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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어머니인가?

부활절 조회 수 15456 추천 수 145 2007.05.13 16:33:20
성경본문 : 요한복음 19:25-27 
mms://wm-001.cafe24.com/dbia/070513.MP32007.05.13. 요 19:25-27
누가 내 어머니인가?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지난 주일은 어린이 주일로,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는 이렇게 특별한 절기를 지키기보다는 바른 신앙과 최소한의 상식만으로도 얼마든지 원만하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 주일이니 어버이 주일이니 하며 지킨다는 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절기가 한국사회에 안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고, 기독교 신앙의 차원에서도 그런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런 절기를 마다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어버이 주일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 애제자인 요한에게 어머니의 노후를 부탁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누구나 죽음에 임박해서는 가장 절실하고 정직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유언은 법적인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 깊은 곳에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염려가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새길 수 있는 사건은 어버이 주일의 성서본문으로 안성맞춤인 것 같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에 의지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효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교할 것 같군요. 본문이 과연 그것을 말하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효자와 효녀로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어른을 공경해야하는지 성서말씀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서른 세 살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서와 기독교 초기 문헌에서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말을 발견할 수 없는 걸 보면 그가 결혼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그런 그가 지금 죽음 직전에 처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 당시에 가장 처참한 사형제도였습니다. 우리의 옛 조선시대와 비교하자면 능지처참(陵遲處斬)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있고 그 밑에서 로마병사들이 예수님의 옷가지를 나눠가졌습니다. 유대의 한 젊은이는 무고한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젊은이들은 작은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은 비극인가요, 희극인가요? 그러나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늘 일어나니까요.
요한은 이런 끔찍스러운 장면에 이어서 새로운 장면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출신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저자이며 예수의 제자인 요한입니다. 그 이외의 인물들이 더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렇게 중요한 장면에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빠졌다는 게 이상하긴 합니다. 그는 지금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자책감으로 어디로 숨어버렸는지요.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제자 요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그 이후로 그 제자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기까지인데, 그 뒤로 이어지는 말씀을 연결해서 읽어야만 본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이 중요하니까요. 28-30절에서 예수님은 두 마디 말씀을 더 하십니다. 하나는 “목마르다.”이며 다른 하나는 “이제 다 이루어졌다.”입니다. 그 말씀 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31절 이하의 설명은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체를 처리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요한이 전하는 이런 일련의 보도를 읽으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유언입니다. 목마르다는 말씀은 육체적인 고통에서 나오는 비명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운명에서 일어난 인류구원의 성취에 대한 증언이며 고백입니다. 전자가 예수님의 인성을 그대로 노출한다면, 후자는 신성을 가리킵니다. 이 두 마디 말씀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요한복음 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조금 이상합니다. 어머니를 제자인 요한에게 부탁하는 일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예수님의 메시아적 삶이 종결되는 그 순간에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말씀이었을까요? 아마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셨지만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아들이기 때문에 죽는 마당에 어머니의 노후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효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언급은 메시아의 죽음이라는 그 사건의 무게에 비추어 지나치게 가볍고, 안이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누구이기에 절체절명의 이 순간에 중심인물로 등장하나요? 성서는 그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만, 로마 가톨릭교회는 마리아 승천일을 지킬 정도로 마리아 숭배의 경향이 강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신학의 자료로 인용됩니다. 신학자들 중에 마리아는 바로 로마가톨릭교회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따라가려면 신학석사 학위 공부로도 부족할 겁니다. 우리는 너무 깊숙이 발을 들이지 말고 성서가 말하는 범위 안에서 예수와 마리아와의 관계를 필요한 것만큼 조금 짚으면 됩니다. 질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정체를 알았을까요?
이에 대한 복음서의 설명은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던 순간부터 무언가 특별한 것을 인식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3:20-35절의 말씀은 이런 상황이 아주 복잡하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있을 때 예수의 친척들이 그를 붙들러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친척에는 예수의 형제들과 어머니 마리아도 포함됩니다. 그들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귀신들렸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의 가족들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마가복음 3:31절에 따르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이 들어가 계신 집밖에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막 3:35)
