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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080315) 받아쓰기-1편
어거스틴의 기도문입니다.
제목, 어거스틴의 기도. 책제목이 그렇고 여기 나와있는 기도문 한편인데요. 이게 어쩌면 이 어거스틴의 기도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냥 기도만 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차원에서 많이 인용되는 기도문입니다. 이런 기도문 우리가 또한 주기도문을 외우듯 외우는 것이 참 좋습니다. 우리가 좋은 시인의 시를 많이 읽고 또 외우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함으로서 시어를 접하므로 우리의 정서, 생각들이 깊이로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기도문도 우리가 자주 읽고 외우는 게 참 좋습니다. 자칫하면 그런 것들을 아 너무 형식적이다 생각할지 모르겠는데요. 모든 좋은 내용들은 좋은 형식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형식과 내용이 이렇게 따로 나눠지는 것 아니예요. 그래서 이러한 아주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의 기도문을 우리가 같이 따라 읽고 외우므로 우리의 영성도 그렇게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이태웅 교우가 바둑을 잘 두시는데요. 바둑 처음 잘 배우려면 정석 완전히 외워야 됩니다. 중요한 거예요. 실전에 가게 되면 정석과 다르게 되지만 일단 정석을 완전히 외워야 어느 정도 실력의 단계에 올라갑니다. 성서 내용도 모르고 무조건 외우는 것은 그렇지만 알고 외워야 신앙도 사실은 그거와 같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알면서 외우면 신앙이 깊어지는데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같이 읽고 묵상하고 명상하는 시간으로 하겠습니다.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 주님, 주님은 위대하시므로 크게 찬양받으실 만합니다.
주님의 은덕은 심히 크고 주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피조물중 하나인 인간이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스스로 지은 죄의 증거와
주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그 증거를 몸에 지닌채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피조물중 하나인 이 인간은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님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찬양하고 살도록 하셨으므로
내 마음이 주님안에서 안식할때까지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아멘.
마지막 연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찬양하도록 창조하셨으므로. 무슨 뜻인가요? 우리가 본질적으로 원래부터 자연적 속성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민족, 어디서나 다 신을 따르잖아요. 좀 이름은 다르나 사람에게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성향이 있습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도 그런 것들이 가득 들어 있을거예요.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주님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보통 그렇게 많이 번역하는데 여기는 안식할때 까지는 이렇게 되어 있군요. 우리가 안식할때까지는. 안식이 뭔가요? 편안한 쉼이거든요. 정말 참된 쉼. 여러분들은 살면서 이런 저런 레크리에이션도 하구요, 어떤 재미있는 일이 있을때는 참 즐겁다. 쉬는 것 같다. 바캉스를 갈때는 쉰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완전한 안식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안에 안식할때까지는 하나님 안에 거할때까지는 어디서도 안식할수 없다. 편안하지 않았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어거스틴의 신앙고백이 옳다고 봅니다. 옳기 때문이기도 하구. 진리 때문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혹은 주님안에서 안식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좀더 생각을 많이 하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사이비 안식에 속을때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거나 성취하거나 누구와 경쟁해서 이기면 우쭐해서 기분이 좋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 것에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소유에서 오는 것 아니다. 깊이 생각하셔야 되구요. 그런 것이 우리의 삶에 일치가 되면 영성이 깊어지게 됩니다. 영적인 삶이 시작되는 거죠.
오 주님, 주님은 위대하시므로 크게 찬양받으실 만합니다.
