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편 강해- 창조자와 인간
시편 8편입니다. 제가 혼자 읽을 테니까 눈으로 잘 따라서 보시기 바랍니다.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기띳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
1.야훼, 우리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2.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나이다.
3.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5.그를 하나님 다음 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7.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딸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공동번역>
<참고> 개역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 나이다
2.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 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릭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자, 그러면 이 시간에는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마지막 구절은 다 같이 읽으면 되겠습니다. 제가 먼저 1절 읽겠습니다. 내용을 잘 보시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독 합시다.
1.야훼, 우리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2.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나이다.
3.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5.그를 하나님 다음 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7.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딸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아멘! 오늘 이 시편 말씀의 제목은 “창조자와 인간”입니다. 우리가 읽으면서 내용을 대충 파악 했겠지만요, 그 창조자에 대한 하나님의 찬양, 노래, 영광송이고요, 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뭐냐, 인간의 위치, 인간의 가치, 인간의 역할, 사명, 그런 것들을 여기 같이 아우러서 쓰고 있습니다. 여기 시를 쓴 사람의 어떤 정신적인 상태, 그리고 그의 세계경험 이런 것들을 한번 예측한다고 할까요? 한번 여러분들이 상상해 보십시오, 한 2500년, 3000년 전의 사람인데요, 예, 얼마 전에 이소연씨가 우주여행을 하고 왔다고 하죠? 예, 아마 2500,3000년 전에 이 시편을 쓴 사람은 도저히 상상을 못 할 겁니다. 지구를 떠나서, 대기권 바깥에 나가서 이 지구를 바라본다고 하는 사실, 사실은 이미 그 전에 아폴로를 타고서 달까지 갔다 온 인간이니까, 지금 뭐 이소연씨가 갔다 온 거는 동네 산책한 거나 마찬가지죠, 달에 갔다 온 것에 비해서는, 달에서 이 지구를 바라봤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요? 지금도 대보름달을 보면 정말 휘황찬란하고 크죠? 쟁반처럼? 그런데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게 되면, 지금 우리가 보는 달 보다 지름이 네 배가 큰 거예요. 놀랍죠, 그걸 바꿔서 상상해 볼 수 있잖아요? 달이 지금보다 지름이 네 배나 크다고 해 보세요, 놀랍지요, 재미있는 그런 우주인데요,
이 시편기자가 살았을 때 그 사람들은 이 우주 이 세계의 별, 달 하늘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지금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지 몇 달 된 아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몇 살 되지 않은 그래서 우주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도 없는 그런 상태와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 비해서 우주에 대한 지식이 아주 미숙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세계를 직면한다고 하는 점에서는 고대인들이나, 지금 우리나 큰 차이가 없어요, 우리가 조금 정보를 아는 것 뿐이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우주의 광활함, 이런 것에서는 2500년 전의 3000년전의 시인이나, 우리나 거기서 거기, 속된 말로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 할 겁니다. 지금 우주여행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주 전체 크기에 비해서는 해변 가의 모래 한 알 정도를 우리가 좀 봤을까 정도고요, 거의 우리는 우주의 실체가 뭔지를 알지 못합니다. 상대적으로 조금 많이 아는 것에 불과한 오늘이나, 상대적으로 조금 적게 아는 이 시편기자가 살고 있었던 그 당시 사람들이나, 이 세계 전체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 그 두려움 그런 것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그것을 찬양하고 있어요,
1절에 그렇게 말하지요? 1.야훼, 우리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놀라움의 표시지요?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그걸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야, 아, 늘 거기 별이 있고, 그러니까 익숙하게 지나가지만, 그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건 정말 놀라운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기자의 오늘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보셔야 됩니다. 이 사람은 그저 자연이 위대하고 장엄하고 엄청나다고 하는 사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뭘까요? 하나님이죠,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냐,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하나님 신앙이 다른 종교에 있는 자연종교하고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자연적인, 이집트도 태양을 숭배했거든요? 자연은 다 엄청나고 위대하니까 얼마든지 자연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섬기는 거죠, 달을 섬긴다거나, 해를 섬긴다거나, 뭐 그렇습니다. 바다의 용왕이라든지, 뭐 그런 것을 섬기는데, 성서기자들은 자연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피조물이다, 누구에 의해 지어진 거다, 거기에 영적인 초점을 두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게 별로, 그게 그거 아니냐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주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거든요? 성서기자들은 이 시편만이 아니라 성서전체가 다 그런데요? 성서의 영성은 이 자연을, 자연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알기는 알지만, 그것을 조금 신학적인 말로 해서 “탈신성화” 했습니다.
