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해석학과 신학

기독교해석학 조회 수 5404 추천 수 62 2004.06.30 22:19:02

2장
해석학과 신학

-설교신학의 토대잡기-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교회의 종교행위 중에서, 혹은 예배 행위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선택하라고 설문조사를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들이 상투적으로 대답하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대답한다는 걸 전제한다면, 결코 목사의 설교 행위가 제1 순위에 자리를 잡지는 못할 것이다. 한 주간 동안 설교에 대한 기대감으로, 또는 예배를 드리면서라도 설교에 대한 기대감으로 긴장하는 신자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설교보다는 주말 TV드라마에서 훨씬 많은 재미를 느끼고 있으며, 예배를 드리면서도 성가대의 찬양이나 광고시간에서 더 큰 감동을 받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답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목사의 설교에서 영적인 깊이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자신들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되풀이되고 있는 마당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하나는 청중 자신들의 문제로서, 그들이 기본적으로 영적인 관심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이 두 사실이 제 각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중복되기도 하면서 교회 안에서 설교의 자리가 축소되는 결과를 빚었다.  
이런 설교의 위기는 사실상 청중들보다 설교자 자신들이 훨씬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한 교회에서 10년 정도 똑같은 대상을 놓고 설교를 하다보면 다음 주일에는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 될 때가 많다. 남의 설교를 거의 표절하듯 베끼기도 하고, 이런 저런 ‘설교 세미나’에 바짓가랑이 찢어질 정도로 따라다니면서 설교 기술을 배우려고 애를 쓴다.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일반적으로 목사들은 이런저런 노력이 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설교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교회 관리 쪽으로 목회의 방향을 잡는다. 설교의 비중을 낮추고 대신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교회를 이끌어간다. 교회 운영이라는 점에서만 본다면 이런 방식으로도 교회는 가능하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반대로 위에서 말한 설문조사에서 설교를 우선순위로 선택하는 신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소위 설교 명망가들이 활동하는 교회에서 이런 현상들은 나타난다. 이런 설교자들을 추종하는 신자들은 실제로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많이 받고 있으며, 다음 설교 시간을 기다린다. 설교 시간에 “아멘!”을 연발하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목을 필기하기도 하고, 더욱 진지한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설교의 내용을 전달하기도 한다. 목사 자신도 신자들의 호응에 감동되어서 자신의 설교가 먹히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설교현장에 설교의 위기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열광적인 분위기만 보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 이면에는 은폐된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현상에도 역시 설교를 하는 자나 듣는 모두에게 약간의 허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설교 현상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의 현상은 권위주의인데, 여기세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이 그것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신자들도 역시 말씀에 대한 깊은 생각보다는 그저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힐 뿐이다. 이러다 보니 실제로는 은혜롭지 않아도 은혜로운 것처럼 위장하거나, 아니면 미각을 상실한 혀처럼 없는 가짜 맛을 진짜 맛으로 착각한다. 이들은 설교자 둘레에 독특한 아우라를 조장함으로써 서로를 속이게 된다. 다른 하나는 일단 형식적으로 설교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현상인데, 여기에 속한 이들은 세련된 수사학에 숨어서 청중들의 의식을 호도함으로써 일정한 설교 효과를 거둔다. 종교적 만족감, 윤리적 만족감, 신앙적 처세술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처럼 작용한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 할 수 있다. 전자는 주로 부흥강사 유의 수법이며, 후자는 현대적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유명 설교자들의 수법이다.
위에서 우리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상반된 현상을 간단히 짚었다. 하나는 설교의 무력감이며, 다른 하나는 과도한 자신감이다. 전자는 교회 안에서 설교의 영역이 심하게 축소된 것이며, 후자는 심하게 과장된 것이다. 전자의 설교는 신자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후자는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서로 상반된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이 양자는 모두 설교의 왜곡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렇다면 설교의 기능이 바람직하게 운영되고 있는 교회는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됨으로써 신자들의 영성이 건강해지는 그런 교회와 설교자가 없지 않다. 그런 교회는 큰 소리 내지 않고 조용하게 말씀의 영성을 지켜나가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만약 이렇게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한국교회를 이끌어나가는 주류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설교의 위기 운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지, 우리 설교자들은 설교가 예배에서,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 전체에서 별로 핵심적인 기능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이 위기를 직시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 문제는 말재주로 넘어가거나 심리요법으로 해결될 게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데서 그 실마리를 붙들어내야 한다. 비록 발걸음이 더디다고 하더라도 다른 요행수나 지름길을 택하기보다는 정공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우리 설교자들에게 이런 위기가 배양될만한 토대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성서 해석의 취약성

