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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가능한가?

부활절 조회 수 13794 추천 수 47 2007.05.06 15:23:30
성경본문 : 마태복음 17:14-20 
mms://wm-001.cafe24.com/dbia/070506.MP32007.05.06. 마 17:14-20
믿음은 가능한가?

교회 생활에서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믿음으로 이겨내세요.”라거나, 교회생활을 등한히 할 때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또는 성서나 교회의 가르침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믿음의 눈으로 보세요.” 같은 말을 흔히 합니다. 반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교회생활을 굳건히 하면 “저분은 믿음이 좋아.”하고 말합니다. 설교자들도 “믿습니까?” 하는 말을 자주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개의 신자들은 실제로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또는 자신의 믿음이 약하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탓하기 까지 합니다.
이런 현상은 로마 가톨릭교회보다 개신교회가 더 강합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명제가 신앙생활의 중심축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 신자들이 믿음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가르치지만 개신교회는 오직 믿음으로만 그렇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영향으로 인해서 교회는 모든 걸 믿음의 문제로 처리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서도 물론 믿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서술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2b에서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하고 고백하긴 했지만, 그래도 바울에게 믿음은 희망, 사랑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기도 했고(막 2:5),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한 가나안 여자를 향해서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고 말씀하셨고(마 15:28),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향해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는 말씀도(마 9:22) 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을 강조하는 복음서 보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고 간질병에 걸린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오너라.”(17절)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이 마귀에게 호령을 하시자 마귀가 나가고 아이의 몸은 치료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왜 자기들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믿음을 세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왜 믿으려고 하지 않느냐? 믿음이 약한 탓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과연 이 말씀이 옳은가요? 간질병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모든 문제가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만약 이 말씀이 사실적인 증언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병원에 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의처증이나 구타 등으로 가족을 괴롭히는 남편도 정상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남북분단도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세계에서 믿음이 가장 뜨거운 한국교회가 그렇게 많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도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엄청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처럼 기도원이 많고 새벽기도가 열정적인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심지어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믿음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법에서도 과장법이라는 게 있듯이 말입니다. 믿음을 겨자씨로 비유하고, 그 능력을 산으로 비유한 걸 보면 과장법이 맞긴 맞습니다. 그렇지만 성서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도 그렇고, 종말 사건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묵시사상도 그렇습니다. 그런 성서의 진술들은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세계와 능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심층적인 차원에서 진리입니다. 지질학적으로도 옳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지구의 표층은 계속 움직입니다. 산이 바다가 되기도 하고, 바다가 산이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말씀으로 지구의 모양을 바꿀 수도 있고, 우주의 운행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산을 바다로 옮기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처럼 우리가 창조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서 간질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고, 인간의 모든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고, 산을 바다로 옮길 수 있을까요? 이런 모든 문제들이 실제로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는 말인가요?
한국교회는 믿음 지상주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늘 ‘믿습니다.’를 입에 달고 삽니다. 그냥 믿습니다가 아니라 된소리로 ‘믿쒸-ㅂ니다!’ 해야겠지요. 예컨대 그럴 능력이 없는데도 믿음을 면분으로 내세워 무리하게 수백억 원의 교회당을 건축합니다. 믿음으로 병을 고치겠다고 우기다가 환자의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믿음이 없다는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이미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굳이 믿음을 입에 떠올릴 필요도 없으니까요.
많은 신자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은 어디서나 가능한 심리현상입니다. 벤처기업을 하는 사람도 자기 확신이 있고, 스토킹 하는 사람도 자기 확신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와 사이비 이단들도 그 확신이 강합니다. 요즘 신입사원 훈련 프로그램도 이런 자기 확신을 자주 이용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만, 교회 안에서 아무리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산을 바다로 옮기게 하는 기도는 드리지 못하더군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면 못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하게 보십시오. 특히 병행구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세 복음서가 이 사건에 대해서 약간씩 다르게 보도합니다. 예수님의 간질병 치유 능력에 대해서 마가복음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9:29)고 진술하며, 누가복음은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라 마지않았다.”(눅 9:43)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대해서 보도합니다. 이 세 복음서의 공통점은 간질병 아이를 예수님만 치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분이시며, 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하는 분이시고, 그만이 믿음이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참되게 믿은 분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에게서만 간질병 아이가 치유되며, 귀신이 쫓겨나고, 궁극적으로 그에게만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믿음은 가능한가?”였습니다. 그 질문을 우리에게 하면, 대답은 “가능하지 않다.”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간질병 아이가 깨끗해지고, 산이 바다가 되는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능력입니다. 하나님과 일치되지 않은 사람은 이런 능력을 나타낼 수 없으며,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다는 게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전체 실존으로 믿은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서 그런 믿음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으로 믿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믿음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니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줄 모릅니다. 간질병 아이를 직접 고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런 기도를 드릴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은 자기가 믿음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에 빠집니다. 그렇다면 산을 옮겨보십시오. 그건 못하면서 간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창조자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의 아들인 예수님의 능력일 뿐입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아무개 목사로 대표되는 분들은 자신이 스스로 귀신을 내어 쫓고 장애를 고친다고 큰소리치는 실정이니 일반 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합니다. 좋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은 자연치유일 수도 있고, 많은 경우에는 대중심리에 빠져서 일어나는 임시효과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치유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아무개 목사의 능력이 아니라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일 뿐입니다.
다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빌려 묻습니다. “믿음은 가능한가?” 앞에서 저는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는 거꾸로 가능하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바다에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즉 내 능력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성경 구절을 약간 아시는 분들은 여기서 빌립보 4:14절 말씀을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절에 기대서 많은 신자들은 믿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선교기금을 보내준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거나 부족하거나 어떤 상태에서도 견딜 수 있다는 영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믿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신감을 토로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여러분이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가 기록되던 시절은 기독교가 아직 체계를 잡지 못했던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유대교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유대교적 기독교’라고 불리는 그런 시기가 오래 지속되었는데, 마태 공동체 안에도 이런 혼란한 상황이 완전히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는 중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하고, 더 나아가 큰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힘든 일입니다. 그것은 산을 바다로 옮기는 것만큼 힘든 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요셉의 아들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나요? 초기 기독교 신자들과 달리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리고 다행입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만 그렇지 실제로는 자기 확신 속에 빠지거나 자기 능력을 믿으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마태는 오늘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간질병 아이는 그 당시의 교회 공동체를 비유적으로 가리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무능력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에게만 창조와 치유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실을, 그 예수를 믿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우리에게 믿음은 현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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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kich

