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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성령강림절 조회 수 12707 추천 수 75 2007.06.17 15:49:57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0617.mp3 
성경본문 : 누가복음 7:11-17 
mms://wm-001.cafe24.com/dbia/070617.mp32007.06.17. 눅 7:11-17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오늘 본문 이야기는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마을로 들어가시는 중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보도입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뒤따랐습니다. 그들이 마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 마침 마을에서 나오는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그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님 일행과 공동묘지로 가기 위해 마을에서 나오는 장례행렬이 마주쳤습니다. 상여가 맨 앞에 있고, 그 뒤를 상주들과 조문객들이 따릅니다. 그런 일반적인 장례행렬은 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례는 특별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젊은이였습니다. 더구나 이 젊은이는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외아들에게 희망을 걸고 살던 여자가 아들을 잃었으니 이것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은 없습니다. 성서기자가 이 여자의 심리상태를 묘사하지 않고 아주 간단히 사실 보도로 끝나지만 우리는 과부와 그 장례행렬에 함께 나선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이 장마철의 먹구름처럼 그들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울지 마라!
예수님은 아들의 상여를 뒤따르고 있는 과부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위로하셨습니다. 울지 말라니요? 도대체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슬플 때 사람은 울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 여자의 슬픔이 보통 슬픔인가요? 자식을 먼저 보내는 걸 참척(慘慽), 즉 참혹한 고통이라고 한답니다. 더구나 이 여자는 원래 남편을 잃은 적이 있으니,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버텨내는 길은 통곡밖에 없을 겁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 아들을 잃고 쓴 책이 <한 말씀만 하소서>입니다. 제 기억에 박완서 선생님도 병으로 남편을 잃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레지던트 훈련을 받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그는 참척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더군요. 일상의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수녀원에 들어가서 몇 달을 지낸 후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왔다고 합니다.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말로 위로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마음으로 위로만 하겠다는 의미라면 실컷 울게 내버려두었을 겁니다. 울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울지 말아야 할 어떤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 상황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은 외아들의 소생입니다.
예수님은 상여에 손을 대셨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시체가 담긴 관은 부정하기 때문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웬 낯선 남자가 상여에 손을 대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상여꾼들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시체를 향해서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장면에서 여러분의 생각은 아주 복잡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또는 그래, 바로 저거야, 죽은 사람도 살리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우리는 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내용이 과학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성서를 읽는데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려는 것은 물리학도 아니고 마술도 아닙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증언합니다.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통치와 구원행위를 증언합니다.
죽었던 사람이 소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행위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보다 더 위대한 사건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많은 고대 문서에도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그런 전승들이 제법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엘리야와 엘리사 전승과 연결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초자연적 능력을 행한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지난주일 설교 본문인 가르멜 산에서의 불 이야기를 비롯해서 엘리야와 연관된 수많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있습니다. 왕상 17:17-24절에는 엘리야가 사렙다에 사는 어떤 과부의 죽었던 외아들을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하 4:18-37절에는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가 수넴에 사는 어떤 부인의 외아들을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세 이야기가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학적 착상은 비슷합니다. 세 이야기가 모두 여자들이 당한 극한의 슬픔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대시대에 여자가 외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자기 전체를 잃은 것과 똑같습니다. 이 세상을 버텨낼 수 없는 참혹한 비극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죽었던 외아들이 소생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겁니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죽어 가는지 모릅니다. 소아암병동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그렇게 죽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기는 합니다. 심지어 죽어 천당에 가서 본 것을 책으로 써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소문은 별로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들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빠져나오거나, 또는 환상을 본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다시 현실의 삶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절대적 차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분명히 죽었던 젊은이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시겠군요. 당신은 성서를 믿지 않는 사람인가, 당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 이신론자인가,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성서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성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만 저는 성서가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막 16:18)이라는 말씀을 사실로 믿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나인에 사는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공동묘지로 가는 중간에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살아났다는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는 게 믿음이 아니라 바르게 믿는 게 믿음이니까요. 이건 성서를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가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가 신학교 강의실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말이 나온 김에 이런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해야겠군요. 2천 년 전 고대인들은 이 세계를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층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의학적인 지식도 없었습니다. 악성 피부병은 모두 문둥병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어려운 병들은 모두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잠간 기절했는지 아니면 진짜 죽었는지를 정확하게 분간하기도 힘들었습니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들은 자주 있었습니다. 아이가 숨이 끊어져서 죽은 줄 알고 날이 새면 화장터에 보내려고 윗목으로 밀어두었는데, 아침에 보니까 다시 살아난 일들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젊은이도 사실은 죽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장사를 지내려다가 예수님이 그걸 발견해서 다시 살려낸 사건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젊은이가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생명을 얻었으며, 이를 통해서 참척의 고통에 빠졌던 과부도 역시 생명을 얻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자기들의 방식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린아이의 세계관으로 이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두려움과 찬양
성서기자가 독자들에게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성서는 다시 소생한 젊은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면서도 무슨 말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고, 아들을 다시 건네받는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서기자가 그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보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 찬양의 내용은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거나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입니다. 메시아 찬양으로 안정맞춤의 노래입니다.
앞에서 저는 본문 사건이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 사건과 연결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엘리야가 중요합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이며, 메시야가 오기 전에 미리 올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바로 엘리야의 초자연적 카리스마를 다시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바로 예수님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함께 한다는 사실을 경험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경험이 기쁨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기쁨은 나중입니다. 기쁨 이전에 두려움이 먼저 옵니다. 모세도 두려워했고, 이사야도 두려워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너무 좋아서 껑충껑충 뛰었다고 말할 분들이 있겠지요. 뛰는 것도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그 깊이를 우리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깊습니다. 그의 사랑도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그의 구원행위도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은 이런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지구의 나이는 대략 45억년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지구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최초의 생명흔적은 35억 년 전입니다. 그런 세월이 30억 년쯤 흐른 뒤 5억4천2백만 전에 크고 작은 생명체들이 갑자기 폭발하듯이 지구에 출현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캄브리아기라고 하는데, 고생대의 시작입니다. 그 뒤로 고생대를 포함해서 중생대와 신생대 등 많은 세월이 흐르는 뒤 신생대 끝인 3백만년 전에야 겨우 현재 인간의 선조라 할 유인원 호모에렉투스가 출현합니다. 제가 지금 잘 알지도 못하는 지질학과 생물학을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시간 앞에서 두렵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공포가 아니라 창조사건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아득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두려움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멍청이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런 두려움은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의 공포와 신앙적인 두려움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통치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에서만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 즐거워서 복음찬송을 부를 수는 있지만, 그건 자기 흥에 겨워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람의 감정이 취해서 부르는 노래와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노래는 전혀 다릅니다. 앞의 노래에서는 자기가 중심이 되지만 뒤의 노래에서는 자기가 끝없이 작아집니다. 전자에서는 나의 즐거움, 나의 행복이 노래되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높으심과 능력이 노래됩니다. 이건 단순히 가사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노래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전자에는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지만, 후자는 그것이 억제되고 영성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고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아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예언자 중의 한 사람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찾아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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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임승한

