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실존론적 해석학-로돌프 불트만-

기독교해석학 조회 수 6048 추천 수 83 2004.06.30 22:20:51
7장
실존론적 해석학
-루돌프 불트만을 중심으로-

불트만은 1929년에 기독교 교리는 “나의 함축적인 현존 이해를 명시적이게 한다”고 진술했으며, 동일한 차원에서 1953년에도 신학은 “신앙에 포함된 인식의 전개”이어야만 한다(R. Bultmann, Kirche und Lehre im Neuentestament, in: Glauben und Verstehen Ⅰ, 1933, 157;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1953, 475, 또한 578f. 참조.)고 주장했다. 아주 간략한 인용이었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학적 토대에 중심을 두고 있는 불트만의 신학적 특성을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칼바르트는 이미 이런 불트만의 언급이 명시적으로 제시되기도 전인 1927년에 신학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는 쉴라이에르마허 이래로 교의학의 토대를 신앙에 설정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자기 증명에 대한 교의학적 자리 매김의 요청과 상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K. Barth, Die christliche Dogmatik im Entwurf, 1927, §7, 83ff.).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현실성이 되며, 또는 어떻게 우리에게 현실성으로 인식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핵심이지(83), 인간의 실존론적 신앙을 그 근거로 삼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자기 확신을 하나님의 확실성으로부터 이해해야지 그 반대일 수 없다.” (이상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1, 53,54 참조).
20세기 개신교 신학계에서 바르트와 쌍벽을 이룬 불트만은 빌헬름 헤어만의 제자로서 초기에 바르트 등과 더불어서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변증법 신학을 전개한 대표적인 개신교 신학자였다. 그러나 차츰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론적 신학에 경도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서 신학을 전개하는 바르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탈신화화’ 논쟁으로 인해서 그의 목사직이 박탈당할 뻔한 위기가 있을 정도로 정통교회에서 배척 당했지만 그가 끼친 신학적 공헌은 참으로 심각하고 방대했다. 뿐만 아니라 신학 밖의 일반 학문세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성과는 바르트보다 훨씬 심대했다고 말해도 잘못은 아니다. 특별히 성서를 오늘의 과학적 훈련에 의해 인식론적 틀을 형성한 지성인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 오늘 우리는 그의 이러한 시도가 과연 기독교 신학을 바르게 해석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실효가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 즉 기독교가 인간 구원을 언급할 때 인간이해가 그렇게 절대적인 것인지, 아니면 그 인간학이 의존해야 할 더 큰 현실성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이제 오늘의 설교 행위에 내면화된 문제점들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불트만의 해석학적 토대

불트만의 해석학은 ‘이해’(Verstehen)와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에 집중된다. 이미 쉴라이에르마허가 해석학의 문제를 이해의 기술이라고 천명한 이후 딜타이와 하이데거를 거쳐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이 이해의 문제는 그 중심에 놓여 있었다. 이런 이해가 가능하기 위해서 전이해, 탈신화화, 역사성 문제가 거론될 수밖에 없는데, 불트만의 이런 전반적인 해석작업은 ‘실존론적 해석’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우선 그가 1950년대에 발표한 네 편의 논문을 중심으로 그의 해석학적 구도를 따라가 보자. “해석학의 문제”(1950)에서는 ‘이해’를, “전제 없는 주석이 가능한가?”(1957)에서는 ‘전이해’를, “그리스도교적 희망과 탈신화화 과제”(1954)에서는 ‘탈신화화’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1958)에서는 ‘역사성’ 문제를 주로 다루려고 한다.

1) 이해
굳이 불트만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해석학이 곧 이해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에서 생각들이 다를 뿐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절대의존 감정’이야말로 신학적 문서를 해석하는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했는데, 불트만은 이런 심리적 해석학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어떤 문서를 이해하는 게 단지 문법적 규칙을 적용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 요소가 필요하다고 쉴라이에르마허가 주장하고 있지만 이런 심리적 해석학은 결국 수학이나 과학, 또는 역사적 문서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는 딜타이의 ‘삶의 해석학’도 역시 자신이 극복해보려 했던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해석학의 문제”(학문과 실존 1)에 실려 있는 그의 언급을 들어보자.

그가 ‘남의 심리 상태를 공감’하는 데 대한 관심을 그 공감에서 솟는 행복감에 근거한 것으로 보고 자기 시대의 모든 제한을 벗어나서 옛 문화를 들여다보는 자이면서 ‘향유’하는 ‘매력’을 논했다는 점에서 그는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매력을 향유할 뿐 아니라 “과거의 힘도 받아들였다.” 이해하는 자는 ‘모든 역사에서 정신의 역사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관조를 통해 자기 개성을 ‘보충’하고, ‘이해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진술에서 보여주는 것은 참 이해가 남의 개성 자체에 도취되어 관망하는 데에 있지 않고, 근본적으로는 오히려 거기서 보여주는 인간 존재의 가능성 -이것은 곧 이해하는 자, 이해에서 의식하는 자의 것이기도 한데-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이해는 해석되어야 할 작품에 제시된 물음과, 작품 중에서 해후되는 요구를 경청하는 것이며, 자기 개성의 보충은 자기 가능성을 더 풍부하고 깊게 개척하는 것이며, 작품에 의하여 자기 자신(즉 미숙하고 위축된, 항상 고착될 위험성에 떨어져 있는 자신)으로부터 발전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298).

