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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사유 속에서 신학과 철학의 만남

 

 

신학과 철학의 대립

 

과연 신학과 철학이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가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서로의 입장이 분분한 가운데 있다. 우선 교회 현장의 풍토는 목회와 신학의 대화마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신학과 철학의 대화는 아예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성을 의지하지 마세요. 기독교는 믿음에 따라 사는 겁니다.”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마당에 신학과 철학의 대화가 설 자리는 마땅히 없다 하겠다. 과연 그런가에 대해서 우리는 질문해야만 한다. 우선 신학과 철학이 대립된다고 보는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자.

신학과 철학이 대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신학자들의 주장을 언급한다. 우선 터툴리안(155-222)은 이렇게 말했다. “아테네는 예루살렘과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아카데미는 교회와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Tertullian, De Praescr. haeret. 7,9). 그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과 철학이 공동의 작업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인데, 신학이 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의 독특성을 훼손당할 뿐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추기경 페트루스 다미아니(P. Damiani, 1007-1071)는 민수기 21:10-13을 알레고리로 해석함으로써 신학자들이 철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자기의 생각을 전달했다. 이 본문은 일종의 고대 이스라엘 전쟁법의 일부로서 노예로 잡아온 여자 포로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보도이다. 이에 근거해서 우리는 철학이라는 머리털을 밀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필요 없는 이론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 손톱도 잘라내고(손톱은 의심의 결과이다), 먼저 입었던 옷도 벗겨낸 다음에 신부로 맞아들여야 했다. 이 여자는 그 주인의 여종으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다미아니의 이런 해석에 근거해서 교회는 중세철학을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로 다루었다.

마틴 루터도 역시 이성으로는 신앙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신학과 철학이 대립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적이 종종 있었다. 심지어 루터는 이성을 창녀라는 극단적인 말로 표현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M. Luther, WA 18, 164, 25f.).

그런데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신학과 철학을 대립적인 관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는 위의 신학자들도 근본적으로는 신학 작업에서 철학적 작용과 활동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터툴리안도 그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스토아 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육체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다미아니는 변증법 자체를 거부한 게 아니라 그것이 신학으로부터 무제한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사실만 거부했다. 루터도 역시 초기에 자신이 오캄주의자였다고 고백했다. 루터가 비난한 철학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루터는 스토아 철학의 숙명주의를 비난하면서 이성의 작용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자연적 이성이 세계 영역에서 특별한 권한을 갖는다는 점만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 계발된 이성이 신학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판넨베르크는 신학의 역사에 나타난 신학과 철학의 대립적인 요소들은 두 사이가 긴장 관계라는 것이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신학은 이성을 사용해야만 했으며, 또한 철학과의 논의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수는 없었다.”(27). 아마 이런 판넨베르크의 주장을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목회자들 중에서는 노골적으로 이성을 불온시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철학적 인식론이 한국교회에 자리 잡을 공간을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의 역사를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철학과 신학 사이에 그렇게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한 역사적 형태를 갖춘 기독교 교리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적으로도 기독교 교리의 진리 요청에 대해서 고유하고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신학과 철학, 13)고 진술했다. 판넨베르크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의 최초 신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 교부들 이후로 조직신학은 늘 철학과의 논의를 통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직신학을 지금처럼 한 분과로만 처리하면 안 된다. 원래의 신학은 그런 분과 없이 거의 조직신학적인 성격으로 구성되었었기 때문에 철학과의 관계가 모든 신학 분과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미 신학의 토대가 철학과의 논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감안한다고 한다면 오늘의 신학도 역시 철학적 사유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곧 신학이 철저하게 철학에 의존적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인식론에 도움을 받는다는 뜻이다.

