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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기타 조회 수 11786 추천 수 53 2005.10.23 23:12:18
성경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2:1-12 
http://wms.kehc.org/d/dabia/10월23일.MP3http://wms.kehc.org/d/dabia/10월23일.MP32005. 10.23.       살전 2:1-12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바울이 처한 상황
오늘 우리의 눈에는 바울이 이룬 선교의 업적이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원래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선 그는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바울처럼 철저하게 율법을 상대화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바울은 극단주의자였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모든 사도들이 율법으로부터 복음으로 신앙의 토대를 완전히 옮겼기 때문에 바울과 같은 생각이었을 거라고 추정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교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 신앙과 유대교 신앙과 더불어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양립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이런 분명한 생각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정통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사도들 중심의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와 바울 중심의 이방인 공동체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게 정략적으로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예루살렘 공동체가 아니라 바울을 공격 타깃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정황에서 사도들은 바울을 편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사도들이 바울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바울이 기댈 수 있는 대상은 자기가 설립한 이방인 공동체였습니다. 물론 이방인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순전히 이방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의 정통 율법주의자들과 여러 경로를 통해서 연결되었습니다. 더구나 바울이 한 지역 공동체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는 게 또 하나의 어려움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설립하고 떠나면 유대로부터 온 유랑 설교자와 전도자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공경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이들에 의해서 바울이 설립한 교회는 계속해서 흔들렸습니다.
그런데다가 그가 설립한 교회마저도 그를 꾸준하게 지원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신앙적인 부분도 있고, 경제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충분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으니까 어느 정도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바울의 경우는 사정이 매우 나빴습니다. 오늘 9절 말씀을 보면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먹을 걸 마련하면서 복음을 전할 정도로 그가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였습니다.

