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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기타 조회 수 10955 추천 수 147 2005.08.28 17:41:44
성경본문 : 출애굽기 3:1-12 
http://wms.kehc.org/d/dabia/8.29.MP3http://wms.kehc.org/d/dabia/8.29.MP32005. 8.29.          
출 3:1-12
모세의 하나님 경험

미디안 사제의 사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3:1).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가 어떤 연유로 미디안 사제의 사위가 되었을까요? 모세는 원래 이스라엘 부모에게서 출생했지만 이집트의 이스라엘 말살 정책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모가 바로 친어머니였기 때문에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었고,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이집트 왕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마흔 살의 나이에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망명지가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의 광야인 ‘미디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야곱이 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에 가서 라반의 딸들을 만나던 장면과(창 29장) 비슷합니다. 야곱과 모세는 똑같이 우물가에서 처녀들을 만났습니다. 라반의 딸들도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우물가에 왔으며, 이드로의 딸들도 그랬습니다. 약간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양쪽의 처녀들에게 똑같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드로의 딸들만 보면 이렇습니다. 그녀들은 다른 목동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양떼에게 물을 먹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에 모세가 등장해서 다른 목동들에게 혼찌검을 내주고 이드로의 딸들이 몰고 온 양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이런 무용담을 전해들은 이드로는 모세를 자기 식객으로 들인 후, 큰딸 십뽀라를 주어서 모세를 사위로 삼았습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요? 미국의 서부 영화에서 나올만한 스토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못된 남자 목동들에게 시달리던 처녀들이 갑자기 나타난 신사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고, 큰 언니가 그 신사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모세는 어쩌자고 미디안 사제의 사위가 되었을까요?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성서 기자는 무슨 생각을 했기에 모세가 미디안 사제의 사위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걸까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읽는다면 이런 구절은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성서기자도 깊은 의미를 담지 않고 이런 사실을 보도했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역사에서는 이렇게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이 훨씬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성서가 결국 역사 해석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읽는 우리는 이런 보도를 통해서 성서 전체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려 깊은 독자라면 그런 영적 통찰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런 상황은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목사 아들이 대처승의 사위가 되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 지도자라 할 모세가 미디안 사제의 사위였다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언급된 걸 보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타종교와의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갈등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스라엘은 옛날에 비해서 훨씬 근본주의적으로 변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서는 ‘가지지구’ 정착촌 철거작업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1967년 6일 전쟁 당시에 이집트로부터 점령한 가자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그곳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일단 팔레스타인과의 화해 제스처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가자지구에서는 철수하지만 대신 예루살렘의 유대인 거주지역과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 사이에 형무소 담보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는 중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좀 더 평화공존의 삶으로 나가야 할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인류는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만 이런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세계 구석구석에 이런 갈등이 때로는 표면화하고, 때로는 내면화해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모세는 이제 미디안에서 사제의 사위로서 양떼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집트를 떠날 때 모세의 나이는 사십 세(행 7:23)였으며, 다시 바로 앞에 나타났을 때가 팔십 세(출 7:7)였으니까, 그는 40년 동안 양떼를 쳤다는 말이 됩니다. 성서는 모세의 40년에 관해서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3:1). 아주 간결하지요? 자기 인생의 삼분의 일이 망각되었다는 게 모세로서는 억울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성서의 글쓰기는 늘 이런 식입니다. 성서는 사람의 드라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드라마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잃어버린 40년’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무작정 양떼를 친 걸까요? 앞에서 언급한 야곱도 하란으로 망명해서 삼촌의 양떼를 쳤지만 ‘재테크’에 뛰어난 탓인지 20년 만에 상당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본문만 놓고 볼 때 모세 40년은 그저 허송세월에 불과합니다. 과연 그는 40년 동안 무얼 하다가 지금 호렙이라는 산으로 왔습니까?
호렙 산은 일명 시내 산이라고도 불립니다. 호렙은 모세가 하나님을 경험한 산으로 불려지고, 시내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산으로 불립니다. 전자는 일종의 ‘소명’이, 후자는 ‘율법’이 중심이지만, 양자 모두 하나님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리학적으로 이 산의 구체적인 장소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진 이야기의 중심 무대로서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 호렙 산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종교적인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장소입니다. 이 산은 엑서더스의 단초이며, 이스라엘 성문법의 토대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호렙 산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요? 성서는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양떼에게 먹일 풀과 물이 광야에 없어서 점점 더 멀리 가다가 우연하게 호렙 산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성서 본문만 갖고는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하게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아마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끌어들였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모든 게 하나님의 각본에 의해서 진행된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실체와 의미를 전혀 모르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성서 텍스트의 심층으로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깊이 들어가도록 노력해야합니다.
호렙 산에서 모세는 이상한 현상을 보았습니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2절)이었습니다. 성서기자는 그 현상을 가리켜서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2절)고 설명합니다. 이 현상을 본 모세가 불꽃이 이는 떨기에 가까이 다가가자 야훼께서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다고 합니다.(4절). 2절에서는 야훼의 천사가 나타났다고 하더니, 4절에서는 야훼가 직접 말씀하셨다고 진술되어 있습니다. 천사와 야훼는 같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천사는 불꽃이고, 야훼는 말씀이라는 뜻인가요? 신학적인 내용을 한 마디만 언급한다면 이렇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J기자와 E기자의 진술이 섞여 있습니다. 약간씩 차이가 나는 전승들이 훗날 어느 편집자에 의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천사와 하나님이 동시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불꽃이 이는 떨기나무를 보았다는 사실과 바로 그 자리에서 야훼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불꽃 현상은 ‘엘모의 불’이라고 하는 자연현상입니다. 지금도 그런 현상은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해서 이 떨기 불꽃 현상을 보게 되었을까요? 우연하게 경험한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는 그럴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저는 성서가 비록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 내면에는 늘 합리성을 깔고 있다고 봅니다. 앞에서 저는 모세가 미디안의 사제 이드로의 사위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모세는 이드로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미디안 종교 의식에도 참가하고, 그 종교의 가르침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요? 미디안 종교는 이스라엘 신앙과 다르기 때문에 모세가 사사건건 장인과 종교적인 다툼을 벌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드로에게서 하느님의 거룩한 산 호렙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모든 종교는 거룩한 것에 근거를 두기 마련입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예수 믿는 며느리들이 시집에서 드리는 제사 때문에 갈등하는 것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사에서도 사실 배울 건 많거든요.
모세는 이집트에 산 40년 동안 이집트 문명과 종교를 배웠고, 부분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의식이 깊어졌고, 미디안에서 산 40년 동안 미디안 문명과 종교에 관해서 매우 깊이 배웠을 겁니다. 그것의 결과가 곧 호렙 산의 발견입니다.

