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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 주현절 후 일곱째 주일

조회 수 789 추천 수 0 2011.02.20 23:23:15

 

대 구 샘 터 교 회 주 보

 

2011년 2월20일,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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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초)

(마태복음 5:38-48/ 원수사랑, 가능한가?)

 

위 본문은 소위 ‘다섯 반명제’ 목록(마 5:21-48) 중에서 넷째와 다섯째 항목에 속한다. 마태복음은 이 반명제를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율법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따라야 할 마태복음 기자의 이런 언급은 예상 밖이다. 여기에는 마태공동체의 고민이 놓여 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이어진 유대 전쟁은 유대교를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당시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를 잡고 있던 초기 그리스도교 집단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유대교의 율법을 따르든지 아니면 유대교 밖으로 나가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압박이었다. 당시에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 그리스도교는 일찌감치 유대교 밖으로 나갔다. 지역적으로 이방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었지만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한 유대 그리스도교는 불가능했다. 이들은 결국 유대교의 요구를 어느 정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율법의 근본인 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율법으로의 회귀는 아니다. 오히려 율법보다 더 절대적인 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반(反)명제로 표현된 것이다. <중략>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차원에서 위기이다. 첫째, 실제 삶에서 원수사랑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명령(mission impossible)을 붙들고 살아야 할 사람들의 영혼은 지친다. 둘째, 정의로운 투쟁을 망설이게 만든다. 히틀러를 술 취한 버스 운전자로 보고 승객을 살리기 위해서 일단 폭력적으로라도 그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실천했던 본회퍼에게 원수사랑 운운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원수사랑은 도대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에 대한 완료된 대답은 아직 없다. 설교자는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나름으로 답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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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수성구 상동 66-7 공간울림(예배처소)

예배시간: 매주일 오전 11시/ 수요성경공부: 매수요일 오후 8시

담임목사: 정용섭 010-8577-1227/ 전도사: 전남정(019-528-8044)

 

 

주일공동예배순서

 

[개회예전]

예배의 부름…………………………………………………………………………… 목사

주님의 평화가 여기 예배로 모인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더 기쁜 일도 없습니다. 우리 함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찬송: 39장……………………………………………………………………………다같이

*오늘의 기도…………………………………………………………………………다같이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 시간 믿음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온 정성을 다 바쳐 예배를 드리나이다.

이 자리에 악한 영이 틈타지 말게 하시고

오직 성령이 이끄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무기력하며,

때로는 영악하고, 때로는 무지하나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야 할 이 세상이

오히려 그것을 감추거나 파괴할 때도 많나이다.

사람들이 인식하든지 또는 인식하지 못하든지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아야할 피조물임을 아나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바른 삶인지

매 순간 분별하며 세워나가기 원하나이다.

세상을 살리는 빛으로 오셨으며,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다시 오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며 미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사죄기도……………………………………………………………………………다같이

목사: 긍휼이 한없으신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우리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며, 우리의 불안이 영혼을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총체적으로 비틀어졌습니다.

회중: 주여,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

목사: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믿는 사람들이 독점하면서 왜곡시킨 적이 많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시켜 주십시요.

회중: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목사: 지난 몇 달 동안 한반도 남쪽에 살던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생명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생명을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이 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도 역시 물건으로 다뤄지는 어둠의 순간이 오는 게 아닌지 두렵습니다.

회중: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목사: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안에서는 악한 것이 쉴 새 없이 솟구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이 부정하고 간사합니다.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고 세상의 헛된 소문에 부화뇌동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리가 우리의 실존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도와주시기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같이: 아멘!

*참회의 묵상기도……………………………………………………………………다같이

*용서의 선포…………………………………………………………………………목사

<목사>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이 끝없으신 분이십니다. 지금 여러분이 아뢴 모든 참회의 내용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행한 이웃의 잘못도 용서하십시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십시오.

<회중> 주님의 용서하심을 감사드리고 찬송합니다.

