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강 인간에 대한 물음(2)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712 추천 수 0 2012.06.16 12:33:12

제 35강

인간에 대한 물음(2)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나요? 우리가 6개월을 약속했는데 벌써 오늘이 5월의 마지막 목요일입니다. 참 빠르죠? 6월 한 달만 하면 다 끝납니다. 오늘은 인간론을 끝내게 되겠군요.

사이버 강의실에 일찍 들어온 분들은 노래를 들었을 텐데요. 무등산풍경소리 4주년 기념음반인 <풍경소리>에 나오는 ‘소낙비’라는 곡입니다. 번안곡이고, 이장순 씨가 불렀어요.

 

1. 어디에 있었니 내 아들아 어디에 있었니 내 딸들아

나는 안개 낀 산 속에서 방황했었다오 시골의 황톳길을 걸어 다녔다오

어두운 숲 가운데 서 있었다오 시퍼런 강물 위를 떠 다녔었다오

2. 무엇을 보았니 내 아들아 무엇을 보았니 내 딸들아

나는 늑대의 귀여운 새끼들을 보았소 마구간 옆에서 어린애를 보았소

하얀 사다리가 물에 뜬 걸 보았소 빈 물레를 잡고 있는 요술쟁일 보았소

3. 무엇을 들었니 내 아들아 무엇을 들었니 내 딸들아

나는 비 오는 날 밤에 천둥소릴 들었소 세상을 삼킬 듯한 총소리를 들었소

길바닥을 기어가던 신음 소릴 들었소 친구를 부르던 목쉰 소릴 들었소

4. 누구를 만났니 내 아들아 누구를 만났니 내 딸들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개구리를 만났소 검은 개를 끌고 가던 흰 사람을 만났소

사랑을 잃어버린 한 남자를 만났소 남편을 찾고 있던 아내를 만났소

5. 어디로 가느냐 내 아들아 어디로 가느냐 내 딸들아

나는 비 내리는 개울가로 돌아갈래요 뜨거운 사막 위를 걸어서 갈래요

빈손을 쥔 사람들을 찾아서 갈래요 무지개를 따다준 소년 따라 갈래요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끝없이 비가 내리네

끝없이 비가 내리네

 

‘아들아 딸아 무엇을 보았니?’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그들이 본 게 다 인간의 삶입니다. 이혼하고 싸우고 죽고 또는 아름답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별빛을 맞으며 밤새워 이야기를 하고요. 인간의 삶에는 그렇게 여러 가지 흔적들이 있어요. 우리가 그 많은 흔적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신기합니다. 우리는 주로 기독교적인 인간을 이야기할 텐데, 그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겠죠. 오늘 뒷부분에서 잠시 이야기하겠지만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 죄와 인간의 관계, 구원의 문제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인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해가 시원치 않습니다. 인간이 뭐냐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를 않아요. 극단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교리적으로만 생각해요.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걸로 끝나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그냥 한마디로 다 해결해버리고 맙니다. 인간과 삶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전혀 없어요.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독단적이죠. 좋은 뜻으로 말하자면 순수하고, 나쁜 뜻으로 말하자면 천박합니다. 세상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접어두고 성서가 말하는 규범대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순수할 수 있습니다. 영성가들, 신비주의자들이 다 그런 순수한 삶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이것은 아주 천박할 수 있습니다. 순수성이 잘못 이용되면 천박해지는 거죠.

