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강 교회는 예배 공동체다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800 추천 수 0 2012.06.07 10:37:30

제 30강

교회는 예배 공동체다

 

 

통합 예배, 열린 예배

오늘은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었습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어린이주일로 지키는데요.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오늘을 어린이주일로 지키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이벤트를 했을 겁니다. 샘터교회에서도 어린이 네 명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예은이 예림이 자매와 한결이와 건이, 모두 해서 남자아이 둘, 여자아이 둘입니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이들이에요. 또 태아가 두 명이 있는데, 선물은 주지 못했어요. 어머니 뱃속에 생명이 잉태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샘터교회는 어린이와 따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이라 같이 예배를 드립니다만, 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세대가 함께 어울려서 예배를 드리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주일학교 아이들과 어른들을 함께 묶어서 예배를 드리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아이들까지 함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제가 예배와 제사를 비교해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사를 드릴 때 어린이들만 따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잖아요? 같이 참석해서 구경이라도 하죠. 사실 구경만 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제사 드리던 기억이 나는데요. 초등학교에 다니기만 해도 순서가 되면 절하고 술을 올립니다. 다 참여하거든요. 예배도 사실 같이 갑니다. 세대 간의 차이 때문에 어린이 예배와 어른 예배로 구분하지 말고 가능하면 다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아주 오래 전부터 주일학교가 독립되어 있어요. 학생회도 웬만큼 규모가 있는 교회라면 다 독립되어 있습니다. 주일학교만 전담하는 교역자들이 따로 있고, 신학생들에게 설교를 맡기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이 바람직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른 방법도 없고 효율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또래 아이들만의 정서와 문화에 맞는 맞춤형 예배를 드리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다시 앞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같지만, 예배는 전체가 다 같이 드리고 그 후에 특별 활동이나 교육을 따로 분리해서 하는 방법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기도 하고요. 지금은 교회구조도 전문적으로 특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너무 분산되어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열린 예배 방식은 유난히 더 그래요. 예배의 효율성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주일학교나 중고등부 학생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청년부나 대학부도 따로 예배를 드린다면서요? 예배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런 방식의 예배는 기독교 영성의 위기라고 봅니다. 대형교회일수록 더 세분화 되는 경향이 있어요. 지금 샘터교회는 조금더 성장하더라도 통합 예배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설교 전까지의 예배는 함께 드리고 설교 순서에 어린이들이 따로 나가서 말씀을 듣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열린 예배가 들어오면서 자꾸 청중들의 눈높이에 맞춘 예배로만 나가고 있어요. 말이 좋아 열린 예배지, 이것은 청중들의 종교적 흥미에 부응하겠다는 천박한 세속주의에 불과하거든요.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게요.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요. 사실은 모두 연관되기는 합니다. 제가 강의한 지 4개월 정도 지났는데, 이 강의를 꾸준하게 듣고 나서 그런 걸 느꼈는지 모르겠네요. 정 목사가 어떤 중심을 갖고 있는가, 또는 어떤 관점이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가 하는 거 말이에요.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한 쪽으로 돌아간다는 걸 느낍니까? 지금 제가 예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뒤에 가면 이 예배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미리 맛보기로 한 마디만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는가 하는 거예요. 생명의 충만감을 확인하고 싶은 거죠. 모두 허심탄회하게 내놓고요. 그게 이제 하나님 이해의 핵심, 예배의 핵심입니다. 교육도 사실은 학생들이 어떻게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도록 하느냐, 그리고 아이들이 어떻게 창조적으로 거기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죽은 교육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생명을 주입시켜서는 안 돼요. 가르쳐 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가르쳐 줄 수 없듯이 생명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생명이나 성령 같은 힘들은 아주 고유하게 활동하니까요. 고유하게 배타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개인이 고유하게 경험하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닙니다. 언저리 정도는 대충 이야기할 수도 있고, 신앙의 선배들이나 스승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맛볼 수는 있겠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 마주치는 것은 자기가 해야 하거든요. 따라서 선생들이 그런 쪽으로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이 중요한데, 과연 선생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뒤에 가서 말할 내용을 미리 좀 말한 겁니다.