설교의 위기를 언급할 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성서해석의 불성실이다. 성서 텍스트가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해석되는 경우는 그렇게 드물다. 이런 현상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위 ‘제목설교’ 형태를 취하는 설교는 성서 본문에서 제목만 뽑아낸 상태에서 설교자가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이다. 둘째, 소위 ‘강해설교’ 형태를 취하는 설교는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성서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신구약 66권 전체에서 성구를 짜깁기하듯이 인용하는 것이다. 이 두 유형의 설교자들에게 성서 해석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제목설교와 강해설교가 이렇듯 성서 텍스트의 해석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필자는 가끔 인터넷을 통해서 유명 짜하다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곤 한다. 말씀의 맛을 새롭게 느끼고 싶어서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왜들 그렇게 자기 이야기가 많은지 모르겠다. 자신들의 어릴 때 이야기, 교회를 부흥시킨 이야기, 자신의 윤리론 같은 이야기를 지루하게 끌어간다. 물론 그들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릴 만큼 입담이 좋기 때문에 아무 내용이 없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신자들은 은혜를 받기는 받는 모양이다. 또 어떤 설교자는 정치, 경제에 관한 시사 문제를 왜 그렇게 많이 언급하는지 모르겠다.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자신의 일방적인, 또는 너무나 상식적인 논평을 섞어가며 엮어낸다. 자신들의 일상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나 시사 뉴스를 핵심으로 전개하면서 성서는 다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뿐이다. 이렇듯 반짝이는 아이디어나 순발력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는 오래 갈 수 없다. 설교자는 일단 성서 텍스트에 충실해야 한다.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치열한 자세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아무리 드라마틱하더라고 늘 주관적 한계 안에만 머물러 있는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이 지향해야 할 성서의 세계가 설교행위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성서해석은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다.
성서해석이 중요하다는 말은 특별한 건 아니다. 이런 부분을 강조하지 않는 설교학 교수들은 없다. 그러나 과연 성서해석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특히 설교와 연관해서 성서해석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명확한 언급들이 없다. 본문비평이나 역사비평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비평으로 설교를 바르게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도대체 J문서, E문서, P문서가 우리 설교에 무슨 영향을 미친다는 말인가? 성서 텍스트의 전승사를 연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설교에 적용될 수 있을까? 이런 쪽으로 공부해보신 분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어떤 설교자들은 성서 텍스트를 오직 신자들의 삶에 적용하는 쪽으로만 밀고 나간다. 이런 유의 성서해석은 우리 삶과 직접 연관되기 때문에 매우 리얼하게 느껴지지만 성서 텍스트의 지평을 훼손시킬 위험성이 높다. 성서해석의 문제를 이렇게 두 가지 흐름으로만 나누기에는 그 스펙트럼이 너무 넓지만 일단 편의상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전자는 텍스트 원리주의이며, 후자는 텍스트 도구주의이다. 전자는 텍스트에 묶이며, 후자는 텍스트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할 설교 행위에서 별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문제가 벌어지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들이 성서 텍스트의 주제를 이미 완료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즉 이들은 성서의 지평이 더 이상 열릴 필요가 없는 고정된 실체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사랑, 구원, 영생, 생명 등등, 이런 게 바로 성서의 주제라고, 그런 것은 우리가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 바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구원이라는 주제가 어느 성서 본문에 있다고 하자. 그 성서 본문은 그것을 기록한 사람의 인식 한계 안에서 구원 사건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 사건의 모든 것을 해명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설교자는 그 본문 안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그 본문이 모두 담아내지 못한 영역까지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의 현실들을 밝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설교자들이 성서의 주제가 이미 완료된 것처럼, 이미 모범답안이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성서해석에 대해서 등한히 하고 대신 그것을 어떻게 요령 있게 전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에 치우치게 된다. 이는 곧 설교자들에게 성서가 일종의 정보 구실만 하지 진리론적 근거로 이해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성서의 주제에 집중한다는 말은 설교자가 근본적으로 성서의 세계 자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성서라는 문자의 언저리에 머물러서 구경꾼처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직접 들어가는 경험이다. 많은 경우에 앞서 말한 대로 성서의 세계보다는 자신의 인생경험이, 자신의 목회 “노하우”가 훨씬 중요하게 기능한다. 아마 이런 현상은 자기 스스로 성서의 세계를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든지 아니면 너무 깊은 세계이기 때문에 알아야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는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매우 심각한 결과가 발생한다.
성서의 세계를 눈으로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으로서의 성서 해석이 설교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보자. 바흐의 파르티타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고 하자. 바흐가 작곡한 이 곡의 악보만 갖고 연주해야 할 이 피아니스트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작업은 바흐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도대체 바흐가 그 곡으로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우선 분석하고 그 곡의 세계를 실제로 경험해야 한다. 악보라는 기호는 단순히 어떤 소리를 지시하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음악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서 바흐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노래를 했다면, 비록 악보에 그려진 소리를 낼지는 몰라도 바흐를 정확하게 해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처럼 설교자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이 본문에 대한 해석인데, 이 기초적인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다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아주 소홀히 취급된다는 것은 설교의 근본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칼 바르트가 독일의 본(Bonn)대학에 있을 당시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하는 등 히틀러의 니치즘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가 교육부장관에 의해서 출판과 강의를 금지당한 후(1935년?) 모국인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초청을 받고 떠나면서 신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Exegese! Exegese! Exegese!”(주석하라)였다고 하는데, 그는 아마 19세기의 문화 개신교주의에서 성서의 세계가 한낱 인간의 문화현상으로 축소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래서 히틀러의 제삼제국 이데올로기가 생산될 수 있었다는 점을 경고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바르트와 전혀 다른 환경 가운데서 말씀을 전해야 할 우리가 그의 말씀 실증주의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지만 일단 성서의 고유한 ‘놀라운 세계’ 들어가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성서 본문의 지평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그것을 오늘의 세계로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성서의 창조에 관한 보도가 오늘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설교의 창조성이 요구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같은 성서 본문이라도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를 읽을 수 있는 영적인 깊이에 따라서 그것은 전혀 새로운 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 텍스트의 해석은 횔덜린이나 괴테의 시, 또는 렘브란트나 피카소의 그림, 바흐의 음악을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다. 혹은 우리의 문화유산을 감상하고 그것의 의미를 풀어내는 작업과도 비슷하다.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세계를 거기서 포착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2. 기독교의 “체계”에 대한 이해 부족