아들이 염려되어 찾아온 어머니를 뛰어나가 맞아들이지는 못할망정 누가 내 어머니이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형제이고 어머니이다, 하고 말씀하실 게 뭡니까? 이런 장면을 보고 예수님은 인정머리가 없다거나 불효자라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심정을 가진 분이라고 한다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가 그런 가족관계에 대해서 가타부타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사랑과 효도 같은 문제는 성서의 주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관습이고 가치이고 도덕률입니다. 그런 도덕률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서는 어디서나 강조된 것들입니다. 유교적인 가치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한민족에게는 훨씬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일반적인 도덕률을 반대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추종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 자녀사랑, 효도, 민족주의 같은 것을 주제로 설교할 수 없습니다. 설교는 예수님에게 발생한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도 역시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효심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케리그마입니다. 성서텍스트의 이런 깊이를 포착하려면 여러분이 본문을 조금 더 포괄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원칙적으로만 본다면 큰 아들인 예수가 죽으면 그의 동생들이 어머니의 노후를 떠맡아야만 했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몇몇 편지에 의하면 예수님에게는 분명히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지 않고 제자에게 부탁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에게서 어머니를 부탁받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입니다. 그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었을 겁니다. 다른 복음서에 이 사건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이 사건이 요한공동체의 고유한 전승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지금 자기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향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바로 요한의 어머니이며, 더 나아가서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지체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육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혈육보다는 신앙이 우선하는 공동체가 된 셈입니다. 바로 여기에 앞서 마가복음에서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이며 어머니라고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 하신 다른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친구, 형제, 부모를 미워하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이나 식구가 원수라는 말씀도 새로운 차원의 가족개념을 가리킵니다. 혹시 이런 말씀을 들으시고 가족을 해체하거나 자신의 불효를 합리화하시는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제 말씀은 상식적 도덕과 신앙의 본질을 혼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제 두 딸이 하루빨리 저의 보호로부터 독립하기를 바랍니다. 경제적인 독립은 나중에 한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우선 독립하기를 바랍니다. 정신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는 건 어떤 면으로 보아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설령 불효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독립적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어버이날에 두 딸들이 선물은커녕 작은 꽃 한 송이도 없었고, “고맙습니다.” 는 인사나 문자도 없었기에 섭섭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두 딸 모두 제 각각 바쁜 탓에 깜빡하고 어버이날을 놓쳤겠지요. 앞으로 계속해서 놓친다고 해서 섭섭할 건 전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독립된 인격체로 건강하게 살아가기만 한다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해서 살아가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 공동체는 인류 미래를 열어 가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가족 개념의 혼란기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미 대가족제가 허물어진지는 오래되었고, 싱글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서 혈연의 가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여전히 막강하게 작용합니다.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한화그룹의 대표인 김승연 씨가 폭력혐의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더니 급기야 재벌총수로는 최초로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술집 종업원에게 얻어맞은 아들을 위해서 조폭을 동원하면서까지 대신 앙갚음을 했다고 합니다. 코미디 같은 사건이지만 한국사회가 여전히 혈연중심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사실은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핏줄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묶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그 중심에 둔 공동체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가 명실상부하게 확보될 수 있다면 지나친 혈연중심주의나 또는 가족 해체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교회가 지금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매진하고 천착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교회가 계추모임이나 친선단체처럼 끼리 집단으로 머물러 버린다면 그건 또 하나의 혈연 중심주의로 떨어졌다는 의미이겠지요. 현재 극에 달하고 있는 교파주의, 개교회주의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서 효도하라고 설교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상식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각자 처한 위치에서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의미의 가족관계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떠해야하는지 질문해야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혈연중심의 가족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샘터교회에 속한 교우들이 온전히 하나님 나라에 의존해서 살아갈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여러분은 바로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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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어린양