여기서 이해 문제가 해석학의 중심에 자리를 잡는다는 말은 아주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불트만의 실존론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해석 사건에서 이해가 관건이라는 말은 곧 그 이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의 실존론적 입장이 핵심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텍스트를 읽고 해석해야할 당사자가 컴퓨터처럼 기계라고 한다면 실존론적 이해는 아무런 역할을 감당하지 않겠지만 텍스트가 형성되는 과정에 이미 사람의 실존론적 경험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 그것을 읽고 이해해야 할 사람도 역시 그런 사람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실존론적 이해 문제가 중요하다는 불트만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좀더 엄밀한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요소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이해를 가능하게 되는 그 힘이 이해하는 사람에게 있다기보다는 텍스트 자체에게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비록 해석자의 이해가 충분하게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텍스트가 독자에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막혀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텍스트 자체가 담지하고 있는 이해의 능력도 역시 인간의 실존론적 이해와 연결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런 갈등을 피해갈 수 있지만 불트만의 해석학이 여전히 인간의 주관적 이해가 중심축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신 중심의 신학 구도에서 그의 입장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해석의 과정에서 주관적 해석이 곧 객관적 해석이라는 불트만의 주장을 좀더 풀어보아야 하겠다. 불트만에 따르면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적 입장이, 그것이 반드시 실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해석학의 문제’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극단적 주관적’ 해석은 곧 ‘극단적 객관적’ 해석이 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실존 문제에 의하여 움직이는 자만이 문헌의 요구를 경험할 수 있다. 역사적 기념물은 오직 우리가 자신의 경험-준비 태세에서 문제성, 즉 세상에서의 우리 존재의 안전지대와 위험지대를 만들어주는, 최종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궁핍과 위협을 알 때 비로소 그의 모태인 깊은 현실에서 우리에게 말문을 열 것이다.(302)

우리는 여기서 불트만이 바르트의 ‘말씀 실증주의’ 내지는 ‘말씀 객관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주관성과 실존론적 차원을 배제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바르트의 입장이 불트만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 인간의 실존 안에 갇혀 있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인간의 주관이 해석 작업에 개입할 수 없다고 본 반면에 불트만은 인간의 실존론적 깊이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성서의 세계는 무의미하다고 본 것이다. 이 문제는 인간의 주관적 실존 체험이 기독교 해석학에서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집중된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주관성이 성서의 깊이를 열어내는 데 상당한 기능을 감당했지만 성서는 존재론적으로 그런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즉 인간의 주관적 실존을 통과함으로써 텍스트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해석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실존을 뛰어넘는 세계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이 세계 현실성은 인간의 실존만으로 감당하기에는 훨씬 깊고 넓은 세계를, 예컨대 물리학이나 예술, 또는 철학과 문학, 더 나아가 우주 전체의 차원에 속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2,3광년 떨어진 어느 별이 반드시 우리의 주관적 실존 체험에 의해서만 해석되거나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묵시적 세계가 반드시 우리의 주관적 체험 안에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주관적 실존 체험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땅의 생명 구조 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2) 전이해
해석 행위에서 반드시 요청되는 주관적 실존 체험은 곧 전이해 개념이다. 불트만은 다른 논문에서도 꾸준하게 피력한 바이지만 “전제 없는 주석이 가능한가?”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가 핵심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바는 어떤 텍스트를 다룰 때 어떤 결론을 전제하고 접근하면 안 된다는 말은 옳지만 그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그것에 대한 선(先)이해를 반드시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쇼팽의 프래루드(전주곡)를 듣고 이해하려면 피아노 악기와 음악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로 하며, 휄더린의 시를 이해하려면 시에 대한 전이해가 필요한 것과 같다. 성서를 해석하는 경우에도 종교에 대한, 혹은 성서의 세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게 마련이다. 물론 불트만이 말하는 전이해는 이런 역사학적 정보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인간의 실존론적 깊이에 닿아 있는 체험을 가리킨다. 그는 성서 주석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 성서 주석은 모든 다른 텍스트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선입 판단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불트만이 여기서 언급하려는 바는 교회가 어떤 교리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성서를 알레고리칼하게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는 마태와 요한이 예수님의 사도였기 때문에 그들의 보도가 무조건 사실이라고 보는 것도 역시 선입 판단이 작용하는 경우이다.  
둘째, 그러나 주석은 그것이 역사과학적(historisch) 해석으로서 역사 비판적 연구 방법을 전제하기 때문에 전제 없는 것일 수는 없다. “주석은 역사적 문헌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역사과학이다.”(136). 따라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사전 지식은 당연히 필요하다.
셋째, 또한 여기에는 주석자의 삶과 성서에서 문제되는 내용의 연관성, 그리고 그와 함께 전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의 전이해는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신에 대한 물음에 근거한 것이다. 즉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주석자가 신에 관해 가능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신에 대한 실존적 물음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 시간, 역사, 구원 개념처럼 인간의 실존에 관한 문제들을 알고 있어야만 성서의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는 말인데, 이것은 일종의 인문학적 차원의 이해라 할 수 있다.
넷째, 전이해는 결코 종결된 것이 아니라 미결된 것이어서 텍스트와의 실존론적 해후에, 그리고 실존론적 결단에 이를 수 있다. 성서와의 실존론적 해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거절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전이해는 하나의 완벽한 체계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어떤 결단을 하게 만들뿐이다. 인간의 육체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에 대한 어떤 전이해를 갖고 있는 독자가 니고데모 이야기를 읽었다고 해서 모두 똑같이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전이해를 통해서 텍스트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는 하지만 그 만남을 통해서 결단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실존론적 체험에 의해서 달라진다.  
다섯째, 이런 점에서 텍스트 이해는 결코 확정된 것이 아니고 개방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의미는 그때에 따라서 뒷날 새롭게 계시되기 때문이다. 바울의 칭의론이 루터에 의해서 “오직 믿음으로만”으로 이해된 것처럼 참된 이해는 역사적 정황 가운데서 서로 다른 입장들이 충돌하거나 교환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다.    