*평화의 인사…………………………………………………………………………다같이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회중> 예배를 인도하는 주의 종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앉으십시오.)

찬송: 국악찬송 52장, 전능의 하나님……………………………………다같이

 

[말 씀 예 전]

설교전기도……………………………………………………………………………다같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에 따라서

지금 우리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나이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말과 문자가 넘쳐나며

매일 새로운 정보들이 우리의 삶을 자극하고 있나이다.

무엇이 참된 것인지

무엇이 오류인지,

무엇이 임시변통에 불과하고

무엇이 영원한 생명인지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나이다.

우리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민감하게 하시고

거짓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말씀으로 가르치셨고,

‘로고스’로 태초에 이미 존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제1독서: 레위기 19:9-18………………………………………………이일녀 집사

성시교독: 52, 시편 119편………………………………………………목사와 회중

제2독서: 고린도전서 3:16-23…………………………………………이일녀 집사

*제3독서: 마태복음 5:38-48…………………………………………이일녀 집사

설교: 원수사랑, 가능한가?……………………………………………정용섭 목사

설교후기도…………………………………………………………………정용섭 목사

찬송: 292장…………………………………………………………………다같이

 

[봉 헌 과 친 교 예 전]

신앙고백: 사도신경………………………………………………………다같이

*헌금: 633장………………………………………………………………다같이

중보기도……………………………………………………………………정용섭 목사

주기도…………………………………………………………………………다같이

알림……………………………………………………………………………정용섭 목사

 

[파 송 예 전]

*송영: 7장…………………………………………………………………다같이

*위탁의 말씀………………………………………………………………정용섭 목사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의 예배를 마쳤으니

이제 모두 세상으로 돌아가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예상하지 못한 많은 일들을 만날 것이며,

거기서 그리스도의 제자 신분이 검증될 것입니다.

그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렇다고 안일에 빠지지도 말며,

영적인 기쁨과 긴장을 유지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깨어 있으십시오.

*축복기도…………………………………………………………………정용섭 목사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알리는 말씀]

* 구제, 선교비의 자세한 내용이 교회 카페에 올라가 있습니다. 참고하시고, 도움이 되는 의견이 있으면 대글로 다십시오. 이 일을 맡고 있는 구제 선교부장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 정용섭 목사의 특강이 2회 준비되어 있습니다. 1) 설교공부: 여성플라자 4층 시청각실, 2월21일 오전 10시-12시/ 2) 알라딘 주관 ‘문화초대석’ 강연회, 2월21일 오후 7시-9시, 양화진 동아리

* 신광혜 집사가 한달 간의 미국 연수를 마치고 지난 화요일에 돌아왔습니다.

* 2월 성경봉독 담당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6일 곽영미, 13일 임부자, 20일 이일녀, 27일 구행자

* 지난주일(2월13일) 헌금: 352,100원

 

매일묵상(‘다비아’에서)

하나님에 관한 경험(마지막 회)

 

지금 그대에게 하나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소. 이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요. 성서도 바로 그것을 말하오. 그 이외의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오. 신약에서는 하나님 경험을 예수 경험으로 말하오. 두 경험이 동일하기도 하지만 다르기도 하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소. 그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요. 오늘은 소명에 대한 것이오. 하나님 경험, 또는 예수 경험은 소명과 연결되오. 그대가 성경을 꼼꼼히 읽었으면 하나님 경험과 소명, 예수 경험과 소명이 깊숙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요.

요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소명에 대해서 말하오. 그대도 소명 경험이 있소? 부르심을 받은 적이 있소? 어떤 이들은 신학교를 가라는 소명을 받았다 하오. 선교사로 소명을 받기도 하오. 거의 모든 교회 봉사는 소명에 근거하오. 소명은 카리스마(은사)요. 하나님의 선물이오. 소명, 즉 카리스마를 받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말과 똑같소.