다시 돌아가죠. 지금 열린 예배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요. 예배도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건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신앙생활 뿐 아니라 인간으로 사는 한 죽을 때까지, 생명이 끝날 때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중요한 문제예요. 이런 것들을 느슨하게 생각한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듯이 구경꾼으로 이 세상을 살다가 끝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늘 심각하게 살라는 건 아니에요.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사실 심각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충만감이 없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로 심각해지는 거예요.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것들이 너무 사소하게 느껴져서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묵상에 나갔나요? 거기에서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요. 마가복음에 밭을 갈던 사람이 보화를 발견하고는 입 딱 다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집의 재산을 팔아서 그것을 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지금 자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친구가 자기를 어떻게 섭섭하게 했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그냥 내려놓게 됩니다. 이게 서로 순환되는 것 같아요. 정말로 생명의 충만감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다른 것들을 내려놓기 때문에 삶이 더 느슨해질 수 있고요.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심각해지고 무거워지는 겁니다. 삶 자체가 무거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과도 사실 연관이 되는데요. 여기에서 말하는 짐은 세상살이의 힘든 짐이 아니라 종교적인 짐입니다. 그렇게 종교마저도 짐이 되어 버리는 거죠. 얼마나 심각합니까? 선교도 그렇고 교회 성장도 그렇잖아요? 신앙생활 자체가 너무 세속적으로 나가서 자신의 전 존재가 담기지 않은 하나의 취미생활처럼 되어 버리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것이 너무 엄숙주의로 빠져서 무겁게 질질 끌고 사는 것도 잘못입니다. 종교도 그렇게 짐이 될 수 있어요.

통합 예배를 강조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할아버지나 손자나, 아들이나 딸이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온전히 생명의 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만이 지배하는 예배로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입니다. 어떻게 하면 청중들의 입맛에 맞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를 극대화한 것이 열린 예배라는 거예요. 여기에는 흥미나 재미만 있으면 됩니다. 당신이 지금 하는 말은 신학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현실 교회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할 사람도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음악 연주회장이 있잖아요? 청중들이 있고 연주자가 있습니다. 두 가지가 서로 대립돼요. 연주회장에서 음악의 존재론적 힘이 지배하는 연주인가, 아니면 청중들의 반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주인가 하는 겁니다. 이 두 개가 때로는 연결되기도 하고 때로는 대립하기도 합니다. 그럼 좀 이해되시죠? 음악의 존재론적 힘이 지배하는 연주여야 한다는 말이에요. 음악의 존재론적 힘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소리 혹은 음악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거예요. 음악의 존재론적인 힘이 있다는 거죠. 이 말은 예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도 중요한 개념인데요. 좀 더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요. 그렇게 소리도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원래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로고스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할 수 있었던 능력으로 나오는데요. 그것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냥 툭툭 던지듯이 전하면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해가 충분히 되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청중들의 열광에 따라가는 연주가 있고, 소리를 따라가는 연주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강의하는 것도 마찬가지거든요. 얼마나 청중들의 반응에 대해 민감한가 하는 것과 내 사유를 통해서 신학적인 힘들을 따라가고 있는가 하는 거죠. 이게 사실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아요. 그러나 볼 수는 있습니다.

예배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계시에 초점을 두는 예배가 있고, 청중들의 은혜에 초점을 두는 예배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열린 예배 방식의 예배들은 모두 청중 중심의 예배입니다. 설교도 청중중심으로 흐릅니다. 현대 설교학 교수들의 이론들도 다 청중 중심주의예요. 왜냐하면 존재론 인식과 사유가 너무 약하기 때문이죠. 어쩔 수 없습니다. 시대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고,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요즘 한국에는 쇠고기 수입 문제 때문에 야단이 났습니다만, 그것도 신자유주의를 중심으로 한 경제만능주의, 즉 경쟁력만 제고하면 모든 것이 통용되는 시대정신이 우리를 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예배마저도 그런 방식으로 운용되는 거죠. 하나님의 계시마저도 우리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는 신앙 태도를 갖는 거예요. 통합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과 치병 문제

