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강 기독교와 한민족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787 추천 수 0 2012.06.19 23:02:01

제 41강

기독교와 한민족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제 ‘기독교가 뭐꼬’가 개론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은 그 안에 기독교의 근본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시시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인데요. 중요한 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어떤 경지, 혹은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느냐 하는 거지, 강의 형식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하는 공부가 개론이지만, 이런 게 바탕에 놓인다면 신학대학원의 고급과정, 신학석사나 박사 과정에 있는 세미나도 공부할 수 있어요. 제가 6개월 동안 말한 내용을 잘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여러분은 신학대학원에 가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습니다. 신학석사와 박사 과정은 전반적인 걸 바탕에 놓고 부분적인 걸 더 자세하게 다룬다는 데 차이가 있어요. 바르트와 브룬너 사이에 진행된 자연신학 논쟁이라든가,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진행된 성만찬 논쟁 등을 좀 더 깊이 들어가는 것뿐이에요. 또 예를 들면 1930년대에 발표된 바르멘 신학선언을 읽고 독일 고백교회가 종교와 정치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좀 더 깊이 들어가는 겁니다. 독일교회가 나치 하에서 두 개로 구분되었는데, 하나는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liche)이고 다른 하나가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에요. 현대신학에서 종교와 정치 문제를 다룰 때 꼭 들어가는 문서가 바로 바르멘 신학 선언입니다. 그 문서가 고백교회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가 앞에서 기독교의 기초적인 내용을 대체로 다 다루었습니다. 출발은 기독교의 토대가 뭐냐는 거였어요. 유대교를 토대로 초대 기독교가 시작한 역사, 초대교회의 기독교 문서들인 신구약성서들, 그리고 교회 형식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결국 기독교 윤리까지 왔는데요. 윤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이고 실천의 문제입니다. 프락시스(praxis)라고 하는데요.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인식, 사유, 고백과 같이 존재론적인 차원도 있지만, 결국은 우리가 행동을 해야 하니까 윤리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 있는지는 딱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행동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 영성은 사막의 교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죠. 그들은 행동하지 않고 사막에서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어떤 깊은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삶에서 보는 것처럼, 광야에 나가 유유자적하고 고독하게 혼자 산 게 아니라 저잣거리로 들어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듯이, 삶과 연관된 윤리의 문제들을 우리가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쭉 연결해서 볼 때 사실 ‘기독교가 뭐꼬’라는 질문에 대한 설명은 다 끝났어요.

이제는 기독교가 뭐냐 하는 질문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상황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남은 강의는 이런 문제를 다루게 될 겁니다. 한국인의 기독교요. 기독교인이 먼저인가요? 한국인이 먼저인가요?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특별히 분단된 체제 속에서 남한 쪽에 태어났고 여기에서 살고 있는데, 그것을 신앙의 틀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열어 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포기할 수 없잖아요. 오늘은 아니고 다음 주 목요일에 이야기할 건데요. 21세기 분단 체제라는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일 뿐 아니라, 21세기 한국교회의 가능성 혹은 한국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하게 붙들어야 할 해석학적 토대 혹은 준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의 관계나 뉴라이트에서 말하는 좌파 운운이 먹히는 이유가 우리가 분단체제에 놓여 있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가 진정성을 담고 한 말인지 그냥 쉽게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직을 시작하면서 남북문제만 잘 끌어가면 다른 것은 좀 놓쳐도 괜찮다고 이야기했어요. 그 말은 남한만의 전반적인 구조를 뚫어본 정치가의 정확한 진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단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정말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없어요. 그게 뭔지는 이 시간에 일일이 다 밝힐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다 잘 알고 있을 거고 강의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니까요. 하여튼 총체적으로 그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크게 두 체제로 나눠져 있어요. 한기총과 KNCC로요. 지금은 한기총의 덩치가 커져 버렸고 KNCC는 힘이 좀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KNCC가 길죠. 1948년에 문을 연 WCC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으니까 1989년에 시작한 한기총에 비해서 역사가 깊습니다. 한기총은 주로 보수적이고 KNCC는 좀 진보적입니다. 한기총은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좀 많고요. KNCC는 북한에 대해 좀 우호적이기는 하지만 친북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북한에 있는 기독교 대표자들과 회의도 하고 연계도 하고 그랬죠. 한기총은 거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유연해지고 있긴 합니다. 어쨌든 분단의 문제가 우리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21세기 한국교회가 나아가야할 중요한 방향점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국이라는 상황 속에서 사는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고 전개해 나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이승훈과 김대건