3) 탈신화화
탈신화화와 이해문제를 불트만의 입장에서 좀더 심도 있게 접근해보자. 원래 탈신화화 논쟁은 1941년 4월21일 ‘고백교회’의 교역자 모임에서 불트만이 제기함으로써 논란의 불씨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강연은 ‘신약성서와 신화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사실 불트만은 이렇게 공식적으로 탈신화론을 제기하기 전에도 이미 그런 토대에서 신약신학을 전개해왔는데, ‘탈신화화’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등장하게 되자 고백교회 교역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불트만이 탈신화화 논쟁을 불러일으킨 동기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서에서 증언된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 탈신화화는 곧 “이해”의 문제이기도 하다.
불트만은 ‘그리스도교적 희망과 탈신화화의 문제’라는 아티클에서 바울의 편지를 해명하는 것으로 탈신화화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사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신구약성서 여러 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불트만은 이런 진술들이 그 당시의 두 세계상에 대한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는 유대교의 묵시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의 영지주의다. 묵시문학에 의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생존 시에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으로 믿었으며, 영지주의에 의해서 경건한 자들의 영이 죽음 후에 하늘의 영광으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불트만이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이런 희망들, 즉 유대교적인 것과 헬레니즘-영지주의적인 것이 신화적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화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런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신화를 틀을 벗겨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신화적 표상에서 그 어떤 상황이나 시대에도 그 정당성을 손상당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다고 본다. 그것을 올바로 찾아내는 작업이 곧 기독교 해석학인 셈이다.
그런데 불트만은 이 탈신화화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기독교 역사와 세속 역사에서 상당하게 전개되었다고 설명한다. 묵시문학적 종말론이 이제 성례화를 통해서 탈신화화 되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었지만 오히려 묵시문학적 종말이 이제는 선취(先取)적으로 교회의 성례전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세속의 역사의식도 다른 차원에서 전개된 탈신화화였다. 역사의 목표를 “정신의 자체 발견”이라고 생각한 헤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에서 이루어진다고 본 마르크스 같은 이들에게서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이 세속화되었는데, 이것이 곧 탈신화화다. 이들에게는 원래 성서의 신화적 표상이 담지하고 있는 그 인간 실존에 대한 종교적 이해가 담겨있지 않을 뿐이다.
불트만의 설명에 따르면 오히려 성서의 신화적 희망이 정신화하는 과정에서 그 인간의 실존 경험이 단단하게 자리 매김되고 있다고 한다. 루터는 소교리문답에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를 “하나님의 나라는 물론 우리의 기도 없이 스스로 온다”고 주석했다. “하늘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자신의 거룩한 영을 줌으로써 우리가 그의 은혜를 통해서 그의 거룩한 말을 믿고 ... 영원히 살게 된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적인 차원에서 “성령의 말과 능력에 의한” 현재적 작용으로 개입된다. 이 지상에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한 생명을 드러낸다. 이러한 루터의 견해를 받아들인 경건주의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의 행위와 이방 선교에서 찾으려고 했다. 경건주의나 윤리적 지평에서 찾으려고 했던 칸트,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역시 나름대로의 신화적 종말론을 정신화 함으로써 탈신화화 작업을 전개한 것이다. 즉 초월적인, 탈(脫)역사적인, 초자연적인 나라의 갑작스런 도래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나 윤리, 공동체 등에서 점진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앞서 인용된 바울의 신화적 진술과 다른 차원에서 종말을 이해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여기서 다시 이 신화적 희망 상(像)의 정신화에서 인간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가 고수되었는지 묻는다.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근원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 정신화로 인해서 원래 신화적 표상이 말하고 있는 바의 것, 즉 인간 삶의 성취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게 아니라 오직 피안(彼岸)적으로 오는 선물,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라는 사상을 파기시키고 말았다. 피안적인 것의 차안(此岸)화에서 그 차안화마저 결정적으로 포기되어야만 신화적 희망상의 본래적 지향성을 인식할 수 있다. 그 지향성은 곧 하나님의 미래에 의해서 인간 실존이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신화적 희망 상들이 개인에게 죽음에 대한 승리를 - 죽은 자들의 부활을 말하는 유대교의 희망상이든지, 영혼들에게 빛의 세계로 상승한다는 약속이든지- 약속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의미와 정당성이 위의 인식과 함께 파악된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유일한 확실성은 모든 인간 앞에 죽음이 마주 서 있다는 것뿐이다. 오고 있는 하나님이 미래로서 모든 미래를 위해 개방된 사람은 죽음 앞에서 놀라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죽음에서 선사하는 미래를 묘사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영광에 관한 상들은 모두 욕망의 환상적 투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환상에 관한 체념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앙의 철저한 개방에 속한다. 그러나 탈신화화에 의해 해석된 신화적 희망 상들의 의미는 그 희망 상들이 하나님의 미래를 인간 생명의 성취로서 말하는 데에 있다.(9).