 

참된 철학으로서의 기독교

 

기독교를 참된 철학이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살지 모르겠지만 그게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특히 교부들에게서 그런 경험이 뚜렷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사상사는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발전해 왔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신학이 이렇게 철학과의 대화를 유지시켰다는 것은 기독교의 변질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사상의 심화라는 점에서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런 태도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인정해야만 한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라서 이 문제를 조금 더 검토하자.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기독교를 가리켜 유일하게 확실하고 유익한 철학이라고 규정했는데, 말하자면 모든 것의 처음과 마지막을 보증하고 완전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철학이라는 뜻이다. “교부들은 이와 달리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 진리의 예증이라고 해석하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을 지혜의 참된 형태라고 해석함으로써 신앙을 철학의 자리에 정치시켰다. 철학은 그 개념의 단어적 의미를 이 지혜에서 찾았다.”(판넨베르크, 28).

이 단락에서 우리가 매우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기독교 사상이 자신의 정체성을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에서 확보하려 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 신학이라는 용어가 신에 대한 가르침을 신화론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는 상황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2세기에 신학은 곧 신화론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전통은 이미 플라톤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었다. 어쨌든지 결국 기독교 사상이 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신화적 철학이나 국가 숭배의 논쟁적인 신학이 아니라 자연신학의 형태를 가졌다. 이것이 곧 신적인 것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학은 단지 신화적인 형태의 해명이 아니라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신을 변증하는 학문으로 자리 매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교부들에게는 기독교야말로 참된 철학인 셈이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기독교 교리를 참된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체계화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 철학은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이 그리스인들에게 빌려준 선물이다.” 그는 철학이 지혜,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을 추구한다고 보기 때문에 철학을 그 개념에 따라서 해석할 수 있었다. 즉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지혜가 사랑을 추구하는 자의 여주인인 한에서 신학은 철학의 가르침을 판단하는 준거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이라는 단어와 철학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개념적인 관점에서는 신학(Theologie)신의 로고스이고, 철학(Philosophie)지혜의 사랑이다. 이런 개념만 본다면 철학보다는 신학이 기독교 사상에 적합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어원의 역사적 차원에서는 그게 달라진다. 신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기독교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헬라 철학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뿌리는 일단 플라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신화에 대한 가르침이다. 신학이 창조자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헬라 신화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게 확실하다면 우리 기독교의 사상을 해명하는 도구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철학도 기독교 안에 뿌리를 둔 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헬라 신화를 검증하는 준거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신학보다는 철학이 그래도 기독교를 해명하는 수단으로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위에서 클레멘스가 설명하고 있듯이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은 그 사랑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점에서 기독교를 가장 정당한 철학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신학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신화로서가 아니라 성서에 계시된 야훼 하나님을 변증하는 학문이 되게 했다.

 

대화

 

하인리히 오트도 역시 판넨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신학과 철학의 영역을 너무 엄밀하게 분리하지 말고 그 연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영역이 처음에 전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던 것이 나중에 가서 비로소 서로 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은 불충분한 단순화이다. 기독교적인 것이 서양인의 의식 속에 들어가 버린 이후로 이러한 분리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15). 기독교 신학이 기독교 가르침의 내용을 확보해나갈 철학적 주제가 바로 그 대상이 되지 않을 없었다고 한다면 기독교 입장에서도 적극적으로 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 신앙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창조문제만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세계의 근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해명하려는 철학과 대화해야만 한다. 오트는 프리드리히 고가르텐의 입장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숙고하면, 그것이 신학적 개념이든지 혹은 물리학적 개념이든지 전혀 상관없이 철학에 근접하게 되고 철학연구를 사용하게 된다.”(F. Gogarten, Entmythologisierung und Kirche, Stuttgart 1953, 72).

오트에 따르면 신학과 철학의 만남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불가피하다. 첫째, 신학 자체가 철학적으로 가능한 사유 내용이 되었다. 만약 신학이 열광주의적 소종파나 또는 밀의종교에 머물고 말았다면 여기서는 철학과의 대화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예컨대 영생교나 정명식의 JMS같은 종파는 그들만의 종교적 체험 안에 머물러서 세계와의 대화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같다. 통칭 무당이라고 하는 이들의 종교현상도 역시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에는 이런 특수한 요소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철학과의 대화 없이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종교생활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 이런 부분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돈벌이와 출세만을 무조건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의 근본에 대해서 질문하게 만드는 철학적 자기반성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우연하게 그런 기회가 온다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거부한다. 반면에 자신의 삶을 보다 근원적인 것에 눈높이를 맞추고 사는 사람은 가능한 외부적인 조건에 의존하지 않기도 하고, 또한 그렇게 노력하기 때문에 철학적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철학적 반성이 반드시 학문적인 과정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근원적인 것에 자기를 성찰해보려는 태도라는 점에서 전문적인 철학공부 여부에 상관없이 그런 태도를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삶의 경험이다.