주님의 은덕은 심히 크고 주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피조물중 하나인 인간이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스스로 지은 죄의 증거와
주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그 증거를 몸에 지닌채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피조물중 하나인 이 인간은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님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찬양하고 살도록 하셨으므로
내 마음이 주님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편 1편입니다. 욥기서 다음에 있는 시편, 구약성경 중후반부에 있습니다. 시편이 150권, 150편까지 있습니다. 우리가 한주일에 1편씩, 매주 수요일 1편씩 읽고 묵상하게 되는데 그러면 약 3년 정도 걸릴텐데요. 조금 속도가 늦기는 하지만 그래도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시편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겠습니다. 1편 1절부터 6절이 있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2]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공동번역) 아멘
복되어라. 이런 말로 시작하네요. 여러분 이 말을 들으면 신약성경 어느 구절 기억나시죠?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하는 산상수훈, 특별히 8복에 나와 있는 그 말씀이 연상될 것입니다. 복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든요. 여기서 말하는 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거스틴의 기도에서 생각했듯이, 어거스틴의 기도에서는 참된 안식이라는 그러한 용어로 나왔는데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 그것도 부분적인 복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7-80년, 조금더 90년 살죠. 빨리 지나갑니다. 저도 어느 사이에 반을 훌쩍 넘어서 중년이후를 사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참 짧네요. 그래도 남아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있다고 우리가 안심하고 삽니다만 그러나 안심할 것이 못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너무 짧다고 하는 것, 어떻게 보면 죽음과 연관해서 말씀을 드린다면 살았지만 죽음이 온 것과 똑 같다고 같이 사는 것, 이것이 기독교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조금 멀리 10년 20년 30년 40년 후라고 하더라도 30년 40년이 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그 순간을 지금 이 현재 삶에서 살아내느냐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영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실감이 나지 않을 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말장난같이 들릴 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고 안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죽는 날을 늘 기억하고 생각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것이 참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죽는 순간 고기 보다 더 넘어서 내가 죽어서 내가 묻히든 화장하든, 화장 가능성이 높을 수 있습니다. 장기 기증을 하고 나머지는 다 화장을 하고 재를 뿌린다고 하면. 그것도 괜찮으니까요. 집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옆에 같이 묻히지 않아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아. 훨씬뒤에 죽고서도 백년 2백년 지난 다음에 내가 어디 있을까요? 이 땅에서 살았던 내 모습은 다 없어지는 겁니다. 그게 뒤가 어디 일까요? 근데 백년 2백년 3백년이 아까 몇 십년이 시간이 짧다고 했는데 이것마저도 짧거든요. 지금 우리가 같이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는데 시편 1편을 이렇게 모여서 공부한 사람들이 천년전에도 있었구요. 어거스틴의 시대에도 있었구요. 아주 오래전 구약으로 넘어가면 더 오래 되었겠군요. 이 시편은 포로기 전후에 쓰여졌습니다. 2천5백년 전후에 쓰여졌거든요. 그 이야기들이 다윗의 시들이 많아서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쭈욱 전승된 이야기이고 실제적으로 시편이 형성된 것은 포로기 정도에 2500년정도 잡으면 됩니다. 요 구절 말씀들은 2500년전부터 히브리인들이 계속 모여서 읽었을 거고 계속 모여서 읽다가 다 죽었습니다.
어디있을까? 그 사람들은요? 여러분들이 천국에 있다 하겠지요. 천국이 어디일까요? 우주공간 어디는 아니겠지요. 어딜까요? 1992년 다미선교회의 예수님이 그때에 10월에 재림한다 했던 사람들은 북극성 어디쪽에 하늘나라 있다. 휴거된다. 거짓말이죠. 지금까지 있던 사람들 어디 가 있을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모든 문제들을 다 설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뜻은 아니예요. 다만 여러분들이 머리에 그리고 있는 그런 부분은 아닐거예요. 그건 시간이 나는대로 조금씩 이야기하기로 하게 될거구요.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수천년 전에 성경을 읽었던 사람들이 다 그렇게 가듯이 우리도 가는 거예요. 앞으로 천년후에 그리고 후손들은 우리가 여기에 앉아 시편을 공부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우리가 역사적으로 남을만한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 큰 흐름속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렇게 다 흘러서 가고 맙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교회를 성도들과 꾸려가구요.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간혹 신학생들에게 강의하고 등등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고 뭔가 하는데 이게 정말 과연 나인가? 하는 그러한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미 시간 5, 6백년 흘러가면 지금 살아있는 내가 뭘까? 이 말이 어떻게 들릴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과거 천년전과 천년후 지금 다 순간 하나같습니다. 순간속에서 우리는 뭔가 열심히 살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일상적인 삶들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은 과거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듯이 과거 현재 미래 전체 시간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는 분이니까 여러분 열심히 세상을 살되 묶여 있지 마세요. 고 두 가지 긴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 동시에 거기에 묶이지 않는 것 초월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한데 그걸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이라고 할때 너무 세속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해서 이 땅에서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참된 복, 참된 안식 이런 사람은 누구인가.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1)