즉 불트만이 주장하는 탈신화화 논의는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신화적 표상이 담아내려는 인간 실존을 읽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 인간실존은 곧 해석의 토대이기도 하다. 2천 년 전의 신화에도 인간 실존이 담겨 있고 그것을 읽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실존경험이 있기 때문에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인간실존은 탈신화화논의가 지향하는 목표점이기도 하고 그 출발점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그것은 해석학의 선(先)이해의 토대다.

4) 역사성
성서가 곧 역사적 산물이라는 확실한 사실에 의해서 불트만은 성서를 다른 고대 문서와 똑같이 역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 접근은 역사 자체를 복원하려는 게 아니라 그 역사의 실존적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트만에게는 역사가 아니라 실존론적으로 해석된 역사, 즉 역사성이 중요하다. 이런 역사성의 핵심을 잡아내는 일은 위에서 언급한 탈신화화 작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선 그의 논문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귀를 기울여보자.
여기서 불트만은 우선 예수의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이해가 실제로 역사 안에서 발생하지 않았다는 엄정한 사실로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역사의 흐름은 신화를 거부한다.”(218). 오늘날 아무도 이 세상과 그 역사가 초자연적인 악마들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우연한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무당들의 행위에 의해서 이 역사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주 드물다. 예컨대 동정녀 탄생, 구름 타고 올라간 후 다시 구름 타고 내려오신다는 신화적 표상을 믿지 못한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사실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없다. 이런 마당에 신화적 표상에 의해서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가 오늘 우리들에게 과연 타당한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전한 종말론적 설교는 포기하고 그의 윤리적 설교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래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그 윤리마저도 사실은 종말론적 지평에서 요청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종말론적 차원과 신화적 진술이 담아내고 있는 근원적인 의미를 찾아보아야 하는데, 그 방법이 곧 탈신화화라는 것이다. 즉 탈신화화는 해석의 방법이다.
“신화는 인간 실존에 관한 특정한 이해의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서를 탈신화화 한다는 것은 그 신화적 표상에서 인간 실존을 읽고 오늘의 삶에 적용시킨다는 의미다.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은 나름대로의 일관성이 있다. 이 세상에서의 허무한 삶을 경험한 인간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사유 체계를 세워본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세상의 일이 허무할 뿐만 아니라 불가해한 요소도 적지 않기 때문에 그 문제를 신화적 세계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신화는 불트만이 말하는 대로 인간 실존에 대한 진술이라는 게 그렇게 명확한 것일까? 그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따라서 움직인다고 설명한다. 딜타이의 해석학에서도 핵심으로 작용하는 인간의 삶이 언제나, 의식적이든지 아니든지 자신의 실존에 대한 물음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에 대한 물음과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은 동일한 것이다.”(241). 이런 점에서 불트만의 경우에 성서에서 인간 실존에 관한 전권위임적인 말을 들을 수 있다. 기독교 해석학은 성서가 말하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그 실존을 이해하게 하는 해석학적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성서해석에서 문제되는 것은 곧 실존이해이기 때문이다.”(243).
불트만의 생각과는 달리 성서의 신화적 표상들이 인간 실존을 훨씬 뛰어넘은 어떤 현실성, 즉 하나님의 현실성을 그렇게 표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 말이 옳다면 우리는 신화에서 인간 실존을 읽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을 읽어야 할 것이다.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이런 인간 실존의 해석학적 지평을 연관 짓고 있는데,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인간 실존보다는 존재 자체가 훨씬 근원적인 토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실존보다는 하나님의 현실성이 기독교 해석학에서 보다 근본적인 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하이데거의 경우에 현존재인 인간의 사유는 존재가 일어나는 통로라는 점에서 존재와 거의 동일시될 수 있긴 하다. 그 사유하는 인간의 실존은 존재의 미래적 가능성을 현재화시키는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철저한 실존인 인간의 죽음 문제를 꿰뚫어본다고 해서 존재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존재가 인간 실존을 통해서 역운(歷運)적으로 일어나지만 실존을 따라간다고 해서 존재가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 이해를 잠시 생각해보자. 그는 예수에게서 발생한 계시 사건이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256f.). “객관적으로 고찰하는 역사가는 역사적 한 인물인 나사렛 예수가 영원한 말, 곧 로고스라는 것을 볼 수 없다.” 객관적 역사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단지 종말론적 시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불트만은 이것을 역설이라고 말한다. 이 종말론적 실존은 오로지 선취로서만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적으로 살아가고 있지 가시적인 것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고후 5:7). 그런데 이것은 믿는 자의 종말론적 실존이 세계 현상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 이해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인 종말론적 사건은 말이 설교되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고후 6:2).