둘째, 신학이 신학 자체의 특수한 기초원리 연구를 수행할 때 철학적 질문제기의 영역에 들어서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예컨대 신학이 하나님에 대해서 해명하려고 할 때 최소한 철학적 존재론과 인식론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 작업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단지 그렇게 선포되는 것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도대체 존재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만 이런 해명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 그 존재라는 게 실체인지, 아니면 과정인지, 시간에 종속되는 것인지, 자유로운 것인지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어떤 틀로 설명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조금 더 직접적인 예를 들자면 이렇다. 물리학자들이 지동설에 동의했는데도 불구하고 신학자들이 그런 학설을 거부하고 천동설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든다면 그것은 아무도 설득시킬 수 없다. 신학이 언급해야 할 대상이 단지 인형이나 의자 같은 사물이 아니라 구원, 종말, 사랑, 생명처럼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형이상학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오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선포는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선포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깨달을 수 있음은 순전히 피상적으로 지성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포와 신학이 관례상 통용되어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과 어휘들로 언급하는 것만이 중요한 일은 아니다. <중략> 그리하여 신학에는 언제나 그리고 항상 새롭게 인간적 현존재의 문제와, 이와 한 가지로 세계의 문제가 현존재에 속한 것으로 제기된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철학과의 만남이 필연적으로 된다. 즉 인간 자신과 세계의 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철학에 있어서 그때그때 구체화되고 언제나 이미 구체화되었다.(17,18)

 

만약 신학이 싸구려 약장사가 아니라 진리 추구라고 한다면 -이미 예수는 우리에게 길, 진리, 생명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철학은 분명히 우리의 도반(道伴)이라 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다시 한번 더 이 진리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자. 철학적 진리가 신학적 진리와 다르다고 하다면 그중에 하나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하나이다. 그 하나를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형상화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결코 구분될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랑에 대해서 철학이 말하는 게 다르고 신학이 말하는 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철학과 대화를 나누며 이런 진리의 길을 함께 가아야만 할 것이다. 이런 진리론적 차원에서 신학과 철학이 같은 길을 가고 있다면 신학과 철학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영역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으로는 기독론에 있다. 철학은 단지 가장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서 길을 가고 있지만 신학은 이미 그 진리가 역사 안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이다. 이 역사적 예수의 사건이 어떻게 철학이 찾아가고 있는 궁극적인 진리에 상응하는 것인지를, 또는 그런 철학적 인식론에 의해서 예수가 진리인가를 보편적으로 해명하는 행위가 곧 신학이다. 여기서 오트는 신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조언하다. 첫째, 신학은 아무리 잠정적인 성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엄밀한 방법론을 취해야 하다. 둘째, 신학은 신학적 주제에 대한 신학적 해명과 철학적 해명을 개방성 및 비종결성에 두어야 한다.

 

대화의 상대자

 

오트는 신학과 철학의 대화를 위하여 이제 하이데거를 그 상대자로 삼아야 할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하이데거가 신학의 유일한 대화 상대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이데거의 사유가 서양 철학의 근본을 새롭게 주조했다는 점에서 이 하이데거를 통해서 신학도 역시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대화의 상대자로 삼아볼만 하다는 뜻이다. 그는 우선 헤르만 디엠의 <하나님과 형이상학, 1956>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디엠은 하이데거 철학을 통해서 과거 철학자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계시의 하나님개념과 결별했던 형이상학적 사유의 길이 최후의 마지막 부분까지 확장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유의 길이 이제 철학자의 하느님마저도 철학적 사유로부터 제거하게 되었다. 즉 서양 형이상학은 더 이상 하나님을 언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신학은 하이데거의 사유에 기대서 형이상학과 결별하고 새롭게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한 셈이다.