그런데 오늘 우리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의 고유한 세계와 독자의 고유한 세계를 창조적으로 연결해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설교자가 ‘기독교’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평생 목회와 설교로 밥벌이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기독교를 알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세례 문답 정도의 수준에서는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만으로 기독교를 모두 안다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20년 동안 운전 경력을 자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자동차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동차에 대해서 아는 게 아니다. 20년 동안 목회와 설교 경력을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그는 기독교를 아는 건 아니다. 이게 정확한 말인지 아닌지, 조금 천천히 앞으로 나가자.
한국 교회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있는 책이 설교집이고, 다음에는 주석집이며, 읽기를 가장 거리는 책이 바로 조직신학 저서라고 한다. 조직신학 책을 읽기보다는 오히려 정신분석이나 심리학, 때로는 상담학 책을 읽는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이미 기독교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는 무언가 함정이 있다. 사실 설교자들이 기독교의 교리(체계)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착각이고 한계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복음이 뭐 별거냐.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이 아니냐.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가라는 말이 아니냐. 예수 믿고 지금 지상천국을 누리며 살라는 말이 아니냐.” 대충 이런 식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어떻고 하나님 나라가 어떻고 말은 하지만 도대체 삼위일체 교리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개념인지, 종말론이 철학사적인 면에서 이 세상의 역사철학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설교자들은 별로 많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개념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예수 믿는 것과 별로 그렇게 깊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믿으라는 말에 목청을 높이지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 내용을 설명할 줄은 모른다.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에만 매달려서 설교한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설교되지 않고 인간의 태도만 강조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설교에는 “하나님이 망각”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믿음은 있지만 무엇을 믿어야 할지 그 대상인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문제는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약간만 세심하게 살피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잘 들어올 것이다. 대개의 설교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살펴보라. 예컨대 이렇게 분주하고 복잡한 사회 속에서도 주일을 잘 지키는 게 큰 믿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카터 대통령이 주일에는 모든 공무를 접어놓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예도 든다. 아주 당연한 말 같지만 주일을 지키는 게 근본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사실만을 엄청난 신앙적 사건인 것처럼 강조한다. 이는 흡사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을 벌인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자세다. 예수님에게는 안식일이 생명을 풍요롭게 만들어가야 할 종교형식이었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인간의 종교행위를 규정하는 절대 규범으로 작동했다(눅 6:6-11참조). 우리의 설교는 바리새인들처럼 대개가 이런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즉 교회에 잘 나오면 마음이 평안하고 출세하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런 정도라면 도대체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을까? 설교가 시민 단체에서 주관하는 교양강좌*나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 불과한데 말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미래를 이 세계 안에서 풀어내야 할 설교가 단지 인간의 실존적인 신앙경험이나 또는 윤리적 실천, 심지어 처세술 정도의 차원으로 떨어져버린 이유는 설교자가 설교의 지평을 지나치게 교회 성장론에 고착시켜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늘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들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의 기질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현실 논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은 늘 어떤 절대적인 세계에 의존되어야 할 종속변수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해야한다. 이런 인식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에 설교자는 늘 어떤 진리를 만났을 때의 충격에는 관심 없고 단지 가시적인 성과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청중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포퓰리즘의 위험성이다. 설교자는 청중들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고유한 영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시인은 자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든지 않든지 시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가듯이, 또한 미술가가 그러하듯이 설교자는 청중들의 기대에만 부응하려고 하거나 또는 그들을 훈계조로 끌어가는 것만을 생각할 게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을 전해야만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설교는 귀납법적 설교, 스토리 텔링 등,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에 그 근본이 있다. 설교의 내용이어야 할 그 하나님을 알면, 즉 그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청중들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방식을 찾아서 전하게 될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진리의 세계를 알거나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이런 저런 방식을 자꾸 따져볼 필요도 없이 단지 자기가 본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그만이다. 진리의 내용에는 이미 그 방식*도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진리의 내용과 그 전달 방식의 상호성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진리의 효과는 그 전달 방식에 따라서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이 전달방식에 치우치면 결국 수사학의 포로가 될 것이고, 거꾸로 진리 자체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배타적 진리전달 방식인 선문답에 빠지게 될 것이다. 양자가 적합한 구도 속에서 연결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진리의 존재론적 우월성은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설교의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 성서의 진리에 대한 경험은 주로 기독교의 체계를 다루고 있는 조직신학에 의해서 수행된다. 왜냐하면 성서는 단지 문자만이 아니라 그 문자를 넘어서는 어떤 존재론적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여전히 은폐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은폐된 진리 세계는 단지 성서신학적인 접근으로가 아니라 기독교의 계시 사건 전체라는 구도 안에서 탈(脫)은폐된다. 이러한 탈은폐의 역사가 바로 조직신학 안에 담겨 있다. 따라서 조직신학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성서의 주제를 폭넓게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당연히 설교의 깊이를 심화시켜준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일반 학문의 세계에서 철학이 담당하고 있는 그 위치가 곧 신학 안에서 조직신학이 담당해야할 자리이다. 철학이 없는 일반 학문과 그 사회는 정신적 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직신학이 없는 신학과 교회 활동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한국의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이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며, 더욱이 교회 현장에서 거의 쓸모없는 학문으로 치부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조직신학을 단순히 기독교의 도그마로만 생각하고, 그 교리가 담고 있는 정신사적 깊이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에 상담학 훈련을 받는 것보다는 푈만의 <교의학>이나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을 읽는 게 훨씬 설교 행위에 도움을 많이 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바르트의 <복음주의신학 입문>이나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이라는 책이 우리의 설교로 하여금 기독교의 근본에 설 수 있도록 기독교 신앙의 체계를 제공해줄 것이다.  