예수에게서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이, 혹은 생명 사건이 선취되었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 여기서 그를 믿고 받아들이는 실존적 결단이 중요하다는 불트만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결국 역사적 예수의 불확실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현실성이나 계시보다도 인간 실존을 모든 인식의 토대로 삼으려는 그의 인식론적 오류에 근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서 오늘의 과학적 세계관이 신화론적 표상을 거부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곧 오늘의 역사가가 객관적인 예수 사건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없다는 말과 통한다. 종말론적인 구원 완성의 선취인 예수 사건에서 역사는 무의미하고 실존만이 그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에게는 어떤 사실은 실종되고 어떤 의미만 무성하게 남게 될 것이다. 또한 예수를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종말론적 지평에서 실존론적으로만 접근해야한다면, 즉 우주론적인 형이상학 구도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기독교의 세계관과 하나님 이해가 놓여 있는 토대가 너무나 부실한 게 아닐까? 즉 인생은 허무하고 그림자에 불과하니까 지금 여기서 자기의 실존에 충실하게 사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말이 된다. 그것보다는 비록 잠정적이고 무상한 역사지만 그것이 엮어내는 실마리를 찾아서 기독론과 종말론 사이에 놓여 있는 체계를 세워나가는 것이 훨씬 책임 있는 신학 행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실존론적 해석학
불트만의 해석학적 특징은 쉴라이에르마허의 주관주의적 심리주의, 딜타이가 주장하는 정신과학으로서의 삶의 해석학, 하이데거의 실존을 탈신화화라는 개념으로 묶어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주관적인 해석을 고수하며, 철저하게 인간 삶을 강조하며, 철저하게 실존론적 이해에 집중한다. 즉 인간의 주관성, 인간의 삶, 인간의 실존이 그의 해석학적 토대를 놓는다. 과연 그런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을 목표로 하는 해석학이 성서와 기독교 전통의 본래적 현실성을 풀어내고 해명해낼 수 있을까?
그가 아무리 성서의 신화적 표상이 함의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론적 의미를 파악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현실일 수 있을까? 그는 분명히 말씀 실증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칼 바르트와는 대립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명제에서 신학의 자리를 찾고 있는 바르트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신학적 명제는 인간적 실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의 참된 성분일 경우에만 타당하다”는 불트만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들(신조들)이 인간 실존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들은 실존의 기독교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근거를 주며 여러 모양으로 인간 실존을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본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본래 사람에 따라 다르게 사람을 만나는 신의 존재와 행위,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존재와 행위를 밝힌다. 그러므로 그것을 인간의 내적 생활에 관한 진술에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Die kirchliche Dogmatik 3, 1948, 535.). 불트만은 이러한 바르트의 비판에 대해서 그가 실존적(existenziell) 해석과 실존론적(existenzial) 해석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오해라는 점을 지적한다(해석학의 문제, 305). 불트만은 인간의 실존을 절대화하고 그것에 빠져버리는 게 아니라 그 실존을 매개로 해서 결국 하나님의 계시에 이른다는 점에서 자신의 해석이 실존적인 해석이 아니라 실존론적 해석이라고 한다.
실존론적 해석이라는 불트만의 주장을 약간 보충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팔머는 탈신화화 개념이 기본적으로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을 위한 “해석학적 기투”라고 하면서 이 개념에 바로 하이데거가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한다. 미래지향적이면서 역사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존재자라는 불트만의 인간 개념은 <존재와 시간>에서 서술된 인간론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이 최소한 세 가지 측면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1) 객관적 사실로 해석되어 단순한 정보로 사용된 언어와, 인격적인 의의 및 강제력을 지닌 언어 사이의 구별이 있다.
2) 신(존재)은 말씀으로서 그리고 언어로서 인간과 만난다는 사상이 있다. 이는 인간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의 언어적 성격에 대한 하이데거의 강조와 상응한다.
3) 여러 말들 중에서 말씀으로서의 ‘케리그마’는 실존론적 자기 이해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사상이다.
팔머에 의하면 불트만의 탈신화화 작업은 신약성서를 실존 안에 해소시켜버리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화적인 요소들 속에 들어 있는 본래적이고 구원적인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탈신화화 개념은 복음을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내재된 천박한 직역주의를 거부한다.”(84). 불트만의 작업이 과연 성공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둘째치고 일단 그가 신약성서의 신화를 해체함으로써 현대적 지성주의에 영합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고, 더 나아가서 하이데거와의 사상적 교류를 우리가 전제한다면 오히려 계시가 계시로 드러나기 위한 매개로서의 실론론적 자리를 확보하려고 했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실존론적 해석학의 문제점