May 06, 2007
*.100.50.94

목사님^^!
설교문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글을 남깁니다.
12번째 단락에서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전체 실존으로 믿은 분이십니다."라고 하셨는데 '전체 실존'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혹시 실존을 어떤 범주적 의미로 생각하셔서 전체 실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저의 소양으로선 실존(Existenz)까진 얕은 지식으로 따라 가보겠는데... 실존 앞에 전체가 붙으니 갑자기 팍 막혀버립니다. 전체 실존이라는 표현이 저에겐 생소한 표현이라 어떤 의미에서 사용하셨는지 보충설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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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May 06, 2007
*.150.83.32

믿음의 주(창시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인 예수
내가 믿는 신앙=객관적 믿음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됨=주관적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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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06, 2007
*.150.14.60

키치 님,
'전체'라는 부사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겠군요.
언어의 뉘앙스를 엄정하게 서술하기는 힘드니까요.
그래도 한 마디 덧붙인다면,
전체 실존은 곧 영혼이라는 뜻과 비슷하겠지요.
인간의 인격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많은 개념들이 있어요.
이성, 믿음, 몸, 영, 감정, 오성, 의지, 생명 등등,
그런 것들은 인간을 이해하는데 일종의 범주 역할만 하지
칼로 무를 자르듯이 무언가를 재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직면할 때 어떤 태도였을까요?
그걸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장 심층적인 영역을, 혹은 범주를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예수의 영혼이 하나님과 직면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것을 저는 전체 실존이라는 말로 풀어서 표현할 겁니다.
성령이여, 우리의 무지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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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콰미