3. 가현설적 인간론

일반 주류 교회의 설교에서는 하나님이 망각된 반면에, 일부 소종파적 경향의 기독교 활동에서는 나름대로 하나님이 주제로 부각된다. 주로 성서 공부를 중심으로 한 선교단체가 바로 이들인데, 이들은 매우 진지한 자세로 성서 공부에 임함으로써 그 성서의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이들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 한국 교회도 역시 성서 공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소위 ‘큐티’로 통칭되는 이런 성서 공부는 일반 교회의 활동이 대개 자기 확대에 치우치는 것에 비해 비교적 성서의 근본적인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방향을 바로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인간 이해가 아주 조잡하고 단선적이고 추상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자기들이 이해하고 있는 작은 틀에 모든 인간을 짜맞춤 하려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그들에게는 실제의 인간이 아니라 딴 세상(별세)에 있는 인간만 보일 뿐이다. 교회사에서 볼 때 ‘가현설(docetism)이 이런 이원론적인 인간이해를 담고 있다. 가현설은 초기 교회에서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그의 신성만을 강조한 이단으로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경시하고 순전히 영적인 세계만을 강조한다.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가현설의 주장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히브리어 루아흐, 헬라어 프뉴마가 헬라 철학적인 면에서 영육이원론의 영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인 몸까지 포함된 전체 생명의 영을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이원론적인 인간 이해는 비성서적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은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모든 사상을 제거시켰다.
가현설적인 이해는 초대 교회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지속되었고, 사실은 지금 우리의 역사에서도 그런 흐름은 여전하다. 이 땅의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저 세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이들의 주장에 전혀 수긍할만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예수에게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한계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신성모독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는 가능한대로 순수하고 깨끗한, 흡사 정수된 물, 혹은 증류수처럼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이런 바탕에서 기독교의 신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에, 현실성이 없는 순수사유에 빠질 염려가 있다.  
가현설적 설교는 결국 신자들을 기독교적 도그마 안에 억지로 담아내려고 애를 쓰게 된다. 예컨대 “예수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을 모든 사람들에게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려고 한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죄의식을 갖고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회개할 필요조차도 느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서 “사랑합시다”라고 외친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 신자들은 속으로 “그래. 설교는 늘 그런 거야. 그런데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군!” 한다. 또는 어떤 신자들은 자신이 회개한 척, 또는 사랑하는 척 위장하며 살아간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을 아주 비현실적이거나 위선적이거나 냉소적으로 만드는 이유가 바로 이런 가현설적 인간론에 있다. 이런 기독교의 추상적이고 이원론적인 인간이해 때문에 니체와 프로이트*가 기독교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많은 기독교 설교자들이 니체와 프로이트를 대표적인 반기독교적 사상가로 보는 이유는 1장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그들이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그 표면적 사실만이 아니라 그들의 비판이 설득력이 있다는 내면적 사실 때문이다. 니체는 기독교의 도덕주의를 가리켜 노예근성이라고 비판했으며, 프로이트는 기독교의 정신 상태를 가리켜 노이로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 당시 기독교는 신자들의 죄를 공격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서 좌절하게 만들고 그 결과로서 교회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게 만들었다. 니체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기독교 도덕주의로 인해서 사람들은 이 땅의 삶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반응하고 오직 초월적인 저 세상만을 추구함으로써 이 세상의 정치적, 종교적 독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기독교의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인간의 ‘이드’를 야훼 하나님이라는 ‘초자아’로 억압함으로써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분열 증세를 보였다는 말이다. 기독교인의 삶이 무책임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은 곧 이런 노이로제 현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헬무트 틸리케는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에서 가현설적 설교의 한 전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어떤 설교자가 기독교인의 삶은 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외로운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인도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구호금을 보내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 예배에 참석한 사업가는 설교가 끝난 다음에 설교자를 찾아와 이렇게 호소했다. 자기는 이미 이웃에 있는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정기적으로 장애인들을 방문해서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자기처럼 교회에 나오는 사람만이 아니라 신앙이 없지만 약간의 도덕심만 있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으며,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업가의 실제적인 고민은 자기와 경쟁하고 있는 바로 상대 사업가와의 관계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경쟁 관계에 놓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 사람에게 절실했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원수) 사랑보다는 공격적인 태도로 살게 만드는 오늘의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이런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설교하기 위해서는 그저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추상적으로 언급하지 말고 아주 구체적인 세계를 배경에 두고 접근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가 부모들이 자기의 어린아이들에게 씻는 일, 자는 일, 노는 일 등에서 작은 행동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해 주듯이 세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예컨대 심하게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가 이혼해야 하는지 그냥 참고 살아야 하는지 그 최종적인 결론은 설교자가 내릴 수는 없다. 구조악이 횡행하는 현실에서는 사업가에게 있는 그대로 세무신고를 해야만 한다고 다그칠 수도 없다. 다른 사업가들은 모두 세금을 줄여서 신고하는데 자기만 정직하게 신고하다가는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윤리가 늘 현실과 타협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설교가 구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행동지침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삶의 방향 말이다.  
우리가 흔하게 듣는 말로 “설교하고 있네!”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원칙적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훈계조의 말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다. 이처럼 오늘의 설교가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이유는, 또한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늘 그렇게 진부한 내용으로 자족해 하는 이유는 바로 가현설적 인간 이해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설교의 위기를 설교자의 입장에서 세 가지로 간추렸다. 성서해석학의 미비, 조직신학의 결여, 가현설적 인간론이 그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은 설교 행위가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논쟁이나 수사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스스로 진리 세계를 열어가도록 준비하는 해석 행위라는 점이다. 여기서는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말씀의 자유로운 활동이 핵심이다. 그 활동은 바로 성서해석에서 시작된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오늘의 설교가 위기에 빠진 이유는 이런 해석학적 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 성서라는 텍스트를 문자적으로, 혹은 교리적으로만 오늘의 삶에 적용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해석되지 않은 설교는 근본적으로 죽은 설교다. 아무리 우리 귀에 솔깃한 내용이라고 해도 역시 죽은 설교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성서해석 문제를 통해서 해명해보자. 여기서는 세 가지 개념, 즉 계시, 언어, 역사가 차례대로 다루어질 것이다.