어떻게 보면 이명박 대통령의 인간 이해, 세계 이해, 기독교 이해가 안타깝게도 후자에 속하는 것 같아요. 이명박 대통령을 우리가 CEO 대통령이라고 많이 이야기 하는데요. 아주 단정적이고 능률적인 것만 생각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만 극대화 하는 쪽으로 모든 것을 몰고 가는 리더십이 있어요. 이런 리더십이 다원적인 요구 사항들을 수용하고 대통령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함께 끌고 가야 하는 상황에서 과연 맞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분은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소망교회 장로님입니다. 그걸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죠. 기독교 신앙을 안으로 감추고 자신이 정치인이라는 점을 더 부각시켰더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그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독교 신앙을 내세웠거든요.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공격적으로 사용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생각들을 명시적으로 표현한 적도 있어요. 오해하지는 마세요. 대통령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되기만을 바란다는 게 아니에요. 정치가 잘못되면 어려운 사람들이 더 어려워지니까 그런 점에서 잘 되기를 바라지만, 잘 될 조짐들이 별로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교회 안에 쌓이고 쌓여서, 한편으로는 순박한 인간 이해로, 다른 편으로는 천박한 인간 이해로 떨어집니다. 주로 천박한 인간 이해로 많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어두운 심연들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산에 있는 수영로교회의 정필도 목사님을 예로 들 수 있어요. 아마 제가 한번 이야기를 했을 거예요. 설교 시간에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설교 시간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게 설교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적나라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떤 주일날 설교에서 관상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쭉 하다가 술집에 있는 여자들이 얼굴이 반반하니까 말년이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술집이나 홍등가에 있는 여자라도, 또는 동성애자라도 모두 우주보다 귀한 생명들이잖아요. 그들에게 어떤 삶의 어둠과 밝음이 혼재해 있는지 헤아릴 생각은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그들의 삶을 매도하더라고요. 그런 일은 우리에게도 비일비재합니다. 인간 이해에 대한 천박한 생각들로 인해서 우리 기독교가 복음의 본질을 오히려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앞에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인간 이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대개는 가현설에 빠져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원래 그런 게 아닙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 이해는 현실적이에요. 이게 좀 이상하게 생각되죠? 기독교는 하나님을 초월적이고 관념적으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니까 인간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텐데요. 표면적으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아주 현실적이에요. 인간만이 아니라 역사, 세계, 계시 등에 대한 이해가 모두 현실적입니다. 현실적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이것은 물질적이거나 가시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정말 현실적인 것, 리얼한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강의의 뒷부분에 나오게 될 죄의 문제도 인간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이건 구원론과도 연관되고 창조론과 심판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으니까 종말까지 관계된 전체적인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거미줄처럼 다 연관되어 있어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리 저리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찾아나가는 능력이 신학입니다.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죄라는 주제 하나만 가지고도 기독교의 창조, 성서, 계시, 성만찬, 세례 그리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또는 성만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른 것들을 다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성서의 인간 이해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온 겁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이나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 등, 성서에는 인간의 악에 대한 보도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 보도를 어떤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로 보면 곤란합니다. 그런 보도는 더 근원적인 어떤 사태를 전하려는 신학적 메타포에요. 구약성서 시대의 고대인들은 형제가 형제를 살해한다는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현실을 본 거죠. 도저히 다른 방식으로는 해명할 길이 없으니까요. 안 그런가요? 인간이 왜 그렇게 잔인한가요? 여러분, 죄의 현실을 봐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과 인간을 낭만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 깊이에서 보는 거예요. 또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 나왔군요. ‘존재론적으로’ 본다는 말이요. 죄는 인간에게 현실이잖아요. 개인이든 공동체든 우리에게 죄성이 강하게 나타나잖아요. 이 죄성이 개인보다 사회로 나가면 더 심해질 텐데요.

라인홀드 니버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착해도 그 개인은 구조 속에서 굴러가기 때문에 악할 수밖에 없다고요. 쇠고기 파동과 연관해서 졸속 협상을 했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꼼수를 쓰는 것이 모두 공무원들이잖아요. 그들을 하나하나 만나보면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아닐 거예요. 그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가는 거예요.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아침에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입맞춤을 하는 아주 자상한 아버지와 남편이었지만, 나치라는 구조에 들어가면 비인간적인 일을 서슴지 않고 했거든요. 이런 이중성을 얼마나 세련되게 감추는가, 아니면 드러내놓고 폭력적으로 하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이게 인간의 본질인 것 같아요. 어린아이를 유괴한다거나, 집단 폭력을 통한 내전 등이 일어나잖아요? 인간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악을 저지르잖아요? 꼭 필요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어느 단계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죽여요. 그리고 전쟁 때는 특히 부녀자 강간이 많이 일어납니다. 평소에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그런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해요.