May 07, 2007
*.54.206.9

목사님 그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능력을 탓했다기 보다는 무능력한 자신의 실존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탓했다고 봐도 무방할까요? 또한 '너희들은 겨자씨만한 믿음 조차 가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야
그것이 인격의 실체지'라는 말씀을 우회적으로 하신거라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님 자꾸 믿음을 상대화시키니까 왠지 좀 서글퍼 지네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즉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
이런 것들마저 무의미 해지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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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流水不爭先

May 07, 2007
*.173.40.129

샬롬 주님의 평화가 목사님과 함께하시기를

목사님의 말씀을 아무대가없이 들으니 미안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힘든 일입니다" 라는 말씀이 너무너무 제 가슴을 울립니다.
진솔함과 거짓됨이 없는 그리고 겸손함이 가져다주는 말씀에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나와 괜시리 뭉클해집니다.
주님안에서 온라인에서의 만남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하며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오늘하루 평안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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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y 07, 2007
*.254.104.85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하면서 쭉 전개가 되는데요... 11장을 보면서 한 가지 느껴지는 것이 본질적으로 믿음이란 것이 하느님을 빙자해서 내가 무슨 일을 이루고, 명예를 얻고, 등등등의 "피조물의 획득과 성취" 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믿음... 곧 예수의 믿음... 그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목사님께서 바로 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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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08, 2007
*.150.14.85

콰미 님,
나도 성서텍스트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답니다.
내 영적 시야에 포착되는 건 말하고 있을 뿐이지 확신은 못해요.
왜 그런지는 아시겠지요?
어쨌든지 내가 보기에 위의 본문은 제자들의 믿음보다는
예수님의 믿음을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본문은 아래와 같이 여러가지 사태를 그 안에 담고 있을지 몰라요.
1. 간질병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의 불신앙
2. 예수님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불신앙
3.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혼란
4. 예수와 하나님과의 일치
대충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1번은 아주 일반적인 생각인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며,
성서텍스트의 핵심도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이 그걸 강조하고 있지요.
혹시 모르지요.
그런 요소가 분명히 있는지도요.
어쨌든지 저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는 겁니다.
특히 제가 강조하려는 것은
믿음은 신자들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체험을 뛰어넘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제가 그걸 '자기확신'이라고 표현했지요.
우리는 어떻게 자기확신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통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자기의 능력개발이 아니라 오직 하니님의 계시 사건에 의존할 수 있을까요?
그걸 말하려고 했는데, 잘 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콰미 님이 어린아이같은 순수한 믿음까지 상대화하는 같아서 불안하다고 말했나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처럼 믿으면 괜찮지요.
어른이 그렇게 믿으려고 하니까 문제지요.
실제로는 아주 영역하고 노회하면서
무늬만 어런아이 흉내를 내는 걸 어린아이같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했네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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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콰미

May 08, 2007
*.54.206.9

제가 말하는 믿음의 성질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어른이 그렇게 믿으려 하는게
문제가 된다고요? 오히려 어른이 그렇게 믿지 않는게 더 문제가 되는거 아닐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에 등장하는 어린 아이의 믿음 '물고기 두마리 보리떡 다섯개 이거 내봐 봤자
간에 기별도 안가니까 혼자 먹어야지 ' 이런 계산을 하지 않는것이 잘못된거라구요 ?
아무리 유연하게 생각해도 좀 납득이 가질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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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배성민

May 08, 2007
*.124.192.160

왜 사람들이 믿음을 강조할까? 믿으면 어떻게 되는데... 이걸 좀 깊이 따져봐야겠습니다.

병고침을 원하거나, 어떤 혁신적인 변화를 원해서 은사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도 믿음을 강조하지요.

사람들이 목사님이 지적한 문제를 단순히 모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자기확신이 아니지.. 등등..
그래도 믿음에 매달리고 싶어집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분명 "어떤 변화/혁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그걸 따져봐야 되겠지요.

