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다

 

다시 성탄절의 계절이 왔다. 성탄절 즈음의 설교에서는 동정녀 마리아, 요셉, 동방박사, 목동,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 헤롯의 유아살해 등과 얽힌 사연들이 주로 다루어진다. 금년 대림절 넷째 주일인 12월18일의 설교 본문은 천사 가브리엘과 처녀 마리아의 대화인 눅 1:26-38이고, 주일과 겹친 성탄절의 본문은 소위 로고스 그리스도론이라 하는 요 1:1-14절이다. 성탄절 설교는 자칫 뻔한 이야기에 머물 수 있다. 그렇고 그런 말로 때우지 말고 해석학적인 토대에서 깊이 있게 접근해보자. 가다머(H-Georg Gadamer)의 표현을 빌리면 텍스트의 지평과 콘텍스트의 지평이 융해되어 새로운 지평으로 나가는 해석학적 사건이 설교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처녀 마리아 출산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신경은 예수가 남자와의 성적 관계없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런 본문을 대할 때마다 설교자는 곤혹스럽다. 물론 예수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확증된 것이라고 완강하게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이다. 첫째는 처녀 마리아 출생이 현대인들에게 전혀 납득될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핵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첫째 문제는 심각한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이 납득하지 못한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문제가 관건이다. 왜 그런가?

복음서와 서신의 전승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예수의 복음은 동정녀 전승과 상관없이 멀리 확장되었다. 동정녀 출생은 예수 사건에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복음이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헬라적인 유대인들이 예수의 동정녀 출생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일반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출생했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전승이 시나브로 그리스도교의 중심 교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다시 정리하면, 동정녀 전승이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가 공중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여자의 몸을 통해서 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고 해석했다. 설교는 일단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12월의 설교 사역을 감당해보자.

 

12월4일/ 대림절 둘째 주일

베드로후서 3:8-13/ 예수 재림을 사모하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예수 재림, 또는 재림 지연 문제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화두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중요한 문제다. 재림은 세계완성을 가리키는 종말론적 표상이다. 세계완성은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정치와 문화와 문명이 말하는 주제다. 재림 문제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열광적인 신앙의 한 행태가 아니라 보편적 세계 구원과 맞물린 주제인 셈이다. 오늘 설교자들은 이러한 인류의 구원론적인 정신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신약성서의 다른 서신과 복음서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재림 지연의 문제가 오늘 설교 본문인 벧후 3:8-13절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본문 앞 구절인 벧후 3:3,4절에 따르면 재림 신앙을 조롱하는 자들이 있었다. 실감이 가는 이야기다. 오늘날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재림을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곤혹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설교자들도 이런 주제로 설교하는 걸 불편하게 생각한다. 성서 텍스트의 고유한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오늘 본문 4절에 따르면 재림 지연을 조롱하는 이들의 논리는 만물이 늘 동일하다는 데에 있다. 이 논란이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설교자들은 이런 진술의 깊이를 뚫고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 성서 이야기는 희화화(戱畵化)되고 만다. 2천 년 전 당시의 유대인 남자 복장을 한 예수가 구름을 실제로 타고 등장할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재림은 원래 세계의 전적인 변화를 가리켰다. 예수의 재림으로 인해서 이 세계가 질적으로 새롭게 변한다는 뜻이다. 이런 세상을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한다.(13절)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만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까지 거론한다.(계 21:1,2)

이 세계가 창조 때부터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다. 오늘의 실증적인 과학자들도 비슷한 논리를 펼 것이다. 베드로후서는 두 가지 근거에서 그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1) 세상은 원래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2) 이 세상은 이미 멸망당한 적도 있다. 이것은 노아홍수를 말한다. 노아홍수 설화는 이 세상의 악과 멸망, 그리고 새로운 창조가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할 뿐만 아니라 세상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세상의 영원불변에 근거해서 재림 지연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본문에 따르면 재림 지연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감안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르다.(8절) 둘째, 하나님은 모두 구원받을 때까지 인내하신다.(9절) 셋째, 주의 날은 도둑 같이 온다.(10절) 종합적으로 보면 주의 날, 즉 예수 재림은 초월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고유하고 궁극적인 구원 사건이기 때문에 사람의 입장에서 재림 지연 운운할 수는 없다.