여기서 질문해보시오. 그대는 무엇을 근거로 소명을 말하는 거요?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긴 하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요. 하나님은 입도 없고 성대도 없소.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독재자는 아니오. 창조의 질서를 훼손하면서 당신의 뜻을 전하는 분은 아니오. 만약 그런 분이라고 한다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할 필요도 없이 그저 말 한 마디로 세상을 구원해야만 하오.

지금 나는 소명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소명이 있소. 소명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오. 문제는 소명이라는 말로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합리화하지 말라는 것이오. 어떤 젊은 여성이 남자에게 가서 당신과 결혼하라는 소명을 기도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요? 이런 방식의 자기 합리화가 교회에 안에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그대도 인정할 거요.(2010년 12월13일, 월)

소명에 대한 앞의 이야기를 보충하겠소.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하오. 독일어로 부르심은 Beruf요. 베루프는 직업이라는 의미도 되오. 하나님의 부르심과 직업은 동일하다는 뜻이오. 칼뱅도 비슷한 의미로 말했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미 알았을 거요. 신학교에 가거나 선교사가 되는 것, 또는 장로가 되는 것만이 소명이 아니라 모든 삶의 과정이 소명이라는 뜻이오.

요즘 신학생들 중에는 나이가 든 이들도 적지 않소. 마흔, 쉰에도 신학교를 간다오. 목사가 되려는 거요. 소위 ‘주의 종’이 되려는 거요. 그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오. 나이가 들어서 신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오. 경우에 따라서는 일흔 살이라고 하더라도 신학교에 갈 수 있소. 그러나 신학교에 가는 걸 어떤 특별한 소명과 연결 짓는 일은 삼가는 게 좋소. 세상에서 모든 일을 실패한 뒤에 마지못해 도피처로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소명 운운한다면 보기에 좋지 않소.

소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하나님 경험, 또는 예수 경험이 소명과 깊이 연관되기 때문이오. 소명은 교회와 선교라는 전문적인 사역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삶 자체인 것처럼 하나님 경험은 어떤 특별한 영역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오. 무엇을 보았다거나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거요. 성서에는 분명히 보았다거나 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오. 아브라함, 모세, 선지자들이 다 그렇소. 그러나 그런 보도는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시(詩)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시에는 숨어 있는 어떤 세계가 있소이다. 성서가 보도하는 하나님 경험에 대한 묘사 속에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뜻이오. 그것을 놓치고 실제로 소리를 듣거나 어떤 것을 보는 것처럼 말하면 성경을 표면적으로만 읽고 마는 거요.

제목이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었소. 대답이라고 하지 않고 질문이라고 했소. 우리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오. 대답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소. 이런 말이 그대에게 심감 있게 전달되는지 모르겠소. 한국교회 신자들은 뭔가 딱 부러진 대답들을 원하오. “믿는 대로 될지어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오. “십일조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이 만 배로 갚아주십니다!”는 말을 들으면 속으로는 설마 하면서도 “아멘”으로 맞장구를 치면서 그렇게 믿고 싶어 하오.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오.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속임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는 결국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고 말 거요.

하나님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다는 말은 아주 명백한 것이오. 그대는 생명이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겠소? 우리는 그것을 모르오. 의학전문가도, 생물학자도, 물리학자도 그것을 모르오. 지금 우리가 살아있지만 살아있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모르오. 이상하지 않소? 생명현상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생명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오. 어떤 이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생명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거요. 그것으로 모든 질문이 끝난 것은 아니오. 왜 죽어야 하는지, 왜 삶에 참된 만족이 없는지, 스피노자와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서 왜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고 무(無)는 없는지, 민들레와 우리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지, 왜 남자와 여자로 존재하는지 등등, 질문은 끝이 없소. 이 중에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소. 이런 질문의 과정을 통해서 생명의 깊이로 들어갈 것이오.

그대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쉬운 대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질문하는 걸 배우시오. 성경도 질문하는 식으로 읽으시오. 질문이 그냥 되는 건 아니오. 아는 게 있어야 질문도 가능하오. 그런 질문하는 과정에서 그대는 우리를 늘 초월하지만 우리의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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