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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세기 37: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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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ms.kehc.org/d/dabia/0807.MP3http://wms.kehc.org/d/dabia/0807.MP32005. 8.7.
창 37:12-28
요셉의 침묵
야곱의 요셉 사랑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는 4대에 걸친 이들 족장 설화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을 드라마틱하게 설명합니다. 이들 중에서 이삭의 무게는 좀 떨어지지만, 나머지는 흡사 대하소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아브라함, 20년간의 타향살이 끝에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야곱, 이집트로 팔려갔다가 결국 이집트의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른 요셉의 삶에는 각각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요셉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거주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맞닿아 있다는 점과 실제로 그 이야기를 다룬 본문의 분량이 많다는 점에서 가장 뛰어난 설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 설화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의 편애에서 시작됩니다. 야곱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느 아들보다도 더 사랑했다고(창 37:3) 창세기 기자가 설명합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옷은 왕족의 예복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요셉은 노동하지 않고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야곱에게 많은 종들이 있었겠지만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들들도 역시 노동해야만 했습니다. 자기들은 매일 양을 키우고 있는데 요셉은 예복이나 입고 앉아 있었다면 약 오르지 않을 형제들이 있었을까요? 우리 큰딸도 설거지를 시키면 왜 동생은 시키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립니다. 당연한 불평이겠지요.
그런데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정확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성서 기자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건 그렇게 정확한 이유가 아닙니다. 요셉은 야곱의 12명의 아들 중에서 열 한 번째입니다. 막내는 ‘베냐민’입니다. 요셉은 이미 그 당시에 열일곱 살이 되었습니다.(2절). 야곱이 훨씬 어린 막내아들인 베냐민을 제쳐놓고 요셉을 편애했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어머니가 라헬이기 때문일까요? 야곱에게 아들들을 낳아준 여자는 네 명입니다. 그 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한 여자는 ‘라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도 정답은 아닙니다. 베냐민의 어머니도 역시 라헬입니다. 더구나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습니다.(창 35:16-20).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죽음을 불사하고 낳은 아들이 베냐민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다른 아들보다 애착이 더 가야 할 텐데, 야곱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요셉을 편애했다고 합니다.
성서는 탐정추리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특별하게 대우했다는 사실만 언급합니다. 성서 기자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은 야곱이 왜 요셉을 편애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서를 읽는 우리도 그런 부분들은 대충 넘어가도 됩니다. 아니 대충 넘어가야만 성서의 근본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소한 사실이 훨씬 근원적인 어떤 사건으로 들어가기 위한 동기로 작용한다는 사실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게 인간 삶의 우여곡절과 그 안에 침투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가 엮어내고 있는 신비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했다는 사실은 아무런 합리적인 타당성이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결국 어떤 의미 있는 사건이 진행된다는 게 바로 성서 기자들이 성서를 기술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웅덩이에 빠진 요셉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런 의미 있는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에 대한 설명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세겜으로 양떼를 몰고 갔을 때 야곱은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업이 잘되고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흡사 어떤 무역회사 사장이 아들을 시켜서 외국 지사에 출장을 보내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목축업을 하시는 분들은 인공사료를 쓰거나 일정한 장소에서 풀을 뜯게 하지만 고대인들은 풀이 있는 곳으로 양떼를 몰고 다녔습니다. 풀도 있어야 하고 물도 적당하게 있는 곳을 찾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왜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며칠이나 걸리는 힘든 여행길입니다. 더구나 본문에 따르면 형제들이 세겜에 머물지 않고 도다인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위험한 곳을 곱게 자란, 그래서 늘 특별한 옷만 입고 자란 요셉을 보낸다는 게 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서기자는 이런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일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고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진도’를 나가는 게 현명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도 설교의 진도를 나갑시다.