1절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시편 1편은 지혜의 교사가 가르치는 말 같아요. 이렇게 좀 지혜롭게 살아라하는 것이죠.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않는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악을 꾸미는 자리는 재미있거든요. 그게 겉으로는 세련되게 뭔가 좋은 뜻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따지고 들면 악을 도모하는 경우 많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이중적이거든요. 겉으로만 드러난 것을 보고 속을 들여다 보기 힘듭니다. 정치는 늘 이렇게 악을 도모할 경우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유익, 악을 도모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이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악을 꾸미는 자리가 뭔지 알지 못하고요. 그리고 그게 매력적인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 이거는 일반 세속사에서 지지고 볶고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대학교 대학교수도 그런 악을 도모하는 일이 많을 겁니다. 이 사회에서 누가 총장이 되냐 누구를 밀어내느냐 굉장히 치열하게 싸우거든요. 똑 같습니다. 시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이나 대학교수 사회나 변호사나 검사나 인간의 본성이 악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하기 힘들어요. 악을 도모하는 자리에 가지 않는다는 것요. 쉽다면 시편기자가 뭐라고 썼겠어요. 쉽지 않으니까 그런거지요.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 다음은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1절은 그런 정도로 이야기하겠습니다. 1절은 그렇게 흉보는 것 굉장히 재미있거든요. 조소하는 거거든요. 같이 모여서 흉보는 것 재미있다. 어울리지 않는다.
2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죠. 하나님의 말씀. 예.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이게 어느 정도의 경지일까요? 참 이게 쉽지 않습니다. 저도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읽었다고 하는 저도 할지라도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가르칠때 깨달을때 그렇다 그렇다 하는데 실제로 살아갈때는 그렇지 않을때가 많습니다. 상식적으로 일반적 교양으로 판단하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법,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아서 그 말씀을 되새긴다. 하루 종일 성경말씀을 읽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 형제님, 자매님. 또 입만 벌렸다면 할렐루야 아멘 이렇게 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가? 그렇지 않거든요. 이거는 하나의 형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입에 달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말씀과 자기 삶이 일치가 되는 단계로 들어가라 하는 것입니다.
3절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나요? 어떤 차원으로 믿으시나요? 모든 일이 잘된다고 할 때 시험만 보기만 하면 합격한다거나, 주식 투자하는데 늘 대박이 난다거나 이런 차원은 아니겠죠. 그런데 성서기자는 모든 것이 잘된다고 할까요? 어떤가요? 무슨 뜻일까요? 성경을 지도하면서 제 말을 정답으로 생각말라. 방향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정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받으시고 여러분 나름대로 생각하십시오. 제가 보기에 안될일이 무엇이냐. 없다는 이 말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좋은 거예요. 설령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좋은 기회라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걸렸어도 낙방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는 은총으로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영성이죠. 짜증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데 그것을 넘어서서야 될거예요. 가능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가운데 들어갈수록 우리앞에서 더 하나님과의 일치, 이런 것들이 가능해집니다. 아니다 난 그래도 세상사람 생각할때도 좋은 것 잘되는 것 그런 것만을 원한다고 생각하시면 아직까지 아직도 기독교 신앙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안되는 것이 없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문학적 표현을 하시네요. 문학적 표현이예요. 상상해 보십시오. 냇가에 심겨진 나무, 우리로서야 우리 눈으로야 나무는 산에 있어도 잘되고 냇가도 무슨 상관이냐 하실지 모르지만 쓴 사람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가나안 땅이잖습니까? 광야에요. 척박합니다. 사막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쪽에서는 시냇물이 아주 필수적이고 생명의 원천인거죠. 이걸 좀 더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냇가와 마찬가지니까요. 정말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잘되는 그러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에 반대되는 사람이예요. 복있는 사람이 아닌 반대되는 사람, 어떤 사람인가요? 이 사람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다. 구체적으로 이 사람이 어떤 일을 행했느냐? 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1절에 나와 있는 것을 연결해 본다면 이 사악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 공부 시간을 토론하는 시간으로 할까요? 제가 질문을 할까요?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는 사람.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린다. 복 있는 사람이 행하는 것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표현이 대단합니다. 바람에 까불리는 겨, 쉽게 흔들리는 거죠. 조그만 어려움이 와도 견디지 못하는거죠. 그렇습니다.