May 13, 2007
*.231.220.162

아멘~

목사님! 그런데 질문이 하나 있어요.
설교 중에 "이런 점에서 주일 공동 예배의 설교에 자녀사랑, 효도, 민족주의 같은 것을 주제로 설교할 수 없습니다."라는 부분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만, 이 말씀 바로 앞에 말씀하신 "자녀사랑과 효도 같은 문제는 성서의 주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관습이고 가치이고 도덕률입니다."는 무슨 뜻인지요.
그것들이 성경의 주제는 아니더라도 한 시대의 관습이나 도덕 같지는 아닌거 같은데요.
관습이나 도덕은 문화에 따라 조금씩은 차이가 있지만 가족간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게 아닌가 싶어요.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셨구요(십계명 중).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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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배성민

May 13, 2007
*.124.192.160

오늘 설교를 들으며 문득 아침에 부모님과 나눈 대화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부모 자식은 나이가 들수록 묘한 죄책감을 느낍니다. 부모는 은근히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리고 자식은 늙은 부모를 부담스러워하면서 미안해 합니다. 단지 "복지제도"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여기 네 어미니다' 예수님이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길 때, 이 본문은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우리는 사실 부모를 '남에게' 맡기고 싶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만) 남의 눈이 무서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그런 사실을 숨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타인의 아들이 되고 어머니가 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맡겼지만, 지금 우리의 교회는 그렇게 아들이 될 힘은 없습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 여기 저기 옮겨 다니고, 심지어 쫓겨 나기도 하는 걸 보면, 교회는 아직 따뜻한 가족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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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소음공명

May 13, 2007
*.59.118.49

'가족' 교회가 잃어버린 단어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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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4, 2007
*.150.14.88

어린양 님,
물론 성서에는 효, 우정, 사회 규범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있습니다.
십계명에도 그런 내용들이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군요.
예컨대 내가 딸들에게
너희는 아무리 늦어도 밤 11시까지는 집에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합시다.
그게 저와 딸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해명하는 기준은 될 수 없어요.
더 중요한 건 아버지와 딸의 관계 자체입니다.
아버지가 존재하고, 딸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것 자체가 중요하지
계명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내 딸이 11시 넘어서 들어올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건 아니지요.
그 딸이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면
11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배성민 선생,
그렇지요?
교회 공동체가 새로운 차원의 형제 공동체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현실은 늘 그렇습니다.
다만 그 방향만은 놓치지 말아야겠지요.
오늘 이사갈 교회 청소하느라 수고했습니다.
키가 커서 높은 곳의 먼지를 잘 닦네요.
수고 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소이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하양에 있는 대구은행 앞에서
오전 10시35분에 기다리세요.
그러면 우리 가족들 그쪽으로 지나면서 픽업할 겁니다.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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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May 14, 2007
*.126.215.142

로마 가톨릭교회는 마리아 승천일을 지킬 정도로 마리아 숭배의 경향이 강하다고 하셨는데요..숭배가 아니라 공경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는 성모님 또는 하느님의 어머니(루가 1:43)로 존경받는 분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니거든요..이는 로마 가톨릭처럼 초대교회의 신앙을 따르는 정교회, 성공회, 콥틱교회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단, 로마 가톨릭의 성모 승천교리는 인정하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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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가을소풍

May 15, 2007
*.79.237.76

어버이날 따님들에게 꽃 한송이 못 받으셨다는 대목을 읽으며 혼자 '킥킥킥~' 웃었는데
나중에 설교듣기를 들어보니 샘터교회 교우님들도 하하하~ 웃으셨군요^^.
독립된 인격체로 자라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따님들이 너무 일찍 헤아리셨나보네요...
마지막 대목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확장된 가족의 범위에
온라인상의 다비안 교우들도 포함시켜 주시는 건가요?
마음의 카네이션 한 송이 보내드립니다.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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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콰미

May 17, 2007
*.54.206.10

형제 자매 아버지 이런 호칭의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잘 될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가족이란 정체성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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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May 18, 2007
*.109.125.151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정용섭 교수님의 설명은
제 짧은 소견으로는 성경 저자들의 설명과 좀 다르다는 생각 입니다.

==============================================
예컨대 내가 딸들에게
너희는 아무리 늦어도 밤 11시까지는 집에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합시다.
그게 저와 딸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해명하는 기준은 될 수 없어요.
더 중요한 건 아버지와 딸의 관계 자체입니다.
아버지가 존재하고, 딸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것 자체가 중요하지
계명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

위와 같이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규정짖는 것은 정용섭 목사님의 설명과는
정 반대로 성경은 존재 자체가 중요 하것이 아니고 "계명"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되는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 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성도들도 주님안에 가지로 연하여
붙어있어 열매를 맺기위해서는 주님의 사랑의 새계명 안에서 행할때라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는 인간의 부자지간의 관계와는 달리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계약 관계"라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 합니다.