결국 요셉은 물어물어 형들이 양치는 곳까지 왔습니다.(17절). 요셉이 오는 모습을 발견한 형들은 그를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습니다.(18절). 여기서부터 요셉 설화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들은 이렇게 의논했다고 성서 기자가 표현합니다. “야, 꿈장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아무 구덩이에나 처넣고는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꿈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보자.”(19,20절). 이 형들이 왜 요셉을 죽일 생각을 했을까요?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 또는 자기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한다는 사실, 혹은 형들과 아버지까지 요셉 자신에게 절하는 꿈 이야기 때문에 죽일 생각을 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아주 사소한 문제만으로도 적개심을 느끼고, 더 심한 경우에는 죽일 모의까지 꾸밉니다. 그렇게까지는 이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사람이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적으로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 이 형들의 음모는 그렇게 진지한 게 아니라 가볍게 던진 말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열 명의 형제들 중에서 아무든지 장난삼아 “저 요셉이라는 녀석을 한번 혼 구멍을 내주어야 하지 않겠어? 요즘 너무 까분단 말이야.”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몇 명이 옆에서 맞장구를 치다보면 자기들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동네아이들이 무심결에 던진 돌이 개구리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맏형인 르우벤이 중재에 나섰습니다. “피만은 흘리지 말아라. 그 녀석을 이 빈들에 있는 구덩이에 처넣고 손만은 대지 말아라.”(22절). 르우벤은 나중에 자기가 요셉을 구해낼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따라서 결국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처넣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요셉이 침묵을 지킨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고자질을 잘하고, 자기 꿈 이야기를 떠벌리던 요셉이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못된 짓을 하느냐? 아버지가 결국 이 사실을 모를 것 같으냐? 내가 잘못했으니 한번만 살려 달라. 당연히 이런 말을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성서기자는 이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 뒤에서 벌어지는 위급한 순간에도 요셉의 침묵은 계속됩니다. 요셉을 둘러싼 사람들의 주장과 고함과 격론은 분분한데 요셉은 정반대로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셉이 그만큼 신중하기 때문인가요? 그가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할 수 없었을까요?
성서 기자의 관심은 요셉의 말과 그의 행동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성서 기자는 요셉의 운명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것 너머의 어떤 손길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손길과 직접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 성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사려가 깊은 독자라고 한다면 요셉이 침묵하고 있는 바로 이 대목에서 ‘행위’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일 음모를 꾸미면서 한 말을 기억해보십시오. “그 꿈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보자.”(20후). 이들의 입을 빌려서 성서 기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형들의 말과 요셉의 침묵을 통해서 성서기자는 하나님의 손길을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가 이런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밀고 나가는지 본문을 좀 더 따라갑니다.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
구덩이에 빠진 요셉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이야기를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옛날이야기처럼 전해 듣는 이스라엘 어린이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궁금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과연 구덩이에서 굶어죽는가, 아니면 르우벤의 계획대로 나중에 구출되는가? 이 이야기는 예상외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동생 요셉을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높은 구덩이에 밀어 넣고 형들은 그 옆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25절).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웅덩이 안에서 살려달라는 요셉의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천연덕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는 건 참으로 인간의 고약한 모습입니다. 그 순간에 길르앗으로부터 낙타를 몰고 오는 이스마엘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아버지인 이삭의 이복동생인 이스마엘의 후손들입니다. 마침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가 형제들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그래도 우리 동기인데 그를 죽이고 그 피를 덮어 버린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니? 그러니 그 애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버리고 우리는 손을 대지 말자. 아무래도 우리 동기요, 우리 혈육이 아니냐?”(26,27절). 형제들이 유다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이십 냥’에 팔아넘겼습니다.(28절). 이런 증언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요셉을 판 사람들은 요셉의 형제들이 아니라 미디안 상인들입니다. 그런데 36절에 보면 요셉을 이집트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에 판 사람들이 미디안 사람입니다. 아마 이 요셉 설화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는 두 전승이 뒤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는 또 다시 요셉의 형들이 꾸민 음모가 계속됩니다. 그들은 요셉의 장신구로 꾸민 옷에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의 옷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야곱은 평생 상복을 벗지 않고 살겠다는 심정으로 아들들과 며느리들의 위로를 마다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아니다. 나는 지하로 내 아들한테 울면서 내려가겠다.”(35절).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야곱의 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건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과 아버지와 삼촌을 기만하던 야곱이 결국 자식들에게 기만당하며 끝없이 깊은 슬픔 속에 빠져드는 장면입니다.
