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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완성

성령강림절 조회 수 15134 추천 수 72 2007.08.26 15:16:59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0826.mp3 
성경본문 : 히브리서 11:32-12:2 

믿음의 완성

2007.08.26. 11:32-12:2

 

기독교의 여러 가르침 중에서 믿음만큼 중요한 것은 별로 없다고 봐야합니다. 마틴 루터의 솔라 피데’(sola fide) 개념 이후로 프로테스탄트는 이 믿음에 더욱 집중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이미 바울이 로마서에서 가르친 내용+입니다. 이에 반해 로마 가톨릭교회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에 따랐습니다. 믿음과 행위의 문제는 한 두 마디로 끝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예컨대 사랑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 아무런 실천이 없다면 사랑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거꾸로 선물 공세를 펼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랑의 증거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돈 조바니>의 주인공은 바람둥이입니다. 그는 여자를 유혹하는데 달인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단지 감미로운 말로, 좋은 선물로 여자들을 유혹했습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여성들이 이 바람둥이가 던진 미끼에 걸려들었습니다. 이는 곧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위만으로 사랑이나 믿음을 확인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믿음뿐이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이나 행위도 중요하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이나 결국 믿음의 존재론적 토대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승리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의 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히 11:1절은 신약성서에서 믿음을 정의한 유일한 구절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줍니다.” 그는 믿음을 두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줍니다. 둘째, 믿음은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줍니다. 바라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표현만 다르지 실제 내용은 똑같습니다. 둘 다 하나님, 또는 하늘나라를 가리킵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 또는 하늘나라를 담보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오직 믿음뿐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히브리서 기자의 이 진술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중요한 믿음을 11장에서 구약의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그는 4절에서 아벨을 예로 듭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카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5절에서는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알려진 에녹이 등장합니다. 7절은 노아를 언급하고, 8절은 아브라함을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은 여기 히브리서 11장에서도 아주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 야곱, 요셉도 역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23절에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의 주도로 이집트를 탈출하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여리고 성에서 살던 창녀 라합도 역시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도와서 멸망을 면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로부터 라합에 이르기까지, 즉 아담의 아들들 시대로부터 가나안 정복 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의 전체 역사를 일별하면서 그 안에서 면면히 흐르는 믿음의 역사를 독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서 판관들과 예언자들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결국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이 믿음의 구도로 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승리했습니다. 33,34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보도합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고 약속해 주신 것을 받았고 사자의 입을 막았으며,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피하였고, 약했지만 강해졌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믿음을 통한 승리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팔레스틴에서 재산가가 되었고, 그의 아들과 손자들도 모두 크게 성공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출애굽한 이후로 그들은 다시 팔레스틴에서 다윗과 솔로몬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국가적으로도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승리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것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패하는 믿음