거짓 전도자들
그렇지만 바울이 가장 크게 걱정하는 부분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거짓 전도자들에게 교리적으로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사실을 매우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4절 말씀에 따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미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에게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이 사실을 좀 더 명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또 그들은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일까지 방해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의 은총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짓 전도자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약간 긴 구절이지만 3-5절을 다시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동기나 속임수로 여러분을 격려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인정을 받아 복음을 전할 사명을 띤 사람으로 말하는 것이며,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까지 아첨하는 말을 쓴 적도 없고 속임수로써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달라고 간청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거짓 전도자들의 실상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거짓 전도자들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아첨’을 하고, ‘탐욕’을 부립니다. 이러한 거짓 전도자들의 행태는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6절)입니다.
유대에서 온 이 거짓 전도자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를 일으킨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걸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고 단지 그들의 태도를 간접적으로 지적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유대로부터 온 율법주의자였다는 사실에서 바울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 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온갖 감언이설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거짓 전도자들의 주장에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런 부분을 분간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들 거짓 전도자들이 늘 이상한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은 그럴듯한 말을 합니다. 매우 세련된 태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런데다가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 자체에 매력적인 힘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성서에 대한 지식이 많고, 기도를 유창하게 잘 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를 잘하고,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헌금을 많이 하고, 등등, 모범적인 교인이 되는 것 자체가 매력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하나님에게 칭찬받는다는 말 앞에서 그것을 부정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런 율법주의적 신앙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함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이 참된 평화와 자유와 기쁨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일치는 그런 인간적인 노력과 업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체험적으로, 실존적으로 알았습니다. 그가 볼 때 그런 율법주의적인 신앙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결국 사람의 반응에 따라서 달라지는 상대적인 가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절대화하는 게 나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절대화하지 말고 적당한 선에 받아들이면 되지 않는가, 공연히 바울처럼 극단적으로 나가는 건 서로 다툼만 만드는 거 아닌가, 하고 말할 수 있긴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게 돈벌이나 직장생활 같은 거라면 그게 가능하지만 절대적인 생명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합니다. 생명에 관계된 것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지 적당하게 양다리 걸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동양의 선승들도 평생을 암자에 들어가서 화두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바울은 대중추수적 행동에 빠져 있는 거짓 전도자들 앞에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흔들리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는 그들과 전혀 다르게 설교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설명은 불필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바울이 그렇게 진정한 마음으로 전했다면 굳이 그것을 확인시키지 않아도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알고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 심리적으로 조금 쫓기는 상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종의 신학 논쟁, 또는 진리 논쟁에서, 특히 거짓 전도자들은 데살라로니가 현지에서 직접 교우들을 선동하고 있는 마당이니까, 자기의 주장을 강력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사람의 마음이 이심전심이 되려면 훨씬 깊은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데살로니가 교우들과 바울은 아직 그런 상태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흡사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듯이 그들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합니다. 그런 흔적을 우리는 그가 이 본문에서 “여러분이 알고 있다.”는 의미의 단어를 여섯 번이나(1, 2, 5, 9, 10, 11) 사용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거짓 전도자들과는 달리 사도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고(7절) 합니다. 그는 그 대신에 어머니처럼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아마 거짓 전도자들은 사도들이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권위를 앞세워 매우 권위적으로 행동했겠지요. 이런 권위는 아주 매혹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한 조직 안에 그런 권위가 자리 잡으면 거기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판단력을 눈멀게 만듭니다. 흡사 경제적 힘을 절대적 권위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정의와 평화와 자유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처럼 권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강력한 힘으로 작용합니다. 바울은 어머니라는 권위가 아니라 사랑으로 자녀들을 대하는 어머니처럼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대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만이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 같이 분명한 목표를 갖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11절). 어머니의 마음이 부드럽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단호하겠지요. 어머니가 자녀들의 마음을 풀어준다면 아버지는 방향을 잡아주겠지요.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도록 분명한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여기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무엇일까요? 이런 용어들이 기본적으로 추상적이기도 하고, 성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을 우리가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길을 잃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단순히 교회에 잘 나와서 예배를 잘 드리고, 세상에서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실증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예를 들어 보십시다. 여기 어머니와 딸이 있습니다. 이 딸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린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24시 편의점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자기 딴에는 최선을 기울였지만, 그게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딸은 몰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거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실 뿐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다른 나라 기독교인들에 비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훨씬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런 수고 중에는 귀중한 것도 있지만 무의미한 것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예배나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나름으로 의미를 얻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런 모든 것들은 자기를 성취하려는 탐욕을 쉽게 변질되고 맙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슨 의미로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요? 그는 지금 우리가 무슨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철저하게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홀로 일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 단락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12절).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게 곧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 통치는 곧 종말론적 생명이라 할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이렇게 찾아오셨고, 그런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린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의 삶 안에 생명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영은 나사렛 예수의 영이기도 합니다. 그를 믿음으로, 또한 그 사실을 믿음으로 그런 생명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사실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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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한진영

October 24, 2005
*.98.120.103

오늘 말씀에 가슴 가득 묻혀있던 헛된 망상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고픈 잠잠한 바람이 소리없이 밀려 듭니다. 그런데 목사님..바울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거대한 신학적인 변화를 이루는데 그토록 율법에 열심이었던 그가 이신칭의의 대가가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다소에서 머무른 칩거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요? 무슨 새로운 공부를 하였던건가요? 아니면 오직 성령님의 전권적인 깨닫게 하심 덕분인가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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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5, 2005
*.249.178.15

한진영 씨,
바울의 그 변화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한 선생이 알고 있는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을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긴 하지만
그런 경험의 실체라는 걸 우리가 따라가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가 다마스커스 도중에서 만나 예수는 누구인가요?
부활, 승천, 하나님의 우편 자리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예수가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 이 현실 역사로 등장했다는 것인가요?
그런 좀 무리한 해석입니다.
지금 우리도 예수를 말씀으로 만날 수도 있고,
기도 중에도 어떤 영적인 경험을 하거나
예배에서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다마스커스 경험은 좀 달랐던 거 같습니다.
이런 문제는 신약학자들이 대답해야 할 부분입니다.
(조직신학을 전공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예수를 알기 전에 이미 종교 체험이 많았으며,
특히 구약성서에 정통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설명할 수 있는 몇 마디입니다.
바울이 예수 생전에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예수와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그의 행위와 사건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입수했을 겁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가에 대해서 여러각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세례 요한도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해서 질문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당시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도대체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건 말이 안 되었으니까요.
사도들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 신앙고백은 상당히 시간이 흐른 다음에 생성된 것이죠.
부활 사건이 일어났을 순간에도 사도들은 그런 현상 앞에서 당황했을 뿐입니다.
훗날 그런 사건들이 구약에 의해서 해석되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도 그런 과정 속에 있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데반의 순교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를 믿었다고도 말하지만 그것도 결정적인 대답은 아니죠.
나도 더 이상 설명할 게 없네요.
이참에 바울에 대한 공부를,
특히 역사적 공부를 좀 더 해볼까 합니다.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1]한진영