거룩 경험과 역사참여
도대체 호렙 산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일까요?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도움으로 호렙 산의 떨기 불꽃 앞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5절).
성서기자는 무슨 이유로 그곳을 ‘거룩한 땅’이라고 말할까요? 불꽃이 일지만 떨기는 타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일까요?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현상인 ‘엘모의 불’을 거룩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일정한 장소만이 아니라 ‘땅’ 전체가 거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이 거룩하다는 사실은 모든 시인과 화가들에 의해서도 노래되고, 그려집니다. 이미 창세기 기자도 하나님이 창조한 이 땅이 “보기에 좋았다.”(창 1:10)고 했습니다. 여러분 쉽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몸이 땅의 질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것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은 거룩하지 않을까요?
모세는 이미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를 통해서 이런 가르침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땅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깊이 깨닫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경험의 핵심입니다. 루돌프 오토는 <das Heilige>라는 책에서 종교의 핵심이 곧 거룩에 대한 경험, 즉 거룩한 두려움인 ‘누미노제’라고 언급했습니다. 옳은 설명입니다. 모세도 신을 벗어야만 했고,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6절)고 했습니다. 만약 다른 종교에도 이런 거룩한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비록 어떤 절대자를 부르는 호칭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경험이 있다면 결국 야훼 하나님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에 미디안 종교가 야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드로의 미디안 종교와 모세의 야훼 하나님 신앙에 결정적인 차이가 이제 나타납니다. 이드로는 자기 사위에게 ‘엘모의 불’이 일어나는 호렙 산을 지시하는 데 머물렀지만, 모세는 바로 그 대목에서 한걸음 더 나갑니다. 그게 무얼까요? 모세는 야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어라.”(7-10절).
모세의 거룩 경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역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학대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깨우침으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곧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이 역사와 결합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특히 고통당하는 인간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지며, 결정적으로 예수에게서 완성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이 이 땅에서 태어난 한 인간과 하나 되신 사건이 곧 예수이십니다.
모세의 하나님 경험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모세와 같은 거룩한 경험은 우리에게도 역시 유효합니다. 느닷없이 호렙 산 사건이 벌어진 게 아니라 40년 미디안 광야의 삶이 그 밑바탕이었습니다. 우리의 한 평생의 삶도 그런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향해서 나가고 있을까요? 거룩한 땅, 생명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 있나요? 그런 경험이 구체적인 역사 참여로 실체화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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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똑소리

