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강 헌금에 대해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710 추천 수 0 2012.06.07 10:33:26

제 28강

헌금에 대해

 

시 한 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빛-꽃망울’입니다.

 

당신을 통과하여

나는 참되다, 내 사랑.

당신을 통과하면

모든 게 살아나고

춤추고

환하고

웃는다.

터질 듯한 빛 ―

당신, 더없는 광원(光源)이

빛을 증식한다!

(다시 말하여)

모든 공간은 꽃핀다!

당신을 통해서

모든 게 새로 태어난다, 내 사랑.

새롭지 않은 게 있느냐

여명의 자궁이여.

그 빛 속에서는

꿈도 심장도 모두 꽃망울

팽창하는 우주이니

당신을 통과하여

나는 참되다, 내 사랑.

 

어떻습니까? 한번 듣기만 해서는 금방 따라오기가 쉽지 않죠? 전문적인 시인이거나 시 읽기에 훈련이 많이 된 사람이라면, 낭독하는 걸 듣기만 해도 어떤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은 상당히 전문적인 훈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한 번 들어서는 잘 모릅니다. 제가 이것을 프린터로 출력해서, 요즘 계속 시간 날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읽습니다. 우리처럼 시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여러 번 읽어야 이게 와 닿는 것 같아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단어 자체를 따라가기가 힘들고요. 또 그 시인의 시적 영감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시에는 단어와 단어 사이를 연계해서 시인이 포착하고 있는 고유한 세계가 있거든요. 시인만의 창조적인 시각이 있는 거죠.

도대체 정현종 시인은 빛-꽃망울이라고 하는 이 시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까요? 그냥 어렴풋이 제게 와 닿는 것은 있습니다. 첫째 연 마지막 줄에 이렇게 나오네요. 모든 공간은 꽃핀다! 느낌표로 되어 있어요. 공간 사이에 빛이 있겠죠. 빛이 있어야 꽃이 내 눈에 들어와요. 그건 계속되는 움직임이죠.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꽃이 피는 것은 우주의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이 시는 공간, 빛, 세계, 꽃망울이라고 하는 사물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에게 세계의 신비를 전달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정확히 맞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이러한 시의 창조 작업이 가능한 것은 이 세계가 어떤 것으로도 결코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게 참 신비로운 건데요. 일단 예술가나 시인들은 그것을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그게 늘 살아 움직여요. 세계가 살아서 자기에게 온다니까요. 이 말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매일이 똑같은 날이 아니고, 똑같은 나무를 봐도 그 나무가 매일 변한다고 느껴요. 때에 따라서 자기에게 다르게 전달되는 거죠. 사실 시적 영감이 강하지 못한 평범한 우리도 그런 걸 경험하잖아요? 똑같은 미류 나무지만 어느 날은 그게 더 크게 와 닿는 경험을 하잖아요? 그게 세계가 말을 거는 건데요. 그게 인간의 감수성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세계가 그렇게 말을 걸기도 합니다.

제가 이 시를 읽은 이유는 일단 이 시가 좋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고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성서를 읽는 것이 시를 읽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시를 사실적으로만 읽는다면 미련한 사람 아니겠어요? ‘모든 공간은 꽃핀다.’는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믿는다면 시를 이해하는 게 아니거든요. 성서도 시입니다. 거기에는 시적인 메타포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신문 보도로 읽기 때문에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타깝죠. 그게 억지로 설득시켜서 될 일이 아니잖아요. 중고등학생이나 초등학생에게 고급 시나 철학을 이해하라고 한다면 안 되잖아요. 억지로 강요하지 말고 그 학생 혹은 청중에게 어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인식론)을 훈련시키는 게 가장 좋은 지름길입니다. 다른 것은 없더라고요. 대구성서아카데미도 사실 그런 일을 하는 겁니다. 평신도 신학운동이죠. 신학이라는 것은 바로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식론적 훈련이거든요. 이런 것 없이 다짜고짜 동성애가 어떻고, 공산주의가 어떻다고 말해봐야 사실은 반감만 생기고 잘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십일조 헌금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교회에서 벌어지는 종교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조금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에요. 헌금입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여러분이 강의안을 참고하도록 하고, 지금은 핵심적인 것만 짚겠습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헌금에 대한 열정은 무서울 정도예요. 헌금 뿐 아니라 지난주에 보았던 기도도 마찬가지죠. 예배에 대한 열정도 강렬해요. 세계에서 우리처럼 열광적으로 헌금하는 나라도 없을 겁니다. 미국처럼 부자들이 자기 재산을 기부하는 것 말고 일반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드리는 헌금 행위만 놓고 본다면, 세계교회에서 우리가 가장 앞설 거예요. 헌금 종류도 참 많죠. 주일헌금, 구역헌금, 절기헌금, 생일헌금, 건축헌금, 장학헌금, 선교헌금, 그리고 부흥회 때마다 감사헌금을 드리고요. 별미헌금이라는 것도 있더군요. 부흥회 마지막 시간에, 야곱이 자기 아버지에게 별미를 갖다 바치고 축복을 받은 걸 그대로 따라하는 헌금이에요. 그 밖에도 이래저래 내는 헌금이 많을 겁니다.

