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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안식일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974 추천 수 81 2007.09.02 16: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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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이사야 58:9-14 
mms://wm-001.cafe24.com/dbia/070902.mp3정의로운 안식일
2007.09.02. 이사야 58:9-14

기원전 537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해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해입니다. 그들은 대략 50년 정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된 뒤에 이스라엘의 귀족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갔고, 나머지 민중들은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라가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똑같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크게 달랐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여전히 그 땅에 머물러 있던 민중들은 물심양면에서 크게 고통을 당한 반면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귀족들은 다니엘의 경우에서 보듯이 비교적 넉넉하고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쪽에 속했든지 나라 없이 살았다는 점에서 지난 50년은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근동 지역의 패권을 새롭게 쥐게 된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칙령에 따라서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1945년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내파와 국외파 가리지 않고 모두가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포로 귀환 이후에 이스라엘은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손질하는 등, 야훼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520년에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은 51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달라진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활동하던 말라기 예언자는 그 시대가 아주 무질서했다고 지적합니다.  

금식과 정의
오늘 본문을 기록한 제3 이사야의 눈에도 그 당시의 사회가 그렇게 비쳤습니다. 그는 부패한 사회 문제를 단식과 연결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의 바로 앞 단락인 사 58:1-8절에서 그 당시에 단식이 얼마나 무의미하게 실행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참된 단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식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면서 중요한 경건 의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그 고통을 금식에서 찾은 것이지요. 포로기가 끝난 뒤에도 그런 전통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여기서 단식, 즉 금식은 단지 끼니를 거르는 것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모든 종교적인 경건생활을 가리킵니다. 예배, 기도, 말씀읽기 등등, 이런 경건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며, 형식입니다. 이런 경건생활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신앙의 스승이 되었던 분들 중에서 이런 경건생활을 소홀하게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흡사 음악가가 평소에 음악을 듣고 연습해야만 음악적인 감수성을 놓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조용필 씨가 언젠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루라도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음감이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경건생활은 영적 감수성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문제는 이런 경건생활이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의 금식은 두 가지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금식하는 자신들 중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금식의 날에 돈벌이나 오락을 즐기면서 금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따위 금식을 집어치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금식을 반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금식하는 사람의 모양을 이렇게 빗대서 말합니다. “머리를 갈대같이 구푸리기나 하고 굵은 베를 두르고, 재를 깔고 눕기나 하면 그것으로 다 될 듯싶으냐?”(5b절) 이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입니다. 겉으로 슬픈 체하고, 경건한 척하는 금식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그런 것과 전혀 다르다고 합니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어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사 58:6,7절) 10절에서도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자에게 나눠주고 쪼들린 자의 배를 채워준다면, 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 오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전혀 차원을 달리 하는 금식을 가르칩니다. 경건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 내용을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과 압제받는 사람들, 그리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언급하는 이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그런대로 편안하게 살던 이스라엘의 귀족들이 아니라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고국에서 고난 받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시대에서나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포로시대에나 포로귀환 이후의 시대에나 그들의 형편은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자유와 해방의 날은 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소외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들을 사람대접하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는 참된 경건생활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저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웬만큼 생각이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정의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랄 겁니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악한 힘들이 제압되기를 바랄 겁니다. 이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며 실천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가 매우 무능력하다는 자조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억울하게 묶인 사람을 풀어주거나 압제받는 사람을 석방하고, 나의 먹을 걸 굶주리는 사람과 나누며 살지 못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조금씩 그런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성서가 말하는 정도까지 자기를 부정하면서 남을 돕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티브이나 신문에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의 기사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을 못 받는 사람들이나 쪽방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조금씩 힘을 모울 수는 있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내놓지는 못합니다. 그런 도움의 손길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에 넘쳐납니다. 이런 일에 무작정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적당하게 외면하는 게 옳은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은 한편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넘쳐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우리 개인이 무능력하다는 사실 앞에서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딘가 잘못된 것일까요?