원시교회인 에덴동산의 계약은 "선악과을 먹지 말라"는 것 이었고..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의 계약은 "내 명령을 지켜 행하라"는 것이 계약 조건이었고.
신약교회의 성도의 계약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해하는 것"이 계약 조건이이라 봅니다.

우리가 그 계약을 파기하면 하나님도 그 관계를 유지 하실 수 없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낭만적인 낙관주의로 규정하는 실수가
원시교회와 구약교회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 받은 이유라 생각 합니다.

또한 신약의 교회 세대도 낭만적이 낙관주의로 관계를 규정하면 반드시
버림을 받을 것 이라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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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이택환

May 22, 2007
*.61.167.35

코람데오님,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롬 3:4)는 말씀을 믿으실 줄 압니다.
“율법(계약)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는
말씀도 역시 믿으실 줄 압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어떤 일부의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에서 유대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담에서 우리 모두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계약파기적이고, 비신실하고, 거짓된 인간의 불의함에 대해
끝까지 당신의 신실하심을 유지하고 계심, 즉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3:3-4a)
이것이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이지요.

복음이란 결국 신실하지 않은 인간을 용납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다시 말해 일방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불의함) 달아나버린 인간에 대해,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과의 관계를 유지하시고(의로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 호세아서의 주제이고,
신약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 구약이 일관되게 말하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악용하여,
사람들이 온갖 죄를 더욱 담대하게 지을 게 아닌가? 라는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은 세상에 악을 조장하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치한 질문은 이미 로마서 3장의 유대인 항변자를 통해 제기된 바 있습니다.
바울의 답변은 그런 식으로 복음을 훼손하는 자를 향해,
“그들이 정죄를 받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일이지,
은혜를 궤변으로 만들거나,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남편의 영원한 용서를 믿고 계속 음란을 즐겼다!,
탕자는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믿고, 다시 아버지의 돈을 챙겨서 유유히 집을 떠났다!)

또한 은혜를 율법으로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호세아에게 붙잡혀 온 후, 고멜은 평생 호세아의 노예로 살았다!,
돌아온 탕자는 이후로 형보다 더욱 철저히 아버지의 명령에 맹종하는 아들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이제는 허접한 일들을 그만두고,
별 거 아닌 일에 목숨 걸고 서로 싸우려고 하지도 말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대해 보다 깊은 연구가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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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May 22, 2007
*.109.125.151

이택환님의 위의 글은 제가 먼저 쓴글의 핵심인 하나님과 인간과 언약관계 즉
신약 성도들에게 주님이 명하신 "새 계명 안에서 행하라"는 명령을 약화시킬 아무런
단서도 재공하지 못한다 생각 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율법"은 구약의 언약이지 신약의 새계명 즉 새로운
계약과 동일시하는 것은 로마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 이라 생각 합니다.

로마서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전체를 읽어야 하고 전반부의 몇 구절들로
그 진리를 이해 하기가 그리 간단한 책이 아닙니다.

바울의 신학의 핵심은 "그러므로"에 있습니다. 즉 그 큰 구원받은 자의 바른 삶에
대해서 말씀 하시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 6장 15)

이택환님 위의 본문은 은혜 아래 있는자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씀 하시고
계시는 군요. 이택환님은 님이 은혜 아래 있다고 자신 하십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구약 이스라엘 교회에 대해서 너희는 하나님과 세상을 더불어 사랑한
간음한 더러운 여인이다. "너희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렸다, 회계하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라"는 것 입니다.

지금의 교회 세대가 하나님과 우상(돈)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과 세상을 더불어 사랑해도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구원하실것으로 착각
하신다면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 부족 아닐까 생각 합니다.

님의 말씀대로 일방저인 하나님의 은혜라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버리셨을까요?
앞뒤가 맞질 않다는 생각 들지 않으세요..