4. 성서 본문과 계시의 현실성

성서 본문을 중심으로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행위가 바로 설교라고 할 때 성서와 계시의 관계를 우선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바로 성서론과 계시론에 해당되는 것인데, 설교자는 이 두 개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설교는 성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관계되는 행위이다. 물론 설교가 성서를 본문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그것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계시의 현실성이 그 중심에 놓여 있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성서가 바로 계시인데 그걸 구분하라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문제를 아주 모호한 상태에 남겨두고 지나쳐왔기 때문에 툭 하면 성경 몇 장 몇 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변호했다. 또한 성서와 계시를 일치시킴으로서 설교 편이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성서가 계시이니까 특별히 설교 준비를 할 것도 없이 성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말이다. 물론 실제로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심리적으로 그런 상태에 있는 이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성서에 있는 여러 서사와 경구들을 적당하게 조합한 다음에 이에 적절한 예화 몇 가지를 섞어서 입담 좋게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이와 달리 성서의 언어와 하나님의 계시를 구분할 때 설교자는 성서 본문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 안에 있는, 또는 그것 위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전하기 위해서 철저한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서와 계시의 관계를 손가락과 달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을 때 우리가 손가락을 보는 이유는 그것의 방향을 통해서 달을 보려는 것이지 손가락 자체를 보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 없으면 달을 발견할 수 없듯이 성서가 없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긴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손가락은 손가락일 뿐이지 달은 아니다. 이렇게 손가락과 달을 구분해서 보고 결국 달을 볼 수 있도록 끌어가는 작업이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성서해석학은 성서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 현실성*을 확보하는 작업인 셈이다.

*예를 들어, 여기 조훈현과 유창혁이 둔 엘지배 세계 기왕전 기보(棋譜)가 있다고 하자. 가로 세로 19줄씩의 바둑판에 흑백 돌이 이리저리 놓여 있는 그림이다. 이 돌에는 일련의 번호가 매겨져있다. 바둑을 전혀 둘 줄 모르는 사람은 이 기보에서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다. 그의 눈에는 번호가 적인 흑백 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모습만 눈에 어른거릴 것이다. 그러나 돌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이게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두어진 바둑인지 안다. 이 기보를 읽기 위해서는 소위 정석을 알아야 하고 그것에 따른 수많은 변형을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응용 수단을 알아야 한다. 이 바둑을 둔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오간 여러 생각들을 추적할 수 있어야만 이 기보가 바르게 읽혀질 수 있다는 말이다. 기사들의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바둑의 현실성이며 본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둔 기보를 아무나 읽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수읽기가 어느 정도 따라가야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실력 차이가 엄청난 상태에서는 조훈현씨가 왜 이 수를 두었는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바둑을 관람자들에게 해설하는 사람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없이 해설하려고 든다면 그는 핵심을 짚어내지 못하고 영 엉뚱한 말만하고 말 것이다.