July 05, 2006
*.144.20.41

목사님!
위의 설교문을 읽으면서 또 한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답변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셨다는 "이리로 가까이 말라......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평소 목사님의 신학으로 본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모세의 역사의식을 성서기자가 그런 식으로 표현해 놓았거나,
아니면 후대의 신명기 사가들이 야훼신앙의 관점에서 모세의 소명사건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줌으로서
이스라엘 역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인지 그게 궁금하네요.
만일 하나님의 직접적 말씀처럼 보이는 위의 내용이
자기민족을 해방하고자 한 모세의 역사의식이 자신의 내면에서 발동한 것이라면
후반부에서 자신은 그런 일에 무능한 사람이라는
구차한 변명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아니면 현실역사에 대한 인식은 뚜렷하지만
그런 암담한 현실 속으로 자기자신을 던지는데는 주저하는
인간의 한계 또는 인간의 이중성을 묘사하기 위해서일까요?
이런 식의 성서읽기가 제가 보기에도 한편으론
너무 심리적, 인간학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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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05, 2006
*.249.178.27

똑소리 님,
이미 내가 할 말을 대충 다 하셨군요.
다만 모세의 소명이 단지 모세 한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참여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모세와 얽힌 설화가 형성된 것이지요.
이 전승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인식과 역사관, 세계관이
포함되었겠지요.
그리고 이들의 전승에는 주변 다른 문명의 영향도 들어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살던 사람들의 신앙,
바벨로, 이집트 등등,
여러 신앙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에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히 고립된 종교는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고유한 세계 체계가 성립되었는가 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구요.
그렇다면 모든 종교가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대답은 오늘 하지 않아도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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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똑소리

July 06, 2006
*.204.68.109

목사님!
한 가지만 더 여쭐께요.
모세가 젖먹이때까지 친모에게 맡겨졌다고 하는데
이때는 분명히 말도 알아듣지도 할 줄도 몰랐을텐데
어떻게 두 세살밖에 안되는 그 어린것이
어머니로부터 민족의식을 배울 수 있었을까 그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갑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7-8살 될때까지 젖을 빨았단 말인가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렇다고 청소년기에 친모로부터 과외수업을 배웠을리만무하고.
그러면 모세는 슈퍼맨(?)인가?
여기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내막이 있는건지.
모세의 해방의식이 어렸을때 어머니의 훈육에 의한 결과라는 것도 이스라엘의 역사가들의 판단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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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06, 2006
*.249.178.27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실보도가 아닙니다.
역사는 늘 해석을 통해서 기록됩니다.
특히 신적인 경험은 더욱 그렇습니다.
모세가 어느 정도나 역사적 인물인지는 종합적으로 연구해야겠지요.
이집트의 역사에 모세가 나오든가요?
그렇다고 성서가 허무맹랑한 이야기 모음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언서에요.
예언자적 통찰력을 확보한 사람들의 기록이지요.
대충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겁니다.
profile

[레벨:1]angelleaf

September 21, 2007
*.228.66.190

모세가 40세 때 이집트를 떠난걸 오늘 알았네요..ㅎ

나의 신앙적인 경험이 역사참여로 실체화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해주신 설교 감사합니다.

모세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서두 괜시리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엘모의 불이라는 것도 자연현상이라는 것도 오늘 새로 알게 되었구요.

정용섭 목사님!!

