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과 이단

-한국교회 목회현장에서 바라본 이단 문제-

2012년 9월6일, 정용섭 목사(대구샘터교회)

 

 

필자가 1980년대 중반 현풍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을 때의 일화다. 아주 성실한 통일교 신자 한 분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주일 공동예배를 비롯해서 수요성경공부 모임에까지 교회의 모든 모임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 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는 다시 통일교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요즘 문선명 선생님이 자꾸 꿈에 나타나서 돌아오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비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꿈 운운 하면서 돌아가야겠다는 것이다. 결국 돌아갔다. 그냥 돌아간 게 아니라 다른 한 분을 데리고 갔다. 이단으로 빠지는 분들이 정신적으로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분들이다. 인격적으로도 진정성이 있고, 신앙적인 열정도 강하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의 특징이 그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들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이단 문제를 다룰 때 유의해야 할 또 하나의 관점은 다음이다. 정통 기독교 노선도 스펙트럼이 넓은 것처럼 이단들의 스펙트럼도 각양각색이다. 그 차이를 세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전도관이나 통일교처럼 반(反)기독교적인 색채가 농후한 이단들은 쉽게 구별이 되지만, 그 외의 수다한 반(半)기독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단들은 구별하기가 어려워서 대책도 쉽지 않다.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후자에 속하는 이들이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일반 신자들의 종교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방어하기가 어렵다. 이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김기동과 박옥수에 대해서 잠시 검토하겠다.

 

김기동과 박옥수

귀신론의 김기동 목사와 구원파의 박옥수 목사의 설교를 비평한 글이 실린 졸저 <속빈 설교 꽉찬 설교> 발간 후에 필자는 한국이단대책위원회로부터 공문을 메일로 받았다. 이단에 속한 목사들을 정통교회 목사들과 함께 다룬 이유에 대해서 해명하라는 것이었다. 해명이 없을 경우에 문제를 삼겠다고 했다. 나는 이단에 대한 선입관을 내려놓고 그들의 설교만을 그대로 보고 싶었다. 그들의 설교를 검토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세 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복음에 대한 열정과 목회적 진정성

김기동과 박옥수는 이단 중에서는 비교적 온건한 쪽에 속한다. 그들의 설교는 전반적으로 복음에 천착해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재림주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단히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즉 케리그마에 천착하고 있다. 이런 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정통교회 목사들 중에서는 케리그마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많다. 대신 값싼 기복주의나 도덕주의에 떨어진다. 교양이나 처세술에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고 옥한흠 목사님도 문제로 지적한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신앙적 토양이 어느 수준인지에 대한 단적인 증거다. 원초적 복음에 굶주린 기존 기독교인들이 김기동이나 박옥수의 가르침에 솔깃해하는 것은 나름으로 이유가 있는 셈이다.

김기동과 박옥수의 목회적 진정성도 높이 사야할 요소다. 적지 않은 청중들이 그들을 추종하는 이유는 그들의 교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들 개인이 담보하고 있는 목회적 진정성에도 있다. 예컨대 박옥수는 젊은 시절 목회를 시작할 때 신자들의 상처에서 나온 고름을 입으로 빨아 처리한 적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런 목회와 인격의 진정성이 위험하다. 이것이 왜곡된 가르침을 희석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다른 건 몰라도 목회를 아주 열심히 하신다. 인격이 아주 훌륭하시다.”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먼저냐, 아니면 건전한 인격이 먼저냐 하는 문제는 간단히 재단될 수 없다. 현실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인격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2) 신학 부재

인간적이고 목회적인 차원에서 꽤 괜찮은 목회자들인 김기동과 박옥수에게서 이단적인 요소가 발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신학의 부재다. 신학의 부재는 결국 기독교 신앙을 주술의 차원으로 떨어지게 하거나(김기동),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인간의 실증적인 확신으로 떨어지게 한다(박옥수). 김기동은 “교리란 원래 미신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 정통 교리를 부정하고 귀신론으로 대체한다. 박옥수는 성서를 극단적인 알레고리로 해석한다. 그들이 신학을 부정한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신학이 없으니까 대신 개인의 경험을 절대화하고, 청중들의 종교적 욕망을 추수(追隨)할 수밖에 없다(포퓰리즘). 대부분의 사이비 이단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이 두 가지, 즉 주관적 신앙경험의 절대화와 신앙의 대중추수주의이다. 이것이 청중들에게 어필하면 대중성을 확보하게 된다.

