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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기타 조회 수 12760 추천 수 42 2004.08.08 14:29:33
성경본문 : 누가복음 11:5-13 
2004. 8.8.                         기도란 무엇인가?
눅 11:5-13

기도 현상의 양면성
저는 젊은 시절을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신앙형태라 할 수 있는 열광주의 분위기에서 보냈습니다. 열광주의의 특징은 예배를 자주, 그리고 뜨겁게 드린다거나 전도를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에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기도를 어떻게 드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경주 감리교회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는데, 그 교회는 학생들이 방언 기도를 할 정도로 열광적인 신앙 형식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신학대학교에 다닐 때도 가끔 친구들과 기도원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에 자리잡고 있는 이런 기도의 열정은 지금도 여전할 겁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매일 새벽 기도회만이 아니라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철야기도회나 또는 심야기도회 모임을 갖습니다. 여선교회나 남선교회도 자체적으로 기도회 모임을 교회 안이나 교회 밖 기도원에서 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국회나 어떤 기독교 단체에서 주기적으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 정도니까 우리의 신앙적 특징을 알만 합니다. 이런 기도의 형식적인 모임이 많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기도와 결부시키는 우리 신앙의 내면적 의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이나 교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지요”라든가, 좀 좋은 일이 생기면 “기도가 많아서 그렇지요” 하면서 일종의 기도만능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기도 생활과 연관해서 우리에게 있는 또 하나의 현상은 기도 무용론입니다. 주로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기도 무용론은 앞에서 설명한 기도 만능주의에 맞서 있는 또 하나의 극단입니다. 이 기도 무용론도 관점에 따라서 좀 구별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 그대로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자만심에 빠져서 기도를 전혀 드리지 않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자만하지는 않지만 기도를 드리거나 드리지 않거나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데 굳이 기도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기도 만능주의와 기도 무용론이라는 양극단의 싸움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기도 만능주의자들은 상대방을 기도도 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기도 무용론자들도 상대방을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신앙이라고 무시합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도를 자녀와 부모의 대화로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부모에게 많은 것을 적극적으로 조르는 자녀들이 있고, 알아서 해 주겠지 하고 마음을 놓고 있는 자녀들이 있는데 어느 쪽이 무조건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뒤로 미루어놓고 우선 “기도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봅시다. 기도의 본질을 알아야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기도에 대한 가르침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2-4절은 우리가 매주일 예배 시에 함께 드리는 ‘주기도’입니다. 마태복음(6:9-13)에 비해서 약간 짧습니다만 기본 틀은 똑같습니다. 누가는 ‘주기도’에 이어서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5-8절에 소개된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있고, 9-13절의 경구들은 마태복음(7:7-11)에도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많은 경우에 오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내가 이해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제가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적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제 신앙이나 삶의 경향에 잘 맞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가능한대로 저의 선입관을 버리고, 그게 가능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위에서 간략히 말씀드린 대로 두 단락으로 구별됩니다. 5-8절에 나오는 비유와 9-13절에 나오는 경구입니다. 먼저 5-8절을 보겠습니다. 늦은 밤 어떤 사람에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 손님은 더운 낮을 피해 밤에 먼 여행을 하다가 친구 집에 들렸습니다. 친구 손님을 갑자기 맞은 이 사람은 먹을거리가 없어서 이웃에 사는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가서 사정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귀찮게 굴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7절). 빵 몇 덩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고 해서 이 사람을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불을 밝히기도 힘들고 그 어두운 시간에 잠가둔 문고리를 여는 일도 만만치 않거니와 더구나 가족들이 같은 방에서 잤기 때문에 식구들이 잠을 깰 수도 있기 때문에 친구의 요청을 받아주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이렇게 결론 맺으십니다. 우정만으로는 빵을 내줄 수 없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결국 그 청을 들어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비유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눅 18:1-8) 비유와 비슷합니다. 원칙적으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귀찮게 굴면 해결된다는 논리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누가는 이 비유에 이어서 이 비유의 해석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경구를 제시합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9절). 교회에 다니는 사람 치고 이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기독교인의 영적인 태도를 이 구절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두드리기 전에 이미 열어줄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11, 12절 말씀도 마저 읽어볼까요?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자식이 원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을 주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이 사실보다 우리를 더 위로해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좋은 부모가 있는 것만 해도 우리의 마음이 뿌듯한데 창조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주신 이 말씀은 옳습니다. 특히 하나님에게 절실한 마음을 갖는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는 점에서 귀찮을 정도로 하나님께 구한다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기독교 신앙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보는 생물학자의 마음처럼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냉정한 상태이어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어두는 결단이기 때문에 불의한 재판관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밤중이라도 이웃 친구를 찾아가 빵을 달라고 할 수 있는 심정과 태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기도는 바로 절대적인 하나님과의 만남과 그 관계라는 점에서 우리의 모든 일상과 상식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욕망의 성취?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토대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조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는 속담이 여기에 해당될까요? 그러나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해명하고 있는 이 말씀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말씀으로 오용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에게는 이 말씀에 대한 오용의 뿌리가 깊은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는 내용이 결국 자신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교회당을 달라거나 빈자리를 채워달라거나 수능시험의 높은 점수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면서 상대방을 원수 마귀로 단죄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물론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소외된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이 생태계의 회복을 위해서,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도 많지만 일반적으로는 자기를 성취하는 일에 빠져버린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은 과연 철없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용돈 달라는 식의 기도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걸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걸 의미하는 걸까요?
저는 이런 대목에서 약간 주저하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적당한 일자리를 위해서, 건강과 물질적인 넉넉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일상적인 삶의 행복한 조건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자식들이 수능시험을 잘 치르게 해달라는 것도 역시 나쁜 기도는 아니겠지요. 사업의 번창을 위한 기도도 필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아마 이라크 전쟁을 위해서 떠난 미군들을 위해서 미군 군목들이 기도했을 것이며, 얼마 전에 이라크로 떠난 우리 군인들을 위해서도 역시 우리 군목들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 부시도 역시 기도했겠지요. 기업가가 많이 나오는 교회의 목사들은 주일마다 그 사업가와 사업을 위해 기도할 겁니다. 비록 그 기업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교묘하게 착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조금 노골적으로 기도를 하는 교회에서는 “우리 교회에 십일조 헌금 1천만 할 수 있는 사업가가 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까지 합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일상의 과정을 하나님께 맡길 뿐만 아니라 그런 준비를 위해서 기도해야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지나쳐서 우리의 욕망의 충족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 사이의 긴장 말입니다. 우리가 대개의 사이비 종교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가 이렇게 인간의 욕망과 결탁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조희성이라는 사람이 교주였던 영생교는 영생마저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했고, 일련정종은 주문을 외움으로써 소원성취 된다는 식으로 신자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우상숭배으로 배척되고 있는 모든 종교현상은 물질적인 풍요와 후손의 번식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유대인들의 신앙은 비록 그런 물질적인 풍요가 후손의 번창이 중요한 요소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결과에 불과했고 궁극적으로는 야훼 하나님에게 모든 생존의 토대를 두었습니다.