먼저 한국교회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두 사람, 이승훈과 김대건을 설명하려고 하는데요. 그들이 누군지 벌써 느낌이 오죠? 한국 가톨릭을 시작한 대표자들이에요. 이승훈은 최초로 세례 받은 사람입니다. 로마가톨릭이 개신교보다 백 몇 십 년 전에 조선에 들어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쪽에 세례자가 먼저 있었어요. 이승훈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통틀어서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럼 김대건은 누구일까요?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사제였습니다. 로마가톨릭을 포함한 한국교회사에서 이 두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큽니다. 이승훈은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았어요. 그때 받은 세례명이 베드로였고, 1784년 2월이었다고 합니다. 230년 전이군요.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그해 3월에, 그러니까 2월에 세례를 받고 3월에 가톨릭의 몇몇 성물을 챙겨서 조선으로 돌아와 전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5년 만에 신자수가 4천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참 놀랍죠? 저도 교회사 책에서 인용한 건데요. 어떻게 한 사람이 세례를 받고 들어와서 5년 만에 4천명을 전도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속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이승훈은 사제가 아닌데도 미사를 드렸어요. 가톨릭은 사제 없이 미사를 드리지 못하니까 미사라고는 할 수 없고, 정확히 말하면 공소(公所) 예절입니다. 사제 없이 평신도끼리만 드리는 미사를 공소라고 합니다. 이승훈은 미사를 공소 방식으로 진행했을 뿐 아니라 세례도 줬어요. 사제가 아닌데 말이죠. 이게 얼마나 합법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뒤로 어려움을 많이 당했어요. 1785년에 김범우의 집을 치안당국이 급습했는데, 거기에 모였던 가톨릭 신자들 중에 양반들은 훈방 조치하고 김범우만 유배를 보냈습니다. 그 사람은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김범우의 집터에 지금 명동성당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언덕에 모여서 정부가 허락하지 않는 종교행위를 하다가 발각되어 유배를 떠났다가 죽은 김범우의 집터에 그 유명한 명동성당이 세워졌다고 하네요. 21년 전(1987년) 한국에서 민주항쟁이 뜨겁게 일어났을 때 가톨릭의 명동성당이 아주 상징적인 역할을 했는데요. 시민운동의 거점이 지금은 시청 앞으로 옮겨졌죠. 그만큼 명동성당이 점점 보수화되었다고 할까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조금 거리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그쪽으로 안 가는 게 아닐까요? 21년 전에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주항쟁이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장소가 다르다고 하는 것에 어떤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아요. 하여튼 김범우 집의 급습 사건 뒤로 가톨릭은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로마가톨릭이 한국에서 당한 순교는 끔찍했어요. 조선의 쇄국정책 같은 국내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로마가톨릭이 지혜롭지 못했던 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황사영 백서 사건인데요. 주문모라는 중국인 신부가 있었어요. 그분이 한국에 들어와서 전도를 했는데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 황사영입니다. 조선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받으니까, 주문모 신부가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조선의 박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 황사영을 밀사로 보냈는데, 그 문서가 발각된 거예요. 그게 황사영 백서 사건의 단초입니다. 백서의 내용은 네 가지예요. 첫째는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가톨릭 신자들의 말살 상황을 설명했고, 둘째는 천주교가 박해를 당하는 이유를 그 당시에 있었던 당쟁 관계에서 설명하면서 조선의 경제적 빈곤을 구제해달라고 했고요. 셋째는 중국이 조선에 압력을 넣어서 천주교를 용인하도록 해달라고 하는 내용이었고, 넷째는 조금 심각한 문제였어요. 서구의 여러 나라를 움직여 군함 수백 척에 군사 5-6만과 대포 등의 무기를 싣고 조선에 와서 힘으로라도 조선을 굴복시켜 선교 승인을 받아내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이런 밀서가 발각되었으니 조선이 발칵 뒤집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사화가 시작되는데요. 황사영은 1801년 27살의 나이로 반역죄로 몰려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승훈이나 김대건 신부도 빨리 죽었어요. 황사영도 27살이면 지금 나이로 보면 상당히 어리잖아요. 결혼도 했던 것 같은데요. 국가적인 차원에서 볼 때 엄청난 일을 도모하기는 했어요. 그 사람의 행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나이에 엄청난 일을 한 거예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좀 조숙했던 것 같아요. 반역죄로 몰려서 참수당하고, 가산은 다 몰수되고 모친은 거제도로, 처는 제주도로, 자녀들은 추자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그때 300여명이 넘는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순교가 일어났어요. 1840년 기해교난, 1866년에는 병인교난, 1871년 신미교난입니다. 이후로 대원군이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해서 전국 주요 도읍에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 박해에 박차를 가했어요. 이런 이야기들은 한국교회사를 읽으면 다 나오니까 자세하게 말하지 않을게요.