어쨌든 헌금을 열심히 한다는 건 한국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많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일단은 그래요. 그런데 이걸 무조건 좋게만 보기가 힘든 이유는 뭘까요? 헌금이 왜 필요한지는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과도한 헌금 행위를 좋게만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겁니다. 앞에서 예배를 설명할 때도 말했지만, 이 헌금을 의무의 차원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입니다.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하는 게 문제인 것처럼 헌금도 마찬가지예요. 주일 성수나 헌금을 율법처럼 가르치는 거죠. 기독교는 율법과 복음의 긴장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복음 중심의 신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존속시키려는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와 대립각을 세웠던 거고요. 그것이 기독교의 역사적 모태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늘 복음의 은총을 말하면서도, 주일 성수나 헌금을 법처럼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복음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틀이나 법, 규칙 같은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인가요?

은총과 법의 문제는 뒤에 다시 설명할 기회가 올 테니 여기서는 그만두겠습니다. 어쨌든 한국교회는 예배와 헌금 등을 법처럼 지키지 않으면 큰 일 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더구나 그것들을 복 받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섞여 있어요. 율법적인 행태와 기복적인 행태가 주일성수와 헌금에서 나타나고 있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 동영상 강의를 듣는 분들 중에 목사님들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헌금의 문제점들을 짚고 있는 거예요. 그 문제를 짚어야만 헌금의 의미가 바로 살아나니까요. 강의안에는 의무와 복이라고 썼는데, 말하다 보니 더 좋은 단어가 떠올랐네요. 헌금이 교회 안에서 율법적이고 기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것 표현 같아요. 이런 경향은 예배에도 나타나고, 그 밖에 교회 안의 다른 많은 종교행위들에서도 나타납니다.

한국교회에 헌금 종류가 많다는 사실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교회를 운영해야 하니까, 일단 돈이 필요하고요. 헌금이 많아야 전도 프로그램도 짜고 신자들도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목사님들도 교회에서 과도하게 헌금을 강요한다는 걸 알기는 알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식으로라도 신자들을 가르쳐야 오늘과 같은 세속적인 세계에서 그나마 기독교적인 신앙을 지켜나가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헌금의 종류가 너무 많아요. 이런 식으로 헌금의 종류를 만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겁니다. 웬만한 규모의 교회 성도들은 교역자들이 심방을 오면 심방 감사헌금을 하더군요. 그게 교회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심방 온 교역자들의 거마비 비슷하게 사용됩니다. 체면 때문이라도 교회 중직자들이 안 할 수 없거든요. 차비라는 명목으로 촌지처럼 하는데요. 이런 저런 이름의 헌금들을 다 합하면 신자들이 쏟아 붓는 헌금의 액수가 굉장히 많을 겁니다. 하여튼 좋은 뜻으로 헌금을 많이 내겠다는 건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뜻으로 낸 헌금을 정말 좋은 뜻으로 잘 사용하느냐가 문제겠죠. 헌금을 얼마나 바르게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까지 말해야 하기는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기독교 인터넷 신문에 나온 걸 잠깐 봤는데요. ‘높은뜻숭의교회’에서 탈북자들을 위한 공장을 짓기로 했답니다. 교회가 상당히 좋은 일들을 많이 합니다. 좋은 일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진부한데, 더 나은 표현이 생각이 안 나네요. 진보적인 교회보다 오히려 이렇게 보수적이면서 깨어 있는 교회가 사회개혁적인 일에 헌금을 더 많이 투자하고 있다는 이 역설적인 현상을 고민해야 합니다.