그러나 이스라엘이 승리했다는 것은 역사의 한쪽입니다. 다른 쪽에는 실패가 있습니다. 그들이 걸어온 고난의 과정을 본다면 그들의 역사는 승리보다는 실패에 더 가깝습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고, 볼 수 없는 것들의 확증이라고 말한 히브리서 기자도 이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겁니다. 36-38절에서 그는 이런 실패, 또는 고난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롱당하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예컨대 역대하 36:16절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낸 특사를 조롱하고 예언자들을 놀림감으로 삼았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위대한 예언자도 족쇄에 묶여 감옥에 갇힐 때가 있었습니다.(20:2, 37:15, 38:6) 한 전설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스가랴도 역시 돌에 맞아 죽었으며(대하 24:20-22), 이사야가 톱질을 당했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 시대에는 수백 명의 예언자들이 동굴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세례 요한은 헤롯왕과 헤로디아 왕비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과 예언자들이 험악한 꼴을 당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지적은 역사에 대한 바른 판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세상에서 늘 승리만 하는 게 아니라 실패도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세상 사람들이 실패라고 말하는 그런 고난과 시련을 많이 당할지도 모릅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노력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힘들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예를 들어, 히틀러 시대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정권과 투쟁하다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만약 그가 다른 목사들처럼 히틀러 정권이 반()기독교적이라 하더라도 조용하게 지냈으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는 히틀러라는 악과 투쟁하다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특히 군사독재에 항거하거나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에 항거하다가 험한 일을 당한 이들이 많습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 신앙은 이런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요즘 우리의 신앙형태가 지나치게 친자본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특히 미국에서 잘 나가는 목사님들의 영향을 받을 때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집니다.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나 오스틴 목사님의 <긍정의 힘> 같은 신앙서적들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이 현실에서 우리는 이런 신앙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1970년대부터 로버트 슐러 목사의 <불가능은 없다>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현실에서도 그렇고,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그렇고, 성서에서도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성서는 오히려 믿음으로 인해서 시련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던 예수님의 운명은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실패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살다가 인생을 실패한 가장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런데도 믿음으로 불가능이 없다거나 만사가 형통하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장 반()기독교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어도 이 세상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믿음 생활하는 사람은 무조건 실패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지나치게 믿음을 성공의 전제 조건처럼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무조건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면서도 실패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그런 실패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무조건 성공에만 집착하면 그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영성은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고난과 시련을 서술하는 이유는 그가 살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38a절 말씀을 보십시오. 거기서 그는 가난, 고난, 학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말합니다.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험악한 꼴을 당하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황제의 끔찍한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서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상은 분명히 살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완성

오늘 성서말씀을 따라가는 우리는 지금 조금 곤란한 형편에 빠졌습니다. 믿음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했습니다. 믿음으로 자식을 얻었고, 전쟁에서 이겼고, 정의를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는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좋았지만 오히려 믿음 때문에 심각한 삶의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실패한 사람들 쪽에 속합니다. 이런 게 바로 세상의 삶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는 일이 있고 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그저 받아들여야 할 삶의 몫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이런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아무런 필요가 없으니까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인정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틴 루터의 칭의론도 바로 여기에 근거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줍니다. 우리도 지금 그런 믿음으로 삽니다. 그런 믿음으로 이런 험악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으며,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과 확신으로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합니다. 이 약속된 것은 믿음 너머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하는 차원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40절에서 이를 부연해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이런 암시만으로도 여러분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영웅들도 받지 못한 이것이 무엇인지 눈치 채실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의 운명입니다. 그를 통한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이며, 참된 생명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시고 현재 하느님의 옥좌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12:2b) 하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의 옥좌는 그 생명의 자리이며, 오른편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위의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것을 믿는다고 생각하겠지요. 예수님을 분명하게 믿는다고 말하고 싶으실 겁니다. 그게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옳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약속된 것, 더 좋은 것은 우리의 믿음에 의해서 주어지기도 하고 주어지지 않기도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 너머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건입니다. 믿음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것 같은 생각은 잘못입니다. 믿음은 우리 인간의 상대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바울에 의하면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도 여전히 상대적입니다.(고전 13:2) 우리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사건, 더 앞서는 사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생명사건입니다. 생명의 완성입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의 마지막 대목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게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했던 핵심입니다. 40절 말씀을 다시 그대로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제쳐놓고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라고 말합니다. 그 우리가 누군가요? 지금 시련을 당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인들입니다. 앞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을 제쳐놓고 생명의 완성에, 또한 믿음의 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바로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도 받지 못한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과대망상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이 완성된다는 인식이며, 신뢰이며, 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전통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며, 구원받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빌려 여러분에게 다시 권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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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보리떡5물고기2

August 26, 2007
*.142.62.36

교수님~! 그 동안 잘 계셨죠?
목회현장에 나오니, 사막에 있는 것처럼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네요.
다른 신학 동료들은 멀쩡한데 왜 저만 이렇게 유독 목마름을 느끼는 건지...
예전 신대원 다닐 때가 그립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비아에 들러 냉수 한 모금 마시고 갑니다.