오늘의 설교자는 어떤 면에서 흡사 5급 정도의 바둑 실력이면서도 프로 9단의 바둑을 해설하고 있는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와 비슷하다. 성서의 세계는 저만치 앞에 있는데 그저 흉내만 내면서 성서를 해명하고 있다. 설교자들은 성서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전하든지 아니면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만, 즉 자기 설교를 이런 저런 방법으로 꾸미는 데에 신경을 쓴다는 말이다. 조훈현과 유창혁의 바둑을 보면서 그들의 복장이 어떻다느니, 오늘 날씨가 어떻다느니, 혹은 대국장 분위기나 상금의 크기에 대해서만 많은 말을 늘어놓고 정작 바둑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아마추어 해설가와 거의 비슷하다. 한국 교회의 설교가 늘 성서의 주변에서만 맴돌지 그 세계 안으로 치고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서의 세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현실성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달이 안 보이고 손가락만 어른거릴 뿐이다. 그저 처세술에 관한 책을 읽으면 될 만한 것, 윤리학에 관한 책, 심리학이나 정신분석만 배워도 해결될만한 것들을 설교라고 생각한다. 성서가 인간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당연히 처세술, 윤리, 정신 분석적 차원의 사건이나 이야기들이 담겨있긴 하지만 성서가 말하고 있는 핵심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이다. 곧 하나님 자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계시이다. 그것은 곧 하이데거의 존재(Sein)나 장자의 도(道)일 수도 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설교자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요소이며, 설교자들이 청중들에게 전해야 할 세계도 역시 이것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 자체의 드러남을 따라가는 학문인 해석학적인 훈련은 필수적이다.
물론 우리 설교자들은 늘 그런 세계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전한다고 주장한다. 한편의 설교 안에 하나님, 영생, 복음, 구원, 축복이라는 단어들이 얼마나 빈번히 등장하는가를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단어들로 묘사되고 있는 성서의 세계인 하나님의 현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삶 속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는 채 따로 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 세계 안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존재’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아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자기 스스로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영생’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런 세계가 자기 삶에 육화된 사람은 별로 없다. 철학은 곧 ‘철학함’이라는 말이 있듯이 신학도 역시 ‘신학함’이다. 설교도 역시 구경꾼으로 성서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 세계 안에 완전히 들어가서 살아가는 ‘설교함’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그 세계를 참되게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 우리들 중에서 실제로 체험한 성서의 세계를, 즉 하나님의 현실을 설교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저 약장수처럼, 또는 마술사처럼 주어진 단어들을 그럴듯하게 나열할 뿐이다. 아래는 어설프지만 필자가 마음으로 그려본 한편의 우화다.

아주 유명한, 아주 잘 나가는 수영 코치가 있었다. 그는 인근 각처에서 수영 강습을 받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분일초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이 수영 코치는 수영 선진국에서 발행된 수영 교본을 수 십 권이나 구입해서 완전히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으며, 세계 유수의 수영 학교에 꽤나 자주 견학을 가기도 했다. 매스컴에서도 이 사람을 성공 신화의 장본인으로 치켜세웠다. 실제로 업적도 많았다. 취미로 수영을 배우는 아줌마들만이 아니라 어린 수영 천재를 발굴하기도 했고, 물론 수영 교본을 몇 권이나 저술하기도 했다. 사람이 많이 몰렸기 때문에 이 사람은 직접 가르치지 않고 대개는 그 밑에 있는 다른 코치들이 가르쳤다. 이 사람의 이름만 듣고도 사람들은 벌 떼처럼 모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만은 그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한 번도 물에 들어간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는 물 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은 물에 뜨는 느낌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도 유명 수영 강사가 되어서 명예도 얻고 돈도 벌었다. (우리 설교자들도 역시 성서의 세계를, 그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고 교본에만 의지해서 설교하는 경우가 없을까?)