김대건이라는 사람만 좀 짚겠습니다. 1821년에 태어났고 16세 때 청나라 마카오 신학교에 입학했어요. 1845년 8월 17일, 24살의 김대건은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신부 서품을 받았습니다. 한 달 후에 페레올 주교와 같이 국내에서 반년쯤 활동하다가 체포를 당했죠. 국내 정치가 굉장히 복잡했던 때여서 결국 1845년 9월 15일, 25살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칼을 8번 맞고 죽었다고 해요. 김대건 신부가 죽었던 그곳은 지금 성지가 되었는데요. 한강을 내려다보는 장소인 것 같아요. 제가 가봤는지 안 가봤는지 기억이 없네요. 이렇게 천주교가 조선 땅에 발을 내디딜 때 참으로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교회 역사가들은 이렇게도 말해요. 고대 로마 제국의 기독교인들이 19세기 초의 조선인들만큼 수난을 받았는지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요. 로마 황제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던 초기 기독교인들보다 어쩌면 한국의 조선 사람들이 당한 순교가 더 끔찍했을지도 모른다는 진술인데,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까 말한 대로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겠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잘 헤쳐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부추긴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요. 좀 전에 예를 든 황사영 백서 같은 것들은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지더라도 천주교가 승인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기독교 신앙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표현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물론 그 당시에 가톨릭이 박해를 받고 있었던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지혜롭지 못하게 대처했던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와 서구문화

정치적인 사건은 접어둔다고 해도, 한국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올 때 취했던 신앙적 자세도 문제였어요. 우리가 순교를 생각할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행위로 받아들이고 신앙의 모범으로 삼기는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죽음을 다 그렇게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 내용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 천주교 신자들이 제사와 신주를 불사르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거예요. 제가 오늘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요. 이게 개신교 신자들의 신앙과도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짚고 넘어가죠. 지금도 개신교 신자들 중에 순교자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게 어떤 점에서 보면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는 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나온다면 좀 우습지 않냐 하는 거죠. 물론 시어른들이 인격적이어서 며느리의 신앙을 존중해준다면야 괜찮죠.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잖아요. 시어른이 겉으로는 알았다고 해도, 속으로는 그런 며느리에게 기분이 좋을 리 없거든요. 예수 믿는 며느리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제사를 지낸다고 해도 억지로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전도 부치고 음식 장만도 하지만 표정에 다 드러나니까요. 하여튼 이런 상담이 다비아에 올라온 적도 있었고 전화로 상담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시댁과 이런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 그걸 기독교 신앙을 잘 지키는 자세로 생각하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사 문제는 신앙의 본질이 아니니까요. 신주는 조금 다르겠죠. 돌아가신 분의 위패를 모아놓고 3년 동안 절하고 밥도 놓잖아요. 지금은 그렇게 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별 문제가 되는 것 같지 않은데, 제사는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많은 목사들이 추석이나 설 즈음해서 제사 지내지 말라는 방식으로 신자들을 가르치는데, 저는 그게 별로 지혜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사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전날 밤이나 추석이나 설에 드리는 동양의 고유한 문화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봐도 공동체를 하나로 만드는 좋은 제도라고 할 수 있어요. 옛날에는 먹을거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제삿날만 기다리는 자식들도 많이 있었거든요. 그 때가 돼야 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 제사 음식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어요. 그것을 통해 공동체성을 확보한 거죠. 또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제삿날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제사를 드리는 게 좋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걸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지금 기독교에서는 제사가 아니라 추모예배로 통하는데요. 추모예배나 제사나 마찬가지죠. 사실 한국의 어떤 전통을 살린다고 한다면 제사를 살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굳이 그게 꺼림칙하다면 추모예배로 바꾸고요. 어쨌든 제사의 여러 가지 순서가 있잖아요. 일종의 예배인데요. 미사죠. 이걸 통해서 죽음을 더 가깝게 느낀다고 하는 것, 그리고 자식들에게 그런 것을 간접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천주교가 처음에 들어오자마자 이걸 거절해 버렸어요. 지혜롭지 못한 거죠. 좀 심하게 말해서 그 당시에 잔혹하게 박해를 받고 순교당한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나 개신교 신자들이 제사에 대해 이런 자세를 보인 것은 북미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서양 문화와 기독교를 이 선교사들이 하나인 것처럼 가르쳤거든요. 이게 문제였던 거죠. 이게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어 왔고, 지금은 그 증상이 로마가톨릭보다 개신교가 더 심해요. 미국이라면 무조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국가라고 말하고요.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서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걸 대단한 것처럼 말해요. 좋은 전통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손 얹고 기도하면서 자기 말 듣지 않는다고 작은 나라들을 무지막지하게 공격하는 게 미국이거든요. 이라크 전쟁 같은 일들이 계속 반복되잖아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런 일들이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닙니다. 크게 일어난 전쟁 말고도, 미국은 제3세계에 자기가 원하지 않는 정부가 들어서면 반정부 무력단체에게 무기를 지원해서 정부를 전복해버리는 일도 많이 했어요. 한국의 목사들이 미국 대통령이 성서 위에 손 얹고 기도한다는 예를 들면서 미국을 대단한 기독교 국가인양 말하고, 그런 것들을 자꾸 신자들에게 세뇌시켜서 미국의 모든 문화를 기독교 자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어요.