오트는 디엠의 이런 논조에 대해서 형이상학 개념을 한정적인 의미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해서 동의한다. 이는 곧 하이데거가 사리에 맞지 않는 신개념을 그 마지막까지 마주쳐 사유함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사유의 공간을 마련해준 것인지 검증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보기에 디엠이 유의하는 하이데거 철학의 유사(類似) ‘무신론적성격에도 불구하고 혹은 아마도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이 철학은 신학과의 효과적인 대결을 위하여 특별히 많은 것을 약속해주는 것 같다.”(21,21).

하이데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바르트 역시 신학과 철학의 원칙적인 접근과 대화를 인정하고 있다는, 아니 디엠 보다 훨씬 적극적이라는 오트의 지적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사실과 다르다는 점에서 조금 놀랍다. 오트가 인용한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아래에 그대로 인용하겠다.

 

이미 신학이 다른 학문들에 대하여 주장하는 독립성은 아무튼 원칙적으로 필연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참인지에 대하여 묻는 질문을 어느 특수한 학과의 특수질문으로 취급하기는 미묘한 문제이다. 이 미묘한 문제를 우리가 그것의 사실상의 불가피성을 진지하게 인정하면서 싫더라도 인수해야지, 어떠한 이유로도 그것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중략> 그러나 신학은 특수한 문들을 열 특수한 열쇠를 정말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즉시 다른 어떤 학문에서도 활성화될 수 없는 인식근거를 신학이 마음대로 처분하지도 못하고, 다른 어떤 학문에 대해서나 꼭 감추어져 있어야 할 대상영역도 신학이 알지 못한다. ... 철학과 속된학문 일반이 참으로 꼭 속되거나이교적인 필요는 없다. 그것은 기독교 철학일 수 있다. 그것을 원칙적으로 논박하는 사람은 기독교적 희망이나 기독교적 겸손에 부합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에 대한 절망을 기독교적세계의 과대평가와 결부시킨다.”(KD. 1/1, 3f.)

 

사유의 사유

 

오트에 따르면 신학이 하이데거 철학을 대화의 상대자로 삼아야 할 이유는 하이데거 철학이 불트만과 고가르텐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외형적인 관점보다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역사성에 대한 생각을 극단화했다는 데에 있다. 이 역사성에 대한 극단적 사유에서 신학과 하이데거 철학이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신학은 세계와 더불어 맺으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 앞에 있는 세계의 역사성 이외에는 신학적 사유의 다른 어떤 지평도 알지 못한다.”(25)는 오트의 진술은 옳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역사적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성서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역사성을 지지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역사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사유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로서의 계시의 틀 안에 있는 신학이 그를 통해서 역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오트의 논리에서 과연 하이데거가 극단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 역사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오트의 설명을 따라가보자.

