속하는데,
저는 그것을 우리가 완전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난해구절로 남겨둔 것입니다.
그런데 엘람 님은 꼭 찝어서 ‘이렇다’ 하고 단정하시네요.
그것의 실체를 다 아세요?
그게 본인이 말한대로 ‘도덕적인 상태’에 따른 세대라고 확신하세요?
그렇다면 조금 우습군요.
저는 그 대목에서 초기 공동체가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와 재림의 지체 사이에서
신앙적인 갈등을 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전한 겁니다.
저는 지금 저의 성서해석이 무조건 정당하다는 걸 변호하거나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엘람 님의 접근 방식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상대방을 향해서 당신은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니
내가 한수 가르쳐 주겠다,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네요.
제가 결정적으로 실수를 했거나,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설교 전체가 기독교 진리에서 벗어나고
신자들의 영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면 제가 인정하고 달게 받아야지요.
그런데 별 것 아닌 것을,
그리고 정확하지도 않은 것을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저는 모르겠네요.
노골적으로 말해서
엘람 님은 제가 전혀 따라잡을 수 없는 높은 경지의 영성을 가진 분이거나
아니면 성경해석에 대한 자신의 실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분인 것처럼 보이네요.

오늘 제가 이렇게 길게, 그리고 거칠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단지 엘람 님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방식의 글쓰기나 대글달기가
다비아에 자주 올라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작은 정보를,
그것도 확실하지 않거나 여전히 논란 가운데 있는 것을
왜 침소봉대하는지,
그게 이상하다는 거지요.
자신의 신앙적 깨우침을 진솔하게 나누는 건 아름답지요.
그리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서로 물어보고 대답하는 거라면 좋겠지요.
그러나 한 수 가르치겠다 하는 생각이라면
이런 건 기독교인의 성숙한 담론이 아닙니다.
물론 엘람 님의 글들은 비교적 정교하고 전문적입니다.
특히 전문 용어와 개념들은 탁월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전문적인 용어와 개념으로 글을 쓴다고 해서 옳은 건 아닙니다.
올린 글 중에서는 옳은 것도 있고,
논란거리도 있고,
틀린 것도 있지요.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들도 있고,
다른 데서 베껴올 수 있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서해석을 시금석인 것처럼 전제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재단하고 있으시네요.
제가 잘못 본 게 있으면 용서바랍니다.
주의 은총이.
profile

stigma

February 14, 2007
*.239.184.28

목사님 놓으신 한 언질...잘 주셨습니다.
제 마음에 담습니다.
profile

[레벨:28]첫날처럼

February 14, 2007
*.104.201.139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서의 언어는 지시적인 언어가 아니라서 큰 틀에서 용어의 의미를 파악해야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profile

[레벨:1]똑소리

February 14, 2007
*.204.70.4

첫날처럼님!
환자손님없어요?
맨날 컴터앞에 앉아 계시면 진찰은 언제해요?
그러다 손님 다 날려요.
열공도 좋지만 일도 하셔야 대출안하고 살 수 있죠~ ^^;;
암튼 보기 좋네요.
동지를 만난것 같아서.
profile

[레벨:28]첫날처럼

February 14, 2007
*.104.201.139

위에 한의원이 하나 더 생겨서 환자가 좀 줄어서 여유(?)가 많이 생겼습니다...ㅋㅋㅋ... 벌써 몇 번째 겪는 일이라, 무덤덤... 이럴 땐 무리수를 두는거 보다는 정공법으로 나가는 것이 결국엔 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환자 한 명 한 명 더 신경써주고, 더 귀 기울이고, 더 존중해주고... 어떤 땐 이 것마저도 장삿속 같아서 스스로가 가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나마라도 그렇게 하면서 마음공부가 많이 됩니다... 이 곳에서 정말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면 밥은 먹고 산다는 깨달음도 얻었구요...

참 재밌는 건... 환자 한 명 한 명 보는 것이, 수도하는 것 같다니깐요... 인내심과 자제력을 많이 배웁니다... 간혹 한 번씩 환자분들의 이야기에서 많이 느끼기도 하고...