"실패하는 믿음, 그리고 믿음의 완성..."
타들어가던 목구멍이 시원해 지는군요. ^^

주 안에서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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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6, 2007
*.181.51.23

최남국 전도사,
오랜 만이오.
잊지 않고 이렇게 다비아에 들어와서
인사를 주니 고맙소이다.
다른 동료들도 역시 목말음은 똑같을 거요.
단지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목마름을 느낀다는 건 그만큼 영적으로 예민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자, 힘을 내고, 가던 길을 그대로 잘 가봅시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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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푸른적토마

August 27, 2007
*.84.242.69

긴~~ 여운이 남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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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구름나그네

August 27, 2007
*.153.220.125

목사님의 글과 설교를 통해 조금씩 믿음의 뼈대를 세워가고 있는 초학자입니다.
위의 "믿음의 완성" 마지막줄에 "믿음의 존재론적 토대가 가장 중요하다" 고 말씀하셨는데요.
"믿음의 존재론적 토대"의 구체적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초보적인 질문인 것 같지만 전 잘 모르겠어서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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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도루박

August 27, 2007
*.136.92.57

처음 설교비평을 접할 때와는 달리 다비아에 있는 글들을 읽어보면서 점점 삐딱하게(?) 되가는 중입니다^^. 구름나그네님과 같은 질문해보고 싶었어요. 대학시절 하이데거책을 읽으면서 한참 헷갈려하던 존재여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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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도루박

August 27, 2007
*.136.92.57

믿음의 대상과 신자의 형편은 구분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믿으면 만사형통'에 대한 지적인 것은 공감합니다만 '예수가 믿음으로 살다가 실패한 가장 대표적인 분입니다..."는 표현은 좀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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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7, 2007
*.181.51.23

믿음의 존재론적 토대!
믿음, 존재, 토대...
이렇게 한 문장이나 단어를 독립적으로 다루면
그 의미가 충실하게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
글의 흐름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체 문장과 단어도 명백해야 한다는 점에서
위의 질문은 필요합니다.
위 문장을 그냥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이렇습니다.
믿음은 우리 인간에게 나타나는 삶의 태도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세계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그 궁극적인 세계는 곧 하나님이지요.
그게 곧 존재론적 토대이지요.
존재론적 토대라고 하는 그 궁극적인 세계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세계, 그 힘, 그 인격자야말로
'자존자'이지요.

예수의 십자가와 실패 운운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 사건을 이미 정형화된 기독론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그 도그마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 사건의 실체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지요.
도그마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 도그마의 내용을 모른 채 그것에 매달리는 게 문제이겠지요.
예수 당시에 십자가는 거리낌이 많고 어리석은 사건이었지요.
예수는 이런 점에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실패의 길을 갔습니다.
인간의 실패가 이제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승리가 일어나는 단초가 된 것이지요.
이런 문제는 다비아 검색을 통해서 들어가면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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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도루박

August 27, 2007
*.136.92.57

취지는 잘 이해하겠습니다. 청년예수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콘텐츠가 바라는데로 이뤄졌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불신자에겐 실패로 보였겠지요. 도그마에 매몰된 사람이라도 누가 그걸 모르나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믿음의 존재론적 토대 위에서 선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려는 것 좋은 일이고 권장할 일입니다. '목표가 이끄는 삶'도 '예수 안에서'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린 것이기에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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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구름나그네

August 27, 2007
*.153.220.125

이렇듯 친절함을 보이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목사님..
구리거울의 희미함이 서로 가까이 맞대고 봄과 같이 확연해 집니다.
결국 믿음의 제1원인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곧 우리 믿음의 존재론적 토대가 되는군요.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져야 가능한것이기도 하겠구요..ㅎ 감사합니다.
(저의 이해에 오류가 있으면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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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7, 2007
*.181.51.23

구름나그네 님,
저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받으셨군요.
오류라니요, 제 설명을 아주 정확하게 요약하셨습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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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