하이데거의 철학은 사유의 사유(ein Denken des Denkens)라고 한다. 그는 세계가 그렇게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유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를 그렇게 사유하는 것에 대해서 사유한다. 사유라는 게 있다는 것과 이 사유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있다는 것, 그리고 현존재인 인간이 세계와 존재자에 대해서 사유했다는 것과 인간이 내면적으로 강요되어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사유했다는 사실에 대한 경탄으로서 하이데거의 철학이 시작된다. “일찍이 그리고 갑자기 하나의 사유가 있다는 이것을 누가 놀란다고 그 깊이를 헤아려낼 수 있을까?”(Aus der Erfahrung des Denkens, 21).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의 사유 능력을 높이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이 세계를 규정한 게 아니라 사유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사유하도도록 강제한 것이다. 그 이전의 형이상학은 이 세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의 궁극적 본질과 의미를 파악하려고 했다면 하이데거는 그렇게 사유하도록 다그치는 힘을 사유한다. 여기서 인간의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사유의 통로로서 Dasein이다. 그 사유의 근원적인 힘이 곧 존재라 할 수 있다. 왜 하이데거의 철학이 이전의 형이상학과 다른가 하면, 기존의 형이상학은 존재를 보편적이고 당연한 어떤 것으로 전제하고 존재하는 것들을 물, 이데아, 절대정신 등으로 규정하는 사유의 능력에 중심을 두었다면 하이데거는 그런 사유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유의 사유로서의 하이데거 철학을 역사성에 대한 극단적 사유라고 보는 이유는 그가 기존 서양철학의 주장을 근거로 소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서양 철학의 근원과 전제들이 상대화하고 그렇게 해서 사유 일반의 역사성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우리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지만 일단 이렇게 정리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양 철학의 역사라 할 수 있는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을 여러 관점에서 해명하는 노력이었다고 한다면 하이데거는 그런 철학적 사유 자체에 대해서 질문함으로써 철학의 역사를 해체시켰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한민족의 역사를 기술할 때 기존의 역사가들이 왕 중심의 역사에 관심을 둠으로써 결국 민중의 역사를 놓친 반면에, 어떤 새로운 역사가는 역사의 초점을 민중에 맞춤으로써 감추어졌던 새로운 역사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는 정치, 경제의 역사만 다루던 기존의 역사해석에서 어떤 사람이 종교의 역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다시 구성한 경우와도 비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들을 규명하던 역사의 구조를 이제 전혀 다른 지평인 사유의 사유에서 접근함으로써 망각되었던 존재에 눈을 뜨게 했다는 점에서 역사성을 극단적으로 사유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역사성에 관한 극단적 사유를 충분하게 소화할 수 있다면 인간의 표면적인 역사에서 오해되고 왜곡되었던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지평에서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신학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세계가 하이데거의 극단적인 사유에 의해서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이런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 서로 다른 주장이 가능하겠지만 최소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 내용의 극단성과의 연관성만은 충분히 확보되리라고 본다. 그것은 곧 부활이다. 이 세계의 극단적인 변화를 내용으로 하는 부활 신앙은 사유의 사유라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통해서 훨씬 확실한 철학적 토대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예수의 재림도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생명형식과 전혀 다른 세계로서 우리에게 임하게 될 그런 재림의 때에 대한 해명을 오늘의 물리학이나 지난날 실증적 역사관이 감당하기는 힘이 미치기 힘들지 모른다. 이 물리학이나 실증 역사관은 모두 서양의 형이상학의 역사와 더불어 발전해온 세계 인식이기 때문이다.

 

신학적 사유의 주제

 

하인리히 오트는 하이데거의 역사성에 대한 극단적인 사유 문제를 몇 대목으로 설명함으로써 그런 사유를 신학적 사유의 단초로 삼으려고 한다. 앞으로 좀더 자세하게 다루어야 할 그 윤곽을 서론적으로 그려보려는 시도인 것 같다. 오트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시도를 사유의 사유로 규정하면서 이것은 곧 역사 문제를 극단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유의 사유라는 관점은 우리가 쉽게 동의할 수 있는데 역사성에 대한 극단적인 질문이라는 관점은 그렇게 쉽게 납득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과 신학자가 만나는 자리가 곧 역사라는 점에서 하이데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철학적 덧칠을 모두 벗겨내고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기는 하다. 우리는 오트가 말하는 역사를 단지 연대기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역사는 이 세계인 것 같다. 기존의 철학은 이 세계가 있으며, 그 안에 무언가가 있다고 전제했지만 하이데거는 그런 선입관을 포기하고 이 세상이 그렇게 있다고 사유하는 그 사유 자체를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을 역사성에 대한 극단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일단 이런 정도로 접어두고, 이제 오트가 하이데거의 철학적 구도에서 파악하고 있는 신학적 성찰의 주제에 대해서 잠시 검토해보자. 이런 주제는 앞으로 그의 책 <사유와 존재> 전체를 견인해가는 토대들이다.