오늘 샘터교회의 설교 제목은 ‘간질병과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생명의 충만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모든 게 연관이 되거든요. 앞서 예배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것도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 얘기할 간질병과 믿음도 생명과 연관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 본문은 다들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간질병에 걸린 아이의 부모가 예수님께 와서 제자들이 자기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왜 믿음이 없냐고 말하면서 마귀를 내쫓고 병을 고쳤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물러간 다음에 왜 자기들은 고칠 수 없었냐고 묻죠. 예수님은 믿음이 약한 연고라고,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더러 저기 바다에 빠져라 하면 그대로 될 거라고, 믿기만 하면 안 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전승은 마태 마가 누가, 세 공관복음서에 다 나오는데요. 마가복음에 제일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은 부분적으로 축소시켰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자꾸만 성경을 의심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을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세상의 삶이 엇박자로 나가는 거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있는데, 그 이치와는 다르게 가는 거예요. 물론 우리는 깊은 차원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 시대의 이치를 따라가지 않는 것이 분명하지만, 일상적인 삶에서도 이 세상의 이치와 다른 것을 주장한다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거든요. 설교에서 한 예를 들었는데요. 루이스(C. S. Lewis)의 글을 설교에 인용했어요. 루이스는 참 좋은 기독교 문학가이죠. 그러면서도 신학적 마인드가 아주 탄탄하신 분입니다. 이 분이 신학을 전공한 건 아닌데요. 그러나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한국의 소설가를 예로 들었는데요. 『한 말씀만 하소서』(세계사)라는 수필집도 썼고,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여백)라는 책도 썼습니다. 박완서 선생인데요. 그분이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보에 몇 년 간에 걸쳐 ‘작은 성서 묵상’이라는 코너에 글을 썼어요. 그런데 신학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더군요. 그럴 수 있습니다. 루이스 얘기로 돌아올게요. 루이스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어떤 깡패가 한 선한 사람을 야구 방망이로 칠 때 하나님이 그 순간에 야구 방망이를 꽃으로 변화시키겠는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지 않거든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언덕을 올라가는 건 힘들 수밖에 없어요. 믿는다고 해서 그 언덕이 갑자기 내리막길이 된다고 한다면, 카오스가 되고 마는 거죠. 루이스는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보세요. 간질병에 걸린 사람이 믿음만 있으면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말했을까요? 이 말을 우리가 곧이곧대로 믿고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이고 신앙인가 하는 겁니다. 기도 자체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니에요. 믿음으로 이 세상의 일반적인 이치를 바꾸어 보겠다고 하는 것이 과연 건전한 신앙이냐는 겁니다. 과연 성서가 그것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이 세상의 이치에는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별로 잘날 것도 없고 못날 것도 없고 말이죠.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안 죽거나 아플 사람이 안 아프거나 자동차 사고 날 사람이 안 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아주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겠죠. 하나님을 믿으니까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급하게 서둘지 않고 생각을 달리하게 되니까, 정신적으로 건강해져서 몸도 건강해지고, 그래서 사고 날 확률도 줄어들고 말이죠. 그러나 그런 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성실하게 살기만 하면 다 똑같지 않겠어요? 큰 틀로 보면 기독교인들이나 토속 종교인들이나 세상은 똑같이 우리에게 반응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요. 야구 방망이가 갑자기 꽃으로 변한다거나, 강도가 들어와서 칼을 들이 밀 때 칼이 갑자기 종이로 바뀌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이 자리에서 다시 설교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이치를 갑자기 초자연적으로 바꾸어서 나에게 유익하도록 만드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통치를 믿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일 처음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한 거예요. ‘바실레이아’, 하나님의 나라거든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박했다고 하는 사실을 온전히 신뢰하고 거기에 우리의 삶과 우리의 운명을 걸고 사는 게 믿음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잘 믿어서 덕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야구 방망이가 꽃으로 바뀌지 않아요. 믿음을 통해서 이 세상살이를 나에게 편리하도록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이기주의죠. 예수 믿고 우리가 마음의 위로를 얻겠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예수를 믿지 않아도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훈련이나 뇌 훈련, 혹은 정신과 상담 등을 통해서도 자아를 통제하거나 위로를 받을 수 있어요.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 혹은 우리가 잘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인데요.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뭐냐고 하는 겁니다.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도 믿고 있다,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대중 설교자들이 예를 들어 말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을 봐라, 미국의 경제권을 다 쥐고 있을 뿐 아니라 노벨상의 30%를 유대인이 타는데, 하나님을 잘 믿어서 그런 게 아니냐, 우리도 저렇게 잘 될 수 있다, 예수 성공 불신 실패, 이게 바로 기독교 신앙의 원리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아니냐고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저는 그렇게 소박하고 좋은 뜻으로 단순하게 믿고 사는 것을 냉소적으로 생각한다거나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 지성인들, 삶과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책임감을 갖고 사는 사람들, 무죄한 자의 시련과 고통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곤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자꾸 규정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규범(norm)이 아닙니다. 제가 윤리적인 설교는 복음적인 설교가 아니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설교는 신앙을 규범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기준들이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은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한 학기 동안 하나님의 나라만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 왜 하나님에 나라를 붙이는가, 하나님은 뭐고 나라는 뭔가, 계시는 뭔가, 생명은 뭔가, 이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어요.