이사야의 말씀을 다시 봅시다. 그는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고, 떠도는 사람을 집에 맞아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하게, 그리고 도전적으로 선포합니다. 우리의 신앙 양심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바벨론 포로 이후 새로운 상황을 맞았습니다. 율법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시행규칙도 손질해야 합니다. 사회제도를 혁신해야 할 때입니다. 어떤 제도를 도입하는가, 어떤 방향으로 개혁해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억울하게 묶여있는 사람들을 풀어내주는 법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생존이 보장되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지금 포로귀환 이후 지지부진한 사회개혁을 강력한 목소리로 외치는 중입니다. 정의로운 질서를 요구합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오늘 억울하게 묶인 사람들은 누굽니까? 얼마 전에 인혁당 사건에 관계된 분들이 국가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 선고공판에서 원고 승소판결이 내렸습니다. 각각 해당 가족에게 국가는 수십억 원의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는 판결이었습니다. 오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한, 또한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줄여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세제개혁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청소년들은 입시라는 멍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멍에를 수부기 위해서 순전히 경쟁력 중심으로 작동되는 한국사회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패러다임은 가난한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입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정의와 평화가 더 높은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게 말은 좋지만 어떻게 실천할 수 있냐,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겁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돈에만 치우쳐서 살아가고 있는 마당에 정의와 평화가 무슨 설득력이 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기업만이 아니라 대학마저도 앵무새처럼 경쟁력만, 즉 돈만 외치고 있는 실정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러시아계 한국인으로 현재 오슬로 대학교 교수로 가 있는 박노자 선생은 <창비> 2007년 가을호에 “한국 대학사회의 슬픈 단상들”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사립대학교 당국과 교수, 대학생 모두가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었다는 그의 지적은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한 대목만 인용하겠습니다.
“2007년 5월에는 아예 대학재단들의 제2금융권(펀드 등) 투자와 대학이 보유한 부동산의 상업적 임대를 허용하는 방침이 발표되어 캠퍼스 백화점이 건설되는 상황까지 임박했다. 사립대 재단들은 그들대로 지금 돈을 쌓아두었다가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 쓰려고만 할 뿐 학교에 대한 예산 지원에 매우 소극적이며, 정부는 정부대로 고등교육 예산을 크게 늘리지 않은 채 사립대단들의 ‘돈 쌓아두기’와 투자열풍에 대한 행정적 지원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교회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교회가 이런 일에 먼저 발 벗고 나섰는지도 모릅니다. 한국 전체 교회의 30%가 미자립인데도 불구하고 교인이 모이는 교회는 수백억 원짜리 교회당을 짓는다거나 다른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야 한다는 이사야의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대형교회는 우선 미 자립교회의 생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요즘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로 크게 부각된 사실이지만, 2007년 현재 한국교회는 1만 6천명 이상의 해외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라고 합니다. 만약 해외로 나가는 이런 선교비를 절반으로 줄이기만 한다면 미자립교회 문제를 상당한 정도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게 다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원칙적으로만 보면 국내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우선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보다는 돈벌이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속적인 시류에 영합하는 게 아닐는지요.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성서말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돈벌이와 안식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돈벌이보다 정의와 평화가 중요하다는 성서의 가르침이 원칙적으로 옳지만, 그것의 실천은 현실적으로 쉽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개인의 양심이 선하고 정의롭다고 하더라도 사회가 변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라인홀드 니이버가 이미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지적했듯이 그 이유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좋은 제도가 필요합니다. 학생들도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게 능률이 더 오릅니다. 도서관이라는 제도가 뒷받침해줍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곧 율법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율법 중의 하나가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7일째 쉬셨다는 의미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도입된 안식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 제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일이 시대에 따라서 오용되는 일이 많았고, 유명무실해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런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거룩한 날에 돈벌이하느라고 안식일을 짓밟지 마라.”(13a절) 포로귀환 이후의 이스라엘은, 특히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돈벌이 때문에 안식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태도를 경고합니다. 그 날을 존중해서 여행도 하지 말고, 돈벌이도 말고 상담 같은 것도 하지 말라고 선언합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이사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식일을, 우리의 경우로 한다면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은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자 바리새인들이 불평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사야는 돈벌이에 취해서 살아가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서 경고하는 중입니다. 이 메시지에서는 안식일이 아니라 돈벌이가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돈벌이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이 망하는 법은 없지만 돈벌이에 자기 영혼을 파는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이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외면하게 됩니다. 그런 사회는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돈과 사회적 지위로만 평가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안식일이라는 최소한의 제도까지 부정하면서 돈벌이에 나섭니다. 그런 사회는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게 바로 예언자들이 말하려는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까지 안식일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안식일에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을 받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해야겠지요. 이를 위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각자 살아가는 자리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돈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더 궁극적으로 그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정의와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정의로운 안식일을 향해서 한걸음씩 앞으로 나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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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사오정

September 02, 2007
*.74.17.7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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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푸른솔