어저께 밤에 EBS인가 거기에서 마리아 칼라스에 대한 방영이 나왔어요.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거든요. 그런데 저는 몰랐는데 그걸 보니까 정말 대단한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년을 살았을까?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사람이 오나시스의 꾀임에 넘어가서, 그리스의 선박왕, 몰고 다니는 큰 배있죠. 그거에다가 선물공세 하니까 넘어갔습니다. 오나시스는 키도 작고 똥똥하고 볼품없고 나이도 좀 들었던 것 같아요. 이 사람의 전략에 넘어가서, 잘생긴 키큰 마리아 칼라스가 넘어갔어요. 여성 분들은 선물공세에 좀 약한 것 같아요. 누가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인데 빠져갖고 몇 년 동안 재미있게 지냈다. 몇년 지난 후에 칼라스도 모르게 오나시스가 존 에프 케네디의 미망인을 만나다가 2년 동안 만나다가 결국 미망인하고 결혼합니다. 마리아 칼라스하고는 결혼하지 않고 그냥 살았죠. 마리아 칼라스는 거기에 충격을 받아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가창력도 떨어지고 그러니까 대중들이 따라오지 않고 인기를 더 이상 유지 못하니까 견디질 못해 합니다. 스타가 스타 자리에 올라갔다가 그게 좀 흔들리니까 수면제 먹고 자살기도도 하다가 쇠약해져서 53세인가 이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 나이에도 관리만 잘하면 노래를 잘 할 수 있거든요. 제가 한 여자분을 매도하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분 나름대로의 삶의 상처들이 얼마나 심각했을까? 다는 모르겠으나 있겠죠. 오늘 구절에 읽으면서 생각나는 거죠.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다. 명성에 흔들리자 자기 모든 삶의 의지를 꺾고 그렇게 점점 시들어서 젊은 나이에 53살 나이에 죽다니. 다른 사람이 볼때는 여전히 인기, 미모가 있고 그런데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은 것이 아닌가? 현대의 삶이 많은 것을 이루고 있지만 그러나 2500년전의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느쪽입니까? 바람에 흔들립니까? 겨 처럼 그럽니까? 아니면 냇가에 심겨진 나무에 같은가? 까불리는 겨가 어떠냐?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5)
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는 거거든요. 속 중심에 대한 심판이거든요. 겉이 아무리 화려해도 중심이 부실하면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겠죠.
마지막 6절입니다.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6)
네.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되겠군요.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이것을 여러분은 자꾸 사업이 실패한다. 이런 쪽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속이 실패하는 거예요. 아무리 화려해도 속은 멸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어느 한 순간도 편안하지 못할 수 있어요. 결국 악한 자의 길은 그길로 가게 되구요.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남편이 보살피는 거나 아내가 보살피거나 자식이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보살피신다고 하네요. 이러한 영적인 경지가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그런 믿음 생활 하고 계시는 것인줄 알고요 미처 거기까지 다 이르지 못했다면 야훼 하나님이 손길을 호흡하듯이 느껴봅시오. 늘 함께 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죠. 저와 여러분이 2500년전의 시를 쓴 시편기자의 이 시내용처럼 정말 참된 복에 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영적인 경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야훼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보라. 시편기자의 시 내용처럼 참된 복에 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편을 다시 읽겠습니다.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2]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공동번역) 아멘
어거스틴의 기도문입니다.