August 27, 2007
*.221.66.21

안녕하세요 목사님^^
설교를 글로만 읽다가
오늘에서야 설교를 통해 목사님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설교듣기'라는 아이콘이 제눈에 들어오지 않았네요.
제가 생각한 것과 거의 7~80%유사한 목소리 색깔과 톤을 가지셨네요.
읽는 것보다 귀로 들으니 이해도 빠르고, 친근감도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또박 또박 이해시키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오늘도 질문을 갖고 왔습니다.
솔직히 아직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사건"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리고 이 생명사건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사회적 구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물론 그 이상을 의미하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더 근본적인 질문인 구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다른 표현들과 말씀들은 무리없이 이해되는 것 같은데, 유독 이 구원과 생명에 가서는 너무 추상적이 되어 구름을 잡으려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쉽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실마리가 잡혀 제 스스로 풀어 갈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이런 암시만으로도 여러분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영웅들도 받지 못한 이것이 무엇인지 눈치 채실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의 운명입니다. 그를 통한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이며, 참된 생명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생명사건입니다. 생명의 완성입니다."

감사합니다^^

ps. 얼마전 추천해 주셨던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하나님 나라>>라는 책은 구하기 정말 힘든 책이네요. 영문으로 된 것을 사는게 빠르겠어요. 빨리 읽어보고 싶은데 말이죠. 혹시 이렇게 절판도서를 구매할 수 있는 Tip을 아시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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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살군

August 28, 2007
*.105.251.195

목사님,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믿음에 관한 초보적인 질문을 하나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오늘날 한국기독교에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믿음'이란
목사님께서 설교에서 말씀하신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논리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생명사건인 '신앙'의 바탕아래 서 있는 믿음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가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사실이나 진실로서 확증되는데 본질이 놓여있는
구체화된 '믿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내가 믿는다"라는 사실에 역점을 둔 나머지
자신이 바라고 휘고하는 에로스아래 믿음이 놓여버리는 경우를 많이 마주칩니다.

그래서 이들에겐 믿음이란 자신이 바라는 것(끊임없는 소유)를 확증시켜주는 단어이자
보지 못하는 것(갖춰지지 못한 소유)을 확증시켜주는 단어인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앞서 목사님께서 설명하셨듯이 신앙의 존재론적 터 위에 서 있는 믿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믿음이라면

위와같이
'자신이 믿는 믿음'에 놓여있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부정되어야 하나요?

그리고 더불어 만일 신앙의 터 위에 서 있는 믿음을 설명한다면
그때의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 할 수 있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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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도루박

August 28, 2007
*.136.92.57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앙의 선진들은 그 믿음에 대한 증거를 체험했고, 그 허다한 증거들은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목적에 둔 것들이란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한국기독교 목사님들 다 그렇게 설교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마찬가지에요. 이러한 기본전제를 부정하면 그건 기독교인이라고도 할 수 없지요.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어떤 목표와 소망들이 신앙 안에서 어떤 모습을 띄어야 하는가하는 점은 각자의 받은 은사와 소명에 따라 각양각색일 겁니다.

병이 들면 낫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좋아서 낫기도 하지만 믿음이 좋아도 병으로 사망하기도 합니다. 병으로 사망한 분을 믿음이 없다고 비난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낫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도 역시 좋은 신앙태도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서 청지기역할 하겠다는 삶의 태도가 왜 비난받아야하지요? 이런 분들이 가난한 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릭 워렌이나 로버트슐러, 조용기 어느 분도 그런 내용의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럴정도까지 기본이 안되있는 사람은 한국교회에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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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예랑

August 28, 2007
*.206.89.69

어제 조용기 목사가 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고 하더군요.. 하나님의 뜻은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가난한자가 되는걸 원치 않으신다
고 하더군요..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정 상반 되거든요..
오히려 비움 나눔을 설파 하거든요..
조목사님 제발 이제 어린애 같은 설교 그만 하시고 은퇴좀 하시죠?
로버트 슐러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조롱하는 뉴 에이지 단체의 연례 행사,
문선명과 통일교 행사에도 서고,몰몬교인들과도 어울리고
신학자로서 정체가 헸갈립니다.
재미있는 것은 조용기 목사의 목회가
로버트 슐러의 (긍정,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 신학을 그대로 답습하여
순복음 교회에 적용 시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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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8, 2007
*.181.161.203