신학은 이 두 왜곡의 길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 인식의 길이다. 신학은 진리의 영인 성령에게 의존하는 신앙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좀더 풀면 다음과 같다. 신학은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역사의 경험에 우선권을 둔다. 기독교 신학은 어떤 한 두 사람의 기발한 생각이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축적한 영적 보고다. 집단적 영성인 셈이다. 개별 설교자(목회자)의 한계를 집단적 영성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 바르트와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통해서 목회자 개인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이런 신학의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은 당연히 포퓰리즘에 빠지지 않는다. 대중(민중)이 호응한다고 해서 무조건 따르지도 않고, 반대한다고 해서 물러서지도 않는다.

 

3) 정통 교회와의 문제점 공유

김기동의 주술적 세계관과 박옥수의 실증주의적 구원론은 정통 교회로 인정받는 교회의 목사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날 때가 많다. 필자가 보기에 윤석전 목사나 조용기 목사의 설교가 이들의 설교와 다를 게 별로 없다. 이게 우리의 한계이다. 그들의 얼굴에 우리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으니까 접어두고, 김기동과 박옥수의 신학적 특징을 개괄적으로만 정리하겠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현주소도 드러날 것이다.

김기동의 귀신론은 위에서 지적한대로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역사가 아니라 주술의 차원에서 접근한 결과이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세계는 신비이다. 하나님 자체가 신비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의 깊이를 생각해보라. 태초는 아득하다. 하늘과 땅도 아득하다. 성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가리킨다. 도대체 무(無)가 무엇인가? ‘왜 존재하는 것들은 있고, 무는 없는가?’ 신정론(神正論)도 사실은 세상의 신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신학적 담론이다. 왜 무죄한 이들이 고난을 받고, 불의한 이들이 잘 되는가 하는 문제의식 말이다. 이런 문제는 세상과 역사의 신비로만 접근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욥기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의 자유로 언급된다. 에버하르트 융엘은 <Gott als Geheimnis des Welt>에서 하나님을 세상의 비밀이라고 말한다. 비밀은 곧 신비이다. 이런 차원을 못 보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김기동은 그 신비를 주술적으로 처리한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을 귀신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이원론적이고 주술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런 주술적인 신앙이해는 한국교회에 광범위하게 깔려 있다. 김기동에 대한 필자의 마지막 코멘트는 다음과 같다.

 

김 목사가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역사가 아니라 주술의 차원에서 처리함으로써 결국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형해화하고 대신 귀신론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도 내가 할 일은 끝난 것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정통으로 자처하는 설교자들의 정신세계도 역시 주술이 지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가시지 않아, 내 마음이 영 개운치 않다.(기독교사상, 2005년8월호, “신앙의 신비, 주술인가 역사인가?”)

 

박옥수의 구원론은 김기동의 귀신론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대구에서도 심심치 않게 그의 대중 집회가 열릴 정도다. 그의 논리가 그만큼 탄탄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정통교회의 구원론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위 구원파를 대표하는 그의 주장은 구원의 신비를 실증적인 차원으로 끌어들인 결과다. 이것은 구원론의 오류다. 하나님의 자유를 인간의 심리적 확신으로 훼손한 것이다. 그는 결국 구원 결정론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구원 결정론이 칼뱅의 이중예정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칼뱅의 경우에는 이중예정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신학적 착상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이 오히려 열려 있다. 오늘 한국교회 목사들 중에 박옥수처럼 구원을 실증적 범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천국상급론 등이 그런 예의 하나다. 박옥수에 대한 필자의 마지막 코멘트는 다음과 같다.

 

도대체 청중들은 박 목사에게서 무엇을 보고 그렇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는가? 박 목사의 구원론이 일종의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로 작용했다는 게 그 대답이다. 인간이 이 땅의 삶에서 감당해야 할 정신적, 육체적인 긴장과 불안을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단순한 구호로 해결해보려는 박 목사의 설교는 그것이 본인에게 아무리 절실하다 해도 종교적 여흥과 다를 게 없다. 그 여흥은 구원을 실증적으로 확인해보려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 거둬들인 선악과이며, 그 끝자락에는 일반교회 안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구원론의 타락이 꿈틀댄다.(기독교사상, 2006년 3월호, “구원을 향한 과도한 욕망의 끝자락”)

 

엄격하게 말해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이단들에게도 정통적인 요소가 있고 정통에게도 이단적인 요소가 다소간 불문하고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루터를 종교재판에 회부한 로마가톨릭의 오류가 교회 역사에서 반복되었다. 마녀사냥도 일종의 이단 논쟁이다. 지동설까지 종교재판에 처했다. 이단 논쟁은 양날의 칼이다. 기독교의 진리론적 능력이 드러나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패권적 행동일 수도 있다. 이단, 또는 타종파에 대해 경우에 따라서는 그 차이를 관용으로 대해야 하고,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한다. 그 때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 대답은 근본적으로 성령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필자는 소극적으로 이런 기준을 제시한다. 교권의 차원이라면 가능한대로 관용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지만, 진리 논쟁이라면 치열하게 다퉈야 할 것이다. 이런 분별 자체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 역사를 바르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분별력이 생길 것이다. 이런 분별력에 키운다는 의미로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두 가지 이단 논쟁을 검토하자.