일반 자연종교에서는 자연을 신성화 한 반면에 이 성서기자들은 탈신성화, 예,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 이쪽으로 신앙의 초점을 두었습니다. 예, 그 1절에서 바로 시편기자가 세상을 지으신 그러한 하나님의 경이로움, 그러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세상자체를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여러분이 전제하고 읽어야 되요, 그건 세상을 지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죠, 2절을 보면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상징일까요? 실제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예, 정말 어린이 갓난아이를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어쩌면 그것보다도 지식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이야기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조금 모자라도 이 세상의 장엄함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찬양할 수 밖 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린이와 젖먹이들이 노래한다, 그거는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그 찬양, 하나님에 대한 영광돌림, 그런 것들이 지식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오히려 없는 사람들이 영적세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로 우리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2절 후 반절에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했다, 누굴까요? 당신께 맞서는 자들 예, 이건 꼭 악한 사람들이라고 말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맞선다고 한다면, 교만한 사람들이죠?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그런 거겠죠, 지식 자랑한다거나 자기가 성취한 어떤 것들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요, 정치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예술적인 것 일 수 도 있고요, 사회적인 업적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될 그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려는 사람들, 그들을 가리켜서 당신께 맞서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들이 비교되죠, 어린아이, 젖먹이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요, 오히려 잘난 사람들,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맞서죠, 그런데, 시편기자는 그 맞서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다, 무색하게 했다, 그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 이런 시편기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마 제가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잘 아실거구요. 이거는 그저 그러려니, 아, 그랬으면 좋겠거니라고 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 인간 삶과 영성을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를 낮춘말이죠, 자기기 이룬 게 많을수록 자기를 낮추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그럼 결국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지만, 하나님을 맞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젖먹이처럼 자기가 내세울 게 없는 그러한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3절에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군요.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 그리고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절에 보면 그 다음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일단 3절만 보더라도, 여기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그 짤막하게 말하지만, 그 장엄함, 그것을 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들이지요, 하나님이 달과 별들을 달아 놓았다,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은하수 같은 것들, 그리고 지금은, 여기 도시 진량도 큰 도시는 아니지만 불빛들이 많아 가지고 밤에 달빛을 보기 힘들거든요? 보더라도 띄엄띄엄 인데 옛날 제가 어렸을 때는 동네 나가서 놀 때 정말 칠흙 같은 어둠이었어요. 그러면 정말 밤하늘의 별들이 우수수 떨어 질 것 같은 그런 경험이 어릴 때 많았어요. 그러면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물론 교회는 다니지 않았을 때요, 아주 어렸을 때요, 말로는 그렇게 표현하지 못했지만, 어린아이래도 어떤 장엄함 앞에서 두려움, 그런 것들을 느낀 경험들이 있습니다. 은하수, 별들, 우주 그리고 떨어진 별똥별, 그런 것들 좀 봤어요? 어렸을 때? 별 똥별 떨어지는 것, 유성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을 참 많이 봤습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한 1초 2초 정도, 불빛을 내면서 지구로 떨어지는 돌덩이들, 그런 빛들을 봤어요. 참 신기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게 되면 시편기자가 이제 인간이 누구냐 그런 것들을 생각 할 수 밖 에 없다는 거예요.
4절에 그런 이야기를 하죠?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걸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 그러한 장엄한 우주, 그리고 우주만이 아니라 미시의 세계에서의 꽃 한 송이라도, 거기서 사실은 우주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데요, 그러한 신비로움, 그러한 것들을 볼 때, 우리는 이 사람이 누군가,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난 것 같이 사람들이 서로 그렇게 하는데, 이러한 우주와 생명, 이런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내세울 것이 뭐가 있나, 인간이 얼마나 비천한가, 그런 것을 깨달을 수 밖 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편기자가 인간이 누구냐, 인간이 무엇이냐, 그렇게 반복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야기 할 수 밖 에 없었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이렇게 인간이 누구냐 하는 것이 그냥 자책감으로 하는 것, 아니면 자조적인 생각으로 자기의 무력감 속에서 빠져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이 사람들은 인간을 이야기 할 때도 결국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연을 말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고요, 인간이 누구냐, 왜 이렇게 내가 작냐, 이렇게 미련하냐, 그런 걸 말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이죠? 5절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어떤, 5절에서 8절까지 쭉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에게 정말 어떤 어떤 일들을 하셨다고 하는 거지요, 무언가요? 하나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셨다, 하나님은 각주에 나와 있듯이 천사들, 혹은 신들,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적인 자리에 다음 가는 자리, 그러니까 동물이 아니라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위치를 말하겠지요,