김영한의 불트만 비판을 일단 간단히 살펴보자. 개혁주의 신학자답게 불트만의 성서 해석에는 결정적으로 성령의 역할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부터 비판을 시작한다. 다음과 같이 다섯 항목으로 제시된다.
첫째, 불트만의 해석학적 착상은 성서해석의 가장 관건이 되는 ‘성령의 조명’, 즉 성령론적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둘째,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 착상은 현대인의 실존이해에 치중하므로 성서가 고유하게 지니는 세계상을 도외시하고 있다. 셋째,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은 신약성서의 관건이 되는 구속역사를 부정하고 그것을 실존의 종말론적 사건, 곧 실존의 역사성으로 제한시킨다. 넷째,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은 케리그마의 구속사적 내용을 종말론적 사건으로만 해석하여, 케리그마를 내용적으로 환원함으로써 케리그마의 원천이요 근거인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다섯째,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해석학을 신약성서 해석에 극단적으로 절대적인 요구로써 적용함으로써 실존론적인 임의성에 봉착하게 된다.
김영한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다섯 항목을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결국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1) 불트만의 탈신화론적 해석학에 의하면 인간의 실존이 성서와 계시의 객관적 사실보다 우선한다. 따라서 예수의 구속 사건이 갖는 역사적 유일회성이 종말론적 실존성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다. 불트만은 성서의 탈신화론적 표상에 있는 참된 내용을 인간의 실존이라고 보고 그런 실존적 경험을 오늘의 독자들에게 실존적으로 해석해주는 것을 신학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화론적 구조에 얽매이지 말고 그것이 담아내고 있는 어떤 사실, 즉 인간의 실존 경험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탈신화화 작업은 필연적이다. 이런 점에서 불트만의 탈신화론적 해석학의 기본적 착상 자체를 몽땅 불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은 신약성서의 관건이 되는 구속역사를 부정하고 그것을 실존의 종말론적 사건, 곧 실존의 역사성으로 제한시킨다.”고 보는 김영한의 주장은(107) 지나치게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전제를 깔고 비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구속사건이 유일회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실존 영역 안에서 사건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만약 그 구속사건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 사건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이 사건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그 책임을 그에게 묻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의 탈신화론적 해석학이 이런 인간 실존 중심적 사유로 인해서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인간론적 인식의 종속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인간의 실존을 잘 들여다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과 연관해서 불트만의 실존신학을 설명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사실 하이데거의 중심 사유도 실존이 아니라 존재였다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을 함께 엮어내는 시도는 별로 타당성이 없다. 어쨌든지 불트만의 탈신화화 논의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핵심 주제라는 점은 분명하며,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역사적인 현실성이 중심으로 작용하는 성서를 해석해야할 신학적 과제에서 곁길로 빠져들었다고 볼 수 있다.  
2) 김영한은 불트만의 해석학적 착상이 성서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성령의 조명, 즉 성령론적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우리는 김영한 비판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하나는 쉴라이에르마허를 다룰 때도 지적한 것이지만 칼빈이 진술하고 있는 “성령의 조명”은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의 교권적 성서해석에 대한 반동으로서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시한 것이었지 역사 비평적 연구를 제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영한이 말하는 대로 성령의 조명이라는 문제가 기독교 해석학에서 그렇게 절대적인 기능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성서나 기독교 문서를 해석할 때 인간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된다. 더구나 어떤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도 유보되어야 한다. 예컨대 통일교의 문선명이 자신의 성서해석이야말로 성령의 조명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따라서 기독교 해석학에서 일방적으로 성령의 조명 운운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이며, 오히려 성서와 기독교의 교의에 대한 진리론적 노력이 요구된다. 다른 한편으로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성령은 성서가 구전되고 문서화되는 그런 전승 과정에서 뚜렷하게 활동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그렇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해석해야할 우리에게 반복해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면 성서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신학과 교회 현장에서 예민한 주제로 작용한다. 성령론이 오해되거나 남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객관적으로 타당한 논리를 제기할 수 없을 때 성령을 도피로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성령을 개개인의 주관적인 어떤 체험에 대한 권위 부여쯤으로 여긴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자기의 생각이면서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성령이 깨닫게 했다고 주장한다. 자기의 생각에 대한 근거를 성경 구절에 찾기만 하면 그것이 곧 성령의 조명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불트만의 실존 경험이 성령의 조명일 수도 있다. 문제는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성경의 계시와 성령의 조명을 동일시한다는 데에 있다. 김영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서 그 자체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서 해석자는 스스로의 선이해를 불트만처럼 성서에 주입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기의 선이해가 성서의 말씀에 의해서 비판받아야 한다. 성서가 말씀하도록 해석자는 자기의 선이해를 반성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성서가 실존에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존이 성서의 말씀에 의해 해석되고 밝혀져야 한다. 이것이 성서해석의 기독교 현상학적 접근방법이다.” (105). 인간의 실존이 성서에 의해서 비판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성령의 조명과 동일시된다면 성령의 조명을 너무나 축소시키는 결과가 된다. 생명의 영인 성령이 어찌 성서에만 한정된다는 말인가? 모든 이해의 문제를 성령에만 의존시킨다면 결국 모든 해석학적 시도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불트만의 ‘탈신화화’ 개념이 담아내려고 하는 ‘실존론적 해석’의 핵심적인 문제를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까? 뒤에서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을 다룰 때 좀더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불트만에게는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의미가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물론 불트만이 탈신화화 개념을 통해서 신약성서의 근본을 포착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그 방법이 지나치게 실존론적 의미에 한정됨으로써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역사의 지평이 소실되고 만다. 예컨대 신약성서에 묘사되어 있는 예수의 부활 사건은 종말론적 차원에서만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역사적으로는 별로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인간과 우주의 역사에서는 죽은 듯이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종말이 이르러야 겨우 말할 수 있는 사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신화적 표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에 개입된 하나님의 사건으로써 오늘도 역사적으로 해석되고 변증되어야만 한다. 비록 그것이 종말이 오기 전에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종말과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 역사에서 인간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사건에 참여할 계기가 마련된다. 불트만 해석학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문제를 윤철호 교수도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는데, 옳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역사적 사건들에 기초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불트만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현실에 역사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시도에 대하여 비관적이다. 물론 그도 역사와 케리그마, 예수의 삶과 삶의 의미에 대한 교회의 선포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그 이상의 역사적 탐구는 역사적으로 불가능하고, 신학적으로 불필요하고 무익하다. 역사는 언제나 신화 속에 숨겨져 있어서 회복될 수 없으며, 또한 신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기독교 인식론과 해석학, 190).