 

존재자와 무

 

1. “왜 하필이면 존재자는 있고 도리어 무는 없는가?” 하이데거는 이 옛 형이상학적 질문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취임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929)에서 제기했다. 오트에 의하면 이 질문의 근본 취지는 더 이상 존재자를 기대할 수 없는 그 한계에 대한 사유로 돌입해 들어가는 인간의 질문이라고 한다. 존재자의 끝은 어디일까? 존재자와 무의 경계선이 바로 존재자의 한계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존재자의 한계, 존재자와 무의 경계에 서서 인간의 사유를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쉽게 풀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런 존재자들만 인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존재자들만이 궁극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들 이외에도 존재할 수 있었지만 존재하지 못하게 된 것들이 너무나 많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런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약간 관점을 달리해서, 사유하는 우리 앞에는 식물과 동물로 구별되는 생명체들만 있고 그 중간쯤 되는 생명체는 없는데,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그게 바로 진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의 이런 생명세계는 진화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아주 우연한 결과에 가깝다는 점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오트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열린 공간에서 하나님과 만난다고 주장한다. 현존재와 존재가 의문시되고 근거가 없어질 때 거기서 하나님과 만난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만나는 곳에서는 현존재와 존재자 전체가 의문시되고 근거가 없어진다. 하이데거에 의해서 존재자의 한계가 지적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사유를 통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존재자들과 같은 지평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초월해서 존재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미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의 심층적 의미는 역사성에 대해 극단적으로 질문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의해서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존재유비

 

2. 존재를 묻는 질문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고 우리가 존재한다는 말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혹은 이 말이 본시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고, 신학을 위해서도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질문이다(32). 이 세계의 존재하는 것들의 유비를 통해서 하나님을 논증할 수 있는 로마 가톨릭 신학의 존재유비 개념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비판을 가한 개신교 신학자는 그 유명한 칼 바르트다. 그가 존재유비 개념을 거부하게 된 동기는 인간이 존재의 유비를 사유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을 인간의 그런 인식론적 사유 안으로 한정시킨다고 보았다는 데에 있다. 바르트는 에밀 브룬너와의 논쟁에서 브룬너를 로마 가톨릭의 자연신학의 한 부류로 규정하면서 이런 존재유비를 부정하고 신앙유비(analogia fidei), 또는 관계유비(analogia relationis), 행위유비(analogia operationis) 개념을 제시했다.

우리는 여기서 기존의 존재유비가 포함하고 있는 위험성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의 비난을 그대로 인수할 정도로 이 존재 문제에 대한 정의가 해결된 게 아니다. 또한 이 세상이 곧 하나님의 창조사건이라는 점에서 존재자를 통한 하나님 인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인간 스스로 그런 차원을 마음먹은 대로 처리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기존의 형이상학이 이미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했던 그 존재의 뿌리를 훨씬 근원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존재유비의 실체를 다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존재에 대한 관심이 인간의 인식론에 해당되는 게 아니라 그런 인식론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힘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즉 닫힌 존재질문이 아니라 열린 존재질문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작업이다.

 

사유행위로서의 신학

 

3. 오트는 신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세 가지 부분을 신앙, 신학, 고백이라고 규정한다. “신앙은 실존적 현실이고, 신학은 사유이며, 고백은 언어이다.”(34). 여기서 오트가 사유의 사유라는 하이데거 철학과 연관해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대목은 신학의 사유이다. 그는 불신앙적인 사유운동으로서의 신학에 대한 논의를 근본적으로 깊이 있게 질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유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이루어진 다음에 신앙과 신학의 본질과 그 관계를 질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이 목회 현장에서 불신당하는 이유는 오트가 위에서 지적한대로 그것이 객관적인 사유행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목은 인격적인 결단인 신앙이기는 하지만 신앙에 이르기까지 당연하게 작동되어야 할 요소가 신학적 사유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이제 하이데거에 의해서 사유의 주관주의적 차원이 지양되고 사유의 존재론적인 차원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유행위인 신학의 근본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언어

 

4.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온 문서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비판하는 작업이 신학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문서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에 대해서 질문해야만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입장은 말씀과 계시를 그릇과 그 안에 담긴 내용물로 비교한 바르트의 입장과도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하이데거와 더불어 언어의 시원적 본질을 숙고함으로써 신학의 해석학적 토대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시간