 

신약성서의 이단 논쟁

첫째는 영지주의다. 영지주의(Gnosticism)는 신플라토니즘의 일파로서 초기 기독교 시대에 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 역시 영향을 받았다. 주로 요한서신이 그렇다. 로고스, 빛과 어두움이라는 메타포 등이 예다. 영혼불멸설도 영지주의의 뿌리인 플라토니즘의 영향이다. 삼신론과 양태론 등을 거쳐서 핵심 교리로 자리 잡은 삼위일체론도 플라톤 사상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가 주변 사상이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사도들과 교부들이 주변 철학과의 대화에서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는 증거다. 기독교를 독단론이 아니라 진리론에 근거해서 변증했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학이 주변 철학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또는 주변 사상에 영향을 끼칠 것은 끼쳤다.(판넨베르크의 Theologie und Philosophie 참조)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에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끼쳤지만 결국은 퇴출당했다. 가장 첨예한 논쟁은 기독론에 있었다. 영지주의 교부들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소위 가현설(Docetism)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과 동일한 육체를 지닐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초창기에 상당한 호응을 얻었으나 결국 예수의 본질을 ‘vere Homo, vere Deus’라고 규정한 정통 교부들에 의해서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이 논쟁은 요한1서 4:1-6절에 구체적으로 보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가현설에 대한 요한의 비판은 극단적이다. 그가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보았다는 증거다. 이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신비로부터 삼위일체론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가현설적인 입장에 따르면 예수와 하나님의 위격적인 긴장이 모호해진다. 예수의 위격이 아버지에게 귀속되고 만다. 삼위일체론은 삼위가 단순히 일체라는 뜻이 아니다. 삼위는 구분되어야 한다. 삼위일체론은 단일군주론의 극복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에게 의존해서 구원을 행하시고, 아들 하나님인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께 의존해서 구원을 이루셨다. 성령도 이런 관계에 자리한다. 참고적으로 성령론에서 ‘filio que'(그리고 아들로부터) 논쟁은 서방교회와 동방정교회 분리의 신학적 단초로 작용했다. 이런 신학적인 문제가 별 것 아니거나 목회 현장에서 별 실용성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은 기독교 교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모르는 소리다. 사도들과 교부들은 초장부터 치열하게 논쟁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교리가 역사에서 틀을 잡은 것이다. 그런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적 경험이다.

둘째는 유대 기독교다. 초기 기독교는 대표적으로 두 파가 다퉜다. 하나는 유대 기독교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 기독교(또는 헬라파)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사도행전 기자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 상황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편집 방향에 따라서 다루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꼼꼼히 살피면 두 파가 어떻게 다퉜는지를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다. 예컨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구제 문제로 히브리파와 헬라파가 다퉜다. 그들은 사도 외에 일곱 명의 일군을 뽑는다. 그들은 모두 헬라파들이다. 이 사건은 이방 기독교와 유대 기독교의 분파를 의미한다. 스데반과 빌립을 대표로 하는 일곱 일꾼들은 사도에 버금가는 활동을 했다.

이방 기독교와 유대 기독교는 사실 동일한 복음을 따르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다툰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단논쟁에 가까운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방 기독교의 태두인 바울의 갈라디아서에 나온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대표자들이, 그들은 물론 유대 기독교를 대표하는데,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와서 바울이 처음에 전한 복음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갈라디아 교우들의 신앙은 흔들렸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향해서 저주를 퍼부었다. 바울의 주적은 할례파들, 즉 유대 기독교다. 그들은 이방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룬 신학논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 기독교의 주장은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다. 토라와 할례가 없는 교회는 자칫 도덕적 방종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갈라디아 교회에 그런 위험성이 있었다. 유대 기독교가 토라와 할례를 주장한 실질적인 이유는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가 과도기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 ‘나사렛 파’로 남으려고 했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경건한 유대교인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그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유대교와 척을 지면서까지 토라와 할례를 거부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서 이방 기독교는 유대교와 관계를 전혀 새롭게 설정했다. 유대교의 토라와 할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복음 공동체를 지향했다.(에티엔트 라크리매, 초기 기독교 형성, 참조)

바울은 유대 기독교의 주장으로 인해서 기독교인의 자유가 훼손된다고 보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 2:4) 바울은 유대 기독교를 일종의 혼합주의로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되 유대교의 율법도 받아들이는 혼합주의라고 말이다.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는 이런 점에서 경쟁 관계였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와 바나바까지 비난했다. 당시 유대 기독교는 주류였고, 이방 기독교는 비주류였다. 바울은 유대 기독교의 주축인 예수의 제자들과 동생들을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힘들게 되었다. 마게도냐 사람들의 환상을 보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는 사실은 바울의 이런 어려운 입지를 가리킨다. 당시 바울은 ‘왕따’였다. 자기의 복음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 어디선가 쓸쓸하게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바울을 통해서 살아났다.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져서 결국 소멸되었고, 이방 기독교는 배타적이라 할 정도로 복음을 순전하게 고수하다가 결국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 종교로 부상했다.