헌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십일조만 하더라도, 이걸 어떻게 율법적으로 강요하는지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말라기서나 그 외 여러 곳의 성서 본문을 들먹이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식으로 말하죠. 그러나 어느 정도 상식만 있는 목사님이라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한국교회의 전통이니까 그 헌금을 좋은 쪽으로 잘 쓰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걸 아주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교회들이 상당히 많을 겁니다. 그냥 옛날 방식으로 무식하게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고상한 방식으로 십일조를 율법적이고 기복적인 형태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죠. 그런 이야기는 길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세계 전체 교회에서 우리나라만 하고 있어요. 물론 미국에서도 복음주의적인 교회나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십일조를 할 겁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하지 않아요. 제가 있었던 독일교회 역시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독일에는 주민등록을 할 때 종교를 적는 칸이 있습니다. 자기가 개신교인지, 가톨릭인지, 무교인지 말이에요. 종교가 없다고 종교란에 선택하지 않으면 종교세를 내지 않습니다. 종교세의 금액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세금의 십분의 일 정도예요. 소득의 십분의 일이 아니라 소득세의 십분의 일이니까, 1년에 3백만 원을 세금으로 낸다면 30만 원 정도가 종교세로 나가는 거죠. 그리고 교회에 가면 헌금 시간이 있기는 한데, 푼돈으로 합니다. 제가 유학공부를 할 때 본 바로는 그들은 독일 돈으로 1-2마르크 정도 해요. 우리 식으로 하면 일, 이천 원 정도죠. 그런 헌금은 주로 자매결연한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 트랙터를 사주기 위한 기금 등으로 사용합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들은 종교세로 해결하고요.

우리는 나라에서 물론 헌금을 원천징수까지 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그와 비슷하게 총회나 노회 차원에서 모든 헌금을 관리해서 모든 교회에 골고루 사용될 수 있도록 할 수는 있습니다. 큰 교회에서 내는 헌금이든 작은 교회에서 내는 헌금이든 모두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굳이 목사들이 큰 교회에 서로 가려고 머리 디밀고 싸우지 않을 겁니다. 큰 교회에 가봐야 골치 아프고 힘만 드는데요. 제가 너무 인간적으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실 문제는 돈이거든요. 교회개혁이든 교회일치운동이든 사실은 모든 게 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헌금을 어떻게 내고 어떻게 쓰느냐, 이것이 교회개혁의 중요한 문제인데, 모두가 입 다물고 있어요.

십일조는 구약 당시에 유대인의 삶에서 나온 일종의 종교세이기도 하고 국세이기도 합니다. 그 때는 종교와 국가가 일치된 사회였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십일조 전승도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레위지파 사람들은 토지를 분배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머지 지파가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내는 십일조 종류가 있었고요. 또 어떤 때는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3년에 한 번씩 내는 것도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국세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결했던 거죠. 유대인들이 실제로 십일조 제도를 얼마나 실행했는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구약에 나와 있다고 해서 모든 게 다 실행된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면 안식년이나 희년도 문서에만 남아 있을 뿐, 실제로 그렇게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7년마다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리기만 한다면 상당히 정의로운 복지 시스템이죠.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된다면 사회질서가 근본적으로 허물어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볼셰비키 혁명이나 북한에서 일어난 토지혁명이 실제로 7년마다 반복된다면,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될 거예요. 그 정신은 좋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어느 사회든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사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일어나고 자본 축적이 일어납니다. 잉여생산이 생기면서 결국 사회가 구조적으로 불의해지고요. 그걸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안식년과 희년 제도가 나온 겁니다. 그것은 정말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죠.

안식일은 비교적 정확히 지켜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안식일을 지킨 게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도 다 제사를 드린 것도 아니에요. 가까운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듣고 오는 정도였죠.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전은 예루살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일 년에 몇 번만 갔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갈 수 없었어요. 갈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만 갔습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에요. 사실 안식일을 성수주일로 몰아붙이면 왜곡하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주일을 지키지 않고 놀러 다녀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놀러 다니는 게 쉼은 아니죠. 정말 참된 쉼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에서는 목회자나 일반 성도나 주일이 가장 힘들 겁니다. 그건 안식일이 아니라 종교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왜곡될 수 있다는 겁니다.