제목, 어거스틴의 기도. 책제목이 그렇고 여기 나와있는 기도문 한편인데요. 이게 어쩌면 이 어거스틴의 기도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냥 기도만 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차원에서 많이 인용되는 기도문입니다. 이런 기도문 우리가 또한 주기도문을 외우듯 외우는 것이 참 좋습니다. 우리가 좋은 시인의 시를 많이 읽고 또 외우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함으로서 시어를 접하므로 우리의 정서, 생각들이 깊이로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기도문도 우리가 자주 읽고 외우는 게 참 좋습니다. 자칫하면 그런 것들을 아 너무 형식적이다 생각할지 모르겠는데요. 모든 좋은 내용들은 좋은 형식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형식과 내용이 이렇게 따로 나눠지는 것 아니예요. 그래서 이러한 아주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의 기도문을 우리가 같이 따라 읽고 외우므로 우리의 영성도 그렇게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이태웅 교우가 바둑을 잘 두시는데요. 바둑 처음 잘 배우려면 정석 완전히 외워야 됩니다. 중요한 거예요. 실전에 가게 되면 정석과 다르게 되지만 일단 정석을 완전히 외워야 어느 정도 실력의 단계에 올라갑니다. 성서 내용도 모르고 무조건 외우는 것은 그렇지만 알고 외워야 신앙도 사실은 그거와 같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알면서 외우면 신앙이 깊어지는데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같이 읽고 묵상하고 명상하는 시간으로 하겠습니다.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 주님, 주님은 위대하시므로 크게 찬양받으실 만합니다.
주님의 은덕은 심히 크고 주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피조물중 하나인 인간이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스스로 지은 죄의 증거와
주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그 증거를 몸에 지닌채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피조물중 하나인 이 인간은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님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찬양하고 살도록 하셨으므로
내 마음이 주님안에서 안식할때까지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아멘.
마지막 연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찬양하도록 창조하셨으므로. 무슨 뜻인가요? 우리가 본질적으로 원래부터 자연적 속성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민족, 어디서나 다 신을 따르잖아요. 좀 이름은 다르나 사람에게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성향이 있습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도 그런 것들이 가득 들어 있을거예요.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주님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보통 그렇게 많이 번역하는데 여기는 안식할때 까지는 이렇게 되어 있군요. 우리가 안식할때까지는. 안식이 뭔가요? 편안한 쉼이거든요. 정말 참된 쉼. 여러분들은 살면서 이런 저런 레크리에이션도 하구요, 어떤 재미있는 일이 있을때는 참 즐겁다. 쉬는 것 같다. 바캉스를 갈때는 쉰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완전한 안식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안에 안식할때까지는 하나님 안에 거할때까지는 어디서도 안식할수 없다. 편안하지 않았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어거스틴의 신앙고백이 옳다고 봅니다. 옳기 때문이기도 하구. 진리 때문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혹은 주님안에서 안식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좀더 생각을 많이 하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사이비 안식에 속을때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거나 성취하거나 누구와 경쟁해서 이기면 우쭐해서 기분이 좋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 것에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소유에서 오는 것 아니다. 깊이 생각하셔야 되구요. 그런 것이 우리의 삶에 일치가 되면 영성이 깊어지게 됩니다. 영적인 삶이 시작되는 거죠.
오 주님, 주님은 위대하시므로 크게 찬양받으실 만합니다.