죄의 현실들은 아주 명백합니다. 성서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기만 하면 죄의 현실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근원적인 힘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던 거예요. 그 힘을 사탄 혹은 마귀라고 본 건데요. 이것은 고대인들이 일종의 신인동성동형론적인 차원에서 신을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한 것뿐이에요. 여기서 핵심은 죄와 악에 존재론적 뿌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혹은 마귀가 시공간적인 범주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그것은 고대인들이 인식하는 통로였을 뿐이니까요. 오늘날에는 뭐가 악의 존재론적 뿌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프로이트라면 우리의 무의식이 그렇게 한다고 말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나 마귀가 틀렸다는 말은 아니고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거죠. 동정녀 마리아가 오늘날의 생물학적 차원에서 보면 말이 안 되지만, 그것의 신학적 내용이 뭔지를 알면 충분한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나 마귀의 신학적 내용이 뭔지를 모른다면, 그와 관련해서 엉뚱한 일도 많이 일어나게 되죠. 영안이 있다고 하는 교회 권사님들, 주로 기도를 열심히 하는 여자 분들이, 저 사람은 귀신이 턱에 달렸다거나 등에 시커먼 게 있다고 말하잖아요. 환각, 환청일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밤에 공동묘지 옆을 지나가면 나무에 뭐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어떤 사람의 얼굴이나 등에 귀신이 몇 마리 붙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병적인 자기 암시를 통해 반복된 것이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탄과 마귀의 실체를 경험할 수는 없어요. 사탄이나 마귀의 방식으로 기독교가 말하려고 했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면 됩니다.

성서 기자는 우리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악의 근원을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악을 현실적으로 봤던 거예요. 뚫어지게 보고 있는 거죠. 죄를 순진하게 보지 않고 아주 근원적인 차원에서 봤어요. 그래서 존재론적이라고 말한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인간이 투쟁해서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탄이 나오고 마귀가 나오는 거죠. 이건 존재론적 힘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투쟁하거나 노력해서 극복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되나요? 안 되죠? 그런 투쟁이나 노력이 우리의 악한 행위를 약간 줄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그런 경향 자체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흙이다

기독교적 인간 이해에서 죄 문제를 제외한 두 가지 관점은 창세기에 나와 있는 보도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인간이 흙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것을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요. 인간 창조에 대해서 J문서인 창세기 2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리고 3장 19절은 이렇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게 분명합니다. 그걸 순순히 받아들여야 해요. 너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 정말 흙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우리는 죽은 다음에 천당에 가서 금 면류관을 받고 배고픔이나 아픔도 없이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행복한 삶을 영원히 누리겠다는 희망으로 있는데, 그냥 흙으로 돌아간다니, 그건 우리의 육체에만 해당하는 말이고 우리의 영혼은 그런 게 아니지 않냐고 생각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것은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영과 육을 따로 나누는 것은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가 아니에요. 육은 땅으로 가고 영은 하늘로 가는 게 그럴듯하긴 한데, 맞지는 않습니다. 영과 육이 하나가 되어야만 인간이에요. 영과 육이 분리된다고 하면 플라톤의 생각과 가까운 거죠. 인간 이해에서는 기독교가 플라톤보다는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영과 육을 하나로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이걸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성서가 딱 부러지게 말하는 게 아니라서 정확히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딱 부러지게 말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걸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말한다는 게 상당히 어렵고,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삼천포로 빠질 가능성도 많아요. 성서에 이렇게 나온다고 몇 구절을 따다가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거라고 말한다면, 오해될 가능성이 많죠. 인간이 영과 육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영과 육이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나오기도 해요. 육은 썩고 영은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영과 육이 분리되면 인간이 아니에요. 또 한 가지 문제는 우리의 현재 몸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썩거든요. 이건 아주 분명한 사실이에요. 우리는 죽으면 보통 천당에 간다고 말해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입니다. 거기에 간다고 하는 것도 분명한 겁니다. 성서가 말하고 있고 명확한 거니까요.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실이 서로 모순되죠? 영과 육이 분리되면 인간이 아니고, 영과 육이 분리되어야만 육은 썩고 영은 어디로 간다는 말이 되니까요. 서로 충돌하는 주장이 얽혀 있습니다. 저도 지금 설명을 하면서 뭔가 논점이 흩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교과서에 나온 대로 또박또박 말하라고 하면 할 수는 있겠는데, 그보다는 내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을 말하려다 보니까,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엉클어진 실타래지만 천천히 잘 풀어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무조건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영과 육이 하나로 되어 있지만,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사실은 이게 비밀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수학 문제 풀듯이 공식을 대입해서 푸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면 풀리게 되겠죠. 기독교 역사가 처음부터 시작해서 쭉 진행되고 있잖아요? 그 과정 중에 바울의 칭의론이 나왔고,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이 나왔고, 루터의 주장들이 나왔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죠. 그러나 이런 것들도 마지막까지 가봐야 완전히 다 드러납니다. 이 맥락을 빨리 눈치 채야죠. 기독교 신앙이 처음부터 다 완성된 게 아니었어요. 기독교 신앙도 잠정적인 거예요. 불확실하지 않고 확실한 것인데 아직은 잠정적이라는 거죠. 알겠어요? 불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완료된 것은 아닙니다. 길을 가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신학자와 영성가들이 그런 내용들을 더 많이 풀어내고 있는 거죠.