님의 글을 읽으며 님께서는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시는 소위 "행함이 있는 믿음"
즉 성도들이 받드시 맺어야할 사랑의 행위의 열매를 바울이 로마서 초반 부에서
말씀하시는 "율법"과 같은 개념으로 동일시 하시고 있는데 이는 바울서신를 오해
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행위의 열매가 없는 신앙인들은 반드시 잘리워져 불에 던지운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 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믿는순간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이요 신앙의
경주의 시작이 되는 것 입니다. 평생 죄짖지 않고 은혜가운데 거하기 위해 싸우고
사랑의 열매를 맺기위하여 탐심과 죽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 입니다..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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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이택환

May 23, 2007
*.61.167.35

코람데오님처럼 성경말씀과 신학적 과제에 대해 철저한 성도님들이 있어야,
한국의 목사들도 정신을 차리고,
설교시간에 대충 코미디나 하면서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배움을 통해 무너지는 만큼, 더 좋은 것이 새롭게 세워질 수 있음을 감안하시고,
정 목사님과 다비아로부터 배우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저도 이곳에서 그런 자세로 배우고 있는 수많은 목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
코람데오님,
저는 이미 구원을 얻은 바울을 비롯한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믿습니다.
일찍이 루터도 사람은 죽어야 비로소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했다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가 전가됩니다.(이신칭의)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 이전에 이미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 용서의 비유(마 19:21-35), 포도원 일꾼의 비유...
복음은 모두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계약을 행함은 은혜에 따른 결과이지,
계약을 행함에 따라 은혜가 베풀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종말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는 누구나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그렇지 않다면 신비주의 이단에 속한 자들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하셨습니다.(롬 8장)
하나님께서는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인 동시에 죄인"인 역설적인 존재로서의 우리는
성령님과 함께 이 고난의 현실을 오늘도 인내하며,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새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신약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이 따로 지켜야 할
새롭게 업그레이드 된 십계명이나 율법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예수님이 전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새 계명이고,
그 복음을 다시 풀어서 온 세상에 전한 사도 바울의 복음이 곧 새 계명이겠지요.
그것은 곧 신실하지 못한 모든 인간은(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역사의 한 가운데 나타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새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즉 복음을 믿지 않으면),
약속에서 떨어진다는 코람데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한다며 온갖 것들을 주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요 6:29).

끝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에서 불필요한 부분이 9-11장(이스라엘)이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9-11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결코 이스라엘의 구원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강조점도 하나님께서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구원받았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지요.
그것은 마치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를 비웃는 꼴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9-11장의 주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이스라엘은 구원에서 떨어졌다/
왜 하나님은 그런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는가? - 를 우리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은혜와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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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May 23, 2007
*.109.125.151

이택환님의 좋은 말씀 잘 읽었습니다.

"복음은 모두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계약을 행함은 은혜에 따른 결과이지,
계약을 행함에 따라 은혜가 베풀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계약을 행함에 따라 은혜가 배풀어 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반드시 계약을 행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계약을 행하는지의
여부가 은혜를 받은자인지 않은지 판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의미 입니다.

[마태 11:28,29,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죄의짐과 속박으로 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함을 얻은자는 죄의 종에서
주님의 종이되어 다시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좁은길을 갈 것을 명령하신 것 입니다.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지 않는 사람 즉 주님의 멍에를 지지 않는 사람은
죄에서 자유함을 받은 자가 아니지 않을까요?

바울이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 하나님을 주셨다는 말씀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령안에서 행할 수 있도록 즉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행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다는 말씀 이십니다.

이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선지자 에스겔은 예언하기를

[에스겔 36 : 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신약교회 시대에 주어진 성령은 사람들의 문제 해결하는 도께비 방망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기 위한 역사인 것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복음을 믿는다는 의미와 동일시
하는 성경해석은 매우 광의의 해석으로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저자들은 "믿음"이란 용어를 두가지로 분리해서 사용 하는데
입술만의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이 그것 입니다.

이택환님 몇가지 여쭈어 보겠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이 식어지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형재를 내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아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좀더 논점을 좁혀 볼까요?