 

십일조와 면죄부

십일조도 유대인들이 처한 특별한 삶의 형태에서 나온 하나의 종교 행위였어요. 예를 들면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삶에서 나온 경험이었거든요. 제가 언젠가 다비아에 ‘돼지고기와 십일조’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들은 아주 건조한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위생 건강이 나쁠 때 고지방 먹을거리를 먹으면 전염병에 취약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법을 만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도 대개는 그걸 지키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에 따라서 강요하면서 돼지고기는 왜 허락하는 걸까요? 왜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취사선택을 하는 걸까요? 자기가 편리한 대로 받아들이는 아전인수인 거죠. 그러니까 복잡한 사정들이 다 있습니다. 단순히 십일조를 해라 하지 마라 하는 말이 아니라, 속이지 말자는 거예요. 꼼수 쓰지 말고 정상적으로 하자는 겁니다. 십일조를 안 해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게 아닐 뿐 아니라 망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아무리 십일조를 꼬박 꼬박 바쳐도 창고가 넘치도록 축복받는 일도 없습니다. 말라기에 나오는 주장은 그 당시에 말라기가 그렇게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될 만한 그럴 형편이 있었던 겁니다. 그 시대가 처한 삶의 형편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거기에 선포된 내용을 그대로 따다가 2천 년도 훨씬 지난 지금 이 시대에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는 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십일조에 얼마나 매달려 삽니까? 그게 정말 기독교인의 자유일까요?

어떤 면에서 십일조는 종교개혁의 빌미가 되었던 면죄부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개신교에서 통용되고 있는 십일조 개념이, 즉 율법적이고 기복적인 헌금행위가 5백 년 전 면죄부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언제 기회가 있으면 십일조와 면죄부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볼까 합니다. 면죄부만 놓고 봐도 우리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다 좋은 겁니다. 면죄부가 왜 좋은지 압니까? 로마가톨릭 신학의 기본적인 개념에는 천국과 지옥만이 아니라 연옥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단이지, 이렇게 말하면 무식한 겁니다. 연옥 개념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성서적 배경이 있습니다. 죽은 이후의 세계가 얼마나 다층적이고 복잡합니까? 구약이 다르고 신약이 다르잖아요? 이 시간에 거기까지는 들어가지 말죠. 하여튼 연옥 개념이 있었어요. 연옥에 들어간 사람들은 완전히 구원받지도 못했지만 완전히 지옥에 떨어진 것도 아니었거든요. 따라서 연옥에 있는 부모, 친구, 조상들을 위해 면죄부를 사서 헌금을 하면, 헌금이 헌금함에 딸랑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 영혼이 하늘나라로 간다고 믿었던 겁니다. 좋은 쪽으로 본다면 면죄부가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부모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불안하잖아요? 그런데 누가 헌금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속된 표현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죠. 면죄부를 사는 쪽에서는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고, 면죄부를 파는 쪽에서는 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수 있는 기금을 마련할 수 있잖아요. 그 베드로 성당이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가톨릭교회의 구심점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한국의 개신교도 교회를 많이 짓고 있어요.

우리는 면죄부라고 하면 딱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는데, 십일조라고 하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 체제 안에 들어가 있으면 잘 보이지 않거든요. 우리가 그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잘 모르는 거예요. 면죄부를 사던 그 당시의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루터 같은 몇몇 사람들만이 문제의식을 느꼈어요. 교황주의자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이 방식을 통해서라도 교황 중심의 종교적 토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사제직을 사고파는 일까지 있었는데도, 그 당시에는 그걸 문제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문제로 느껴지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교회 조직에서 밑에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따라가고요. 위에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 목사만이 아니라 장로나 오피니언 리더들은 자기가 동의를 하지 않아도 그 방식으로 해서 교회가 부흥한다면 따라갑니다. 뭘 좀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눈감고 넘어가야 그 교회 속에서 어떤 것들을 누릴 수 있죠. 제가 좀 야박하게 말하죠? 그런데 사실이 그래요. 조금 무식한 사람들은 자기 교회에 의사, 변호사, 검사, 교수들이 다들 헌금하고 기도하니까, 그게 옳은가 보다 생각하고 따라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면죄부를 사면 자기도 따라서 사는 거예요. 안 그런가요? 헌금은 근본적으로 복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걸 알고 헌금하세요.