주님의 은덕은 심히 크고 주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피조물중 하나인 인간이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스스로 지은 죄의 증거와
주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그 증거를 몸에 지닌채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피조물중 하나인 이 인간은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님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찬양하고 살도록 하셨으므로
내 마음이 주님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편 1편입니다. 욥기서 다음에 있는 시편, 구약성경 중후반부에 있습니다. 시편이 150권, 150편까지 있습니다. 우리가 한주일에 1편씩, 매주 수요일 1편씩 읽고 묵상하게 되는데 그러면 약 3년 정도 걸릴텐데요. 조금 속도가 늦기는 하지만 그래도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시편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겠습니다. 1편 1절부터 6절이 있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2]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공동번역) 아멘
복되어라. 이런 말로 시작하네요. 여러분 이 말을 들으면 신약성경 어느 구절 기억나시죠?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하는 산상수훈, 특별히 8복에 나와 있는 그 말씀이 연상될 것입니다. 복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든요. 여기서 말하는 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거스틴의 기도에서 생각했듯이, 어거스틴의 기도에서는 참된 안식이라는 그러한 용어로 나왔는데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 그것도 부분적인 복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7-80년, 조금더 90년 살죠. 빨리 지나갑니다. 저도 어느 사이에 반을 훌쩍 넘어서 중년이후를 사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참 짧네요. 그래도 남아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있다고 우리가 안심하고 삽니다만 그러나 안심할 것이 못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너무 짧다고 하는 것, 어떻게 보면 죽음과 연관해서 말씀을 드린다면 살았지만 죽음이 온 것과 똑 같다고 같이 사는 것, 이것이 기독교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조금 멀리 10년 20년 30년 40년 후라고 하더라도 30년 40년이 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그 순간을 지금 이 현재 삶에서 살아내느냐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영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실감이 나지 않을 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말장난같이 들릴 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고 안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죽는 날을 늘 기억하고 생각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것이 참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죽는 순간 고기 보다 더 넘어서 내가 죽어서 내가 묻히든 화장하든, 화장 가능성이 높을 수 있습니다. 장기 기증을 하고 나머지는 다 화장을 하고 재를 뿌린다고 하면. 그것도 괜찮으니까요. 집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옆에 같이 묻히지 않아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아. 훨씬뒤에 죽고서도 백년 2백년 지난 다음에 내가 어디 있을까요? 이 땅에서 살았던 내 모습은 다 없어지는 겁니다. 그게 뒤가 어디 일까요? 근데 백년 2백년 3백년이 아까 몇 십년이 시간이 짧다고 했는데 이것마저도 짧거든요. 지금 우리가 같이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는데 시편 1편을 이렇게 모여서 공부한 사람들이 천년전에도 있었구요. 어거스틴의 시대에도 있었구요. 아주 오래전 구약으로 넘어가면 더 오래 되었겠군요. 이 시편은 포로기 전후에 쓰여졌습니다. 2천5백년 전후에 쓰여졌거든요. 그 이야기들이 다윗의 시들이 많아서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쭈욱 전승된 이야기이고 실제적으로 시편이 형성된 것은 포로기 정도에 2500년정도 잡으면 됩니다. 요 구절 말씀들은 2500년전부터 히브리인들이 계속 모여서 읽었을 거고 계속 모여서 읽다가 다 죽었습니다.
어디있을까? 그 사람들은요? 여러분들이 천국에 있다 하겠지요. 천국이 어디일까요? 우주공간 어디는 아니겠지요. 어딜까요? 1992년 다미선교회의 예수님이 그때에 10월에 재림한다 했던 사람들은 북극성 어디쪽에 하늘나라 있다. 휴거된다. 거짓말이죠. 지금까지 있던 사람들 어디 가 있을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모든 문제들을 다 설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뜻은 아니예요. 다만 여러분들이 머리에 그리고 있는 그런 부분은 아닐거예요. 그건 시간이 나는대로 조금씩 이야기하기로 하게 될거구요.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수천년 전에 성경을 읽었던 사람들이 다 그렇게 가듯이 우리도 가는 거예요. 앞으로 천년후에 그리고 후손들은 우리가 여기에 앉아 시편을 공부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우리가 역사적으로 남을만한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 큰 흐름속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렇게 다 흘러서 가고 맙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교회를 성도들과 꾸려가구요.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간혹 신학생들에게 강의하고 등등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고 뭔가 하는데 이게 정말 과연 나인가? 하는 그러한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미 시간 5, 6백년 흘러가면 지금 살아있는 내가 뭘까? 이 말이 어떻게 들릴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과거 천년전과 천년후 지금 다 순간 하나같습니다. 순간속에서 우리는 뭔가 열심히 살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일상적인 삶들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은 과거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듯이 과거 현재 미래 전체 시간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는 분이니까 여러분 열심히 세상을 살되 묶여 있지 마세요. 고 두 가지 긴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 동시에 거기에 묶이지 않는 것 초월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한데 그걸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이라고 할때 너무 세속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해서 이 땅에서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참된 복, 참된 안식 이런 사람은 누구인가.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1)