June 17, 2007
*.248.72.180

우상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깨달으면서 처음 하나님의 두려움을 느꼈던 때가 회상됩니다. 정말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참으로 두려웠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성경을 보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었습니다. 그러나 찬양이 이어지지는 못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진정한 두려움이었는지에 대한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때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이었는지, 단순히 공포였는지 말이죠.
시간이 지나고 때가 오면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겠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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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kiswon19

June 19, 2007
*.141.49.238

이곳에 첨으로 글을 올리는군요...전 목사님이 "찬양" "음악" 과 관련된 글을 올리면 , 많은 관심을 갖고 읽습니다.. (제가 음악하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의문" 을 갖게 되는 두가지는...

"두려움" 이라는것도 한 "인간적(개인적 혹은 군중적)감정' 이고..., 그 "감정" 으로 찬양했다고 생각하구요...,: 그게 "세상적" 인지 "신앙적" 인지 를.., 쉽게... 고민(논리) 없이 판단한다는건 좀....^ ^ (더불어...목사님의 CCM 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기본 견해를 여러번 피력하시더군요: 개인적으로...다소 "비논리(고민)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다른 신학적인 부분에 비해서요... ^ ^ )

한가지 더는..., 그들이 불렀던 찬양은 즉흥적으로 나온 "찬양" 이 아니라..., "구전" 되오거나 "전승" 되어온 "통상적인 문구" 를 갖고있는 "찬양" 일거라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나름의 확신도 있구요...(즉 "시편" 같은것...).... 그렇다면 ..., 문제는 좀 달라지겠죠....!

„비영적(인간적 감정)인 찬양“-목사님의 표현을 빌려- 과 „영적인 찬양“ 을 구별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닌거 같구요… 특히 „그 당시“ 라면 더더욱 그렇구요…,

„찬양“ 에 관한 부분은 다소 „비학구(?)“적인 이원론 적인 잣대로 판단하고 계시진 않은지……..