헌금은 은총의 문제입니다. 은총은 기본적으로 모든 게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에서 가능한 개념입니다. 독일에서는 격년제로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교회가 각각 교회의 날(Kirchen Tag)이라는 행사를 합니다. 1985년이 홀수 해인데, 제가 독일 뮌스터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 때는 통독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교회의 날을 우리 식으로 바꾼다면 선교대회가 됩니다. 이 행사가 참 부럽더군요. 제가 참석할 때는 뒤셀도르프라는 도시에서 열렸습니다. 신학교 교수들이나 제3세계 지도자들도 많이 오고요. 평신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적 이슈를 신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합니다. 한 일주일 동안 심포지엄이나 퍼포먼스 등 많은 행사들이 열려요. 연극, 음악제, 강연, 설교, 예배 등이 진행되는데,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돼요. 참 부럽습니다. 도시마다 돌아가면서 격년제로 해요. 제가 참석했던 해의 주제가 바로 ‘디 에르데 게훼르트 고트’(Die Erde gehört Gott, 지구는 하나님의 것이다)였는데, 핵심 주제는 생태 문제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따라서 그 안에서 누리는 삶의 조건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잘 가르치면,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잘 이해하면 그 안에서 헌금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답이 나옵니다.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게 되고, 다소 비자발적이라고 하더라도 무리하게는 안 합니다. 합리적으로 하는 거죠. 헌금은 자발적 민주주의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가장 좋게는 은총론에 근거해서 해결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최소한 합리적인 민주적 절차를 거쳐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안 될 게 없어요. 이 두 개가 서로 긴장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면 더 좋겠죠. 은총론에 근거한 합리적인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드려지는 헌금 운영 및 교회 운영이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한국 개신교에 그런 날이 올까요? 조금 저는 비관적인데요. 그래도 절망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해나가면서 그분이 하실 때를 기다려야겠죠. 헌금 문제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성찬공동체

지금까지 교회의 본질과 형태에 대해 말하면서 기도, 헌금,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했고요. 다음으로 성찬 문제입니다. 성찬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실제로 밥을 같이 먹는 애찬식 즉 밥상 공동체와, 간단한 빵으로 의식을 거행하는 성찬식, 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전자는 모든 신자들이 참석했고, 후자는 기독교 신앙에 좀 더 깊이 들어온 사람들이 참석했던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저는 성찬식의 궁극적 의미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생명에 대해 산다고 하는 구원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세계와 더불어 생명을 나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의 빵과 하나의 포도주를 함께 둘러서 같이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된다는 종교적 의미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이웃들과의 연대성(solidarity)을 확보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사회복지는 성만찬의 확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오늘 21세기에도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물(物)의 영성화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물의 영적인 의미 말이에요. 독일어로는 ‘딩'(Ding)이라고 하는데, 하이데거 철학이 그런 세계를 열어줍니다. 다리나 구두 같은 사물에 어떻게 영적인 의식이 활동하는가 하는 건데요. 주술적인 건 아니에요. 이런 이야기는 중요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말할 기회가 오겠죠. 하이데거의 세계 이해를 통해서 성만찬의 의미를 더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성만찬은 이렇게 마치겠습니다.

 

목사제도

그 다음이 목사, 장로 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교회에 목사들이 많죠? 대략 10만 명 된다고 해요. 목사들이 너무 많아요. 그 문제도 건드리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요. 너무 대량 생산이 되는 바람에 자리가 없어서 갈 데도 없는데, 자꾸 배출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헤쳐 나가야 할까요? 자리가 없어서 택시기사를 하는 목사도 수천 명이 넘는다고 하고, 그냥 큰 교회에 협동목사라고 이름만 걸어두고는 실제로 활동하지 않는 목사도 많다고 해요. 이름이라도 걸어둬야 작은 교회라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니까요. 그렇게 많은 목사들이 양성되는데, 그럼 양질의 목사들이 배출 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둘게요.