당연히 여기서 "어떻게 변화되는데?"라고 묻고 싶어집니다. "믿음으로!!" 이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
하게 됩니다. 물론 믿음으로 변화되는 건 맞지만,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냐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가 좀더 분명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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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y 08, 2007
*.254.104.85

믿음도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그런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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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y 08, 2007
*.254.104.85

목사님 말씀은 항상 그냥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런 생각들을 다시 본질적인 물음으로 되돌립니다... 그런 면에서 화두처럼 내내 생각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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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May 08, 2007
*.109.125.151

콰미님 성경이 말씀 하시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을 단순히 믿고 현재에 적용하는 신앙을 말씀 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예수께서는 몇차례 어린아이를 비유하여 말씀하셨는데 이때 주님이 말씀
하시는 "어린 아이"는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겸손한 성품 즉 세례요한으로
시작된 "회계"를 촉구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르키는 것
입니다.

사복음에서 "어린아이"는 교회시대로 추수되어온 유대인을 가르키고
반대개념인 "지혜자"는 그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세인들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들을 비유하고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님이 말씀하시는 의미의 성경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적용하고
단순히 믿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 관하여 신약성경의 저자인 바울은
장성한 자가 되라고 몇번이고 서신을 통하여 권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 성경구절들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 합니다..

[공관복음]

마태복음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9: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서신서]

고린도전서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히브리서 5: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에베소서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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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y 08, 2007
*.254.104.85

콰미 님이 말하는 "어린아이"의 함축적 의미와 목사님의 "어린아이"의 함축적 의미가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군자는 큰 길로 다닌다." 는 논어(?) 말씀의 "큰길" 을 성서의 "좁은 길"의 의미적 패러다임에 그대로 넣어서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요...

콰미 님 -콰미에게는 말을 놓지만 여기서는 높일께요 ㅋㅋ -이 말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하는 우리 순진한 믿음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 같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아이의 믿음"은 믿음의 질적인 차원에서의 미성숙성과 오류 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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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y 08, 2007
*.254.104.85

코람데오님 말씀 뒷 북 친 거 같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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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콰미

May 08, 2007
*.54.206.9

믿음의 속성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계산하지 않는 것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것 판단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순수 영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의 주인은 어린아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하구요 바울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것은 신앙적 성숙을
원하는 것이지 신앙의순수함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숙과 순수의 충돌이 필연적인가요?
그렇게 주장하신다면 믿음과 사랑의 충돌도 필연적이라고 답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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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y 08, 2007
*.254.104.85

신앙의 성숙과 신앙의 순수함... 서로는 이율배반처럼 보이면서도 역설적으로 동일함을 깨닫는 것...

콰미의 문제 제기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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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May 08, 2007
*.109.125.151

콰미님 계산하고 이치를 따져보는 신앙은 순수하지 않은 걸까요? 천국의 주인이 어린아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몇군데에서 앞뒤 문맥에 맞게 다시 한번 잘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글자 그대로 따지지 않고 믿는 믿음을 말씀하고 있질 않습니다.
주님이 어린아이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성경 속에서 정확히 이해 하시길 바래서
드리는 말씀 입니다. 어떤 단어 하나만 분리해서 일반적인 의미로 신앙에 적용하였다가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오해하고 잘못된 신앙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을 것을 말씀 하셨지만은 또 한편으로 따져 보면서 계산해 보면서
지혜롭게 신앙하라는 의미의 말씀도 하셨기 때문 입니다.

콰미님 간단하게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지병때문에 세번이나 하나님께 병 낮기를 기도 했는데
병이 낮질 않았습니다.. 과연 바울의 믿음이 부족해서 일까요?
바울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병고치는 은사를 믿지 않아서 일까요?

지혜와 지식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무지하고 순수한(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신앙과 믿음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을 피할 수 없었음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 도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슬픔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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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소음공명

May 08, 2007
*.59.118.25

'오직 믿음'은 '오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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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콰미

May 08, 2007
*.59.105.89

바울은 실존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지 결과를 위해서 기도한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답변이 되셨나요?