하나님 나라는 규범도 아니고 범주(category)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범주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은 대개 규범과 범주로 되어 있거든요.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이 안에 살고 있어요. 대한민국이라는 카테고리 속에 있고, 시민으로서 지켜야 하는 법이 있죠. 그 법이 규범인데요. 우리는 이런 것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안에 들어오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두 질서 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게 바로 루터의 두 왕국론(Zweireichlehre)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 등 여러 가지 비유로만 말했거든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거 하나만이라도 오늘 꼭 이해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요. 그거는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 쉬운 거라고 생각하나요? 쉬운 거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는 것은 패러다임 쉬프트, 즉 사고의 틀이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해요. 대개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이런 개념을 잘 생각하지 않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고요. 하나님을 옥황상제처럼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지 나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라라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통치 개념입니다. 생명의 통치죠. 생명의 힘입니다. 막연한 생명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일반적인 자연의 생명을 포함한 기독교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생명의 힘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까지 설명하려면 기독론까지 들어가야 하니까 접어두고요. 여기에만 집중해서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바람과 같아서 규정하고 범주화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삽니다.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임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가 문을 열면 됩니다. 여는 것이 우리의 회심입니다. 그러면 그냥 하나님의 나라에 살게 되거든요.

저는 기본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루터의 두 왕국론(Zweireichlehre)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몸을 갖고서 세속의 질서, 지상의 나라에 살고 있죠. 그와 동시에 거기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에 의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나라이자 통치인 거죠. 두 질서입니다. 이 두 질서를 살아내야 하니,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긴장해야 되겠습니까? 좋은 뜻으로 긴장이죠. 자칫하면 이걸 절대화할 수도 있어요. 세상의 군주들은 이걸 절대화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금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루터의 두 왕국론을 비판해요. 저도 좀 이런 쪽에 있는데요. 비판하는 이유는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구분한다기보다는 이 질서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루이스의 이야기처럼 야구 방망이 논리가 있는 겁니다. 그 질서대로 경찰이 법을 집행하잖아요? 법이 있어요. 실정법이죠. 실정법이 세속 사회를 끌어가는 하나의 힘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이것을 인정하든 안 하든, 실제 현실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루터가 말하고 있고 바울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꾸 이야기가 옆으로 나가니까 이건 그만 하겠습니다.