그것을 구체적으로 성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고요, 하나님의 영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은 동물하고 다른 특성들을 갖고 삽니다. 예, 그런 것들이 뭐냐,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우리 인간만이 죽음을 의식하고요, 죽음을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곧 시간을 의식한다고 하는 겁니다. 동물들은 시간을 의식하지 못하지요. 죽음도 없죠, 그들은 죽음도 의식하지 않죠? 한 순간에, 그 순간에 충실한 것으로 삽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동물은 자연이죠, 자연적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 시간 이런 것을 인식하면서, 자연적인 습성이 있지만, 자연을 뛰어 넘는 어떤 성질, 어떤 성질, 본성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뭐 그런데 근거해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인간만이 문명을 발전시킨다거나, 뭐 그런 특성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성이 있다거나 말이죠? 그러니까 동물들은 아무리, 침팬지나 그런 것처럼 지능이 조금 발달된, 지능이 조금 괜찮은 동물들이라고 하더라도, 문명을 발달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 타고난 그러한 한계, 자유적 본성, 그런 걸 안고 사는 거지요, 예,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특별히 하나님 다음가는 위치에 앉히시고요, 그 다음에 또 뭐라고 합니까?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여 주셨다, 이게 다 하나님의 선물인거죠, 하나님의 선물, 그리고 세 번째는 6절에 보면,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거느리게 하셨다, 다스리게 하셨다, 계속 반복해서 얘기하죠, 하나님이 만드신 거죠, 우리가 만든 게 아니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셨고, 모든 것을 거느리게 했다, 일종의 청지기 사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예, 우리 인간이 한편으로는 상당히 비천하고,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는 비천하고 그러나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 특별한 위치를 주셨다고 하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 받았다고 하는 점에서는 상당한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고요, 그게 다 양면성이 다 있습니다. 예, 여기서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거든요? 동물들보다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는데요? 우리가 잘 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죠, 하나님의 뜻이죠, 청지기 사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예, 이것은 창세기 1장 앞부분에 나와 있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또 그리고 창조하신 다음에 인간 아담에게 이 세상을 다스려라, 이름도 붙이게 하고, 그런 것 하고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사람이 특별한 사명이 있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잘 다스린다고 하는 겁니다. 예, 이것은 우리가 잘나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따른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은 권한, 권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봉사와 섬김이다 이런 생각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이 청지기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해서 한 마디만 더 붙인다면, 이렇게 한번 질문을 해 봅시다,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다스릴 수 있을까요? 어떻해요? 그것이 잘못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소유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세상을 파괴하게 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이 세계를, 모든 동물들을, 모든 세상 것들을, 섬길 수 있을까요? 예, 그건 뭐 다른 데 있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능력이라기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세상을 잘 다스리고, 혹은 섬기고 봉사하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 결론적으로 1절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한 번 더 시편기자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똑 같지요, 야훼 우리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그리 크십니까, 예, 온 세상의 장엄함을 보면서,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보는 이러한 영성이 참 우리들에게 필요한 거지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못 봅니다. 세상 참 아름답다, 살기 좋다, 멋지게 살자, 자연을 보면서도 아름다움은 누구나 보니까요, 그걸 참 매력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연주의자의 영성에 머무르지 않고, 창조의 영성에, 자연주의의 영성이 아니라 창조의 영성, 이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되는 거죠, 이것은 자연을 무시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거는 자연주의자들과 더불어서 똑 같이 자연의 아름다움, 그 귀한 것, 그런 것들을 다 같이 알면서, 그러나 더 나아가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우리의 바람직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오늘 시편8편 1절부터 9절까지 “창조자와 인간”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같이 나눴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안에 들어 와 있습니다. 한 70년,80년 살다가 또 떠나야 되겠지요? 여기서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잘 섬기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섬기기도 하고, 또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하나님의 찬양이 우리를 이끌어 가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 이 시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읍시다, 1절부터 9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1.야훼, 우리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2.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나이다.
3.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5.그를 하나님 다음 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7.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딸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아멘! 제가 기도하고 이어서 주님 가르친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시편8편의 말씀을 같이 나눴습니다. 얼마나 오묘하고 놀라운지 우리는 세상 앞에서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깊고, 더 풍요로운 하나님의 그 창조의 솜씨 앞에서 우리가 그 어떤 말로 그것을 다 기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오직 당신에게만 영광을 돌립니다, 이렇게 비천한 저희들에게 좋은 사명, 이 세상을 섬기고 봉사하고 다스리라고 하는 사명을 주셨사오니, 우리가 잘 감당하도록 저희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가 영원히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님은 항상 창조하고,양육하며, 완성하십니다.
오 주님, 주님은
지극히 높고 선하며 전지 전능하시며,
지극히 자비로우면서도 의로우시며,
지극히 은밀히 존재하면서도 가장 가까이 계시며,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강하시며,
항상 계시되 어디에 의존해 있지 않으며,
스스로는 변하지 않되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며,
새롭게 되거 옛것으로 돌아가지 않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만한 자들을 노쇠하게 하시니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항상 일하되 안식하시고,
항상 거두되 부족함이 없으며,
항상 받들어주고, 채우시고, 보호해주십니다.
주님은 항상 창조하고, 양육하며, 완성하십니다.
주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나 찾으시고,
사랑을 하되 욕심으로 불타지 않으며,
질투를 하나 괴로워하지 않고,
뉘우치나 슬퍼하지 않으며,
노하되 안정하십니다.
주님은 하시는 일을 바꾸되
뜻과 계획은 바꾸시지 않으며,
무엇을 찾으실 때는
아주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결코 궁핍하지 않음에도
무엇을 얻을 때 기뻐하시며,
욕심이 없으나 이득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필요 이상 바쳐
주님을 우리에게 빚진 자로 만들려 하나,
사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주님의 것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고전 4:7)
주님은 우리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으나
마치 빚진 것처럼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아멘. (1.4.4)
성 어거스틴 『고백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