 

5. 하인리히 오트는 신학 개념에서 시간이 담지하고 있는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서 하이데거의 시간 개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와 종말,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영생을 말해야 할 신학이 시간의 심층적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하이데거가 존재시간의 차원에서 풀어간다는 사실을 우리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면 그의 시간 개념은 우리의 작업을 훨씬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세계

 

6. 과연 세계란 무엇인가? 앞서 하이데거가 왜 하필이면 존재자는 있고 도리어 무는 없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존재자에 대한 극단적인 질문을 열고 있지만 그것은 곧 이 세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세계는 바로 창조와 화해와 종말을 언급하는 신학이 관심을 기울어야 할 주제이기도 한다. 오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물론 세계가 신학에서 사유되는 관점은 근본적으로 자연과학의 관점과 다르고 아무튼 자연과학 위에 세워진 자연철학의 관점과도 다르다. 신학에서는 세계가 신적 행위의 결과와 대상으로 사유되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역사 속에 통합되어 있는 것으로 사유된다. ‘세계는 이 역사에 낯선 어떤 것이 아니고, 역사 밖에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역사에 붙잡혀서 이 역사를 신앙으로 이해하면 그 역사 밖에는 더 이상의 것이 존재할 수 없다.”(36). 하이데거는 물()을 정적인 하나의 사물로만 간주하지 않고 우주론적인 시각으로 직관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론이 어떤 지평에서 신학적으로 사유되어야 할는지에 대한 방향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지 우리는 하이데거의 질문과 대답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게 아니라 기존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그의 철학의 길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통찰을 심화하려는 것이다.

 

인간

 

7. 일곱 번째로 오트가 제시하고 있는 주제는 인간이다. 그는 실존철학에 영향을 받는 실존신학의 인간론을 이렇게 해명한다. “인간적 실존은 다른 존재자와 유사하게 기술될 수 없고, 인간적 실존이 단순한 대상이 되는 곳에서는 결코 바르게 이해되지 못하고, 도리어 인간적 실존은 하나의 자기(自己)로서, 그것은 자신의 결단 속에서 활성화된다는 것이다.”(36).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요소로서 자기의 실존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결단하는 것이라는 실존신학의 인간론이 종교적, 정치적 권위에 좌우되던 인간을 새롭게 해석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실체가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과연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로서의 인간 이해가 이런 실존적 인간론을 극복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그런지, 더 나아가서 현존재 인간론이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인간이해와 어떻게 결합되고 상충되는지에 대해서 꾸준하게 질문해야만 한다. 만약 하이데거의 중심 철학이 실존이 아니라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실존적 인간론은 약간 방향이 왜곡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이데거에게는 인간의 실존적 경험과 그 결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존재가 사유를 통해서 탈은폐되는 그 도구로서 현존재(Dasein)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 신학자들은 생물학적 인간론과 철학적 인간론의 압박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특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에 어떤 특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그런 여러 관점과의 연관성 속에서 보편타당한 대답을 모색해야 할 자리에 서 있다. 물론 이런 자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현존재라는 하이데거의 매우 특이한 인간학 앞에서 신학은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인간론을 새롭게 성찰해야한다는 압박감을 받고 있는 셈이다.

 

존재의 삼중적 차원

 

오트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존재는 언어, 시간, 세계라는 삼중적 차원에서 우리와 연관된다. 존재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이런 세 차원에서만 사유될 수 있고, 거꾸로 언어, 시간, 세계에 관한 사유는 결국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간다. “존재는 언어로서, 시간으로서, 그리고 세계로서발생한다(40).