하여튼 이 세계가 운영되는 질서가 있고 영적인 질서가 있는데, 기독교인은 양다리를 걸친 것처럼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될지 모르겠어요. 세속과 하나님, 세속과 교회, 문화와 교회, 국가와 교회 등, 하나님의 질서와 세속적인 질서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질서가 있고 그 안에 세속 질서가 들어 있는지, 아니면 이 세속 질서와 하나님의 질서가 중간 어디쯤에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이게 다 하나인지, 그것은 학자들마다 다른데요. 루터에 의하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다가 옆으로 나갔죠? 하나님의 통치를 어떤 규범이나 범주 안에 넣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경구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건데요. 도덕경에서 말하는 이 도(道) 개념이 하나님 나라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길이라는 말을 했는데요.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노자 장자가 말하는 도 개념이 연결됩니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늘 흐리멍덩하다는 말이냐고요? 그런 건 아니에요. 여러분이 이런 말만 들으면 오해하기가 쉬운데요. 이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래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우리의 규범과 범주를 벗어난다는 말은 우리의 인식론을 넘어서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인 반면, 규범과 범주는 다 그 창조 세계 안에서 일어나요. 하나님은 창조된 분이 아니라 무(無)로부터 창조한 분인 반면, 규범과 범주는 유(有)의 세계, 창조 세계예요. 물론 하나님은 유의 세계와 무의 세계 모두를 다스립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유나 무의 개념이 무엇인지 잘 몰라요.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지금은 없지만 나중에 있는 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등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 수준이 어린아이 같은 거죠. 아무리 뛰어난 물리학자나 철학자라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조그만 흔적 하나를 남길 뿐입니다. 기독교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계시론에 의존합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이 계시가 존재인 거죠. 우리의 모든 의식과 생각들은 규범이나 범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벗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어떤 테두리 안에 가둘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인식의 한계예요. 그렇다면 늘 뜬 구름 잡는 것처럼 ‘하나님이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내버려두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경험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방향은 오늘 제가 강의에서 핵심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죠. 하나님이 창조자니까요. 부활이 생명의 문제니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살면서 생명을 경험하는가? 이것이 관건입니다. 왜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했는지 이해가 되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인식론과 계시론에 대한 문제이자 또한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생명은 부활과도 관계되고 창조와 종말과도 연관되며, 더 나아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칭의의 문제와도 연관됩니다. 칭의도 생명의 문제예요. 이 칭의론이 왜 생명의 문제인지 A4용지 다섯 매로 써 보겠습니까? 이런 걸 자기가 에세이 식으로 쓸 수 있어야만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겁니다. 생명과 칭의의 관계에 대해서 A4용지 다섯 장이든, 열 장이든 얼마든지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쓰려면 칭의가 뭔지 생명이 뭔지에 대해서 다 알고 있어야 하거든요. 그냥 말로만 예수 믿고 영육 간에 구원을 받는다, 예수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식으로 계속 외우고만 있으니 어려운 거죠. 왜 기독교 신앙이 2천 년 동안 인간의 의로움을 붙들고 천착했는가, 그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주제이기도 하고, 어거스틴과 루터가 붙들고 있었던 핵심이기도 한 그런 문제들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전혀 없어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죠. 그것도 종교적 욕망이고요. 종교적 욕망으로 내가 의로워졌다고 하고, 즐거워서 두 손 들고 찬송이나 부르는 거예요. 청중들은 열린 예배에 참석해서 즐기고 만끽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이비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거예요. 사이비 종교일수록 포퓰리즘에 빠진다는 거 알죠?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거예요. 도대체 왜 인간은 의로움을 말할 수밖에 없는가? 왜 실질적인 의가 아니라 법적인 의미로 의를 말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런 걸 이해해야죠. 인간이 뭔가? 죄가 뭔가? 죄의 문제를 왜 기독교는 존재론적으로 생각했는가? 왜 마귀의 작용으로 생각했는가? 이 모든 질문에는 생명에 대한 깊이가 있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죠?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사탄,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거래하는 장면, 이 모두가 인간론이거든요. 거기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 속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들어가야 합니다. 갑자기는 안 돼요. 우리의 인식은, 배움이라는 것은 하루 저녁에 뚝딱 하고 되는 게 아닙니다.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기독교가 무엇이지를 알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실질적으로 깊어지는 거예요. 그럴 때야 비로소 우리가 신비주의자로, 영성가로 나갈 수 있습니다.

생명문제로 돌아오죠. 우리가 현재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지금의 이 생명 경험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 너머에 뭔가 다른 게 있을까요? 도대체 우리는 생명을 뭐라고 생각하나요?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고 뇌가 살아 있고 호흡하고 자손을 번식할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생명 현상입니다. 맞아요. 그러나 과연 그것만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돌이나 바위 덩어리는 생명이 아니라고 100% 확신할 수 있나요? 어쨌든 그것도 창조론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창조물이잖아요. 바위 덩어리 하나도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죠. 성서에도 너희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치리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사물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생명의 영역이 바뀌는 겁니다. 넓어지는 거예요. 그건 그렇다고 하고, 당장 우리 앞에 있는 문제만 생각해 보죠. 오늘 제가 하는 말은 그냥 지나치지 말고 두고두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해답을 갖고 말하는 게 아니라, 문제의식을 갖고 말하는 겁니다. 이건 정말 우리의 실존적인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어느 때 우리가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나요? 성령 충만이라고 할까요? 우리가 생명의 충만감을 느꼈다면 성령 충만한 겁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니까요. 언제 여러분은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나요? 생명은 살아 있음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살아 있다고 느끼나요? 각자 여러 경우가 있겠죠. 아기를 처음 낳고 안았을 때 생명의 충만감을 느낄 수도 있겠고,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작품 하나를 써낼 때 충만감을 느낄 수도 있겠죠. 그 밖에도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루 헤아릴 수가 없겠죠. 알코올 중독자들은 술이 없어서 며칠 동안 힘들어하다가 술 한 잔 마셨을 때 살아 있다는 충만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뭐 알코올 중독자들이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겠나, 참 웃기네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범주화하는 겁니다. 때로는 범주화가 필요하겠지만 결정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들의 살아 있다는 경험이 다릅니다.