September 03, 2007
*.63.146.9

목사님께 먼저 감사 드립니다.
말씀 본문들과 성경 테마들에 대한 명쾌 선명한 지적들과 통찰력에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목사님이 7월에 하신 “하나님과 계명” 과 그리고 9월에 하신 “정의로운 안식일” 를 읽고 넓게는 율법(계명) 개념, 작게는 안식일 개념을 정립함에 있어서 도움 받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몇자 적어 봅니다. 지금도 초교파 신문 싸이트인 http://allthatnews.co.kr/에서 안식일 주일 논쟁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진부하고 해묵은 논쟁였잖아요?
목사님의 이번 두 설교에서 계명의 성격과 의미와 계명 지킴의 본질을 지적을 해 주셨는데 다음 개념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목사님의 열린 사고의 글들을 읽어 온 제가 계명을 단세포적으로 구원용으로나 혹은 구원 유지용으로도 여기지 않고 문자를 절대화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일반적으로 십계명을 비롯해서 모세오경에 기록된 모든 가르침”을 의미 하신다고 하면서 계명은 상황과 시대에 따라 꾸준히 변해 왔으며 그 때마다 나름대로 다르게 제시된 계명과 하나님과 일치되었다고 언명할 수 있는 계명들을 지켜야 하며 또 지킬 수 있다류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변화의 예로서 삼겹살과 여자 목사 예를 드셨는데 -
이런 예들의 변화를 놓고 - 도덕법인 십계명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도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아예 둘째 계명을 없애 버리고 안식일은 주일로 바꾸고 아홉째 계명을 둘로 나눠 열 개 구색을 갖춘 것으로 아닙다만 이래도 괞찬은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인간이란 존재는 형태와 형식이 너무나 자주 그만 두꺼운 껍질이 되어 첨과는 달리 얼마 안가 얼마든지 왜곡되는지 그 질곡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본질을 담고 있는 형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눈금을 가늠하는 형식들이 필요하다는 말은 참으로 동감 합니다. 후라이 할 때 계란 껍질은 다 버리지만 껍데기 없이 어찌 날 계란을 부패로부터 방지하고 운반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처럼 어떤 땐 형식을 깨면 즉시 본질 자체에 심한 왜곡이 와버리는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목사님이 예로 든 딸이 11에게 집으로 컴백 못할 수도 있지만 엄마의 컴백 명령 자체를 팍 무시하고서 엄마 사랑이 성립되지 않듯이 십계명과 안식일을 다 지킬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을 사람이 임으로 바꾸거나 무시하면서 “하나님 사랑”은 난센스 이렇게 도식이 그려질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께서도 가장 핵심적인 율법 중의 하나가 안식일이라 하셨는데 -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도덕법 십계명도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이런 개념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네요. 그리고 역사적으로 일요일이 공휴일 된 것이 먼저 인지 - 안식일이 주일로 된 것이 먼저인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 이런 것에 대한 글을 접하신 적이 있는지요.

안식일 주일 문제는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수도 있는데 - 실천적인 부분에 들어가서... 겉으로 보이는 예배일을 달리하면 한국적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엄청나게 다르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이라서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는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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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September 04, 2007
*.109.122.27

좋은 설교 말씀 잘 읽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이라도 올바른 금식의 의미를 실천하는 삶을 가르치고
배웠으면 합니다..

얼마전 저희교회(성도 10명에서 잘 늘어나지 않는 미자립교회 입니다)
목사님이 본 설교에 포함된 본문으로 참된 금식이란 제목으로 10분 설교
했었는데 그리 깊이있는 설교는 아니었지만 참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www.ean.or.kr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4, 2007
*.181.51.23