탈신화화 논쟁과 설교

오늘 우리의 설교 현장에서 이 불트만의 탈신화화 논의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 점검해보도록 하자. 대개의 설교자들과 신학자들은 불트만을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전제하고 기독교를 손상시킨 대표적 인물처럼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우리의 설교에는 그의 탈신화화 작업이 은연중에 베어있다. 물론 불트만처럼 철저하거나 논리적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런 설교의 틀에 빠져있다는 말이다. 이를 신화론과 실존론이라는 두 가지의 극단적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사실은 인간론적 설교라는 점에서 하나의 사실을 가리킨다. 즉 설교 행위가 인간적인 지평에서 그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동기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는 이미 니체나 프로이트에 의해 충분할 정도로 비판받은 바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런 신화론적 구조에서 생산되는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성서의 내용 중에서 분명히 어떤 설화 내지 신화적 성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석하지 않고 무조건 사실로 강변한다. 예컨대 노아 홍수 사건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고 방주를 찾기 위해서 터키의 아라랏 산으로 탐색 활동에 들어가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한국 교인들 중에서 에덴동산을 실제로 기대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부활한 다음에 얻게 될 생명의 세계마저도 보상의 차별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 우주의 마지막 때 우리들도 구름을 타고 실제로 휴거할 것으로 믿는 이들이 있다. 이런 신화론적 표상은 우리 인식을 뛰어넘는 신비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등장한 문학적 장르인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무리 믿음이라는 말로 치장한다고 해도 바른 게 아니다. 시는 시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사실로 생각하면 그 시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신화를 신화로 이해하지 않고 사실로 믿어버린다면 오히려 성서의 권위를 깎아 내리는 꼴이다. 그런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을 비호하는 분위기가 순수한 믿음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 한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신화론적 설교로 인해서 신자들의 의식 구조가 오늘의 시대 속에서 일종의 정신분열증 같은 갈등을 겪고 있다. 즉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성서해석의 깊은 틈바구니에서 힘들어한다는 말이다. 오늘의 신자들이 성서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을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성서는 초자연적인 세계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둘째,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니까 기독교인은 성서를 통해서 초자연적 것만을 배우고 이 세상에서 자연적인 것을 배운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셋째, 성서의 초자연적인 진술(신화)은 믿을 만 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신앙을 돕는다는 의미에서 그냥 내버려두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상의 어떤 유형이든지 이런 신화론적 사유에 머물러 있는 한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는 책임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한국교회의 신화론적 설교, 내지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 건강한 신학이 자리를 잡지 못하게 만든다. 기본적으로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을 거부함으로써 설교자들과 청중들이 고대사회의 세계관에 안주하고 만다. 따라서 설교는 이 세계 앞에서 성숙한 자세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흡사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계몽주의 이후의 현대인들에게 기독교의 진리성을 정당하게 선포할 수 없다. 이제라도 설교의 신화적 구조를 벗어내는 일이 시급하다. 아래는 졸고 할렐루야교회 김상목 목사의 설교 비평인 “신화적 설교와 신학적 설교”의 마지막 단락이다.

신화적 설교
우리는 여기서 가장 근원적인 두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설교의 텍스트인 성서는 고대인들의 신화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신화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이 설교비평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정도에서 우선 첫 번째 질문부터 그 대답을 찾아보자.
신구약성서에 신화적인 요소가 개입해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완고한 근본주의자들이 아닌 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만약에 김 목사가 확신하고 있듯이 에덴동산이 신화적 설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면(왕좌 130 이하) 그곳이 어디인지 찾아가라고 권면하고 싶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 이후에 쫓겨난 그 에덴동산이 지구 어딘가에 있을 것 아닌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하는데,(1월30일) 그 하늘이 곧 우주의 어느 한 공간을 가리킨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갈릴레이 이전 사람이거나 아니면 1992년 다미선교회 소동을 일으켰던 광신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성서의 이런 진술들은 사실적 언어라기보다는 신화적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에 신화가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신화라는 개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고대인들에게는 오늘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사건들, 즉 신화들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서술한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컨대 어린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실로 인식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어린아이들이 어른이 된 후에도 산타클로스라는 사건, 혹은 그런 상징에 놓여있는 영적인 리얼리티들은 결코 손상되지 않는다. 성서가 해명하는 하나님이 겨우 산타클로스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하고 역정 내지는 마시라. 다만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뿐이니까.
보기에 따라서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 성서의 신화적 요소를 역사적 사실들과 구분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이지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축자영감설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구약성서가 금하고 있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율법은 고대 유대인들의 생활습관에 속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지 말고, 머리에 너울을 쓰라는 바울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도 역시 그 시대의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관, 풍습까지 포함해서 고대인들의 인식론적 도구들을 바로 신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성서의 신화를 사실로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김 목사처럼 여성의 산고를 “죄와 타락에 대한 하나의 상기, 상징”이라고 주장하며, 이브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다스려야 한다고 용감하게 주장하게 된다.

일단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가정도 질서를 통해 유지해야 되고,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창조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남자에게 책임을 지웠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의지하고 남자가 다스리도록 질서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왕좌 186).