한국교회에서는 목사에 대한 인식이 극단적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목사를 신격화해서 주술적인 대상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무당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목사가 자기 집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복이 임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전도사가 심방 오면 싫고 목사가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도 자신의 신격화를 조장하고 있어요. 물론 목사에게 독특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카리스마는 외적인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를 말하는 겁니다. 성가대원도 카리스마가 있는 거예요. 목사도 그중에 하나로서 카리스마가 있어요. 은사원리에 따르면 이 카리스마에는 높낮이의 차이는 없어도 서로 배타적이라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남의 카리스마를 침범할 수는 없는 거죠. 목사가 노래를 하고 싶다고 성가대원들을 내쫒고 자기가 노래를 부르면 카리스마의 원리에서 벗어난 겁니다. 목사에게 주어진 카리스마는 두 가지인데요. 성례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평신도가 설교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이것은 목사들만이 성서를 더 정확하게 전할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의 카리스마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라면 그 일을 잘하면 됩니다. 만약에 주일학교 교사인데 설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소정의 신학 교육을 받고 목사를 하면 돼요. 그러나 일반 평신도들의 설교권은 논란이 됩니다. 특히 침례교회에서 평신도의 설교권이 많이 열려 있는 것 같은데요. 거기까지 나가면 말이 길어지니까 그만하죠. 어쨌든 목사의 신격화는 문제이지만, 목사의 카리스마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 다른 극단은 목사에 대한 고용 의식입니다. 점점 더 이런 쪽으로 흐르는 추세인데요. 교회가 목사를 고용했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일종의 월급 사장인 셈이죠. 그런 현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일일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교회도 있고 아주 건전한 교회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장로들의 힘이 센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를 뽑을 때, 시험을 치듯이 후보 목사들이 가서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래도 그 정도는 하나의 검증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담임 목사가 부임해서 몇 년 내에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면 장로들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고용 사장이 회사를 발전시키지 못하면 이사들의 눈치를 보는 것과 같은 거죠. 목사직은 여전한 주술적 기대와 새롭게 대두된 합리주의적이고 도구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성직자관으로 인해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당회제도

장로 문제는 자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강의안의 마지막 단락만 볼게요. 장로 제도가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좋은 에너지 역할을 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문제점이 많은 제도가 되어버렸어요. 장로 제도가 뭔지에 대해서는 접어두겠습니다. 일단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교회의 직분에 그렇게 열심을 내는 이유, 혹은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평신도들이 왜 그렇게 직분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사실 제가 그 이유를 왜 모르겠습니까? 이해합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워서 말하는 거예요. 여자들은 주로 권사가 목표고, 남자들은 직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입니다. 서로 장로 하려고 신경전을 벌일 정도니, 한국교회에 에너지가 넘친다고 해야 할지, 세속화되었다고 해야 할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의 구조와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걸 감당하려면 많은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게 세뇌가 돼서 그런 건지, 정말 하나님의 은혜인지, 한국교회 신자들은 그걸 즐거워하는 것 같아요. 힘들면서도 즐거워한다니까요. 심리적으로 보면 자학적인 증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자학을 통해서도 쾌감을 느낍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많이 씁니까? 장로가 못되면 교회 출석까지 미루기도 합니다. 서로 당파를 짓기도 하고 말이죠. 왜 이럴까요? 그리고 왜 그렇게 교회 안에 직분 서열이 많을까요? 서리 집사는 뭐고 안수 집사는 뭔가요? 이것도 코믹하지 않습니까? 집사는 뭐고 장로는 뭔지, 뭐 하러 그런 구분을 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직분이 필요한 이유는 아마도 교회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서열을 두고 경쟁을 시켜야 서로 열심히 하려고 한다는 심리 작용이 개입된 게 아닐는지요. 어쨌든 신자들은 고생이 많습니다. 목사야 주일에는 수고를 하더라도 월요일이면 쉬잖아요. 그리고 주중에도 눈치껏 쉴 수 있거든요. 정 힘들면 기도원에 간다는 핑계로 쉬어도 되고요. 그런데 평신도들은 6일 내내 노동 현장에서 시달리다가 주일이면 교회에서 또 일하잖아요. 참 대단합니다. 이 직분에 대한 과도한 열심을 조금 진정시키는 게, 멀리 내다보면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합니다.

결국 이런 문제는 교회의 모든 권력이 당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제 의견은 당회 해체가 대답입니다. 해체하지 않으면 당회를 임기제로 하든지요. 당회는 형식적으로 원로급으로만 구성해 놓고, 실질적으로는 여전도회 대표, 청년회 대표 등이 모여 교회운영위원회를 구성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운영위원들이 실질적인 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다면, 굳이 장로가 되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 같아요. 원로는 원로로 대우해 주고 실제적인 문제들은 운영위원들이 한다면 좋지 않겠어요? 운영위원은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골고루 대표가 될 수 있도록 하고요. 안 될까요? 한국교회는 당회가 모든 걸 독점하고 있는데도,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여성안수도 두 말할 필요 없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편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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