코람데오님 자꾸 엉뚱한 결론을 내시는군요 순수한 것과 단순한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걸로 간주하겠습니다.
순수의 영역과 단순의 영역을 혼돈하시는군요 그거 분간하는게 그리 어렵습니까?
예수님은 순수하시면서 단순하지 않으셨습니다. 순수하면서 성숙했다구요
계산하지 않는 믿음을 맹목적 믿음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하답니다.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배울점이 많다는 겁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구요
누가 어린이에게 유치함과 단순함 미성숙함을 배우랍니까? 순수함을 배우라는 거지요
예수님에게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없었다는 반론을 제기하시렵니까?
아니면 성숙과 순수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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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y 08, 2007
*.237.224.108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어지는 법... 믿음이 성숙할수록 더욱 순수해지는 역설...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예수가 이 세상 인간들 중에서 가장 겸손하였다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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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riveroad

May 09, 2007
*.116.148.219

하느님[진리의 본체, 생명의 근원] 앞에서
"순수(한 신앙)"을 포함한 모든 것이 상대화 된다는 것이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와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 아닌가요?

"순수한 신앙" 등등의 (아주 좋아보이는) 가치들를 절대화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것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죠.
다만, 절대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곧바로,
그것은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겠지요.

이렇게 볼 때, 콰미 님의 "순수한 신앙"과
정용섭 목사님의 "믿음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능하다"는
설교는 서로 큰 충돌은 없는 듯..

-텍사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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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May 10, 2007
*.109.125.151

콰미님 님의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글에서 순수의 영역과 단순의 영역으 분간하시고 계시다면
저와 본 문제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님의 글을 오해 하게된 되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믿음을 이야기 하시면서
오병이어 사건을 언급 하셨기 때문 입니다.
사실 성경의 오병이어 사건을 읽어 보시면 님께서 언급 하시는것 처럼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신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어린아기가 신앙심으로 물고기 내어 놓았다는 말씀도 없구요.

사실 오병이어 사건은 영적으로 대단히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며 그 기적의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믿음이나 그런거와는 상관이 없고 떼어주고나서 거둔 12광주리에 그 진리의
핵심이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설교자들이 콰미님과 같이 오병이어 본문을 핵심을 벗어나 가르치고 있고
또한 콰미님 께서도 그러한 방향에서 어린아이의 믿음에 관련하여 언급허셔서^^ 콰미님 께서
말씀 하시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단순한 믿음으로 언급하시는 것으로 제가 착각 하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본질을 왜곡지 아니하고 한 구절 한 구절 조심조심 해석하고
이해하고 바르게 적용하였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랑하는 자의 말이 왜곡되고 거짓으로 전파되는데에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는다면 문제 아닐까요^^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보니 그려나보다 하시고 널리 이해해 주시길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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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소피

May 10, 2007
*.71.223.153

늘 궁금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저또한,
목사님의 이런 성서 해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그런능력을 소유한 분이라는걸 믿는다는것
그것도 십자가에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무력하고 처참하게
죽어간 바로 그사람을 믿는다는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잘 모르면서 믿습니다를 연발할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 그것을 가지고 종교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고
성인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미 다 자란 성인은 어린아이로 다시 돌아갈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의 믿음"
이것은 단순하다거다 순진하다거나 순수함을 훨씬뛰어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는 그냥 어린아이의 믿음이 있을뿐
이미 다 자란 성인들은 결코 소유할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것은 불가능의 믿음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하는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구요
우리는 이것을 믿는것구요
만약 어떤 어른이 스스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흉내낸다고
(이것은 그렇치 않으면서 그런척하는 것입니다.)합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가됩니다.
불가능한것이 없다면 가능게 되는 기적도 필요없지요

주절주절
오랫만에 들어와서 목사님 설교보고 깨달은바가 있어서
후다닥적고 나갑니다.