각 님,
구원과 생명이 추상적으로 느껴진다고 하셨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관념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적이라는 거지요.
우리는 주로 피직만을 현실적인 것으로 여기고,
메타 피직(형이상학)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계가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하나님, 또는 삼위일체, 성령도 역시 비현실적입니다.
또는 거꾸로 그것을 순전히 피직으로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을 거구요.
신학생, 신학자, 설교자, 목사들은 성서의 관념적인 세계를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화이트헤드가 말한 경구인
"리얼리티 이느 어 프로세스"에서 process는 형이상학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걸 비현실적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리얼하지요.
구원과 생명은 지금 우리 앞에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해명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실체가 드러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궁극적인 생명을 해명해야 할 신학의 길은
이런 점에서 매우 위태롭습니다.
자칫하면 약장사가 되거나
아니면 도사가 되고 맙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신학적인 사유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와 신학이 말하는 생명과 구원의 세계를 폭넓게 이해해야지요.
그 과정에서 그 실체가 조금씩 또렷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걸 제가 억지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한 두 마디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저도 길이 멀기도 합니다.
한 예로 생물학적인 생명현상과 예수의 부활생명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창조의 생명과 종말의 생명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공부해야 하겠지요.
어쨌든지 각 님의 문제의식은 아주 소중합니다.
신학을 공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군요.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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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8, 2007
*.181.161.203

살군 님,
인간론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신앙과
하나님의 창조과 구원 사건에 의존해 있는 신앙을
선명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건 살군 님이 잘 설명했습니다.
자기 확신에 빠져 있는 믿음이 부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지요?
바리새인들의 업적의는 부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그들도 나름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기본적으로 자기신뢰이며, 자기집착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믿음이 부정되어야 하는지 아닌지는 끊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신앙이 그들의 영성을 심화하지 못한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겠군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론적 통치 사건에 의존하는 믿음은
자신을 믿음 조차 상대화합니다.
자기의 존재 자체를 그 사건에 의존시킵니다.
철저하게 자신이 낮아지는 겁니다.
저는 이 설교에서 두 가지 믿음을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상태였든지 중요한 건 믿음의 토대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는 사실이라는 거지요.
그건 오늘 한국교회에서 지나치게 '믿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염려에서 나왔습니다.
믿음 만능론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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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8, 2007
*.181.161.203

예랑 님,
짚어 주신 그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조용기 목사님 류의 신앙은 신학이라기보다 인간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처세술에 의지하는 거지요.
그런 방식으로라도 신자들이 은혜와 위로를 얻으면 괜찮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천지면 어떻고, 정명석이라면 어떻고, 박태선이나 문선명이면 어떻겠습니까.
그들도 모두 믿음을 강조하고
나름대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는데요.
인간론으로부터 신론으로 전적인 방향 전환,
이것이 바로 회심(메타노이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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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

August 28, 2007
*.221.66.21

정 목사님. 언제나 친절한 눈높이 해설과 격려를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서의 관념적인 세계를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그렇네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생명', '영생' 그리고 '하나님 나라', 그 실체를 알고(경험하고) 싶네요. 어쩌면 제가 이미 경험하고 있지만, 제가 설명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또는 우리 설교자들은 모두 그것을 경험하고 말하고 있지만, 아직 "온전한 것"이 오지 못했으므로 "부분적인 것"에 머무르거나 왜곡하는 우를 범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세계에 빠져보렵니다.
profile

[레벨:28]첫날처럼

August 28, 2007
*.211.211.129

골로새서 3장 3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네요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 분과 함께 영광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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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August 28, 2007
*.247.251.62

정목사님 설교 은혜롭게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좋은 글 써 주시는 도루박님의 글도 잘 읽었습니다.