October 26, 2005
*.59.47.214

그렇군요.. 다메섹 사건 이전에 충분히 바울이
예수에대해 듣고 판단할 시간이 있었겠네요
아무튼 말씀보다 이런 행간들에 관심이 가는건 어려서 영어 공부 좀 할라치면 수학 생각나고 하던 버릇이랍니다. 답글 중에 "도대체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건 말이 안 되었으니까요" 라는 말씀이 마음에 다가 오네요. 그런데 왜 난 이 사실을 그토록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였을까요?
낯설음도 없이 십자가가 왜 이렇게 아뭏지 않을까요. 말이 안 되는 십자가는 대충 넘어가고, 말 되는 이야기나 더 듣고 싶은 이 내 마음.. 주여..
감사합니다 목사님
profile

[레벨:100]정용섭

October 26, 2005
*.249.178.19

한진영 씨는 하나를 말하면 둘을 깨우치는 사람이 있군요.
십자가의 낯설음이라.
그걸 벌써 눈치 채 버렸네요.
신학생들은 아무리 말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목사들은 훨씬 심할지 모르죠.
우리의 생각을 종말론적 진리로 열어주는 기독교 신앙 안에 있으면서도
좀처럼 생각의 문을 열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앙의 연조가 깊을수록 그런 현상이 강고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진영 씨,
하나님은 바로 그 낯설음입니다.
그 생명 앞에서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그건 아무리 세련된 기독교 문화와 정서로 치장했다고 하더라도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칭의에 놀라고, 종말에 대해 놀라고,
존재론적 사랑의 능력에 놀라고
하나님 나라의 낯설음 앞에서 당혹스러워 하고,
이런 경험이 없어서야 어디 창조와 그 완성인 심판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런 영성이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profile

[레벨:1]한진영

October 27, 2005
*.98.255.105

목사님의 칭찬에 초딩처럼 상기됩니다,
제가 원체 빨리는 배우는 경향이 있는데 뭐든 길게 못가는게 흉이랍니다 ^^
말씀조차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들고 성령의 역사도 내하기 나름이라는 자기중심주의가 연조가 깊을 수록 무섭게 고착화되는것을 저 자신도 느끼고 주변 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제까지의 나를 버리고 오늘 다시 십자가 앞에 선다는게 너무 어렵네요. 그러나 가끔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하루 속에서도 생각지 않게 생경함으로 십자가를 보게될 때가 있음에 놀라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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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유희탁

October 28, 2005
*.230.134.234

목사님의 말씀처럼 저의 설교속에서도 성도들에게 율법을 강조하는 부분들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 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외치던 입술이 부끄러워 어쩔바를 모르겠네요...두분의 대화가 제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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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4402
196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3940
195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4261
194 대림절 “사람의 아들”이 온다. [2] 2006-12-03 14638
193 대림절 새로운 세상이 온다! [2] 2006-11-26 15006
192 기타 야훼 찬양! (욜 2:21-27) [3] 2006-11-19 13307
191 기타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희망 [2] 2006-11-12 15685
190 기타 욥의 하나님 경험 [6] [1] 2006-11-05 14679
189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714
188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518
187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7502
186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19602
185 기타 고난 받는 그리스도 [2] [2] 2006-10-01 15177
184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19904
183 기타 창조 영성 [4] [2] 2006-09-17 15092
182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22979
181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333
180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21768
179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7893
178 기타 예언의 성취 2006-08-13 16122
177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233
176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6431
175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6880
174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3522
173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8867
172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619
171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525
170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772
169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5206
168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677
167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675
166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094
165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13222
1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0
163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13057
16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35
16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2745
160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645
159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5689
158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13201
157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3290
156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178
155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263
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058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624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038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793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02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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