본문의 이런 해명을 따라가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그 개념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서의 고유한 영적 세계를 따라가려면 신학과 인문학적 사유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연금술사>에서 코엘료가 한 다음과 같은 진술이 무슨 뜻인지 보라. “연금술은 납으로 금을 만드는 비술이 아니라 모래 한 알을 우주로 보는 새로운 시각이다.” 그는 대체로 저런 뜻으로 말했다. 모래 한 알을 통해서 우주와 만날 수 있는 인식과 경험이 문학, 예술, 인문학, 신학, 물리학 전반에 이르는 토대다. 코끼리와 하루살이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똑같은 무게라는 장자 류의 아포리즘도 이와 비슷하다.

예수 재림의 지연이라는 상황에서 여전히 재림 신앙을 영혼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인가?(11절) 본문은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구체적 삶이 중요하다. 이것은 재림을 조롱하는 이들의 부도덕한 삶과 대립된다. 둘째는 하나님의 날이, 즉 주의 재림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다. 전자는 삶의 영성이라면 후자는 삶 너머의 영성이다. 전자는 차안적인 생명이고, 후자는 피안적인 생명이다. 이 둘이 결국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하나다.

이런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설교자는 더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의 영적인 수준에 따라서 그런 신앙의 현실성(reality)이 확보되거나 아니면 단순한 종교적 교언영색에 떨어진다. 필자의 입장에서 한 마디만 하면 다음과 같다. 13절이 말하는 ‘의’ 문제를 세계 완성 및 구원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주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이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만들어 줄 것이다. 즉 거기서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2월11일/ 대림절 셋째 주일

이사야 61:1-9/ 가난한 사람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7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8 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9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이사야는 서로 다른 시기에 기록된 세 편의 모음집이다. 소위 제3 이사야는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56-66장이다. 익명의 제3 이사야가 활동한 시기는 거칠게 봐서 기원전 530년에 걸친 2-3년간이다.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 또는 그들의 후손이 기원전 537년에 1차로 귀환해서 예루살렘 건설에 박차를 가했지만 별로 진도가 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개혁의 열정만 뜨거웠지 성과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2 이사야의 제자로 알려진 제3 이사야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영적 각성을 위해서 구원론적 메시지를 선포했다. 제3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대목은 사 60-62장이고,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의 일부인 사 61:-3절이 핵심이다. 이 구절은 포로 이후의 시대에 요청된 보편적인 구원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에게 임하는 구원 소식이 그것이다. 시 146:7-9절에 나오는 억눌린 사람, 주린 자들, 갇힌 자들, 맹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도 이런 구원론적 선포를 메시아적 차원에서 그대로 받아들였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첫 설교가 바로 사 61:1을 본문으로 선포되었다고 전한다.(눅 4:18) 소위 마리아의 찬가(눅 1:47-55)도 간접적으로 이런 틀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사 61:1-3절이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아적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이 자신에게 내렸다는 말로 본문을 시작한다. 자신이 여호와의 영을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받은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내렸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신탁(神託)이 눈에 보이는 건 아니다. 성서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음성으로 듣는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도 영적인 차원이지 사실적인 차원은 아니다. 이것은 시인의 시 경험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비슷하다. 이런 대목은 오늘 설교에서 직접 관련되는 게 아니니까 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왜 정당한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는 뜻으로 잠시 짚은 것뿐이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이 내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 그 뒤로 가난한 자에 속한 일단의 사람들이 열거된다.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가 그들이다. 2절에는 슬픈 자가 거론된다. 이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배척받은 사람들이다. 아무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아무도 이들에게 진정한 마음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사야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냄을 받았다고 선포했다. 사 61:4-9절은 이런 구원 문제를 이스라엘 민족과 연관해서 구체적으로 해명한다. 그 내용은 설교자들이 풀어서 설명하면 된다. 7절에 결론이 요약되어 있다.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영을 받아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는 이사야의 구원론적 진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설교자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은 물론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가난으로 인한 삶의 왜곡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가난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가 되더라도 본질은 아니다. 부의 불균형이 더 문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설교자는 사회과학적인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일종의 역사의식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 가난과 부의 불균형 앞에서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첫째, 이 문제를 그리스도교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경제정의, 복지문제를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순전히 이원론적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둘째, 가난을 구조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구제의 대상으로만 접근한다. 인간 삶에 대한 안이한 발상이다. 오늘날처럼 신자유주의가 글로벌 차원에서 횡포를 부리는 시대에 예언자적 전통을 외면하는 처사다.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새로운 의식과 구조 개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이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런 세상이 온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본문에서 이사야가 놀라운 구원 신탁을 선포했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것이 해결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슬픈 자가 나왔다. 그것을 완전히 해결한 그 어떤 정치인도, 그 어떤 예언자도, 그 어떤 사업가도 없었다. 무한한 소유욕이 인간에게서 제거되지 않는 한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사야는 자기가 가난한 자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선포할 뿐이고,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를 읽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누가복음 기자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첨가한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설교자는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가 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인지를 어느 정도의 깊이에서 현실적(real)으로 인식하고 전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설교자의 영성이 판단될 것이다.