결국 이것의 핵심은 우리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에 숨을 쉬고 살아가는 방식만을 생명이라고 한다면 그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게 돼요. 그러면 죽음 이후의 생명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손금을 들여다보듯이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아직은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생명도 창조부터 종말까지 모두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를 했지만, 그것으로 창조가 끝나지 않고 종말까지 연결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종말은 중요합니다. 종말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세상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까지는 완성된 게 아니거든요. 생명도 아직 완성된 게 아니고요.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영과 육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영의 실체도 우리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어요. 제가 이번 ‘기독교가 뭐꼬?’라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확실하게 아는 게 아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이런 표현이 기독교 신앙을 지나치게 불확실하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비쳐지지 않을까 좀 염려스럽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이지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에요. 생명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만큼 우리는 인간의 영과 육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흙을 이야기하다가 다른 이야기를 했군요.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흙이 되는 게 참된 생명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겁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흙처럼 되는 게 참된 생명과 접촉하는, 그 생명 안으로 돌입하는 길일 수 있다는 뜻이에요.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제가 지금 딱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흙이 된다는 것은 정말 생명이 끊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니까요. 그게 무슨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냐고 생각할 겁니다. 그게 고정관념이죠. 우리는 어머니 품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이런 방식의 생명을 절대화하고 있어요. 이것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죠. 물론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알 수도 없어요. 그게 우리 인식의 근본적인 한계죠. 실존적인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피투성, 세상에 던져진 자로서 세상 밖의 것을 알지 못하는 한계인 겁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로 설명하자면, 동굴 안에 있다 보니 밖의 세계를 모르는 거죠. 우리는 이렇게 먹고 살고 노래하고 잡담하는 방식의 삶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흙처럼 존재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큰 착각일 수 있어요. 하나님이 흙의 존재 방식으로 놀라운 생명의 평화를 허락할지 누가 알 수 있겠어요? 단정적으로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 무인 우주선이 화성에 안착했다고 합니다. 작년 8월에 쏘아 보냈는데 이번에 겨우 도착했다고 합니다. 10개월이 걸렸다는군요. 5억 몇 천만km가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가 1억 5천만km인데, 빛의 속도로 9분 정도 걸립니다. 까마득한 거리죠. 지구에서 태양이 더 멀리 있을 것 같은데, 화성이 더 멀다고 하네요. 이걸 제가 더 정확하게 확인해보지는 못했어요. 참고로 태양에서 또 다른 태양까지의 거리가 얼마인지 아세요? 하늘의 별들은 다 태양입니다. 곳곳에 따로 있어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별이 2-3광년 거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가 9분인데, 2-3년 동안 빛의 속도로 달려가야 또 하나의 별이 있다는 겁니다. 우주를 생각하면 너무 까마득하죠. 화성에 안착한 무인 우주선이 탐사하려고 한 가장 핵심적인 것이 지표 말고 지하에 물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겁니다. 물이 있어야만 생명이 있었을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죠.

화성에도 지구 못지않은 생명현상이 있었을까요? 그 모든 비밀이 언제쯤 밝혀질 수 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물처럼 되는 게 정말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아니겠느냐고요. 그런 가능성을 우리가 열어두자고 말이죠. 하나님의 나라를 잘 먹고 잘 사는 쪽으로만 보고 복지가 극대화된 상태로만 생각한다면 생명의 차원을 축소시키는 거라고요.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를 생명에 참여하게 할지 열어놓자고요. 왜 우리가 그것을 독단적으로 가로막고 있느냐는 거죠. 제가 하는 말은 성서적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철학 사상이나 동양적 영성에 기반을 둔 것 같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가로막지는 말자는 뜻이에요. 생명의 문제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만큼 우리는 인간을 좀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열어갈 미래를 겸손한 자세로 기다리며 살아야겠죠. 우리가 구상하고 생각하는 그 방식의 삶만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절대화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줄 새로운 세계를 기쁜 마음으로,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묵시문학이고, 예수님이 비유로도 말씀하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인 거죠.