이제야 글머리에서 제기한 아마추어리즘의 정체를 좀 더 정확하게 확인한 셈이다. 그의 설교가 기본적으로 고대인들의 미숙한 세계관이었던 신화적 패러다임의 내부 공간에서 순환되고 있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그의 성서관이 ‘신화적’이며, 따라서 설교도 역시 세속적인 성공신화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신화적 설교가 한국교회 강단을 지배하는 한 새하늘과 새땅을 향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인 희망은 단지 말에(고전 4:20) 머물고 말 것이다.

신학적 설교
신화적 설교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신학적 설교에 있다. 신학적 설교에 관해서는 한 두 마디로 끝낼 수 없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면서 아포리즘의 방식으로 간단히 그 방향만 제시하겠다. 신화적 설교가 과거지향적 복고주의라고 한다면 신학적 설교는 미래지향적 종말론이라 할 수 있다. 신화적 설교는 고대의 세계관 안에 폐쇄되는 것이라면 신학적 설교는 역사적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리는 것이다. 신화적 설교는 탈역사적 퇴보의 전망이며, 따라서 역사적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한다면, 신학적 설교는 역사적 진보의 전망이며, 따라서 역사적 불안을 향한 도전이다. 결국 신화적 설교는 신화를 오늘의 삶에 무조건 적용시킨다는 점에서 성서의 인간학적 도식화라고 한다면, 신학적 설교는 신화 너머의 영적인 현실을 오늘의 삶에서 새롭게 해석한다는 점에서 성서의 성령론적 역동화라 할 수 있다.
글쓰기를 끝내기 전에 한국교회의 내일을 짊어진 젊은 설교자들에게 한 마디 훈수를 두자. 대중은 신학적 설교보다는 신화적 설교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다. 대중 설교자가 되기 원한다면 부디 신화적 설교의 노하우를 배우는 데 힘을 쏟으라. 그 공부는 쉽고 그 길은 넓다. 그러나 영의 미래는 없다. 반면에 고단하고 외로울지 모르지만 신학적 설교의 길을 가는 설교자는 대중을 얻지는 못해도 심층적 생명이 풍요로워지는 영성의 세계와 만날 수 있으리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 목사는 곧 완공될 21세기의 노아 방주인 할렐루야 교회당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의로웠던 노아처럼 세상을 향해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와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구원을 외칠 것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만 그런 신화적 설교가 언제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게 될지 옆에서 지켜볼 뿐이다. <기상 2005년 5월>

실존론적 설교
위에서 언급한 설교의 탈신화화는 불트만에서 배울 것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면, 두 번째로 언급될 실존론적 설교는 불트만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 행위가 불트만이 제시하고 있는 실존론적 지평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상담학 공부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 지금까지 무턱대고 믿으라고 선포했지만 이제는 그 설교를 들어야 할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겠다는 의도는 일단 바람직하다. 그러나 인간을 이해하는 공부라 할 상담은 설교 행위에서 너무나 작은 부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열을 올리면서 집착할 필요는 없다. 우선 더 본질적인 것에 대한 공부를 충분히 한 다음에 그것의 효과를 제고시키기 위해서 보충하는 것뿐이지 상담한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설교자들이 흡사 이런 상담술, 처세술, 대화술이 설교 행위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곡해하고 있다.
우리의 설교 내용을 찬찬히 살펴 보라. 거기에는 모든 게 인간 실존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빠졌는데 기도하고 매달렸더니 해결되었다는 설교는 일종의 처세술이지 기독교의 설교는 아니다. 소위 ‘기복’ 설교가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 설교는 모두가 한결같이 실존론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민중교회의 설교도 역시 그렇다. 기복적인 설교가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부추긴다면 민중설교도 역시 인간의 욕망에 그 동기가 놓여있다. 착취당했던 사람들의 권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어느 모로 보아도 타당하지만, 그런 사회개혁이라는 목표가 인간학적 발상에서 출발하지 하나님의 나라 표상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데에 그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한국의 민중신학이 철저하게 인간학적 발상이라는 사실이 이를 확인시켜준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일어나지 않는 그런 사회가 온다고 한다면, 그게 인간의 정치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도래할 리도 없지만, 그때 민중신학이 할 일은 무엇인가? 신학이 그런 시공간적 한계 안에서만 타당한 논리라고 한다면 성서의 보편적 전승을 인간의 욕망 안에 가두어버리는 꼴이다.
신화적 구조나 실존론적 틀, 양자 모두 자기 자신의 신앙 경험에 따라서 성서를 해석하는 설교의 특징이다. 이런 설교는 늘 자기의 그런 주관적 경험에 머물게 되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현실성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와 약점이 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합주부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교육 대학교에 다닐 때도 개인 레슨을 받거나 작은 심포니에서 활동하던 김 선생의 지도로 오십 여명의 어린이들이 합주부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학교측이나 학부모회에서도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 선생은 워낙 음악을 좋아한 탓에 사비를 털어 가면서까지 합주부를 키워나갔다. 어느 날 새로운 어린이가 신입 부원으로 들어왔다. 이 아이의 어머니가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바람에 합주부 부원들 사이에 불평과 불만이 늘어갔다. 아이들은 지휘 선생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지나치게 많은 애를 썼다. 심지어는 꽃을 사온다거나 간식을 사오기도 하고, 심지어는 촌지도 내밀었다. 이제 연습시간이 즐겁지도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고 억지로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옛날에 비해서 실적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전국 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하고 시민을 위한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외면상 옛날과 달라진 것은 없고, 오히려 더 열성적인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러나 이런 음악 활동을 통해서 얻어야할 마음의 평화와 자유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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