푸른솔 목사님,
안녕하세요?
우선 저의 설교를 꼼꼼이 읽어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설교에서 강조하는 부분들이 목사님의 생각과 통하는 게 있는가 봅니다.
이미 생각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리도 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더 설명해봐야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물으셨으니까 조금 말해 보겠습니다.
질문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군요.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도 변화가 가능한가?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는 무엇인가?
보기에 따라서 한 가지 질문이 되는군요.
로마 가톨릭과 우리의 십계명이 약간 다르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게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잘못 되었고, 우리는 옳다고 말할 성질의 것을 아닌 것 같군요.
십계명은 바벨론의 하무라비 법적이 있듯이
고대 유대인들의 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명령이었지요.
그런데요.
여기서 중요한 건 하나님의 법, 또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게
그렇게 실증적인 성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언자들의 신탁도 마찬가지구요.
오히려 역사적 해석이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그것이 역사적 해석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오늘 우리도 역시 해석을 해야겠지요.
예컨대 "부모를 공경하라."를 절대적인 계명으로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부모를 버리라고까지 말씀하셨거든요.
간음하지 말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것도 이미 간음한 거라고 해석하셨습니다.
특히 안식일이 문제군요.
고대 유대인들에게 왜 안식일 제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 신학사적 배경을 이 자리에서 모두 말할 수는 없겠지요.
아마 다른 글에 나올 겁니다.
<기독교를 말한다.>에도 설명이 있을 거구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노동의 문제입니다.
칼 마르크스의 노동의 해방과 안식일 개념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제사를 드린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과
고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를 제사행위 쪽으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초기 기독교가 지금의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건 상당히 세월이 흐른 뒤입니다.
로마 문명에 깊숙이 들어간 다음이지요.
어쨌든지 율법은 우리가 최선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점에서
소홀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손 쉽게 변형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
즉 노동, 결혼, 자유, 평화 들을 파괴하는 경우는 생각을 달리해야겠지요.
율법을 어느 정도나 보수 유지하고,
어느 경계에서 변형시킬 수 있는지는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꾸준하게 신학적 성찰을 해야겠지요.
성서와 지난 2천년 교회 역사에 근거해서,
그리고 오늘의 삶의 흔적에 대한 공부라 할 인문학적 바탕에서
통합적으로 생각해야겠지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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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September 05, 2007
*.211.211.46

목사님 설교의 연장 선상에서 기독교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대선입니다... 이런 저런 후보들이 난립하고 있는데요... 기독교계에서는 노골적인 편들기를 하고 있는데 그 핵심 내용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대통령" 이라고 합니다만 너무 표면적으로만 접근한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일수록 내용적으로 냉철하게 접근할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세상 속에서 하나님 뜻을 내용적으로 가장 잘 수행해낼 수 있는" 그런 지도자에게 표를 던지는 것... 그 것이야말로 물고기 둘 떡 다섯개를 바침으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의 씨앗이 된 그 소년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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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요한

September 07, 2007
*.142.49.29

얼마 전 성공회 교회의 1독서 본문이 이사야 58장이었고
복음본문이 누가복음 13장과 14장에 나오는 안식에 병자를 고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목사님의 말씀이 더욱 명쾌하고 은혜롭게 들입니다.

이사야 58장을 묵상중에 물댄동산이라는 노래를 만들었지요.

그래서 음반에 녹음을 해서 올렸습니다.

목사님의 글에 배경 음악이 되면 좋겠다 생각되어 .....

네가 주의 말씀을 지켜 행하고 주님의 공의를 드러내면
여호와께서 너를 항상 인도해 주시리니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만드시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같을 것이라
물댄 동산 마르지 않는 샘

음반이 나오고 나면 배경 음악으로 넣어 보겠습니다.

목사님 허락하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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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성령강림절 말의 주체, 말의 능력 [10] 2009-08-24 14082
341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79
340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8169
339 성령강림절 믿는 자는 성전이다 [13] 2009-08-03 13359
338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8337
337 성령강림절 승리주의를 넘어 생명으로 [20] 2009-07-20 12989
33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9579
335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18] 2009-07-06 14670
334 성령강림절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다 [24] 2009-06-29 15098
33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구원 섭리 [33] 2009-06-22 16133
332 성령강림절 생명의 날 [17] 2009-06-15 13510
331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7] 2009-06-08 16690
330 성령강림절 성령의 중보기도 [21] 2009-06-01 15320
329 부활절 그리스도인의 이중 실존 [8] 2009-05-25 15274
328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809
327 부활절 ‘여호와 이레’의 믿음 [23] [39] 2009-05-11 25256
326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311
325 부활절 죽임, 살림, 증인 [25] 2009-04-27 16212
324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871
323 부활절 죽음을 무너뜨리리라! [7] 2009-04-13 13270
322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363
321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808
320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25
319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862
31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370
317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6829
316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852
315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57
314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16
313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1946
312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05
311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21
310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883
309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406
308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720
307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264
306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797
305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1650
304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109
303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034
302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695
301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57
300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40
29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568
298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472
297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09
296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488
295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02
294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05
293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41
292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485
291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74
290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28
289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30
288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54
28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46
286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08
285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33
28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08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48
282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25
281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890
280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00
279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292
278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10
27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68
276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10
275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31
274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790
273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47
272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565
271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643
270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245
269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22
268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49
267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678
266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1994
265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44
264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464
263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55
262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53
261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796
260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44
259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57
258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15
257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43
256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12
255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35
254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284
253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59
252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245
251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261
250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161
249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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