1절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시편 1편은 지혜의 교사가 가르치는 말 같아요. 이렇게 좀 지혜롭게 살아라하는 것이죠.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않는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악을 꾸미는 자리는 재미있거든요. 그게 겉으로는 세련되게 뭔가 좋은 뜻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따지고 들면 악을 도모하는 경우 많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이중적이거든요. 겉으로만 드러난 것을 보고 속을 들여다 보기 힘듭니다. 정치는 늘 이렇게 악을 도모할 경우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유익, 악을 도모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이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악을 꾸미는 자리가 뭔지 알지 못하고요. 그리고 그게 매력적인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 이거는 일반 세속사에서 지지고 볶고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대학교 대학교수도 그런 악을 도모하는 일이 많을 겁니다. 이 사회에서 누가 총장이 되냐 누구를 밀어내느냐 굉장히 치열하게 싸우거든요. 똑 같습니다. 시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이나 대학교수 사회나 변호사나 검사나 인간의 본성이 악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하기 힘들어요. 악을 도모하는 자리에 가지 않는다는 것요. 쉽다면 시편기자가 뭐라고 썼겠어요. 쉽지 않으니까 그런거지요.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 다음은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1절은 그런 정도로 이야기하겠습니다. 1절은 그렇게 흉보는 것 굉장히 재미있거든요. 조소하는 거거든요. 같이 모여서 흉보는 것 재미있다. 어울리지 않는다.
2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죠. 하나님의 말씀. 예.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이게 어느 정도의 경지일까요? 참 이게 쉽지 않습니다. 저도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읽었다고 하는 저도 할지라도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가르칠때 깨달을때 그렇다 그렇다 하는데 실제로 살아갈때는 그렇지 않을때가 많습니다. 상식적으로 일반적 교양으로 판단하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법,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아서 그 말씀을 되새긴다. 하루 종일 성경말씀을 읽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 형제님, 자매님. 또 입만 벌렸다면 할렐루야 아멘 이렇게 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가? 그렇지 않거든요. 이거는 하나의 형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입에 달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말씀과 자기 삶이 일치가 되는 단계로 들어가라 하는 것입니다.
3절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나요? 어떤 차원으로 믿으시나요? 모든 일이 잘된다고 할 때 시험만 보기만 하면 합격한다거나, 주식 투자하는데 늘 대박이 난다거나 이런 차원은 아니겠죠. 그런데 성서기자는 모든 것이 잘된다고 할까요? 어떤가요? 무슨 뜻일까요? 성경을 지도하면서 제 말을 정답으로 생각말라. 방향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정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받으시고 여러분 나름대로 생각하십시오. 제가 보기에 안될일이 무엇이냐. 없다는 이 말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좋은 거예요. 설령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좋은 기회라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걸렸어도 낙방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는 은총으로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영성이죠. 짜증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데 그것을 넘어서서야 될거예요. 가능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가운데 들어갈수록 우리앞에서 더 하나님과의 일치, 이런 것들이 가능해집니다. 아니다 난 그래도 세상사람 생각할때도 좋은 것 잘되는 것 그런 것만을 원한다고 생각하시면 아직까지 아직도 기독교 신앙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안되는 것이 없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문학적 표현을 하시네요. 문학적 표현이예요. 상상해 보십시오. 냇가에 심겨진 나무, 우리로서야 우리 눈으로야 나무는 산에 있어도 잘되고 냇가도 무슨 상관이냐 하실지 모르지만 쓴 사람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가나안 땅이잖습니까? 광야에요. 척박합니다. 사막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쪽에서는 시냇물이 아주 필수적이고 생명의 원천인거죠. 이걸 좀 더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냇가와 마찬가지니까요. 정말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잘되는 그러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에 반대되는 사람이예요. 복있는 사람이 아닌 반대되는 사람, 어떤 사람인가요? 이 사람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다. 구체적으로 이 사람이 어떤 일을 행했느냐? 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1절에 나와 있는 것을 연결해 본다면 이 사악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 공부 시간을 토론하는 시간으로 할까요? 제가 질문을 할까요?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는 사람.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린다. 복 있는 사람이 행하는 것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표현이 대단합니다. 바람에 까불리는 겨, 쉽게 흔들리는 거죠. 조그만 어려움이 와도 견디지 못하는거죠. 그렇습니다.