월 2000만원 버는 사람이 1600만원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서 쓰고
나머지 400만원으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 했다고 주장 할 수 있을까요?

자녀들 사교육비로 월 30만원 쓰는 것은 아깝지 않고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 교육보험드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은데.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월 30만원 쓰는 것이 아까운 사람이 이웃과 하나님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다고 주장하며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자신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근거를 성경에서 제시해 주신다면
님이 말씀 하시는 모든 말씀을 받아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지 바울서신들 다시 한번 열림 마음으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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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이택환

May 23, 2007
*.61.167.35

처음에는 서로 간에 다른 점이 많이 드러나는 같았는데,
사실 우리는 비슷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이 확인 되고 있군요.
그러나,

코람데오님,
저는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과 분리된 다른 어떤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믿음-의 정도가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일 만 달란트(수백억 원) 탕감의 은혜를 입은 자는,
마땅히 일백 데나리온(몇 만원)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잡아서 감옥에 가둔 것은
그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은혜를 모르는 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갚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압박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친구의 일백 데나리온이라도 악착같이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 비유는 우리가 남에게 빌려 준 돈을 받아내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말 할 수 없이 큰 하나님의 죄 사함을 은혜를 입은 자로서,
마땅히 사람들에 대해서도 용서의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죽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율법을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은혜로, 의롭다 인정받아 구원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남에게도 율법의 굴레를 씌우지 말고,
또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행함은 새로운 율법조항을 지켜야 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
결국 한마디로 은혜 받은 자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바로서의 행함이 나타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률적으로 행함은 이렇게 나타나야 한다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2000만원 수입전체를 타인을 위해 쓰면서도, 주님의 질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2000만원 수입전체를 자신을 위해 쓰면서도,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러한지 그 내부의 속사정을 우리가 다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50%를 넘지 않는 한, 행함이 없는 자이고
50%를 넘어서는 순간, 행함이 있는 자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볼 때 행함이 없는 것 같은 사람도 주님이 보시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행함이 넘치는 것 같은 사람도 주님이 보시면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다 좋은 것도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
받은바 은혜대로 사는 게 곧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사람들이 왜 이리도 행함이 없는가가 불만이시라면,
율법이나 규례를 더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은혜를 더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지만 특히 로마서는,
새롭게 행해야 할 율법에 관한 책이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책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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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May 23, 2007
*.109.125.151

매우 유익한 토론 이었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고 같은 부분도
있다고 생각 합니다..
저는 이택환님을 신앙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주안에서 같이 형재된
자로 여깁니다. 주안에서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즐거운 주말 되시길 ^^ㅎㅎ
profile

[레벨:3]코람데오

May 29, 2007
*.109.125.151

이택환님 ^^

혹시간 나시면 www.ean.or.kr 설교중 가장 최근 것 10분짜리 설교 한번 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창원 극동 방송 설교 예정 내용 입니다. 집중해 듣지 않으면 쉬운 설교가 아니라 생각 합니다.
창세기 에덴의 배도와 구약교회 이스라엘의 배도와 신약 교회시대의 배교에 관하여 호세아서를
중심으로 창세기와 계시록을 관통하며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바를 잘 요약한 내용 이라 생각
합니다^^
profile

인생해답

June 24, 2007
*.114.227.103

토론을 관전하는 입장에서는 재미 있네요. 편안하기도 합니다. 관전후평: 구원을 받은 사람 중에서는 죄와 선을 왔다갔다 하면서 손톤만큼이라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죽도록 충성할거구요. 그래서 야고보는 구원은 받았지만 도무지 행함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손톤만큼만 하는 사람들) 그래서 일깨워 주려는 목적으로 행함에 대한 내용을 쓴 것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2:2, 5:7) 그리고 "형제들아"하는 문자를 엄청 많이 사용 하는 것만 보아도 이미 믿는 자들이지요.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니까 야고보의 행함에 대하여서도 "구원에서 떨어지나?"~~하면서 괜시리 떨면서 읽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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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52
268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80
267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705
266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22
265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95
264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539
263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88
262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76
261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50
260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83
259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90
258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39
257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96
256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47
255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57
254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316
253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86
252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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