온세상에 하나님의 평화가 충만하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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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광야

May 11, 2007
*.6.130.207

처음 글 올립니다. 한번 모임에 가려고 생각해 보지만 시간도 그렇고 선뜻 나서기가 두렵습니다.
항상 목사님 설교 잘듣고,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와서 설교들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믿음" 다시한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말씀 읽어보겠습니다....
글재주가 없네요.. 교회이전 하신거 축하드립니다.(더 널고 좋다고 하셔서) 목사님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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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1, 2007
*.150.14.94

소피 님, 오랜 만에 반갑습니다.
귀여운 아가야는 잘 크지요?

광야 님,
처음으로 글을 남기신다구요.
반갑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니 다행입니다.
모임에 한번 오세요.
용기보다는 시간이 있으면 말입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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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求道者

May 12, 2007
*.241.161.130

소피님!
이렇게 살짝 왔다가 후다닥 사라지다니...^^
은수가 엄마를 꼼짝 못하게 하나봐요.
아무튼 무지 반갑네요.

기다리다 지친 은수 백일 사진 대신
돐사진 거하게 찍어서 <포.갤>에 올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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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소피

May 12, 2007
*.71.223.153

정목사님,구도자님~
빈말이라도, 제가 샘터교회이사하는데가서 청소라도
도와드리고 싶은데요....ㅎㅎ

은수는 무럭무럭 듬직하게? 잘 크고있습니다.
이런저런일로 조금 바쁘네요
남편과제가 뭔가 일을 벌리고 있거등요..ㅋㅋ
잘됬으면 좋겠는데......
이일이 좀 안정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날것 같아요..
이번년도 내에 그렇게 됐으면 좋겠는데..
두고 봐야겠지요...
그래도 틈틈히 이곳와서 마음의 안식을 찾곤하니까요..

제가 댓글도 못답답니다..또 우네요..에공~~ㅠㅠ
빨랑가서 달래줘야해요~~~
모두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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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사오정

May 12, 2007
*.74.17.75

정목사님!!!
저도 성서일과를 따르고 있는데
한국 문화적 상황에 의해서 개입된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 등등의 성서일과는
제가 가진 성서일과의 본문들(부활 다섯째 주일말씀)과 다르네요^^
목사님이 위에서 본문으로 사용하신 것도 한국 문화를 반영한 성서일과를 따르신 것 같은데.....
또 목사님의 설교를 읽어보면 한국적 상황에 따른 어린이 주일과 관련성이 적어보이고....
목사님이 따라가시는 성서일과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성서일과를 따를 때 문화적인 상황에 의해서 성서일과를 바꾸는 것이
한국 개신교단의 전반적인 동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한국에는 그러한 협의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의 일치를 위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 성서일과를 토대로
매년 당해년도 성서일과를 제공해주는 것은 그나마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본문으로 선택하는
많은 목회자들에게 도전을 주는 것이라 바람직하게 생각하지만....
조금은 생각 해야할 여지가 있는 것 같아서.....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y 13, 2007
*.150.14.146

사오정 님,
저는 김종렬 목사님이 중심으로 펴내시는
<예배와 강단>이 소개하는 성서일과를 따릅니다.
거기에 제 논문이 계속 실리기도 하고
그분과의 인연도 있고 해서
몇년 전부터 그걸 씁니다.
김 목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몇년 전까지는
독일 교회의 성서일과 따왔는데,
그 후로 미국 아무개 협회 성서일과를 따른다고 하네요.
가능한대도 우리나라도 전체 교회가 따를 수 있는 성서일과를 통일했으면 합니다.
가능한 어린이 주일이나 어버이 주일 같은 것들을 빼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주일공동예배를 전제한다면 케리그마를 중심으로 성서일과를 작성해야겠지요.
좋은 주일을.
profile

[레벨:5]살군

June 10, 2007
*.211.143.117

정목사님 무척 은혜로운 설교 잘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말대로
믿음이란 자기 확실성에 근거한 믿음은 아니겠지요

오로지 상대를 믿는 믿음,
상대를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믿음
자기를 부정하고 상대를 믿는 신앙이 올바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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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290
253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60
252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249
251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268
250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173
249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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