어저께 밤에 EBS인가 거기에서 마리아 칼라스에 대한 방영이 나왔어요.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거든요. 그런데 저는 몰랐는데 그걸 보니까 정말 대단한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년을 살았을까?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사람이 오나시스의 꾀임에 넘어가서, 그리스의 선박왕, 몰고 다니는 큰 배있죠. 그거에다가 선물공세 하니까 넘어갔습니다. 오나시스는 키도 작고 똥똥하고 볼품없고 나이도 좀 들었던 것 같아요. 이 사람의 전략에 넘어가서, 잘생긴 키큰 마리아 칼라스가 넘어갔어요. 여성 분들은 선물공세에 좀 약한 것 같아요. 누가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인데 빠져갖고 몇 년 동안 재미있게 지냈다. 몇년 지난 후에 칼라스도 모르게 오나시스가 존 에프 케네디의 미망인을 만나다가 2년 동안 만나다가 결국 미망인하고 결혼합니다. 마리아 칼라스하고는 결혼하지 않고 그냥 살았죠. 마리아 칼라스는 거기에 충격을 받아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가창력도 떨어지고 그러니까 대중들이 따라오지 않고 인기를 더 이상 유지 못하니까 견디질 못해 합니다. 스타가 스타 자리에 올라갔다가 그게 좀 흔들리니까 수면제 먹고 자살기도도 하다가 쇠약해져서 53세인가 이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 나이에도 관리만 잘하면 노래를 잘 할 수 있거든요. 제가 한 여자분을 매도하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분 나름대로의 삶의 상처들이 얼마나 심각했을까? 다는 모르겠으나 있겠죠. 오늘 구절에 읽으면서 생각나는 거죠.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다. 명성에 흔들리자 자기 모든 삶의 의지를 꺾고 그렇게 점점 시들어서 젊은 나이에 53살 나이에 죽다니. 다른 사람이 볼때는 여전히 인기, 미모가 있고 그런데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은 것이 아닌가? 현대의 삶이 많은 것을 이루고 있지만 그러나 2500년전의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느쪽입니까? 바람에 흔들립니까? 겨 처럼 그럽니까? 아니면 냇가에 심겨진 나무에 같은가? 까불리는 겨가 어떠냐?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5)
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는 거거든요. 속 중심에 대한 심판이거든요. 겉이 아무리 화려해도 중심이 부실하면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겠죠.
마지막 6절입니다.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6)
네.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되겠군요.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이것을 여러분은 자꾸 사업이 실패한다. 이런 쪽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속이 실패하는 거예요. 아무리 화려해도 속은 멸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어느 한 순간도 편안하지 못할 수 있어요. 결국 악한 자의 길은 그길로 가게 되구요.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남편이 보살피는 거나 아내가 보살피거나 자식이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보살피신다고 하네요. 이러한 영적인 경지가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그런 믿음 생활 하고 계시는 것인줄 알고요 미처 거기까지 다 이르지 못했다면 야훼 하나님이 손길을 호흡하듯이 느껴봅시오. 늘 함께 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죠. 저와 여러분이 2500년전의 시를 쓴 시편기자의 이 시내용처럼 정말 참된 복에 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영적인 경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야훼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보라. 시편기자의 시 내용처럼 참된 복에 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편을 다시 읽겠습니다.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2]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공동번역) 아멘
시편 공부까지 받아쓰기를?
나도 내가 헛소리를 하지 않았나 잘 들여다보아야겠군요.
또 하루가.
어제와 비슷하지만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네요.
좋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