저의 짧은 „소견“ 이었습니다…

어쨓든 목사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메세지" 는 이해가 가지만..., "음악(찬양)" 과 관련된 "논리" 는 가끔은 잘 납득이 안가더라구요…

끝으로.., 항상 감사히 자~알 읽고 있고..,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맘을 갖고 있고..., 이 홈피를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하구... 다음에 기회되면 글을 또 올리도록하고... 여기서 전 이만...

멀리서... 한 음악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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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2, 2007
*.181.51.23

kiswon19 님,
안녕하세요?
인사도, 대글도 늦었습니다.
미안해서 어쩌지요?
닉네임이 재미있군요.
줄여서 키스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키스 님은 찬양에 대한 저의 생각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으신 겁니다.
문제점이라기보다는 서로의 다른 생각이라고 해야겠군요.
이런 부분에서는 키스 님이 더 정확할 겁니다.
나는 음악 경험에서 아마추어이거든요.
직접 맛보지 못한 채
다른 맛을 빗대어서 설명하고 있으니
어딘가에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그 허점을 키스 님이 짚으신 겁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내가 찬양을
감정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나누어보는 것이겠지요.
그것을 비학구적인 이원론이라고 하셨지요?
옳은 지적이라는 걸 전제하고,
조금 제 생각을 정리해볼께요.
옳던 틀리던 간에요.
영과 감정의 관계는 칼로 무를 베듯이 구별될 수는 없겠지요.
신앙에도 당연히 감정의 차원이 있으니까요.
쉴라이에르마허와 루돌프 오토의 말은 생략하겠어요.
감정적인 찬양은 자기에게 집중한다면
영적인 찬양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적인 찬양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이 아닐는지요.
그걸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현상이 그렇다는 거지요.
소위 복음찬송이 그런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그러다보니 자기의 종교적 연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자기연민은 인간에게 숙명적입니다.
오늘 티브이 드라마는 모두 통속적인 자기연민을 토대로 합니다.
다시, 그게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니까, 이해해주세요.
"당신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가사가 좋지요.
멜로디도 호소력이 있어요.
이 노래가 기독교에서 히트를 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존재 신비는 실종되고
온통 '자기'가 중심이 된 겁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면 기분이 좋은 거지요.

반면에 영적인 찬양은 일체의 자기연민이 없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지요.
이런 찬양에서는 인간의 감정이 극도로 억제됩니다.
억지로 억압한다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그런 찬양은 하나님의 창조, 예수의 구원사건, 성령의 임재만을 노래합니다.
복음찬송도 그런 걸 노래한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부분적으로는 그렇기도 할 걸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소위 복음 찬송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의 심층을 맛본 사람에게서 우러나오는 놀라움에 근거하기보다는
감정의 극대화에 근거합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일들이 가능합니다.
옛날 제가 본 전도관의 예배형태가 그렇더군요.
몇시간씩 찬송을 박수치면서 열광적으로 부릅니다.
내용은 없어도 반복적인 찬송 부르기를 통해서 이미 무아 지경에 빠져버립니다.
그걸 은혜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요.
요즘의 씨씨엠에 전도관의 찬송부르기와 똑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현상적으로 그런 흔적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키스 님이 위 설교의 본문에서 나온 찬양이 즉흥적인 게 아니라 전승된 것이라고 보시는군요.
저도 똑같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그런 전승을 자신의 복음서 집필에 끌어들인 것이지요.

키스 님은 교회음악을 전공하신다니 반갑군요.
씨씨엠 계통이신가요?
앞으로도 저의 글 중에서 교회 음악에 관한 비약이나 왜곡이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깜빡 했군요.
저는 씨씨엠의 음악형식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랍니다.
그 음악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집중하는가,
아니면 사람의 심리에 집중하는가 하는 것을 짚고 있을 뿐입니다.