아, 글고 제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환자보고 컴터 하는 거 밖에 없습니다...ㅋㅋㅋ... 바로 앞에 컴퓨터가 있으니깐요...
profile

[레벨:0]소피

February 14, 2007
*.71.223.153

정목사님의 설교는 언제나 종말론적인 시각을 보도록 만듭니다.
지금과종말의 긴박성을 놓치지 않는 목사님의 설교가
은혜가 됩니다.

"내가 영적인 몸으로 변화한다니..."
생각만 해도 이렇게 가슴벅찬 일인데
왜 그동안 나와 무관한 일처럼 여겨졌을까요?
(입으론 믿는다고 했지만...)

부활이란 주제가
오늘 저에게 충격으로 다가오는것은
그동안 제가 부활을 믿지않았던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활!
정말 우리는 다시살까요???
아직도 잘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죽음을 통과해야 하는 우리 모두에겐
이말은 우리의 삶이 끝이 아닌 또다른 시작이란
소망을 주기하기에 확실하군요..

한가지 설교에서
오늘 우리의 삶과 부활과의 연결이 더 언급됐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부활한다는걸
진정믿는다면,기뻐할일과 기다리는것외에
우리가 더 무엇을 할수 있겠나 싶기도
하네요..
더 궁극적으로는 죽는것이겠구요
(죽음없는부활은 그 의미가 없으니까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동안 제가 궁금해하고 있었던 것들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이 매여지는 경험을
한답니다...(아직도 엮여야 할것이 많답니다..ㅋㅋ)

늘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3]김경태

February 14, 2007
*.226.0.213

직접 설교의 내용과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늘 고민하던 내용을 적어봅니다.
영적인 몸의 변화는 곧 육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인지
육신을 가지고 변화시키는 건지 잘모르겠구요.

혹 육신과 상관없는 변화라면 예수님의 빈무덤 사건은 헤프닝이 될 수 있겠고
육신을 포함한 영적인 변화라는 건 왠지 영적인 몸이 아니것 같구....
이것이 영과 육을구분하는 이분법적 헬라철학의 영향아래 고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결국 변화된 영적인 몸이란
영과 육을 구별하지 않고 다 포함해서 그 자체가 신령한 몸이라는 것인지 설명부탁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15, 2007
*.150.14.50

김경태 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군요.
저도 정확하게 말하기 힘든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몸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개라고 합니다.
사르크스와 소마.
사르크스는 주로 단백질의 차원에서 몸, 또는 육체라고 한다면
소마는 영과의 대립적이 차원에서 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늘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 자체가 신비이기때문입니다.
물론 동물들의 몸도 신비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의 몸은 그들과 차원이 다르다고 보아야겠지요.
그 이유는 인간의 영적인 활동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영과 육으로 보는가,
아니면 영, 혼, 육으로 보는가는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정통적으로는 영과 육, 이분법으로 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과 육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영의 영역이고, 몸의 영역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런 것에 대한 나름의 설명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게 결정론적인 설명은 아닙니다.
어쨌든지 현재 우리는 영과 몸으로 인간이 되었습니다.
생물학적인 차원의 육체를 안고 삽니다.
이런 차원의 육체는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는가, 하는 질문이 따라오겠지요.
이것도 어려운 질문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영육이원론은 헬라사상이지 성서사상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이, 또는 영혼이 죽는다고 말하는 것도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부활에 근거해서 본다면 영혼까지 죽는 게 당연하지만
성서는 영혼불멸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영혼불멸설과 부활사상이 서로 대립적이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정통교리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제 강의나 다른 데서 설명했습니다.
줄이겠습니다.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변형된다고 할 때
지금 우리의 단백질이 질료로 이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과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질료과 형상을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필요하겠지요.
그건 그렇고,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소가 풀을 먹습니다.
그런데 풀이 소의 몸 안에 들어가서 단백질로 변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풀이라는 물질이 전혀 다른 단백질로 변했다는 거겠지요.
풀이 없으면 단백질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풀이 반드시 단백질의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풀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단백질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바울은,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이런 문제를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게 아닙니다.
영적인 세계를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은 궁극적으로 신비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몸을 갖고 살아가는 것도 신비이구요,
앞에서 말했듯이 몸과 영의 결합 자체도 신비입니다.
그런 마당에 현재의 몸이 영적인 몸에서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그 어떤 답변을 할 수 있겠어요.
지금처럼 죽으면 썩게 될 몸이 아니라
하나님 처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는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말하기 시작하면 이제 이단의 길로 들어서는 거지요.
물론 요한계시록에는 하늘나라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가 있지만
그것은 극단적인 비유들입니다.
문학적인 비유들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몸이 아닌 영적인 몸은 귀신처럼 육체가 없는 상태일까요?
이제 그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말할수록 제가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단답식으로라도 대답을 하고 끝내야겠군요.
지금 우리의 몸이 그대로 부활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부활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부활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무엇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혹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 같은 것들이 모두 해소되는,
그래서 영생이 가능한 그런 생명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에 대해서 묻지 마세요. ㅎㅎ
저는 교주가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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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5, 2007
*.236.180.63