지금은 한발 물러섰지만 이명박 정부가 영어몰입교육을 한다는 것도 다 마찬가지예요. 프랑스에서는 일부러 영어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영어로 물어보면 프랑스 사람들은 알아듣지를 못한다고 해요. 이상하죠? 학생시절에는 분명히 영어를 어느 정도 배우는데요. 크면 영어를 잘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영어는 교양영어보다는 실용 영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는 거꾸로 실용영어보다 교양영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접어두고요. 그런 영어 콤플렉스나 사대주의 같은 것들이 한국 개신교회 신자들의 의식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웬만한 대중적인 설교자들은 예화를 들 때 늘 미국 이야기만 해요. 또 기독교 신자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하고요. 워싱턴 지하철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록펠러가 어렸을 때부터 십일조를 해서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입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화와 기독교를 일치시키는 잘못이 천주교가 시작될 때 있었고,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문화와 기독교 사이를 잘 생각해 보세요. 폴 틸리히(P. Tillich)라는 신학자가 있었어요. 독일 사람인데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의 신학적 특징이 문화신학이거든요. 『문화의 신학』는 유명한 책입니다. 틸리히의 말을 빌리자면 문화는 옷이고 신앙은 몸이에요. 몸이 옷을 입는 거죠. 중요한 것은 몸입니다. 벌거벗고 있으면 창피하기는 하지만 옷이 핵심은 아니죠. 그와 마찬가지로 신학이 문화로 나타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질이 중요한 거죠. 둘이 똑같은 게 아니에요. 구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천주교 신자들이 문화를 신앙과 일치시키는 바람에 한국의 문화인 제사를 파괴시킨 거예요. 우상숭배라고 본 거죠. 그건 제가 보기에 그 당시 선교사들이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술 담배도 마찬가지고요. 이건 조금 다른데요. 술 담배는 문화라기보다는 기호의 문제니까요. 그냥 접어두고요. 하여튼 기독교 신앙이 한국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가야 하거든요.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의 옷을 입고, 한국의 먹을거리를 먹고, 한국의 음악을 들어야 해요. 그런데 지금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람이 서양 사람의 옷을 입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행태가 그래요. 물론 이런 문제를 토착화로 말하기도 하는데, 그 토착화에도 정도의 문제가 있거든요. 삿갓 쓴 예수님을 그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갈 필요는 없고요. 역사적 예수를 그대로 살리되,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우리의 문화를 담아내면 되겠죠. 그걸 어디까지 해야 하느냐는 논의의 대상입니다. 예배드릴 때 파이프 오르간이나 서양 악기를 일소해버리고 장구나 북, 징, 이런 것만으로 해야 할까요? 목사가 입는 가운도 한복과 두루마기로 바꿔야 하나요? 찬송가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찬송가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유럽과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이런 찬송가를 사용하는 데가 없다고 해요. 이 정도만 할게요. 천주교가 극심한 박해를 받은 데는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과도 많은 연관이 있지만, 한 나라의 문화와 기독교를 혼동한 이유도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을 말씀드린 겁니다. 우리 개신교도 마찬가지고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 다음은 개신교의 역사입니다. 초기 한국기독교 역사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나오죠. 1885년 4월 5일에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한국에 도착하는데, 이것이 한국 개신교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 이전에 알렌이라는 선교사가 1884년에 북미 장로교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중국에 근무하다가 같은 해에 한국에 들어왔어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6-7개월 정도 먼저 왔습니다. 알렌이 먼저 와서 기초를 닦았어요. 그 뒤에 이런 저런 외교가들 중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개신교가 한국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었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외에 다른 교파들을 살펴보면, 성공회는 1891년 9월 30일에, 침례교는 1889년에, 안식교는 1904년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옵니다. 안식교는 이단인데 왜 이야기를 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이단도 크게 다른 데가 있고 약간 덜한 데가 있는데, 제칠일안식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와 많이 비슷하다고 보면 좋아요. 여호와의 증인은 조금 더 나갑니다. 제가 속해 있는 성결교회는 1907년에, 구세군은 1908년에 시작했어요.