생명을 담은 음악,
잘 부탁드립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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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이성원

June 28, 2007
*.157.17.209

목사님의 이 설교는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청년이 살아났다는 것은 일단 관심 밖인 것 같습니다. 기적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같고...
다만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찬양했다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찬양이 감정적인 자기도취적 찬양과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움으로 느끼며 부르는 찬양이 있다는 말씀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사람이 살아난 것을 보고! 두려워 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말씀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이 청년이 죽었다 살아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그게 또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 이후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찬양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설교된다는 것은 앞뒤가 안맞고, 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들이 두려움으로 찬양했지만, 그것이 또한 오늘날 우리가 찬양의 태도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들의 이 두려움은 사실 목사님의 설교맥락으로 보면 목사님이 바라시는 그런 참된 두려움과는 색깔이 좀 다른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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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kiswon19

June 30, 2007
*.141.49.89

성실한 답변 감사합니다..
전 독일에서 교회음악을 공부했습니다..
현재도 독일에 있구요…

참고로...."음악" 자체에도 "감정" 의 "이입" 의 부분(이론)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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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와선 „세상적“ 인것과 „영적“ 인것의 규별이 어찌 보면 쉬울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세상음악“ 과 „영적(교회)음악“ 의 구별이 지금 생각처럼 분명하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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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말씀대로 칼로 무자르듯 .., "이원적" 으로 나눠질수 만은 없을것 같습니다.
음....비슷한 맥락으로.. "흑" 과 "백", " 세상" 과 "교회" 등 의 사고방식이 한국교회의 "병패" 라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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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다른얘기지만..제가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아이러니“ 하게도 소위 „보수기독진영“ 쪽의 예배(예전)는 „진보적“ 성향을 띄고 있고, 반대로… „진보기독진영“ 쪽의 예배(예전)는 오히려 „보수적“ 성향을 띄고 있다는 겁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론요...연구 해 볼만 할것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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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혹시..."영과 감정의 관계" 에 대해...., 그리고 "쉴라이에르마허와 루돌프 오토의 말" 에 대해 "글" 올려 주실 수 없는지요? ...이곳이 아니면 이런 류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군요...^ ^

미리 "감사" 드리며.... 멀리 독일에서...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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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30, 2007
*.181.51.23

키스원 님이 독일에 계시는군요.
나도 독일과는 인연이 있어서 친하게 느껴지네요.
지난 목요일 다비아 서울 오프 인문학적 성서읽기 공부에 갔다가
수유리교회에 계신 허정회 목사님의 동생으로부터
독일빵을 몇 봉지나 선물로 받았습니다.
브뢰첸으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종류의 빵이었습니다.
요즘 매일 아침 옛날 독일에 있을 때를 회상하며
이 빵을 먹습니다.
허 목사님의 동생은 독일에 건축학을 공부하러 갔다가
빵 공부를 하고 왔다네요.
지금 홍대 앞인가 어딘가에서
독일빵 집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는군요.
그쪽에 대사관 직원들이 많이 사는 것 같습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해석의 기술"이라는 항목이
온라인 강의실 '해석학' 안으로 들어가면 나을 겁니다.
루돌프 오토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만 다룬 것 같습니다.
어딘지를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아마 최근에 나온 이길용 박사의 책에 그 내용이 나올 겁니다.
그렇군요.
이길용의 미디어피아로 들어가서 찾아보세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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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꿈 이야기 [27] 2009-08-31 18202
342 성령강림절 말의 주체, 말의 능력 [10] 2009-08-24 14116
341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93
340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8206
339 성령강림절 믿는 자는 성전이다 [13] 2009-08-03 13399
338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8365
337 성령강림절 승리주의를 넘어 생명으로 [20] 2009-07-20 12999
33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9611
335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18] 2009-07-06 14690
334 성령강림절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다 [24] 2009-06-29 15122
33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구원 섭리 [33] 2009-06-22 16166
332 성령강림절 생명의 날 [17] 2009-06-15 13540
331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7] 2009-06-08 16722
330 성령강림절 성령의 중보기도 [21] 2009-06-01 15345
329 부활절 그리스도인의 이중 실존 [8] 2009-05-25 15298
328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842
327 부활절 ‘여호와 이레’의 믿음 [23] [39] 2009-05-11 25316
326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375
325 부활절 죽임, 살림, 증인 [25] 2009-04-27 16255
324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946
323 부활절 죽음을 무너뜨리리라! [7] 2009-04-13 13308
322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424
321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842
320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54
319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893
31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413
317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6857
316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901
315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87
314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55
313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1983
312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26
311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57
310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914
309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499
308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846
307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391
306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943
305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1972
304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417
303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367
302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989
301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79
300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73
29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612
298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499
297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37
296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589
295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23
294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48
293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66
292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10
291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103
290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64
289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71
288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87
28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71
286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41
285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50
28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38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83
282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65
281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949
280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37
279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326
278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60
27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98
276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45
275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66
274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824
273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85
272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605
271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762
270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373
269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52
268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80
267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705
266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22
265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95
264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538
263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87
262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76
261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50
260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82
259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89
258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39
257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96
256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46
255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57
254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315
253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86
252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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