요한일서가 적(敵)그리스도라고 가리킨 영지주의와 갈라디아서가 다른 복음이라고 가리킨 유대 기독교의 가르침은 어떻게 보면 크게 심각해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양쪽 모두 예수에 대한 믿음만큼은 철저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약간 다른 것을 첨가한 것뿐이다. 만약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갔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역사에 없거나, 아니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종교가 되었을지 모른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진리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전통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져야 한다. 그게 목회 현장이기도 하다.

 

신학 무용론을 넘어

목회 현장에서 이단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것은 현장 목회자들에게 쉽지 않은 문제다. 전업 신학자와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 전자는 신학의 문제이고 후자는 교회정치의 문제이다. 신학자들은 교회의 혼합주의적 유혹을 분별하는 작업을 펼쳐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혼합주의는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바알 신상이 세워진 적도 있다. 교회의 실용성에 치우치면 결국 혼합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 요소가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심각하게 잠입해 있는지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것은 곧 신학 무용론의 결과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신학무용론이 팽배하다. 더 나가 신학해악론이 기승을 부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학이 만능이고 지고지선이라는 말은 아니다. 신학이 교회 신앙을 파괴할 수도 있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신학이 교회와 아무런 연관없이 자체 논리로 발전해갈 수도 있다.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 그랬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신학을 ‘교회의 기능’이라고 했다. 신학은 교회에 뿌리를 두고, 교회에 의존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옳은 지적이다. 신학자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이 바로 교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즉 신학이 먼저 있었던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먼저 있었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늘 교회를 향해서, 교회를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 칼 바르트의 이 말은 신학이 교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교회를 위한 일이다. 만약 신학이 교회에 아부만 한다면 신학도 죽고 교회도 죽을 것이다. 히틀러 나치즘에 대한 <독일 기독교인>(Deutsche Christliche)과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신학적 대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바르트 등이 중심이 된 고백교회의 ‘바르멘 선언’(Barmen Erkaerung)은 일종의 신학적 혼합주의인 나치즘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했다. 그리스도 이외에, 또는 그와 유사한 그리스도를 용납할 수 없다는 신학선언이었다.

교회현장에서 목회자들이 신학을 불신하는 이유는 신학과 영성이 다르다고 보는 데에 있다.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깨우침이지 신학적 지식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흔히 영적인 사람은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도 한다. 그렇지 않다. 신학은 인간의 단순한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이론체계가 아니다. 신학자들은 자기의 이론을 세우기 전에 이미 어떤 영적인 현실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참된 의미에서 신학자(神學者)가 될 수 없다. 신학(theos-logos)은 신의 로고스이면서 신에 대한 로고스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말을 거는 경험이 없다면 신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신학을 실제로 행할 수는(Theologisierung) 없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곧 영성이다. 영성이 없는 신학은 종교적 교언영색으로 떨어질 것이며, 신학적 토대가 없는 영성은 인간학으로 변질될 것이다. 기독교 전통은 신학과 영성의 일치 가운데서 역사에서 성장했다. 기독교 경전을 비롯해서 모든 교리가 신학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만 보더라도 이는 옳다.

신학 무용론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이단 사이비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여기에 왕도가 있는 건 아니다. 신학적인 정보를 확대 재생산한다고 해도 해결되지는 않는다. 최선의 길은 기독교 정통 신앙의 세계를 맛보고 깊이 아는 것이다. 단순한 정보로 아는 게 아니라 앎과 자신의 일치인 돈오(頓悟)로 아는 것이다. 교회 자도자로 평생 살았다고 해서 기독교를 무조건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컨대 칼뱅이 말하는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 개념을 A4 용지 10매를 앉은 자리에서 쓸 수 있는지 자문해보면 된다. 보석감정사는 진짜 보석을 계속 보는 훈련을 하고, 위폐감정사도 진폐에 집중한다고 한다. 바둑에서도 정석을 알아야 꼼수게 눈에 보인다. 최소한 사도신경만이라도 정확하게 알도록 노력하자. 그 세계에 들어간 깊이만큼 사이비 이단의 모습이 눈에 보일 것이다.

(위 글은 장로교 통합 경북노회 사이비 이단 대책위원회에서 주최한 포험에서 행한 필자의 졸고다. 2012년 9월6일, 목요일, 대구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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