5. 성서와 언어 문제

성서해석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두 번째 요소는 언어 문제이다. 이것은 성서 텍스트를 해석할 때 그 안에서 기능하고 있는 언어의 세계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다. 성서는 원래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일단 번역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즉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러시아어를 모르면 그것은 그저 인쇄물에 불과한 것처럼 성서도 역시 성서의 언어를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는 게 우선적인 과제다. 그런데 번역이라는 것은 그 본문의 내용을 완전하게 소화해서 전달해 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오역*이나 반역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된다는 것은 문법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더라도 간단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정도의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만 한다. 두 언어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이런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해도 사실은 아예 해결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간단하게 유럽 언어와 우리말의 차이를 살펴보기만 해도 이 점은 아주 명확하다. 우선 유럽 언어는 시재가 아주 명확한 반면에 우리말은 그렇지 않다. 유럽 언어는 전치사의 용도가 분명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말은 대개가 단문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유럽 언어는 여러 개의 절을 결합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핵심적인 차이는 조동사의 활용도다. 독일어에는 “해야만 한다”를 뜻하는 조동사가 sollen과 müssen으로 구분되어서 명확하게 사용된다. 앞의 것은 본인의 의지적 판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면에 후자는 그것이 배제된 상황에서 사용된다. 앞의 단어가 윤리적인 차원이나 일종의 선택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강요라고 한다면 뒤의 단어는 거의 무조건적인 강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문법적인 차원보다 훨씬 심원한 데 있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를 교환하기 위한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세계관이 담겨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위에서 유럽 언어와 우리말의 차이를 약간 설명했는데, 여기서 말하려는 바는 두 언어의 우열이 아니라 서로가 삶을 다르게 이해했다는 점이다. 한 민족의 세계관이 언어에 담기게 된다. 철학적 사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언어를 그런 방식으로 발전시켜 나가게 되고, 실용적인 가치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의 언어도 그렇게 발전되어나간다. 아주 오래 전 신학생 때 읽은 이어령 씨의 책에 보면 우리 민족은 감정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형용사가 많이 발전했다고 한다. 대신 동사는 별로다. 우리의 말은 이런 식으로 발전했다. 분명히 언어는 그 나라의 존재론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요즘 우리나라에 영어 조기 교육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현상을 여기서 다시 상세하게 거론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급기야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에게 마저 미국인 강사를 통해서 본토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유치원이나 학원에 사람들이 미어터진다고 한다. 세계의 초강국 미국 언어를 배움으로써 세계인의 대열에 끼고 싶다는 마음이야 누가 탓할 바는 아니지만 무엇이 우선이고 차선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모든 문제를 우리만의 식으로 해결해나가자는 속 좁은 쇼비니즘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 인간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우리말을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우리말에 우리 민족의 존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카고 신학교의 서보명 교수가 기독교 사상 2002년 3월호에 기고한 “언어와 문화”를 보면 이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어주고 있다. 마지막 단락을 여기에 인용하다.

하나님의 말씀 속의 언어는 문법과 분석 이전의 언어이고, 억압과 술수 이전의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어바람을 회의적으로 보는 이유는 그 바람이 억압과 지배의 수단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언어로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고 찾을 때 가능하다. 경쟁력의 잣대가 아니라, 나와 내 이웃을 연결해주고, 내 이웃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게 하나님이 주신 언어의 참된 모습일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영어나 한국말의 구분 없이 모든 언어가 추구하고 이루어 내야 할 이 시대의 과제로 여겨진다.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가자. 시공간적으로 성서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설교자가 정확하게 설교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저 히브리어나 헬라어 성서를 읽고 해석할 줄 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설교가 될 수 있을까? 번역을 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아무리 외국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신학적 전이해가 없으면 원서를 번역하기 힘들다.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완벽하게 번역할 수는 없다. 설령 신학을 전공했다고 하더라도 성서 신학을 전공한 사람은 조직신학서를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명제가 여기서도 통한다. 설교자는 성서 언어라는 집에 살고 있는 존재(하나님의 계시 행위)를 읽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곧 해석학적 작업이다. 만약 성서 언어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어떤 외면적 현상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성서의 세계를 바르게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성서 언어가 존재론적으로 담고 있는 그 어떤 세계를 찾아내는 작업인 해석학이 우리로 하여금 설교의 근본을 외면하거나 상실하지 않도록 도울 것이다. 이 문제는 앞 단락에서 언급한 ‘성서본문과 계시의 현실성’과도 연관된다.

6. 성서와 역사 문제

우리가 성서에 진술된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성서가 언어를 통해서 담고 있는 하나님의 행위(계시)가 근본적으로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기자들도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계시행위로 이해했다. 신약성서 기자들도 역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함으로써 나름대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어느 한 사건이 그것 자체로 종결되는 게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더욱 근본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역사의 본질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헬라인들의 의식 속에는 역사가 자리할 공간이 없었다. 그들은 늘 그대로 있는 세계를 직관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만물의 본질을 불이라고 생각한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이는 때가 되면 불이 이 세계를 태워버리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일이 반복된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돌고 도는 게 바로 이 세상(코스모스)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은 어떤 방향을 향해서 흘러가는 세계(에온)를 보았다. 분명한 시작(창조)이 있으며 분명한 끝(종말, 심판)이 있다고 믿었다. 이 전체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게 바로 그들의 신앙이며, 또한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식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고유한 세계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고대인들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 이해에 도달했을까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헬라인들에게나 히브리인들에게나 동일한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서로 다른 견해로 나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이 질문은 곧 “세상이 뭐꼬?”라는 의미이다. 어떤 철학자가 이 세상은 “두껍다.”고 말했듯이 이 세상은 우리의 인식이 도저히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중층적이라는 게 그 대답이다. 우리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창조인 이 세상은 우리가 질문할 뿐이지 그 모든 실체를 우리가 풀어낼 수는 없다. 이런 세상을 헬라인들은 공간의 차원에서 바라보았으며, 히브리인들은 시간의 차원에서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세상은 단순히 공간적인 것만도 아니고, 또한 시간적인 것만도 아니다. 시간과 공간이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방식으로 결탁해서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이 세상의 이 비밀은 종말에 가서 밝혀질 것이다.