그런데 신학도 역시 이러한 삼중적 차원과 연관된다. 사유행위로서의 신학은 언어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다루고 있는데, 이 계시는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동시에 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사건이다. 즉 계시는 언어와 시간과 세계의 차원에서 언급되어야한다는 말이다. 결국 신학자로서 우리가 언어, 시간, 세계를 다루어야만 한다면 이것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질문했던 하이데거의 철학을 통해서 우리의 신학설계를 심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내용적으로 일치시킬 수 없으며, 형식적으로도 일치시키기 힘들기는 하지만 심층적 지평에서는 상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오트는 사유 개념에 대한 질문을 추적하면서 신학적 자기이해 내지 신학의 기획의 문제를 거론하고, 언어 개념에 대한 질문을 추적하면서 신학적 해석학의 문제를 거룩하고, 세계 개념에 대한 질문을 추적하면서 구원의 사건과 세계적 존재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거론한다.”(41). 물론 여기서 시간개념은 이런 전체 신학적 성찰에 기초하고 있을 것이다.

오트가 도식적으로 비교하고 있는 존재의 삼중적 차원은 기독교 신학이 주변의 철학과 맺어야 할 관계를 적당하게 설명한다. 기독교 신학이 자신의 도그마를 자신의 언어로만, 그것도 매우 배타적인 구조에서 피력하는 데 머물러 있는 한 종말론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을 변증하고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뿐이다. 언어와 시간과 세계의 시원적 차원이 우리에게 열린다면 하나님의 계시도 역시 그만큼 열린다고 보아야 한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가 여기에도 해당된다. 다만 우리는 그런 사유의 사유 자체를 목적으로 두는 게 아니라 역사와 세계와 시간 안에서 구체적인 형태(Gestalt)로 등장하셨고, 우리와 같은 언어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와 그의 사건이 바로 궁극적인 생명사건이라는 그 목표를 선취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상수로 포착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학은 여전히 종말론적으로 사유 행위를 멈출 수 없다. 그 사유의 길에서 하이데거는 매우 풍부한 통찰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부분을 오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신학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신앙의 밝혀줌이요, 지성을 찾는 신앙의 밝혀줌이다. 그리하여 신학적 사유가 자기 자신을 언제나 다시 질문하고 신앙으로부터 자신이 나온 것, 자신의 책임을 언제나 다시 담당하고 자신의 사유 방법론을 언제나 새롭게 확실하게 하는 것은 기초적으로 신학적 사유의 본질에 속한다. 그래서 다른 누구보다도 하이데거가 신학을 위한 대화의 상대자로서 적임자이다. 그리고 선험적 질문제기를 최종적으로 결과로까지 이끌어가는 이 사유자와의 대화는 신학연구를 위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약속해준다(44).


[레벨:12]staytrue

2015.02.03 11:21:25
*.72.188.140

'신학과 철학의 만남' 글을 잘 읽었습니다.

온라인으로 이런 강의를 읽을 수 있다는게 큰 행운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듭니다.

기독교만이 유일무이한 진리라면,

혹 기독교가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탁월한 종교라면,

또 글에서처럼 참된 철학이라면,

신학에서 철학으로 인식론, 존재론적 지평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


그런데 거꾸로 도움만 받고 있는 형국은 아닌가하는 생각이듭니다.

신학이 철학의 개념과 이론을 빌려다 쓰는게 아니라,

철학이 신학에서 제시한 인식론과 존재론을 통해 

인간학을 펼쳐야하는 형국이 되어야 신학의 입장과 면이 좀 서게 되지 않을까요?


대화라는 표현으로 뭔가 주고받는 관계처럼 표현되지만,

그건 신학입장에서의 대화지 하이데거나 기타 철학자들이 

신학의 기독론이나 종말론을 자신의 철학체계 안으로

반영한다는 이야기는 본적이 없어서 ....


이렇게 되면, 신학의 정체가 좀 의심스러워지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듭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5.02.03 22:38:36
*.94.91.64

좋은 지적입니다.

철학이 신학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철학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유럽 전통에서 신학과 철학이 대화를 했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고,

어느 시점에서 신학이 그런 지위를 잃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학이 그런 지위를 찾으려면 좀더 노력해야겠지요.

설령 철학과의 그런 대등한 대화의 자리를 얻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야생화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햇빛을 받으면서 그 존재감을 찬란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신학도 그런 진리의 빛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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