기도의 영성
다시 한번 더 질문합시다.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기도하는 게 바람직할까요? 어떤 기도가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고 어떤 기도가 이 땅에서 최소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소박한 기도인지 우리가 판단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대략적인 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대략 감이 잡히지만 모든 문제가 그렇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무엇이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런 문제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은밀한 세계이겠지요.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을 우리의 끈질기고 무조건적인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참으로 곤란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철부지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조르라는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누가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13절). 마태복음에는 ‘성령’이 빠지고 좋은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마 7:11). 마태복음은 단지 좋은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반해서 누가복음이 ‘성령’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여기서 밝히기는 힘들기도 하고, 그렇게 중요한 요소도 아닙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를 놓칠 수도 있고, 또는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에는 없었지만 첨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같이 견주어서 생각해볼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게 바로 신앙이고, 이런 인식이 있을 때만 우리는 정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숨쉬기 귀찮다고 숨을 멈추는 사람이 없듯이 기도하기 귀찮다고 기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숨을 쉬듯이 우리는 죽을 때까지 기도하며 삽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영적인 호흡을 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인 호흡을 그치지 않으려면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인식해야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분과 영적인 호흡을 그칠 수 있을까요? 그만 두라고 해도 그만 둘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삶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기도는 이 사실을 우리 삶의 토대로 삼고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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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angelleaf

November 13, 2007
*.228.66.190

저도 모르게 글에 빠져버리고 말았네요..ㅋㅋ

아직 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는 듯 하네요..ㅎ

요즘 기도를 잘 안해서요^^;;

제가 원하는 것은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셨는데

그런 경험에 한번 데여보고 싶네요..ㅋㅋ

물론 안데여보고 깨닫게된다면 복되겠지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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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November 13, 2007
*.167.175.60

최근 댓글이기에 들어 왔는데 기도에 대한 정 목사님의 설교군요.

저희 교회에서는 두 주일동안(주일 빼교) 특별새벽기도회를 갖고 있는데
매일 다른 이웃 교회 목회자들이 말씀을 주십니다.
특히 어제 들었던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이웃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현재의 내 모습 속에 있는
잘못된 것들--흔히 말하는 죄성들--을 찾아내는 현미경과 같다"는 말씀이 참 가슴에 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이 내용으로 말씀하신 분들이 대다수여서 좀 그렇지만
그래도 좋은 시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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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062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626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041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798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06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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