인간이 흙이라는 그 부분은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 이해의 한 부분입니다. 아주 현실적인 인간 이해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흙과 가까워지는 삶을 지금부터 준비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 지금 우리의 삶은 다 흙하고 멀어졌잖아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적인 생각은 아니고요. 가장 낮아지는 영성이죠. 흙처럼 되는 거니까요. 지금처럼 문명과 문화가 극대화된 곳에서만 우리의 삶을 확인하려고 하다 보면 대부분 흙과 멀어지게 됩니다. 흙으로 돌아가라는 성서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태도죠. 흙을 중심으로 한 전통은 인디언들에게서 볼 수 있고, 티베트의 라다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참고해 보세요.

 

영적인 존재

성서적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은 흙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이 뭐냐는 것은 앞에서 어느 정도 말을 했기 때문에 길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데, 영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아직 다 찾지 못했습니다. 영이 뭘까요? 이성인가요? 누구를 사랑하는 능력인가요? 영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지음 받았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형상은 바로 형상(form)입니다. 성서적인 용어로 형상은 ‘이미지’(image)고요. 헬라 철학의 용어로는 ‘에이도스’라고 합니다. 또 플라톤의 용어로 말하면 ‘이데아’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것들이 다 통하는 말이죠. 그런 근원적인 생명을 가리켜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건 손에 잡히는 게 아니니까요. 영을 이렇게 말할 수는 있죠.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 혹은 속성이라고요. 그것도 상당히 추상적인 표현이군요. 하여튼 우리는 단백질로 구성된 육체를 가진 동시에 이 육체에 떨어지지 않고 한정되지 않으며 이 육체를 넘어설 수 있는 또 하나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것을 우리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헬라인들은 몸과 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해요. 결국은 영과 육이 갈라져야 하거든요. 영혼만 구원을 받습니다. 플라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영혼은 아예 선재적이에요. 이미 그렇게 있었던 영혼이 인간의 몸에 잠시 들어온 겁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의 몸은 무의미합니다. 영혼이 몸이라는 지옥에 갔다가, 육체의 죽음으로 영이 해방을 받는 거예요. 이 영은 이데아계에 있었는데, 현실계에 잠시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론이나 신론이나 초월적인 신 이해에서는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인간 이해에서는 달랐어요. 인간의 영도 피조된 것이죠. 인간의 영은 선재적인 게 아닙니다. 인간의 몸과 같이 만들어진 거예요. 성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인 거죠.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창조주가 모든 자신의 근거를 내부에 가지고 있다면, 피조물은 모든 존재 근거를 외부에 두고 있어요. 스스로 자기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피조물입니다. 질그릇과 같은 거죠. 우리의 생각이나 모든 것에서 다 그렇습니다. 그게 성서가 말하는 인간입니다. 영도 이런 점에서는 피조물이에요. 그런데 그 영은 언제 생길까요? 그건 또 생물학과 더불어 논의해야 할 문제일지 모릅니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는 순간에 생길까요? 배아기 때일까요? 아니면 2개월쯤 되어야 영혼이 생길까요?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천 년 후에 의학이 발달하면 찾아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할 겁니다. 아마도 영원한 미스터리일 겁니다. 몸과 영의 결합이라는 자체가 우리의 인식 한계를 뛰어넘기 때문이죠. 그 비밀을 아는 것은 신의 비밀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예요.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면 그걸 알게 될까요? 하나님을 본 자는 죽어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어요. 마찬가지로 생명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이해하겠죠? 성서도 분명히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다 거짓말로 알아들으면 됩니다. 계시는 하나님 자체거든요.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받을 수가 없어요. 계시를 받으려면 죽어야만 합니다. 아마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계시가 뭔지도 모르고 다른 말을 하는 거겠죠.

인간의 영과 육의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비밀입니다. 창조는 생명이라서 완성되는 순간에나 알 수 있어요. 그걸 안다면 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거예요. 지금 우리는 생명을 어떤 사물과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바위 같은 것을 우리가 생명체로 생각하지는 않죠. 뭔가 자기를 복제할 수 있는 것들만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도 우리의 인식 범주 한계 안에서만 통하는 말이죠. 하나님은 나무, 바위, 강, 흙 등 이 모든 것들을 어떤 하나의 생명 세계로 운영하지 않겠는가 하는 거죠. 우리는 꼭 살아 있는 것만을 생명으로 생각하면서 레벤(Leben)이나 라이프(life)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정말 생명이 완성된 다음에는 그런 개념이 없어질 겁니다. 정말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니까요.