 

창조와 생명의 충만감

오늘 여기 진량에는 비가 왔습니다. 며칠 동안 참 덥다가 저녁에 잠깐 식사를 하러 나갔다가 들어오는데 비가 좀 왔어요. 시원한 바람도 불고 놀라웠어요. 그런 경험은 돈 주고 살 수 없죠. 내가 이 공간 안에 살아 있구나, 숨을 쉬는구나, 봄바람을 맞는구나 하는 생각들도 하고요. 요즘 교회가 있는 아파트 마당의 나무에 잎도 많이 나고 참 좋습니다. 지나가면서 나무 둥치도 만져보고, 어떤 때는 뺨을 대보기도 해요. 질감이 있잖아요. 나무 둥치에서 질감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환희죠. 환희라고 할 수 있는데 참 즐겁습니다. 지금 다비아에 글 쓰는 거나 목회, 이런 거 하지 않고 그냥 숲 속에 있는 암자에 들어가서 혼자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아요. 우리는 그런 걸 다 놓치고 살아요. 건성건성 살죠. 우리의 관심사는 따로 있어요. 자기에 대한 관심,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 관심을 일단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마음을 돌리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조금 정직하게 온전하게 연결되어 있으면,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안에 안겨 있을 때(시편 131:2) 느끼는 황홀한 생명의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삶에서는 그게 최상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삶의 충만감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여기에서 신비롭고 놀라운 생명의 환희를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이내 지나가 버립니다. 제가 며칠 전에 말한 대로 잠정적이에요. 잠정성, 무상성, 늘 그래요.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귀한 거라도 시간과 함께 지나간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 무한한 생명의 충만감을 누리며 사십시오. 여러분의 남아 있는 인생이 30년일지 50년일지 모르겠지만, 바로 여기 지금(here and now)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에게 생명의 충만감을 허락할 겁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을 것이고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볼 거예요. 결국은 모든 게 다 지나갑니다. 성서와 기독교 신앙은 앞으로 새로운 것이 온다고 믿습니다. 전적인 새로움이에요. 제가 돌멩이 얘기를 했죠? 돌멩이는 우리가 생명이 아니라고 우습게 생각하는데 전적인 새로움이 오면 돌멩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모릅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죠. 요정의 세계예요. 이런 것들은 이미 시인들도 다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열어 두십시오. 이것을 규범화 하지 말고, 범주화 하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에 맡겨야 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온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세계인데요. 종말론적으로 오는 세계에 대한 강렬한 기다림입니다. 결혼 날짜를 앞둔 신랑신부처럼 강렬한 기다림과 함께, 잠정적이고 무상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오늘 여기에서 삶의 희열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확인할 수 없어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오늘 우리의 삶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개입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직 때는 오지 않았는데 우리에게 개입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맛보고 믿고 삽니다. 이러한 삶을 가리켜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놀랍죠?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야말로 생명 충만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말론적인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안고 있는 거예요. 그 상상력, 그 비전이 없다면 아무리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온전한 기독교적인 생명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하나님 안에서 경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전달이 되었는지 피드백을 받아야 하는데, 됐습니다. 정리해야겠네요.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말로만 하지 별로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물론 자기는 경험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그게 많은 경우에는 자기 착각일 수 있어요. 구타하는 남편에게 얻어맞으면서도 자기가 사랑받는다고 착각하는 아내들처럼요. 자학을 경험하면서도 거기에서 희열을 느끼는 존재가 인간이니까요. 그것은 왜곡된 사이비 영성인 거죠. 저는 주변에 있는 일반 기독교 신자들에게서 이렇게 열려져 있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를 바라보는 영성을 만나 본 적이 별로 없어요. 이것은 한국교회의 교육이 잘못된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본인이 게으른 탓도 있습니다. 이런 비유로 설명할 수 있겠군요. 초등학교 다니는 학생이 동화책만 보면서 거기에서 만족하는 거죠. 나이가 들어 중고등학생이 되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책들을 읽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감수성에 매달리는 책들만 읽고 저런 책들은 읽지도 않는 거예요. 사실은 누가 전해주는 이야기에만 매달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십중팔구가 그런 상태인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네요. 제가 마지막에 한 이야기는 취소하는 게 낫겠어요.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재단하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다른 걸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자로서 성공적인 목회 같은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해요. 내가 하나님 안에 얼마나 깊이 거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게 여러분에게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심연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가를 기독교 신앙과 연관해서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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