 

12월18일/ 대림절 넷째주일

누가복음 1:26-38/ 마리아에게 임한 능력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설화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처녀 마리아가 아기를 갖게 된다는 소식을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전해 듣는 사람이 마태복음(1:18-25)에는 요셉으로,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에는 마리아로 나온다.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을 했지만 동거하기 전의 상태에 있었다. 당시 유대의 관습에 따르면 여자가 12세쯤에 1년간의 약혼 기간을 보낸 뒤에 동거에 들어간다. 그 나이는 초경에 접근한 때다. 가능한 빨리 후손을 보는 것이 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의 조건이었다. 이런 인문학적 배경에 근거해서 오늘 본문의 서사를 청중들에게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하면 된다.

본문의 중심 메시지가 마리아의 처녀 임신에 있는 게 아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관심을 보인다. 과연 마리아는 남자와의 성관계 없이 예수를 임신한 것인가? 처녀 임신 사건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장하는가? 복음서 기자는 그것에 관심이 있었나? 누가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스스로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전승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가? 마가와 요한, 그리고 바울이 이 전승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상의 여자와 하늘의 신들 사이의 성적인 관계로 영웅들이 태어났다는 이교적인 전승과 마리아 임신 전승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여기에는 많은 논란들이 놓여 있다. 설교자는 이런 질문에 담긴 다층적 논란을 일일이 추적할 수 없다하더라도 일단 문제의식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요구가 생긴다.

마태복음의 예수 출생 예고에는 처녀 임신의 구약적인 배경이 나온다. 이사야 7: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가 그것이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도 큰 틀에서 그것을 배경으로 한다. 글머리에서 언급했지만 처녀 임신 전승은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은 다른 신앙의 뿌리로부터 나오는 귀결이었다. 그 뿌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도 지적한다.(눅 1:32, 35)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분명하다면 그는 당연히 일반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와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초기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고 일부가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오게 되었다. 급기에 사도신경의 중요한 대목에 자리 잡았다.

설교자는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처녀 임신이 핵심이 아니라고 해서 요셉과 마리아가 성관계를 통해서 예수를 임신했다거나, 더 심하게는 예수가 사생아라는 뉘앙스로 접근하면 곤란하다. 마리아 임신 문제는 적극적으로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또는 실증적으로가 아니라 부정적으로,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해명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떻게 궁극적인 사태를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본문이 이미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눅 1:35)이 임했다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게 핵심이었다. 그 능력이 임했다는 사실이 처녀 임신 사건을 통해서 전달된 것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만으로 설교를 구성할 수 있다. 높으신 이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설교의 결론을 내려도 된다. 그러나 설교의 깊이로 더 들어가려면 설교자는 이 문제를 자신에게 소화된 이야기로 새롭게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당혹스러워하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은 엘리사벳의 경우를 예로 든다. 엘리사벳은 이미 가임 연령을 훨씬 넘은 여자였지만 요한을 임신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따르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은 곧 말씀의 능력이다. 그 말씀은 바로 창조의 능력이며, 부활의 능력이고, 종말의 능력이다. 처녀 마리아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임신할 수 있게 한 능력이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명백하다. 말씀의 능력으로 예수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 말씀의 능력이 메시아를 가능하게 했다. 그 말씀은 단순히 구약성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시 사건을, 즉 존재론적 구원 행위를 가리킨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말한 뒤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말했다. 말씀의 능력으로 구원 사건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순간은 처녀 마리아의 역할이다. 그녀의 고백은 이렇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 지극히 높은 자의 능력이 지극히 낮은 여종의 몸을 통해서, 그녀의 순종을 통해서 일어났다. 지극히 높은 자리와 지극히 낮은 자리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어린 처녀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자격이 충분하다.

