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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훼다, 2월27일

기타 조회 수 8920 추천 수 67 2005.02.27 23:56:48
성경본문 : 출애굽기 6:2-8 
2005.2.27.          
출 6:2-8

나는 야훼다

모세의 소명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는 오늘 본문이 처음이 아니라 이미 3장에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과 6장의 이야기가 비록 다른 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우선 다른 점은 이 이야기의 시점입니다. 3장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를 하나님이 처음으로 부른 이야기이지만, 6장은 이미 부르심에 응답한 모세가 바로와 담판을 지으려다가 실패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3장의 모세는 일상에 머물러 있었던 데 반해서 6장의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었습니다. 그런데 3장의 경우나 6장의 경우 모두 모세가 정신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3장의 모세는 자신의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일개 목자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성서가 그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 별로 언급을 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에 모세의 심정이 어땠을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유대인이었지만 이집트의 왕자로 자란 모세가 마흔 살에 망명길에 올라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보낸 40년은 절망과 좌절, 분노와 자책의 시절이었을 겁니다. 자기 민족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모세가 제 할 일을 찾지 못하고 단지 생존에 급급하고 있었다는 건 그만큼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다른 한편, 그가 호렙산에서 불붙는 가시떨기를 발견했다는 건 단지 목자로서의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정신적 어려움 가운데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관심의 결과일지 모릅니다. 일종의 구도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만이, 물론 겉으로는 이런 모습이 크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서 이집트로 돌아와 이제 형 아론과 함께 바로를 찾아갑니다. 자기 민족들과 함께 사흘 동안 광야로 나가 하나님 야훼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요청했습니다. 바로는 이들의 의도를 꿰뚫어보고, 그들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노동조건을 훨씬 열악하게 만들었습니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대표자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했습니다. 이런 곤란한 상황 앞에서 모세는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민족들이 힘을 보태주어도 어려운 싸움인데 초장부터 자기들끼리 분열되고 있으니 모세의 심정이 어땠을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호렙산의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서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모세도 마음만 간절하지 현실의 벽 앞에서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5장22절이 그 내용입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이렇듯이 괴롭히십니까? 왜 저를 이리로 보냈습니까? 제가 파라오를 찾아 가 당신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 이 백성은 더욱 들볶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건져 줄 기미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이 호소를 들으신 하나님은 6장1절에서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비교적 많은 분량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런 진술들은 모세의 일대기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훨씬 정확하게 인식해나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무슨 대답을 주셨습니까?