저도 굳이 구분한다면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릭워렌 이나 조용기 목사님이나 로보트 슐러 같은 분들을 평가하는
시각은 도루박님과는 사뭇 다릅니다..

특이 "목적이 이끄는 삶"은 극단적으로 반 기독교 적이라 생각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비평이 매우 탁월하며 공감가는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읽어 보셨을지 모릅 니다만. 시간내어
한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선 님의 글에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서 청지기역할 하겠다는
삶의 태도가 왜 비난받아야하지요? "

라고 질문하고 계시는데 ..

도루박님 성경 어디에 열심히 일하여 돈 많이 벌어 청기기 역활을
하라는 삶의 태도를 가르치고 있습니까? 궁금 하군요..ㅎㅎ

혹시 그런 가르침을 추측 할만한 성경구절이라고 있는지 ^^
제가 아는 성경은 오히려 그반대되는 삶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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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

August 28, 2007
*.74.0.52

첫날처럼 님
적절한 말씀을 제시해주셨네요. 묵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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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8, 2007
*.181.51.23

그렇군요.
첫날처럼 님이 중요한 성구를 인용하셨네요.
제가 성서학자라면 학생들에게 이런 텀페이퍼 숙제를 내겠습니다.
골 3:3,4절을 A4용지 10매로 주석하시오.
이 구절에 초기 기독교의 모든 신앙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2천년전 그 당시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똑같은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단지 종교적인 수사가 아니라
이 세계를 뚫어본 어느 영성가의 정확한 세계해석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 분과 함께 영광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참 생명, 그리스도, 하나님 안, 은폐,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영광...
도대체 하나님 안에 숨어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런 걸 추상적인 것으로 느끼는 분이 있다면
그는 아직 기독교 신앙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비아의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이런 성성의 실체 안으로 들어가려는 지성적인 노력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성은 곧 영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차원의 우리의 인식론적 노력을 말합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자 19명의 석방이 타결되었다고 하는군요.
참 잘 되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도 좋겠지요.
노무현 정부에서도 지혜롭게 잘 했구요,
한국교회도 이번만큼은 자충수를 두지 않고
잘 참은 것 같습니다.
아직 돌아오는 일이 남았지만 그건 시간 문제이겠지요.
모두들 편안하게 주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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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

August 30, 2007
*.74.0.52

저도 그 숙제 하고 싶네요. 학교 다닐 땐, 숙제를 위한 숙제를 할때가 많았던 것 같은데, 정작 졸업하고 나서는 목마름으로 공부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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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모닝커피

September 09, 2007
*.131.234.17

금년의 가장 큰 사건은 설교비평을 통해 정목사님을 알게된 것입니다.
멀다면 먼 뉴욕에서 다비야를 통해 늘 목사님을 뵐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자 위로입니다.
흥행사들 처럼 하지 못해 늘 전전긍긍하다가 차라리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과히 나쁘지 않다는 것을 설교비평,
그리고 다비야를 통해 알게된 수확입니다.
우리 와이프가 목사님 설교를 들으며 말합니다. "와 정목사님 설교 너무 좋다고"
큰일 났습니다. 이제 우리 와이프가 내 설교는 잘 안들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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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모닝커피

September 09, 2007
*.131.234.17

인사를 먼저 드려야 하는데........ 목사님!안녕하세요.
뉴욕에서 목회하고 있는 이 수영 입니다. 괞찮으시다면 자주 들르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9, 2007
*.181.51.23

모닝커피 목사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뉴욕에 계시는군요.
그쪽은 지금 시간이 토요일 밤이 되겠군요.
저의 설교비평 책을 좋게 평가해주시는 분들은 가끔 만났지만,
제 설교를 듣고 좋다고 하는 분은 별로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처음인 것 같습니다.
덕담으로 알고 감사드립니다.
다비아가 목사님에게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자주 들리세요.
좋은 말씀도 주시구요.
연배도 저와 비슷하시군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이수영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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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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