 

12월25일/ 성탄절

요한복음 1:1-14/ 말씀이 육신이 되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탄절 설교는 늘 판에 박은 듯하다. 청중들도 성탄절 설교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복음서가 전하는 성탄 전승을 동화처럼 재미있게 전하면 그만이다. 그런 탓인지 어릴 때의 추억을 되살려주기만 해도 청중들에게 성탄절 설교가 먹힌다. 일종의 설교 편의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런 설교 편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실험적으로라도 복음서 중에서 헬라사상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요한복음의 서문인 위 본문으로 설교를 시도해보자. 이것은 성탄절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 대한 낭만으로 생각하는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벗어나 언어존재론의 깊이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을 확보하려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같다.

본문에서 핵심은 ‘말씀’(로고스)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아는 척할 뿐이지 실제로는 모른다. 본문 2절에 따르면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한다. 2천 년 전 역사에 실존하셨던 예수가 어떻게 태초에 존재하셨다는 말인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성경이 어디 한 구절이라도 허튼 구석이 있는가. 3절에 따르면 만물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가 되었다. 루터는 우리말 성경이 ‘말씀’으로 번역한 로고스를 ‘Wort’로 번역했다. 영어의 word이다. 단어, 낱말, 말이라는 뜻이다. 또한 창 1:3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이르시자 빛이 있었다고 한다. 빛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만물이 말로 지어졌다는 요한복음의 언급은 옳다. 문제는 그 창조의 말이 어떻게 예수와 동일한가, 하는 질문이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설교 시간에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설교자는 그 맥락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설교를 밀고 나갈 힘이 생긴다. 여기에는 로고스 그리스도론(logos christology)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로고스 그리스도론과 대립하지만,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으로 몰렸지만 나름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양자 그리스도론(adoption christology)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전반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필자는 오늘 설교 본문에 한정해서 설명하겠다.

요 1:14절은 로고스 그리스도론의 핵심 성구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소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씀은 이미 1절과 2절에 언급되어 있듯이 선재적(先在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존재하신 로고스다. 역사적 존재인 예수를 역사 이전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설득력이 있나? 무슨 근거로 역사적 존재가 역사 초월적 존재가 된다는 말인가? 이 논리는 예수가 로고스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여기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통치 능력이고, 계시의 근거이다. 예수가 로고스라는 근거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와 일치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하나님 나라와의 일치는 곧 하나님과의 일치이며, 그것은 동시에 생명 근원과의 일치이다.

위의 사실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보충하겠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증언을 공관복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작한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계보로 시작하고, 마가복음은 세례요한에게서 세례 받은 사건으로부터,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 출생의 비밀이 세례요한과 연관된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모두 역사적 예수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은 선재적 로고스론으로 시작한다. 각각의 복음서가 나름으로 독특한 그리스도론을 제시한 것이다. 역사 내재적 예수와 역사 초월적 그리스도의 변증법적 긴장이자 상호보충이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기자의 관점에서 요약하면, 당시 사람들과 똑같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예수가 바로 역사 초월적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14절에서 예수의 영광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고 한다. 설교자는 이런 교의학적 해명을 청중들에게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조직신학적 사유가 이런 설명에 도움을 줄 것이다.

오늘은 성탄절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구체적인 역사에 개입한 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날이다. 하늘이 땅과 일치한 날이다. 신성이 인성을 입은 날이다. 초월이 내재와 결합된 날이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날이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보고 싶어 했으나 볼 수 없었던, 단지 하나님의 등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예수에게서 본다. 예수는 성육신한 하나님이다. 이게 옳은 말인가? 그것이 옳다는 근거를 변증해내는 것이 설교다.(설교공부 2011년 11월, 기독교사상 201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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