로마가톨릭은 한국에 들어올 때 상당히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개신교는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천주교처럼 사화가 하나도 없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볼 때는 시대적인 상황이 큰 몫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개신교가 들어오던 19세기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1862년부터 1904년에는 농민전쟁과 외세의 압력이 심했거든요. 우리나라에 열강들이 들어와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조선 정부의 권위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추락할 때였습니다. 정부 자체가 힘이 없는데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막을 수 있었겠어요? 제가 이걸 강의안에서 이렇게 표현했어요. “조선의 국력쇠퇴가 개신교의 선교에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 피를 흘리지 않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은 이해하시겠죠? 천주교회는 우리보다 100여년 앞서 들어왔는데 상당히 시련을 많이 겪었고, 우리는 그 후에 들어왔는데 조선 정부가 아주 힘들 때 들어와서 별 어려움 없이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개신교회는 일취월장하게 되고 가톨릭교회는 확장 속도가 많이 느렸죠.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입장이 많이 달라지고 있어요. 가톨릭교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데 개신교회는 정체 혹은 쇠퇴하고 있으니까요. 노쇠하고 조로한 느낌이 들어요. 영성이 살아 있지 못한다는 말도 됩니다.

가톨릭교회의 특징을 말할 때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를 특징적으로 언급하면서 제사 문제를 말했는데요. 개신교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직접선교는 교회를 세우고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방식의 선교이고, 간접선교는 병원이나 학교를 세우는 방식의 선교예요. 이 두 가지를 초기 개신교가 잘했어요. 지혜롭게 잘한 것 같아요. 물론 일제시대 때 한국교회가 상당히 은둔적이고 탈 역사적이고 묵시적인 쪽으로 나가는 경향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그 때가 일제 식민지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죠. 일제 식민지를 잘 보세요. 일제 식민지는 로마 식민지와 상황이 똑같습니다. 2천 년 전에 처음 기독교가 시작할 때도 로마의 식민지였어요. 개신교회가 한국에서 시작할 때도 일제 식민지였다는 사실에서 공통점이 좀 엿보입니다. 둘 다 가능한 대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하는 쪽으로 나간 거죠. 가능하면 정치적인 충돌을 피한 겁니다. 바울도 로마서 13장에서 위의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고 있어요. 노예 해방을 위해 투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바울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 신앙, 즉 그들이 로마 제국과의 충돌을 피한다는 것이 그 제국을 인정한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그 제국은 기본적으로 적그리스도로 작용할 때가 많아요. 황제에 대해서 다들 퀴리오스, 주라고 불렀는데 기독교는 황제에게 ‘퀴리오스’라고 하지 않고 예수에게만 퀴리오스를 붙였다고 해서 순교도 많이 당했거든요. 더 큰 악을 전제하는 거죠. 그러나 매사에 충돌하지는 않는 겁니다. 로마라는 중앙정부에게는 항거를 했지만, 지방정부와는 같이 갈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 게 아닌가 싶어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요? 중앙정부는 이데올로기죠.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이데올로기였어요. 그게 유지되면 만사 오케이지만, 그게 무너지면 박살을 내는 겁니다. 그러나 지방정부는 이데올로기보다 치안을 유지하는데 중심을 두었거든요. 초기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이 치안은 정말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치안이 유지되지 않으면 기독교 선교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유대교와 다른 종파로부터 기독교가 테러를 많이 당했잖아요. 이 지방정부는 최소한 그런 테러를 막아주었거든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이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더라도 전반적인 방향에서는 맞습니다. 지방정부는 바울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어요. 그래서 바울이 편지를 쓸 때 권세에 복종하라고 한 겁니다. 그 말은 로마의 이데올로기를 수긍하라는 말이 아니라 치안을 유지하는 지방정부와 쓸데없이 충돌하지 말라는 뜻이었죠.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도 일제 식민지였습니다. 삼일운동 때 기독교인 대표자가 32명 중에 16명이나 들어갔다고 하죠? 이게 얼마나 객관적인 사실인지는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고요. 또 여기에 들어간 16명이 정말 독실한 기독교인이냐 하는 것도 더 연구해봐야 합니다. 이중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이 변절을 했거든요. 기독교 신앙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16명이라는 걸 너무 자랑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어요. 어쨌든 상당히 많은 사람이 여기에 참여했죠. 그렇게 역사와 독립 등 사회문제에 대해서 관여를 했는데, 그 뒤로 기독교의 성질이 굉장히 소극적으로 바뀌었어요. 