어쨌든지 구약성서의 전통에 따라서 우리가 성서를 역사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두 가지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는 일반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보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그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역사에서 배운다는 게 바로 이런 뜻이다. 일단 이 말은 옳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해석학이 바로 그것이며, 오늘의 많은 역사학자들도 늘 이런 식으로 말한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이렇게 하자고 주장한다. 둘째,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역사적 해석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미래를 지향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미래로부터 현재를 향한다. 과거의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이르러서 밝혀지듯이 오늘의 사건은 미래에 가서야 밝혀지게 될 텐데, 이 미래를 앞서 당겨 경험함으로써 오늘의 사건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가상공간이나 타임머신을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오해다. 역사적 관점을 미래에 둔다는 말은 우리가 실제로 미래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는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역사로 보고 해석해야만 하나님의 계시 행위가, 혹은 진리가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신학적 전망이다. 판넨베르크의 말을 빌리자면 ‘보편사적 해석학’이다.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보편사를 해석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이 한 개인의 실존을 뛰어넘어 전체 역사로서 자기를 들어낸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해야 할 설교자들은 역사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하는데, 이 작업이 바로 해석학이라 할 수 있다.

7. 해석의 길에서

위에서 우리는 성서 해석이라 할 설교 행위에서 언어와 역사가 갖는 그 중요성을 통해서 해석학적 요청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이런 점에서 가다머가 일찍이 <진리와 방법>에서 해석학을 일종의 방법론이 아니라 진리론의 문제라고 본 것처럼 설교도 역시 본문을 해석하는 기술에 머물지 말고 그것의 진리 근거를 파고들어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오늘의 설교가 위기에 처한 이유도 역시 설교가 일종의 기술론에 떨어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인데, 이의 극복은 또 하나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성서(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에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요한복음에 보면 어느 날 밤 은밀한 중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그는 참으로 본질적인 물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근본에 대해서 질문할 줄 아는 태도가 바로 철학이다. 예수는 그에게 대답했다. 거듭나야 한다고. 거듭난다는 게 무엇인가? 다시 어머니의 몸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는 말인가? 합리적으로 생각하던 니고데모는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와 니고데모 사이에 놓여있던 간격은 무엇인가? 이게 과연 극복될 수 있는가? 어떻게 가능한가? 설교자로서 우리는 니고데모 같은 이들에게 어떤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은 과연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을 이해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 세계가 우리의 시야에 들어와 있는가? 어떤 이들은 예수 믿고 지난 일을 회개하고 교회에 잘 나오고 착하게 사는 게 바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말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복음은 단지 우리의 행위나 양심 문제만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 삶의 토대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흡사 모차르트의 음악세계가 아주 분명하게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생명의 세계도 그렇게 있는데, 그걸 인식하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큰 깨달음(돈오)의 세계에 손쉽게 들어가는 왕도는 따로 없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걷다가 발견하기도 하고 아예 못 미치기도 한다. 어떤 이들 중에는 거의 그런 의식이 없었는데도 부지불식간에 그 속으로 들어가 버린 이들이 있다. 위대한 음악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 버린 것처럼 어떤 이들은 그렇게 영적인 깨달음에 들어가 버리기도 한다.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접어두고 일반론적인 면에서 볼 때 바람직한 길은 좋은 선생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좋은 선생이란 그 세계를 먼저 본 사람이니까 제자에게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 굳이 강의라는 형식을 갖추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선생의 존재 자체가 바로 그런 가르침이다. 스위스를 직접 여행하지 못한 사람도 그 나라에 대해서 들은풍월로 무언가를 겨우 말할 수는 있지만 직접 그곳에서 살거나 충분한 기간 직접 여행한 사람과는 전혀 격이 다른 것처럼 이 영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그 무엇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첩경이다.
우리가 좋은 선생을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저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런 가르침을 받을 수는 있다. 특히 신학 훈련을 받은 설교자들에게 필요한 책은 신학 전공 서적은 물론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주변의 인문학* 저서들이다.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철학, 문학, 정신분석, 예술에 관한 좋은 책들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정신사에 축적된 깊이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신학과 설교는 결국 성서 본문을 바르게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하고 전달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런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신학자들과 목사들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곧 인문학적 훈련이다. 어떤 사람은 인문학보다는 성서와 기도가 우리에게 훨씬 근본적으로 필요한 학문의 도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결국 우리는 성서와 기도에서 모든 문제의 해답을 찾아야 할 운명에 놓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와 기도가 담고 있는 내용이 곧 인문학적 훈련을 통하지 않고서는 접근하기 힘든 것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서와 기도의 중심이라 할 ‘생명’을 인문학적 이해 없이 우리가 풀어내려고 한다면 건조한 도그마에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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