영적인 몸의 변화는 성서에서 변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변형은 두 가지로 성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1. 죽은 자의 부활로 인한 때: 새로운 몸을 덧입습니다. 영혼은 아닙니다.
2. 산 자의 휴거 때: 지금의 몸이 새로운 몸으로 변형됩니다. 영혼은 아닙니다.
주님은 부활 시에 새로운 몸을 덧입었습니다. 그래서 시공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요 20: 19).
그리고 사람의 삼분설과 이분설은 학자간에 이견이 있습니다.
사람을 삼분설로 보느냐 이분설로 보느냐
천년왕국을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을 따르느냐에 따라 성서 해석학이 달라집니다.
저는 전천년설과 삼분설로 성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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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February 15, 2007
*.85.66.52

한가지 궁금증이 생기는데요... 부활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인가요? 아니면 믿는자에게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인가요? 성서에는 특수한 현상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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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5, 2007
*.236.180.63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요 5:29)
믿는 자; 생명의 부활
믿지 않은자; 심판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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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February 15, 2007
*.85.66.52

자꾸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의 부활체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이야기가 되나요? 고린도 전서 15장에서는 부활체의 영광스러움을 이야기 하는데, 왠지 성서가 부활에 관해서 진술하는 것이 서로 앞 뒤가 안맞는 느낌입니다.. 마치 창세기 1, 2장에 창조에 관한 전혀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29절에 정확히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단순히 믿는 자, 믿지 않는 자로 이야기 하는 건 단순한 일반화인 것 같은데요...

굳이 예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할 수 밖에 없고, 예수의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악한 일을 행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말은 됩니다만, 그렇게 된다면, "믿음" 이란 것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충성하는 "진상" 들도 많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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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February 15, 2007
*.85.66.52

어찌되었든, 요한복음이든, 고린도 전서든 공통적인 느낌은 부활이란 것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profile

[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6, 2007
*.236.180.63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의 부활체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성서적으로 정답입니다.

요 5:29 해설

악한 일을 행한 자란 요 3:20절에 악을 행하는 자와 같은 단어인데 이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요 3장 19-20절에서 빛이 세상에 왔으며 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빛=예수님=생명의 빛"(요 1:4)입니다.
빛 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 바로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의 의미는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pratice란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의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악한 일을 행할 수 밖에 없다"가 정답이네요. 그것도 습관적으로 악을 행한다.
왜냐고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예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의 선행은 결국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아를 드러내는 선행은 결코 선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선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profile

[레벨:28]첫날처럼

February 16, 2007
*.104.199.91

예수믿지 않는 자들의 선행이 자아를 드러내고 이기적이다...꼭 그렇게 단정짓기가 힘든 경우도 많던데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그리스도인 같은 사람들도 많던데요... 그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죠?
profile

[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20, 2007
*.236.180.63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는 말씀과 같이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그리스도인 같은 사람들도 많던데요. 타고날 때 부터 선한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타고날 때 부터 선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 즉 생명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profile

[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21, 2007
*.150.83.150

창세기 1, 2장에 창조에 관한 전혀 다른 두 가지 이야기
1장의 창조의 기록(1;1~2;3):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과 뜻, 하나님의 갈망과 목적
2장의 창조의 기록(2;4-25):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과 뜻을 이루는 과정,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
profile

[레벨:3]코람데오

February 23, 2007
*.109.125.151

정용섭 목사님의 좋은 설교말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토론의 글들도 잘 읽었습니다.