앞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질 때 침묵했다고 지적했듯이, 미디안 상인들에 의해서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리는 순간에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게 참으로 우리가 따라잡기 힘든 인간 삶의 모순이며 질곡입니다. 한쪽에서는 요셉을 어떻게든 처리하려는 형제들의 음모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거짓은 늘 말이 많은 법입니다. 아들들에게 속은 야곱도 말이 많습니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자기 연민에 휩싸이는 사람도 역시 말이 많은 법입니다. 이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 말이 없습니다. 요셉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는 요셉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닙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요셉 설화에서 ‘요셉의 꿈’을 중요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요셉처럼 우리도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것처럼 성서를 왜곡하는 것도 없습니다. 성서는 결코 요셉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서 텍스트를 곰곰이 읽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요셉에게도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행위에 관해서 독자들에게 해명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요셉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빠진 요셉이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침묵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입니다. 인간이 침묵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말이 너무 많습니다. 아니 우리는 늘 사람의 말을 통해서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런 말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침묵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침묵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창 37:12-28
요셉의 침묵
야곱의 요셉 사랑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는 4대에 걸친 이들 족장 설화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을 드라마틱하게 설명합니다. 이들 중에서 이삭의 무게는 좀 떨어지지만, 나머지는 흡사 대하소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아브라함, 20년간의 타향살이 끝에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야곱, 이집트로 팔려갔다가 결국 이집트의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른 요셉의 삶에는 각각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요셉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거주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맞닿아 있다는 점과 실제로 그 이야기를 다룬 본문의 분량이 많다는 점에서 가장 뛰어난 설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 설화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의 편애에서 시작됩니다. 야곱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느 아들보다도 더 사랑했다고(창 37:3) 창세기 기자가 설명합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옷은 왕족의 예복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요셉은 노동하지 않고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야곱에게 많은 종들이 있었겠지만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들들도 역시 노동해야만 했습니다. 자기들은 매일 양을 키우고 있는데 요셉은 예복이나 입고 앉아 있었다면 약 오르지 않을 형제들이 있었을까요? 우리 큰딸도 설거지를 시키면 왜 동생은 시키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립니다. 당연한 불평이겠지요.
그런데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정확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성서 기자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건 그렇게 정확한 이유가 아닙니다. 요셉은 야곱의 12명의 아들 중에서 열 한 번째입니다. 막내는 ‘베냐민’입니다. 요셉은 이미 그 당시에 열일곱 살이 되었습니다.(2절). 야곱이 훨씬 어린 막내아들인 베냐민을 제쳐놓고 요셉을 편애했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어머니가 라헬이기 때문일까요? 야곱에게 아들들을 낳아준 여자는 네 명입니다. 그 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한 여자는 ‘라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도 정답은 아닙니다. 베냐민의 어머니도 역시 라헬입니다. 더구나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습니다.(창 35:16-20).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죽음을 불사하고 낳은 아들이 베냐민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다른 아들보다 애착이 더 가야 할 텐데, 야곱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요셉을 편애했다고 합니다.
성서는 탐정추리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특별하게 대우했다는 사실만 언급합니다. 성서 기자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은 야곱이 왜 요셉을 편애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서를 읽는 우리도 그런 부분들은 대충 넘어가도 됩니다. 아니 대충 넘어가야만 성서의 근본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소한 사실이 훨씬 근원적인 어떤 사건으로 들어가기 위한 동기로 작용한다는 사실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게 인간 삶의 우여곡절과 그 안에 침투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가 엮어내고 있는 신비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했다는 사실은 아무런 합리적인 타당성이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결국 어떤 의미 있는 사건이 진행된다는 게 바로 성서 기자들이 성서를 기술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웅덩이에 빠진 요셉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런 의미 있는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에 대한 설명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세겜으로 양떼를 몰고 갔을 때 야곱은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업이 잘되고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흡사 어떤 무역회사 사장이 아들을 시켜서 외국 지사에 출장을 보내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목축업을 하시는 분들은 인공사료를 쓰거나 일정한 장소에서 풀을 뜯게 하지만 고대인들은 풀이 있는 곳으로 양떼를 몰고 다녔습니다. 풀도 있어야 하고 물도 적당하게 있는 곳을 찾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왜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며칠이나 걸리는 힘든 여행길입니다. 더구나 본문에 따르면 형제들이 세겜에 머물지 않고 도다인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위험한 곳을 곱게 자란, 그래서 늘 특별한 옷만 입고 자란 요셉을 보낸다는 게 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서기자는 이런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일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고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진도’를 나가는 게 현명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도 설교의 진도를 나갑시다.