엘샤다이에서 야훼로!
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야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의 신으로 나를 드러낸 일은 있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린 일은 없었다.” 6절 말씀도 역시 “나는 야훼다”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야훼로 알리신 첫 사건이 바로 이 말씀에 있습니다. 물론 창세기에도 하나님을 야훼라고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이미 야훼라는 명칭을 알게 된 후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뿐이고 실제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야훼로 알리신 것은 이번 처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는 자신을 ‘엘샤다이’, 즉 전능의 신으로 계시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엘샤다이에서 야훼로 자신을 나타내심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훨씬 잘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행위를 계시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우리는 하나님을 처음부터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니라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차츰 깊이 알아간다는 뜻입니다. 엘샤다이에서 야훼로 한걸음 더 나갔듯이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훨씬 깊이, 훨씬 많이 알아가게 될 것이며,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점점 많이 인식해나가는 우리의 영적인 활동을 가리켜서 ‘영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야훼다”라는 이 명제는 출 3장에서 모세가 처음으로 소명을 받은 호렙산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집트의 유대인들에게 돌아가 그들을 가나안으로 끌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세는 그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누구라고 말해야 합니까?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서로 통할만한 내용이 없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곧 나다.”(출 3:13).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는 건 곧 그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같습니다. 나무는 나무의 정체성을 갖고 있고, 돌은 돌의 정체성을 갖고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세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나는 곧 나다.”(I am that I am.). 이 말은 곧 이름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론적 개념으로 범주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약간 신학적으로 설명한다면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질문하고, 그분이 대답하고, 혹은 그분이 말을 걸어오고 우리가 응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이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그 어떤 이름으로 제한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나는 곧 나다”라고 말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장에서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신 하나님이 이제 6장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대답을 주십니다. “나는 야훼다.” 엘로힘, 엘샤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그 하나님이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야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추상적이었던 하나님 개념이 야훼라는 이름으로 훨씬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또 다른 것으로 불려지게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에 따라서 변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인식론이 변합니다.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흡사 신생아가 어머니를 인식해나가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눈도 뜨지 못하지만 어머니 품에서 젖을 빨고 있는 신생아는 아직 어머니를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어머니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 아이가 어머니를 점점 다르게, 깊이 인식해간다고 해서 어머니가 변하는 건 아닙니다. “나는 곧 나다”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이 이제 “나는 야훼다”로 표현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이 변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과정에서 하나님이 훨씬 구체적으로 인식되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
야훼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근본적으로 출애굽 사건과 연관됩니다. 오늘 본문 전체가 바로 이 사실을 해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이 이집트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집트에서 혹사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은 이 약속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야훼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이르기를 이 민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빼내고 그 고역에서 건져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b절은 이렇습니다. “나의 팔을 펴서 무서운 심판을 내려 너희를 구해 내리라.” 야훼라는 이름은 곧 역사적 구원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구약성서의 민족이라 할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경험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실존이라든지, 우주의 신비에서도 하나님을 인식했지만 핵심적으로 오늘 본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같은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늘 생존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재위하던 짧은 시절을 제외하면 약소국으로서 거의 식민통치만을 받아온 그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역사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에 간섭하시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과정의 한 대목, 아니 거의 결정적인 대목입니다.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소수민족으로서 거의 노예처럼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희망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구원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를 중심으로 한 영적인 지도자들은 현실에서 우왕좌왕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도록 끌어가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늘 모세의 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역사 경험을 통해서 결국 그들은 모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들의 후손들은 이런 모세와 조상들의 이야기를 민담의 형식으로 보존하고 지켜나갔습니다. 상당히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런 민담이 문자로 기록되고 신앙적 의미가 보충되었습니다. 야훼는 곧 자기들의 조상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킨 분이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이름이 곧 야훼였습니다.
오늘의 출애굽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역사적 구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오늘 어떤 방식으로 출애굽을 성취하십니까? 종살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품위가 상실되는 삶입니다. 만약 오늘의 물질문명이 우리를 노예로 삼는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악한 힘입니다. 이런 악한 힘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특히 옛날에 비해서 훨씬 구조적인 틀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은 이런 악한 힘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3천5백년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겪었던 그런 억압적 삶이 오늘도 여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야훼’이십니다. 왜곡된 역사에서 우리를 구해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서운 심판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표면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구원이 별로 일어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의 이집트 같은 막강한 국가들과 기업들이 자신들의 힘을 더욱 크게 확산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라크를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미국을 보면 역사는 정의롭게 흘러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전(全)지구적 자유 경쟁 구조가 뿌리를 내리면서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은 점점 요원한 것처럼 보입니다. 가난한 나라는 점점 가난해지고, 부한 나라를 점점 부자가 되는 세태 속에서 우리나라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일단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 세계 역사는 출애굽의 야훼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야훼 하나님의 약속은 3천5백 년 전에만 유효한 것이었을까요?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렇게 새겨들었습니다. “나의 팔을 펴서 무서운 심판을 내려 너희를 구해 내리라.”(6b). 출애굽의 야훼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심판은 무섭다고 했습니다. 무섭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무섭다는 건 단지 엄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심판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바로에게 임한 심판은 열 가지 재앙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재앙은 모든 이집트 가족의 장자와 짐승의 맏배가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집트를 심판하시고 그들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내셨습니다.
오늘의 역사가 화려한 듯 보일 겁니다. 힘 있는 나라와 그런 사람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그 힘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 현대인은 자기의 지성과 이성을 통해서 자연을 노예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것이 물질주의에 의한 허무주의와 우울증의 만연일지, 생태계의 대파국이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그런 역사를 그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라고 불렀으며,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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