부활,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은 크리스쳔 모두의 궁극의 소망일 것 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이 한가지 소망 즉 신령한 몸을 덧입기를
(바울은 덧입는다고 표현 하지요)소망하여 인생의 길을 이땅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나그네"로 살아갔습니다.

부활과 신령한 몸(영적인 몸)의 개념은 "천국" "처소"의 개념들과 통하하여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필요 할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초반부에서 바울이 하늘에 예비된 처소 즉 "천국"을 왜
"덧입는다"라고 표현하였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신령한몸과 부활과
천국의 개념에 좀더 깊이 다가갈수 있지 않을 까 생각 합니다.
profile

[레벨:3]코람데오

February 23, 2007
*.109.125.151

그리고 김경태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까? 몇자 적습니다.

영적인 몸 하면 자칫 오해되기 쉬운것은 형용사인 "영적"이란 말에
중점을 두기 쉬운데 정작 바울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몸"이라는
단어인 것 입니다..

일반적을 영적인 육적인 것의 구분시 "육적:이다는 언어를 "물질적"이라는
것과 동일시 하기 쉬운데 성경의 저자들은 "육적"이라는 의미를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로 보는 것이 보다 근접한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는 신령한(영적인)몸의 의미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종로릇 하지 아니하는
완전히 자유한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무난 할 듯 합니다..

profile

[레벨:3]코람데오

February 23, 2007
*.109.125.151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단백질차원(물질적)의 몸과 영적인 차원의 몸을 구분한
정용섭 목사님의 구분법은 자칫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정목사님의 구분은 공관복음 저자들의 증언과는 대치할수 있는 가능
성이 내제되어 있다고 봅니다.

김경태님이 의문을 품으시는 부활한 몸에 대해서 성경은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상태에 관해서 약간 들려다 볼만한 단서들을 조금 주고는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상 영적인 몸을 가지고 첫번째 부활하셨던 "예수"라는 청년의
부활후의 새로운 몸에 관해 몇부분 언급 하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의 몸은 우리인간의 손으로 만질수 있고, 또한 부활하지 않은 사람들고
대화도 할 수 있으며, 물고기도 먹을 수 있었다고 증언 하고 있습니다...
profile

[레벨:3]코람데오

February 23, 2007
*.109.125.151

바울이 말하는 "몸"이 바로 부활한 예수의 몸 이지요^^
마라나타 ! 주께서 속히 오시길 가슴깊이 바래 봅니다..
profile

[레벨:3]코람데오

February 23, 2007
*.109.125.151

브니엘남님 그리고 첫날처럼님^^

두종류의 부활에 대해 간략히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성경의 저자들은 브니엘남님의 말씀 처럼 부활을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고 보면 무난하리라 봅니다만 그 구분에 있어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시간" 입니다..

부활에도 차례가 있지요^^ 그 마지막 악한자의 부할은 상당한 시간적인 갭이
있는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부활의 시점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 바울과 사도들의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profile

[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25, 2007
*.150.83.98

코람데오님 부활의 시점이 다르다는 것은 당근입니다. 믿는 이의 생명의 부활은 천년 왕국 전에 일어나고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의 부활은 새 하늘과 새 땅 이전에 일어나니 천 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고후 5장1-3절의 덧입음은 아마 부활한 몸을 덧입음 즉 몸의 구속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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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363
321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808
320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25
319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862
31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371
317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6829
316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853
315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57
314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16
313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1948
312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06
311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21
310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883
309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409
308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725
307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267
306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800
305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1657
304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112
303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042
302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699
301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58
300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43
29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571
298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473
297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09
296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489
295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02
294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05
293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41
292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485
291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75
290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29
289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30
288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54
28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46
286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09
285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33
28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09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48
282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27
281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890
280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01
279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293
278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13
27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68
276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10
275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33
274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791
273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49
272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567
271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644
270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252
269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22
268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49
267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678
266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1994
265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45
264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464
263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55
262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54
261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797
260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44
259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57
258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15
257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43
256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12
255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35
254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285
253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59
252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246
251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262
250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165
249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4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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