근데 미디안 종교를 통해서 모세가 하나님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여기서 그 부분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싶은데

좋은 글 추천해 주실수 있으신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1, 2007
*.181.51.23

앙겔리프 님,
미디안 종교와 모세의 관계에 관한 자료는
제가 찾아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어딘가에서 제가 보긴 했을 텐데요.
아마 판넨베르크의 글에서 본 것 같기도 하구요.
이번 서울오프 모임 공부에서 그게 자세하게 다루어질 겁니다.
제목이 "이드로의 사위 모세"거든요.
형편이 되시면 한번 오시구요,
안 되면 나중에 글이 올라올 때 보세요.
감사.
profile

[레벨:2]그날에

March 08, 2018
*.48.156.31

목사님 질문드립니다^^
신학적인 지식이 없어서 이곳에서 초보적인 질문 드리려니 민망하지만 질문은 댓글로 달면 된다고 하셔서 이곳에서 문의 드립니다~

만약 다른 종교에도 이런 거룩한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비록 어떤 절대자를 부르는 호칭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경험이 있다면 결국 야훼 하나님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에 미디안 종교가 야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부분에서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저는 인간의 전적부패를 배워왔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가서요

질문을 정리하자면

1. 다른종교에도 거룩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종교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다는 뜻인건가요?

2. 거룩한 경험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뜻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요?

예수님으로 화목된 자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것이 아닌가 해서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9, 2018
*.182.156.226

그날에 님, 안녕하세요?

처음 대글을 다셨군요.

반갑습니다.

1) 그렇지요. 하나님을 우리가 독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 인식과 경험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2) 거룩한 경험은 하나님 경험이기에 당연히 기독교 구원과 일치됩니다.

    기독교 구원은 예수를 통한 것이면서 동시에 삼위일체론적이기에

    다른 종교에 나타나는 거룩한 경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 이런 문제를 설명하려면 거룩 경험, 하나님 은혜, 구원, 하나님과의 화목, 예수 경험 등등이

   가리키는 개념들을 충분히 전제해야 하기에 저의 짧은 설명이 비약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질적으로 알고 경험하고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은 사람은

   다른 종교를 폄하할 수 없고, 더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깊이 들어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시간이 부족하고 ...

   더 나아가서 그것만으로 충분할 정도로 영적인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그날에 님처럼 꾸준히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노력은 필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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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30] 2007-05-06 13794
215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185
214 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8] 2007-04-22 10748
213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564
212 부활절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4] 2007-04-08 12893
211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1862
210 사순절 마리아의 나드 향유 [11] 2007-03-25 17598
209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464
208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327
207 사순절 실패의 길을 가자! [9] 2007-03-04 13487
206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531
205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435
204 주현절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고전 15:12-19) [37] 2007-02-11 15972
203 주현절 시몬의 하나님 경험 [21] 2007-02-04 12971
202 주현절 예레미야의 소명 [11] 2007-01-28 15774
201 주현절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5] 2007-01-21 16366
200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252
199 주현절 그리스도의 비밀, 교회의 비밀 [5] 2007-01-07 15721
198 성탄절 솔깃한 말, 터무니없는 말 [7] 2006-12-31 12945
197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4408
196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3949
195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4275
194 대림절 “사람의 아들”이 온다. [2] 2006-12-03 14647
193 대림절 새로운 세상이 온다! [2] 2006-11-26 15017
192 기타 야훼 찬양! (욜 2:21-27) [3] 2006-11-19 13317
191 기타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희망 [2] 2006-11-12 15693
190 기타 욥의 하나님 경험 [6] [1] 2006-11-05 14686
189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727
188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529
187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7511
186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19610
185 기타 고난 받는 그리스도 [2] [2] 2006-10-01 15185
184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19917
183 기타 창조 영성 [4] [2] 2006-09-17 15103
182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22995
181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340
180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21776
179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7908
178 기타 예언의 성취 2006-08-13 16125
177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249
176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6446
175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6889
174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3532
173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8875
172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626
171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528
170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782
169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5213
168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683
167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681
166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103
165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13230
1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21
163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13065
16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45
16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2748
160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649
159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5698
158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13207
157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3292
156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187
155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269
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062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626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042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799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07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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