새롭다는 말을 상투적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새롭다는 것은 전적인 변화거든요. 그걸 생각해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새롭다는 말을 여러분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예를 들게요. 성(sexuality)의 문제인데요. 동성애가 기독교계에서 예민한 문제라서 하는 말입니다. 동성애자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의 성 개념을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얼마나 유치한 인간 이해입니까? 하나님이 생명을 완성한 뒤에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 갈지 우리가 재단할 수 없어요. 그 때는 전혀 다른 방식, 이성이나 동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생명이 시작될 겁니다. 그리고 그 종말에 완성될 생명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지금의 우리를 끌어가고 있어요. 그것을 빨리 눈치 채야죠. 우리는 그런 점에서 어린아이 같아요. 아주 미숙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미숙함을 생각하지도 않은 채 종종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거든요. 그런 걸 좀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영과 육이 이원론적으로가 아니라 통전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일단 영을 이해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우리의 생물학적 육체성을 초월하는, 또는 그 심층에 있는 인간 구성 요소가 바로 영이라고 말입니다.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진 육체와는 구별된 요소라는 건데,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게 아니라 성격을 달리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육은 이 지구 안에서 먹고 살고, 원소가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는 차원이라고 한다면, 영은 그것과는 다른 성격으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말을 해야겠군요. 말을 하다 보니 제 자리를 찾아간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다 생명을 말하는 것 같아요. 지금 중요한 걸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생명을 말하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육적인 생명도 굉장히 소중한 거예요. 먹고 마시는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드러난 방식이고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생명의 힘들을 받아낼 수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을 우리는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원론적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어요. 육체가 영혼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영혼이 육체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기막힌 관계를 종말이 오기 전에는 다 해명할 수는 없습니다.

참고적으로 오늘의 많은 생물학자들이 인간의 정신활동을, 또는 영의 현상을 순전히 생물학적 작용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칼 세이건(Carl Sagan)과 그의 아내 앤 드루얀(Ann Druyan)은 공저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사이언스북스)라는 책에서 영혼의 작용도 뇌의 작용이라고 말하거든요. 칼 세이건은 죽었고 앤 드루얀은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주장이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이 있는 겁니다. 인간 정신과 영혼이 영적인 현실성을 추구하고 있는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흙과 영이 하나를 이룬다면 구원이 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흙과 영의 구도가 여전히 신비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사랑의 현실성을 지향한다면 기독교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도 건강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인간 이해가 초라한가요? 생물학적 정치적 혹은 철학적 인간론에 비해 무게가 좀 없나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얼마든지 그들과 소통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어느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는 숙명인가

앞에서 죄 문제를 말하면서 확실하게 말씀드리지 못한 대목을 하나만 더 짚겠습니다. 기독교가 죄를 말하는 근본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죄 자체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 삶의 현실 속에 나타나는 죄의 존재론적 근원을 말하려는 것이며 더 근원적으로는 그것이 이미 해결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겁니다. 여러분은 죄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에게 죄의 속성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죄는 극복된 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설교를 듣는다면 잘못된 설교입니다. 죄책감은 기독교 영성이 아니에요.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필요해요. 사회적 책임감, 마이너리티에 대해 무관심하면 안 되겠다는 구체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이 사회에 참여하는 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하면서 불안하게 만드는 건 기독교 복음이 아니에요. 청중을 세뇌하는 잘못된 심리학적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다 되었지만 이거 하나만 짚겠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사도신경해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가 극복되었다는 것은 참된 자유에 대한 보증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자유예요. 죽음, 죄,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낭만적인 자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죠. 그 자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게 안 되더군요. 이로써 확보된 것이 인간의 휴머니티에 대한 신뢰입니다. 용서 받은 자, 은총 안에 있는 자들이 누리게 될 휴머니티에 대한 신뢰, 이것은 인간에 근거한 자유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기독교에 뿌리내리고 있는 죄의식은 자기를 거부하거나 생명에 대해 적대감을 갖도록 만드는 거죠. 그보다는 자기를 왜곡하는 현실 앞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쪽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게 기독교가 말하는 죄예요. 잊지 마십시오. 생명에 대한 긍정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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