그렇게 된 건 선교사들이 일본 제국과 쓸데없이 충돌하게 되면서 복음이 억압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그러니까 최소한의 복음 선포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문제들은 말하지 않기로 한 거죠. 따라서 정교분리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게 무조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그게 무조건 옳다는 말도 아닙니다. 교회가 풍비박산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싸울 건 싸워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데요. 그래도 일단 생존이 중요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Sartre)의 한 경구를 이야기했나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이 본질의 상위라는 거에요. 본질을 신앙과 연결해 보세요. 우리는 보통 신앙이 얼마나 깨끗하냐, 얼마나 의로우냐, 얼마나 순수하냐 하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런데 일단 신앙 자체가 있어야 본질을 말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그“저 사람 괜찮다, 도덕적이다.”라고 말할 때는 본질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살아 있어야 본질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렇게 도식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큰 흐름에서는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선교사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의 생존, 혹은 실존을 위해서 일본 제국이라는 악한 질서와 심하게 다투지 않는 그 길로 나간 것은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초기 기독교는 간접선교를 많이 했는데요. 학교와 병원을 많이 세웠어요. 강의안에 많이 올려 두었는데 보십시오.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세웠고요. 메리 스크랜톤 여사도 1886년에 이화학당을 세웠습니다. 북한과 남한에 많이 세웠는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개신교의 특징이 뭔지에 대해 한 가지만 말해야겠군요. 사실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것저것 딱 끊어버리고 하나로 말한다면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대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거든요. 근본주의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니까 다음 시간에 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게 1-2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이것만 간단하게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제임스 바(James Barr)라는 영국 학자가 있는데,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름을 알아 두세요. 제임스 바는 맥그래스와 조금 대별됩니다. 두 사람 다 건전한 신학자들인데 제임스 바보다 맥그래스가 더 복음주의적이죠. 제임스 바는 복음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굉장히 학문적인 사람입니다. 제임스 바가 『근본주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란 책을 썼을 거예요. 거기서 복음주의를 심하게 비판합니다. 복음주의는 말만 복음주의지 보수주의이고 근본주의라고 말하거든요. 이걸 보고 맥그래스가 뭘 잘못 보았다, 우리의 진정성을 모르고 있다고 대답했는데요.(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한국장로교출판사) 두 사람의 책을 함께 보면 재미있어요. 저는 맥그래스에게 인간적으로는 호감이 가요. 그런데 이게 바로 영국 복음주의의 장점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한 것 같거든요. 그냥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는 거죠.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는데요.

제임스 바의 책에 보면 복음주의를 포함해서 근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서무오설, 둘째는 현대 신학에 대한 반대, 즉 역사비평을 반대한다는 거고요. 셋째는 자기와 종교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입니다. 그런 것 같죠? 우리나라의 신앙 형태와 연관이 있잖아요.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에 빠져 있고 역사비평을 부정하죠. 그래서 성서에 신화가 있다고 하면 완전히 넘어갑니다. 그리고 타종교나 타교파에 대한 배타성도 강하죠. 특히 합동측 교단이 좀 보수적이죠. 합동측은 같은 장로교이지만 통합측 목사를 강단에 세우지 않습니다. 아주 코미디 같죠. 통합이나 합동이나 다 칼뱅주의를 따르는 예장인데도, 기장도 아닌데, 통합측 목사를 안 세워요. 이 정도로 배타적입니다. 이런 것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수호하고 있어요. 1992년에는 합동측 교회헌법이 개정되었다고 합니다. 담임 목사 재량으로 강단 교류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입니다. 합동측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우리 기독교 신앙이 다 근본주의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본을 지킨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건데 이걸 잘못 수호하고 있는 게 우리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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