결국 요셉은 물어물어 형들이 양치는 곳까지 왔습니다.(17절). 요셉이 오는 모습을 발견한 형들은 그를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습니다.(18절). 여기서부터 요셉 설화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들은 이렇게 의논했다고 성서 기자가 표현합니다. “야, 꿈장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아무 구덩이에나 처넣고는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꿈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보자.”(19,20절). 이 형들이 왜 요셉을 죽일 생각을 했을까요?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 또는 자기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한다는 사실, 혹은 형들과 아버지까지 요셉 자신에게 절하는 꿈 이야기 때문에 죽일 생각을 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아주 사소한 문제만으로도 적개심을 느끼고, 더 심한 경우에는 죽일 모의까지 꾸밉니다. 그렇게까지는 이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사람이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적으로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 이 형들의 음모는 그렇게 진지한 게 아니라 가볍게 던진 말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열 명의 형제들 중에서 아무든지 장난삼아 “저 요셉이라는 녀석을 한번 혼 구멍을 내주어야 하지 않겠어? 요즘 너무 까분단 말이야.”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몇 명이 옆에서 맞장구를 치다보면 자기들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동네아이들이 무심결에 던진 돌이 개구리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맏형인 르우벤이 중재에 나섰습니다. “피만은 흘리지 말아라. 그 녀석을 이 빈들에 있는 구덩이에 처넣고 손만은 대지 말아라.”(22절). 르우벤은 나중에 자기가 요셉을 구해낼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따라서 결국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처넣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요셉이 침묵을 지킨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고자질을 잘하고, 자기 꿈 이야기를 떠벌리던 요셉이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못된 짓을 하느냐? 아버지가 결국 이 사실을 모를 것 같으냐? 내가 잘못했으니 한번만 살려 달라. 당연히 이런 말을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성서기자는 이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 뒤에서 벌어지는 위급한 순간에도 요셉의 침묵은 계속됩니다. 요셉을 둘러싼 사람들의 주장과 고함과 격론은 분분한데 요셉은 정반대로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셉이 그만큼 신중하기 때문인가요? 그가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할 수 없었을까요?
성서 기자의 관심은 요셉의 말과 그의 행동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성서 기자는 요셉의 운명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것 너머의 어떤 손길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손길과 직접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 성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사려가 깊은 독자라고 한다면 요셉이 침묵하고 있는 바로 이 대목에서 ‘행위’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일 음모를 꾸미면서 한 말을 기억해보십시오. “그 꿈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보자.”(20후). 이들의 입을 빌려서 성서 기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형들의 말과 요셉의 침묵을 통해서 성서기자는 하나님의 손길을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가 이런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밀고 나가는지 본문을 좀 더 따라갑니다.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
구덩이에 빠진 요셉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이야기를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옛날이야기처럼 전해 듣는 이스라엘 어린이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궁금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과연 구덩이에서 굶어죽는가, 아니면 르우벤의 계획대로 나중에 구출되는가? 이 이야기는 예상외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동생 요셉을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높은 구덩이에 밀어 넣고 형들은 그 옆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25절).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웅덩이 안에서 살려달라는 요셉의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천연덕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는 건 참으로 인간의 고약한 모습입니다. 그 순간에 길르앗으로부터 낙타를 몰고 오는 이스마엘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아버지인 이삭의 이복동생인 이스마엘의 후손들입니다. 마침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가 형제들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그래도 우리 동기인데 그를 죽이고 그 피를 덮어 버린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니? 그러니 그 애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버리고 우리는 손을 대지 말자. 아무래도 우리 동기요, 우리 혈육이 아니냐?”(26,27절). 형제들이 유다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이십 냥’에 팔아넘겼습니다.(28절). 이런 증언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요셉을 판 사람들은 요셉의 형제들이 아니라 미디안 상인들입니다. 그런데 36절에 보면 요셉을 이집트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에 판 사람들이 미디안 사람입니다. 아마 이 요셉 설화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는 두 전승이 뒤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는 또 다시 요셉의 형들이 꾸민 음모가 계속됩니다. 그들은 요셉의 장신구로 꾸민 옷에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의 옷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야곱은 평생 상복을 벗지 않고 살겠다는 심정으로 아들들과 며느리들의 위로를 마다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아니다. 나는 지하로 내 아들한테 울면서 내려가겠다.”(35절).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야곱의 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건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과 아버지와 삼촌을 기만하던 야곱이 결국 자식들에게 기만당하며 끝없이 깊은 슬픔 속에 빠져드는 장면입니다.
앞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질 때 침묵했다고 지적했듯이, 미디안 상인들에 의해서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리는 순간에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게 참으로 우리가 따라잡기 힘든 인간 삶의 모순이며 질곡입니다. 한쪽에서는 요셉을 어떻게든 처리하려는 형제들의 음모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거짓은 늘 말이 많은 법입니다. 아들들에게 속은 야곱도 말이 많습니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자기 연민에 휩싸이는 사람도 역시 말이 많은 법입니다. 이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 말이 없습니다. 요셉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는 요셉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닙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요셉 설화에서 ‘요셉의 꿈’을 중요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요셉처럼 우리도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것처럼 성서를 왜곡하는 것도 없습니다. 성서는 결코 요셉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서 텍스트를 곰곰이 읽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요셉에게도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행위에 관해서 독자들에게 해명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요셉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빠진 요셉이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침묵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입니다. 인간이 침묵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말이 너무 많습니다. 아니 우리는 늘 사람의 말을 통해서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런 말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침묵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침묵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